[영화평] 달콤한 불안의 시학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

(夜空はいつでも最高密度の青色だ)(2019)

2019-05-31     조한기(영화평론가)

인간은 운명 앞에 눈이 먼다. 불가해한 운명 앞에 놓인 인간의 근본적인 불안에 대해 고뇌했던 키에르케고르의 말처럼, 삶의 일관성은 오직 인과율을 벗어난 비일관성에서 성립되는 듯 보인다.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의 주인공 미카와 신지는, 삶의 아이러니한 순간을 경험하며 비워낼 수 없는 불안과 마주한다. 허무주의가 팽배한 메가시티 도쿄에서 그들이 조우하는 건 예기치 못한 불행의 연속이다. 그렇기에 두 사람에게 행복은 쉽게 부서져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허망한 꿈으로 여겨진다. 사소한 기쁨도 이들에겐 해답 없는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지난한 과정으로 느껴진다. “네가 가엾다고 생각하는 네 자신을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동안은, 세상을 미워해도 돼.” 고립된 삶을 위로하는 영화 속 시구(詩句)는 두 사람의 일상에 유의미하게 중첩된다.

 영화는 현실에 압착된 두 남녀가 지독한 회의를 넘어 서로를 이해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다. 어쩌면 진부한 이야기다. 그러나 그 속엔 동시대의 비관주의를 되짚는 진지성이 있다. 경제불황의 장기화와 대지진으로 인한 원전폭발사고, 서사무대에서 개인의 삶에 침습한 일본의 시대적 불안은 이미 임계점에 달한 것으로 묘사된다. 여기서 주인공이 거주하는 도쿄의 풍경은 데카당스적인 이미지로 포착된다.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카메라는 얇은 심도로 도시의 화려함과 군중의 집단성을 포착한다.

 

미카는 자전거를 타고 그 속을 헤집으며 “도시를 좋아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라고 조소한다. 파노라마처럼 스치는 스펙터클한 도쿄의 경관은 ‘비장소(Non-place)’화된 대도시의 성격을 드러낸다. 도쿄를 오가는 군중들은 같은 시공간을 점유하지만, 사회적으로는 고립된 고독한 개인들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자의적인 향락에 취해 그런 일상의 압박을 견뎌낸다.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며, 스마트폰에 몰두한다. 점증하는 두려움을 내폐(內閉)하는 작업은 지리멸렬한 현재를 살아내기 위한 최선의 선택처럼 여겨진다.

화려함과 음울함이 공존하는 도심에서 미카와 신지는 각자의 결핍을 안고 살아간다. 미카는 무능한 아버지 대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 낮에는 간호사, 저녁에는 걸스바(Girls Bar)의 서버를 오가는 팍팍한 이중생활이다. 무연고자로 보이는 신지는 한쪽 눈에 장애를 앓고 있으며 막일로 근근이 살림을 이어간다. 이들은 이야기 내내 불확실한 가능성에 얽매여 헛발질을 하곤 한다. 미카는 사랑을 원하는 한편, 사랑에 대한 회의와 두려움으로 번민한다, 영악하지 못한 신지는 타인의 상처에 민감하다. 그런 점 때문에 타인에게 이용당하기 일쑤이다. 타인과 유리된 미카와 신지의 고독은 서로 다른 듯 닮아있다. 좀처럼 사회에 녹아들지 못했던 두 사람의 만남은 기이한 유대관계로 나아간다.

 인간관계에 서툰 두 사람은 타인과의 대화에서 자주 맥락에 어긋난 이야기를 조잘거리곤 한다. 안락사 위기에 놓인 유기견의 운명, 경제적 지위에 따라 달라지는 미디어의 온도 차 등등. 미카와 신지의 엉뚱한 이야기는 주변인에게 빈축을 산다. 사실상 그들의 이야기는 대화라기보다 독백에 가깝다. 미카는 신지와의 대화에서 그의 수다가 불안한 마음을 숨기기 위한 버릇임을 간파한다. 미카도 같은 습관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두 사람이 뱉는 말은 사회 이면의 부조리와 대중의 잠재된 불안 심리를 예민하게 포착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이들의 무의미해 보이는 읊조림은 일종의 사회적 징후로서도 독해할 수 있다. 내면의 불안을 표출하는 동시에 동시대인이 감지하는 공포의 윤곽을 노출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대부분 죽음에 대한 불안 심리로 귀착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실제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의 주요한 모티프다. 영화 속에서 죽음은 여러 차례에 걸쳐 느닷없이 나타난다. 영화는 그 죽음들을 망각할 시간을 내어주지 않는다. 그보다는 현실이 본질적으로 내포한 우연성을 강조한다. 그런 죽음의 필연성과 우발성의 연접은 특히 미카가 겪는 신경증의 원인이 된다. 간호사인 미카는 여러 차례 환자의 사망을 목도한다. 그녀는 슬퍼하는 가족을 보며 죽음이 금방 잊힐 거라고 되뇐다. 

하지만 미카에게 타인의 죽음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으로 환치되는 듯하다. 어머니의 죽음은 미카의 트라우마다. 사랑하는 이의 부재에서 느낀 지독한 상실감은 타인과 깊은 관계맺기를 거부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미카는 “사랑은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을 죽여서 피 냄새가 난다”고 생각한다. 애매한 거리감을 유지하던 미카와 신지의 관계가 이어지는 계기도 죽음과 결부된다. 신지의 동료였던 토모유키는 미카와 데이트한 다음 날 뇌경색으로 갑작스레 사망한다. 우연의 중첩 속에서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던 미카와 신지는 장례식에서 연락처를 교환한다. 토모유키의 죽음은 두 사람의 관계를 전진시키기도 하지만 정체시키기도 한다. 미카와 신지는 교류를 시작하면서 죄책과 회오를 오간다.

 흥미로운 부분은 신지가 미카에게 다가가는 계기가 직간접적으로 죽음과 불안감에 관련된다는 점이다. 예컨대 신지와 미카는 걸스바에서 처음으로 서로를 의식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가난한 신지가 걸스바에 가게 된 계기는 자살을 암시하는 상처 입은 동료의 언행 때문이었다. 평소 동료가 소원처럼 여겼던 걸스바에 데려가 그를 다독여 주기 위해 간 것이다. 신지가 미카에게 먼저 연락을 하게 된 계기도 마찬가지다. 가계부를 정리하던 신지의 잡생각은 자연재해, 에이즈, 테러리즘으로까지 뻗친다. 순간 그는 충동적으로 미카에게 보고 싶다는 메시지를 보낸다. 이후 신지는 과거를 딛고 미카와 만나러 가는 길에서도 고독사한 이웃 할아버지를 발견한다.

 그동안 두 사람의 내면을 지배하던 불안은, 타인과의 접촉을 회피하려는 이유가 됐다. 그러나 이젠 예측할 수 없는 미래와 그에 대한 불안은 무력감을 넘어 관계를 진전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을 실감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두 사람에게 있어 불안은 극복되거나 지양되는 것이 아닌, 서로의 관계를 연결하는 필연적인 매듭이 된다.

 

오랜 방황 끝에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그러나 연인이 된 뒤에도 미혹과 불안을 완전하게 떨쳐낼 수 없다. 이제 행복해질 것이라고 기대한 순간에도 불행은 언제 찾아올지 모른다. 미카와 신지는 떨쳐낼 수 없는 불안과 마주하며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한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이야기는 끝난다. 사실 두 사람이 불안을 마주하는 태도는 소박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의지를 단순히 균열의 봉합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이들은 비가시적인 불안에 천착함으로써 평범한 일상을 극적인 순간으로 재발견한다. 두 사람이 도심의 변두리에서 도시인이 잊어버린 도쿄의 짙고 푸른 밤하늘을 발견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처럼 이시이 유야 감독은 등장인물을 점차 행복의 요인으로부터 소외시켜 나간다. 그렇게 해서 그가 조망하는 지점은 등장인물의 ‘살아있음’ 그 자체만 남는다. 인간은 살아있는 한 불안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근본적인 불안을 딛고 인간은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의 전언은 이렇게 요약 가능하다. 불안은 가늠할 수 없는 미래와 필연적인 죽음, 그리고 결핍된 현재의 간극에서 발생한다. 운명의 돌발성은 때론 잔혹한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반대로 터무니없는 행운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 혹은 미카와 신지처럼 불안을 마주함으로써 일상의 가치를 새롭게 성찰할 수 있을지 모른다. 불안은 늘 새로운 사태의 가능성과 양립하고 있는 것이다.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는 죽음을 매개로 불안의 의미에 대해 집요한 탐구를 시도한다. 불안은 불가해한 우연을 향한 두려움이면서 동시에 삶을 지속시키는 전제일 수 있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글‧조한기
건국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박사수료. 2018 영평상 신인평론상과 한국콘텐츠진흥원 주관 2018 만화비평 공모전 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화와 스토리텔링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