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투쟁’이라는 일상의 정치를 말하다

2019-05-31     김상철 l 경의선공유지시민행동 정책팀장

이 책의 저자인 데 안젤리스는 자본이 순환하는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쓰레기, 일종의 찌꺼기로 부를 수 있는 ‘디트리터스’의 문제를 중요하게 다룬다. 디트리터스는 책을 만들다 남은 종이, 자동차를 만들다 남은 철판과 같은 기계적 잔여물이 아니라 유기체가 만들어낸 잔여물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운 상상을 이끈다. 하나의 사업장이 교환과정을 통해 다른 생산과정과 연관되고 이것이 국가적 관점에서는 무역이라는 강제된/의도된 편차(이를테면 인건비의 차이 같은)를 통해 다시 결합되면서 전지구적 생산과정을 이룬다는 것은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 분석에 있어 그렇게 낯선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런 순환과정이 끊임없는 유기 쓰레기를 만든다. 

“아웃소싱의 비밀은 기업자본의 뱃속에서 노동을 끄집어내 서로 경쟁하는 생산단위들의 군도 속에 옮겨 놓음으로써, 노동에 대한 자본의 지배를 좀 더 비가시적으로 만든다는 점이다. 이처럼 노동에 대한 지배는 노동에 대한 통제를 외부화한 이 대규모 초국적 기업들과 아웃소싱 받은 단위들 간의 무역 흐름처럼 좀 더 흩어져 있고 살균처리된 형태로 나타난다.”(228쪽)

중요한 점은 이 과정이 팔목을 비틀어 강제로 하는 과정이 아니라, 그렇게 해야지만 ‘외부가 없어 보이는 자본주의’에서 삶의 생존을 계속할 수 있다는 타협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를 익숙한 이데올로기 효과로 봐도 좋겠고, 타자화나 소외로 봐도 좋겠지만 핵심은 그에 대한 질문의 방식이다. 질문 자체는 근본적이더라도 질문이 던져지는 곳은 구체적이어야 한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협치, 즉 거버넌스의 과정을 생각해보면 된다. 박원순 서울시장과 문재인 대통령 이후 등장한 사회적 가치에 근거한 협치의 과정은 그 자체로 시민사회의 포섭이자 시민적 삶에 대한 종획이었다. 협치가 수단으로 시장의 가치를 실행하기 위해 동원된다면 우리는 협치에 대해 다시 질문함으로써 그것이 실행될 수 있는 다른 가치로 맞서야 한다.  

“협치가 축적에 맞춰진 ‘권력들의 연속성’을 확립하려고 시도하는 전략이라면, 이 사회적 권력들의 연속성이 모든 가치를 가치로서의 시장에 종속시킨다면, 협치와 신자유주의는 ‘가치’와 ‘권력’의 문제를 다시 열어젖힘으로써 문제화될 수 있고 또 돼야 한다. (…) 궁극적으로 그것은,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며 자본과는 다른 가치의 실천들을 되찾는 활동에 근거한 정치적 과정을 통해 역사를 다시 여는 문제일 뿐이다.”(198~199쪽)

그렇다면 왜 이런 실천들이 어려운 것인가. 만약 가치투쟁이라는 것의 결과가 시장을 수단으로 하는 가치체계를 교체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현재와 같이 누구나 자본주의적 과정이 인간적 삶을 파괴하는 것에 대해 동의하는 상황이라면 왜 새로운 가치로의 교체가 되지 않는가. 여기서 종획과 연관된 ‘훈육’이라는 과정이 나온다. 벤담과 하이에크는 바로 재생산과 사회적 신체를 가로지르는 훈육 과정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는 이론가로 제시된다.

“우리의 상호작용이 점점 시장관계 형태를 취하도록 보장하는 것이 우리가 종획이라고 부르는 영역이라면, 이 매개변수 중심의 지속과 재생산은 사회적 신체를 가로지르는 특이성들에 대한 훈육적 통합의 문제다.”(327쪽)

여기서 데 안젤리스가 말하는 벤담의 판옵티콘은 하이에크가 말하는 자유와 호응한다. 이를테면 하이에크는 자유의 반대인 강압은 ‘인격적 과정’으로 한정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시장에 의해 제한된 선택지, 즉 메뉴는 자유에 반하지 않는다. 그것은 물리적 환경이나 조건에 의한 제약일 뿐 인격적인 강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비정규직을 강제적으로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은 강압이고 자유에 반하는 일이다. 특정한 개인이 정규직을 선택하는 것과 비정규직을 선택하는 건, 설사 그 과정에서 각각의 선택지가 가진 어려움이 있을지언정 비인격적인 조건이므로 자유에 반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모든 선택에 대해서도 이런 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반자본주의적 운동의 관점에서 그것(가치법칙의 유사과정적 특징)을 이해하는 것은 결정적으로 그것이 직면한 것을 이해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요컨데 자본주의의 극복, 즉 ‘역사의 시작’이라는 문제계는 결국, 모든 것을 자본의 척도로 환원하길 원하는 ‘가치법칙’을 극복하는 동시에 모든 것을 절합하는 다른 가치, 다른 척도, 다른 방식을 상정하는 문제계다.”(286쪽)

그것에 대한 반대는, 거대한 전장에서의 승리로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다. 훈육적 과정을 통한 가치계의 구성이 미시적인 것에서 구조적인 것까지 프랙탈의 과정으로 전개된다면, 이에 대한 저항 역시 각각의 마디에서 지속적으로 진행될 필요가 있다. 그것이 ‘편재하는 혁명’이라는 아이디어로 표현되는 것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경쟁 관계는 곧 닮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다시 앞의 비정규직 문제로 넘어가 보자. 우리 사회에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 대한 비판논리 중 하나는 정규직이 되기 위한 ‘노력’을 건너뛰었다는 비난이다. 즉 정규직이 되기 위해 낭비되는 시간에 대한 질문보다는, 같이 낭비하지 않은 시간에 대해 비난한다. 남성이 군대에 가는 문제 역시 그대로 여성이 군대에 가지 않는 문제와 연결돼 이야기된다. 비슷한 유형의 비판으로, 어떤 기업은 이러저러해서 세계 1위 기업이 됐는데 한국의 기업은 이것이 문제고, 저것이 문제여서 한계가 있다고 비판한다. 특정한 나라는 이런 문화와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한국은 이래서 한계라고 말한다. 서로 닮아가야 한다는 정언적인 명령이 시장의 가치, 즉 모든 것들이 자기 복제적인 관계성을 지니도록 만든다. 이렇게 닮아가면 더욱 비교해지기 쉬워지고, 이 측정의 기준인 시장은 가치의 모든 것이 된다.

“사회적 생산집계의 각 ‘규모(개인, 기업, 도시, 지구, 국가, 대규모 지역 또는 자유무역지대)’는 각각의 ‘나머지 세계’와 맞서는 하나의 마디로 전환하라는 강한 압력에 직면한다. 개인 대 다른 개인들, 기업 대 다른 기업들, 도시 대 다른 도시들, 국가 대 다른 국가들, 자유무역지대 대 다른 자유무역지대들. 경제적인 경주에 참여한다는 의미에서 각각의 사회적 마디, 생산 순환고리와 재생산 순환고리들이 결합한 각각의 장은 다른 것들과 유사한 것으로 나타난다.”(401쪽)

그렇다면 이런 가치에 저항하기 위해 아예 시장이 존재하지 않는 곳을 만드는 방식은 어떤가. 전통적으로 비시장적 공간을 만들어서 일종의 시장 내 진공공간으로서 대안을 사고하는 이들은 많았다. ‘정치적인 입장을 말하지 않는다’라는 대표적인 공간은 역설적으로 마을공동체라고 불리는 사업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 됐다. 누구든 직장에서, 학교에서 벗어나 집이 있는 마을로 오면 주민으로서의 정체성만 요구된다. 이웃 간에 얼굴을 붉힐 수 있는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가족의 확장판인 마을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다른 측면에서 자본이 만들어놓은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를 바꾸는 건 어떤가. 최근 노동문제로 비판을 받고 있는 생활협동조합의 사례를 들 수 있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평등한 관계를 만든다는 생협운동이, 정작 그 가운데 존재하는 노동자의 위치를 지워버림으로써 자본의 속성을 복제했다. 전혀 다른 정치권력을 만들어서 새로운 가치체계를 만들 수 있는 진보정당 운동은 어떤가. 기존의 보수정치 내에서 승리하기 위해 보수정당의 원칙, ‘정의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것이 정의’와 같은 현실정치의 문법을 ‘정치의 책임윤리’로 수용한다. 

데 안젤리스가 말하는 다음의 코뮤니즘-아나키즘-사회주의의 관계는 단순히 메타포가 아니다. 생산과 자율 그리고 권력에 대한 새로운 고민이 함께 고민되지 않으면 그것 자체로 불가능하거나 황폐화되거나 오히려 자본의 가치로 종획된다.

“코뮤니즘적 실천이 없는 아나키즘적 실천은 개인주의적이거나 게토화된다. 아나키즘 없는 코뮤니즘은 위계적이고 억압적이다. 사회주의 없는, 즉 국가 내에서/에 대항해/를 넘어서는 투쟁이 없는 아나키즘과 코뮤니즘은 판타지다(유토피아라고 말하지 않는 건 나에게 유토피아는 판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코뮤니즘과 아나키즘 없는 사회주의는 신자유주의적이다.”(447쪽)

공통장은 어디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외부’에 있다. 땅 위를 다니던 철도가 지하화되면서 생긴 지상부는 버려진 곳이 아니다. 여전히 ‘철도부지’라는 법적 체계 위에 있으면서도 철도는 다니지 않는 땅이다. 그리고 그 땅은 시민의 가치로는 접근 불가하지만 자본의 가치로는 접근 가능하다. 실제로 홍대입구역의 애경사옥과 공덕역 인근의 효성사옥은 ‘철도부지’가 자본의 종획에 따라 절합되는 광경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 가운데 시민이 점유하고 있는 경의선공유지는 내어진, 혹은 버려진 땅이 아니다. 이미 이랜드라는 기업에 나눠진 땅이다. 

철도부지가 기업의 땅이 될 수 있는 것은 그곳에 철도가 지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서 국공유지를 둘러싼 가치체계가 그것을 당연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현재 이랜드가 사용 예정인 땅은 예전 마포우체국이 있던 땅과 현재 경의선공유지시민행동에 의해 점유된 땅으로 구분된다. 예전 마포우체국 부지는 2002년부터 지금까지 펜스로 둘러쳐 있다.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버려진 땅이다. 

하지만 철도시설공단과 마포구청의 관점에서는 관리되고 있는 땅이다. 역설적으로 현재 시민들이 자율적으로 사용하는 경의선공유지는 철도시설공단과 마포구청의 입장에서 보면 낭비되는 땅이다. 실제로 철도시설공단의 수도권본부장은 경의선공유지를 사용하고 있는 이들에게 “공시지가가 얼마인데 이렇게 사용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지만, 정작 펜스가 처져 있는 땅에 대해선 침묵했다.

자본의 입장에서 보면, 자율적인 가치를 만들어내지만 공시지가에 상응하는 경제적 가치를 얻지 못하는 시민들의 활동은 곧 ‘디트리터스’가 된다. 버려져서가 아니라, 종획되지 않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자본에 의해 버려졌다고 여겨지는 그곳에서 새로운 공통장의 가치체계가 만들어질 수 있다. 물론 이것이 실패할 수도 혹은 다른 방식으로 자본의 가치체계로 종획돼 갈 수도 있다. 

하지만 데 안젤리스가 말한 대로 좀 더 근본적인 것인 단일의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의 다양한 활동들이 필요하다면 그 장소는 자본의 가치가 닿지 않는 어떤 곳이 아니라 자본의 가치가 닿지만 불완전하게 남겨진 곳이다.

이 책의 내용을 경제학적인 엄밀함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저자의 의도에서 아예 빗나가는 것이다. 일종의 유비로 읽어야 하고 이를 통해서 개념 자체가 아니라 해당 개념을 통해서 드러내고 싶은 맥락을 짚어야 한다.

“이 책이 교환가치,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 시장 같은 범주들을 사용할지라도, 나를 경제학자로 만든 직업교육이 가끔씩 나의 언어와 문제를 짓누를지라도, ‘마르크스의 비판사회이론의 경제적 환원’이라는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오류를, 할 수 있는 한 피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을 독자들이 알아주기 바란다.”(49쪽)

맞다. 데 안젤리스의 주장은 경제학적 주장이 아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정치경제학 ‘비판’인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비판이란 뿌리에 가서 닿는 것이기는 하지만 뿌리에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자본의 가치체계는 한 그루의 나무가 아니라 뿌리 자체가 열매이기 때문이다. 

데 안젤리스의 『역사의 시작』은 바로 여기서 시작해야 할 역사를 말하고 있고, 또 그것이 살아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삶이 있는 한 혁명은 언제나 계속되고 있다.   

 

 

 

글·김상철
경의선공유지시민행동 정책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