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전환’은 머잖았다

 [독자 에세이] 11월호 ‘전태일은 마침내 진화한다’를 읽고

2010-12-03     이강혁/비정규직 노동자, 예술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서울·경기 독자모임의 27차 토론 주제는 ‘남과 북을 사유하고 관계를 논쟁하라’(11월호)였다. 10여 명의 독자들은 텍스트를 강독하며 남과 북에 대한 나름의 사유를 했다. 북한의 3대 세습 비판론이 진보진영을 뜨겁게 달구던 무렵이었다. 하지만 토론회는 사유를 통한 논쟁의 결과물을 내놓지 못하고, 일상에서 남과 북을 끈질기게 사유하자는 ‘결의’로 마무리되었다. 뜻밖에 우리는 남과 북의 관계에 대해 아는 게 적었고, 그만큼 사유의 부재는 심각한 상태였다.

그리고 며칠 뒤, 연평도에 포탄 수십 발이 떨어졌다. 가옥이 불에 타고 군인은 물론 민간인 사망자까지 발생했다. 한국과 미국은 이에 대한 조치로 최고 수준의 서해상 합동훈련을 강행했고, 전쟁의 공포에 흥분을 감추지 못한 시민들은 거친 담론을 포탄처럼 쏟아냈다. 진보 진영에서는 견해가 맞섰지만, “북한은 이제 더 이상 진보의 그것이 아니다”라는 점에서는 공감대가 확산된 듯하다.

비정규직 파업과 연평도 사태

한편, 울산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조의 파업은 수도권 진출을 꾀하고 있었다. 법원이 인정한 존엄을 찾기 위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봉기가 한 노조원의 분신을 기화로 가파르게 고조되면서 전국적 연대가 모색된 것이다. 현대자동차 사측은 용역과 경찰력을 투입해 노조원들을 공장에 고립시킨 뒤 물과 전기를 차단하는 등 강도 높은 조치로 압박하고 있다(11월 29일 현재). 같은 시각 서해상에서는 한-미 연합군의 보복성 훈련이 사상 최대 규모로 진행됐다. 오로지 생계를 위해 끔찍한 일상을 보내고 있던 내게 이런 소식들은 전에 경험하지 못한 흥분과 공포를 주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내게 ‘거대한 전환’이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1월호에 실린 ‘전태일은 마침내 진화한다’에서 필자는 신자유주의를 암과 에이즈 등에 비유하며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병”이라 진단한다. 실로 많은 지식인이 이 병을 고치기 위해 나름의 처방을 열심히 쏟아내고 있다. 그 처방을 복용하는 자들은 신자유주의자가 아닌 현장의 노동자다. 약을 먹고 항체가 생긴 그들은 악덕 자본가들과의 싸움을 시작한다.

여기에서 약이란 ‘지성’이며, 항체란 ‘존엄’이다. 인간이라는 언어의 기표가 가리키는 것은 생물학적인 것이 아닌 지성과 존엄이 함께하는 신비로운 무엇이다. 지성은 고독 속에서 습득되며 존엄은 관계 속에서 부여되는 것이라 할 때, 이 두 가지로 말미암아 인간은 비로소 고유의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일하는 모든 인간이 바라는 단 하나는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비용으로 환산되는 신자유주의는 이런 바람을 무너뜨린다. 과다한 노동시간은 고독을 허락하지 않고, 존엄은 철저한 계산에 의해 선택적으로 집행된다. 시간당 4천 원에서 5천 원씩 받는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열심히 일하면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는 세상이라고 말하면서 더 많이 열정적으로 일할 것을 강제한다. 그러나 부자는 고사하고 법에 규정된 정규직 전환만이라도 꼭 지켜달라던 그들에게 어느 날 날아오는 것은 해고라는 포탄이다.

정규직라고 해서 더 나은 상황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은행이 따지는 대출 조건에서 급수가 높고 상대적으로 목숨줄이 조금 길다는 것뿐, 정규직의 삶이 풍요롭다는 환상은 이제 드라마에서조차 다루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채무와 이자를 갚아나가는 데 숨통이 조금 더 열려 있을 뿐이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일하는 이 세상 모든 인간은 능력에 따라 시장에서 자연적으로 도태되거나 살아남는 생물체가 아니다. 우리는 체제로부터 강제되고 분류되는 노동자, 즉 함께 살아가기 위해 일하는 인간이다. 도대체 인간의 저 위에는 무엇이 있기에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걸까? 인간의 삶을 강제하고 재단하는 실체는 무엇인가?

영화 <천국으로 가는 노동계급>(1)의 대사가 떠오른다. 정신병원에서 요양 중인 노동자 밀리티나를 찾아간 미치기 직전의 노동자 루루는, “공장에서 만드는 수백만 개의 부품들이 어디에 쓰이는지 아느냐”고 묻는 밀리티나에게 “그것들은 모터에 들어가는 부품들이고 그 모터는… 거기엔 없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무언가에 들어가는 것”이라 설명한다. 이에 밀리티나는 “아, 거긴 없다고? 어느 날 그 생각을 하다가 공장장의 멱살을 잡고 물었지. 도대체 우리가 공장에서 뭘 만드는 거지? 도대체 뭐야! 죽여버리겠어! 죽여버리겠어!” 했다.

이런 생각들이 부질없어 보여도 어느 날 문든 중요한 물음으로 다가와 삶 전체를 뒤흔드는 때가 분명히 있다. 그리고 그 순간 결단을 요구하는 것은 무언가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인지한 자신의 깊은 내면이다. ‘더 나은 내일’이라는 것이 개인적 풍요가 아닌, 노동자의 근로 환경이었던 전태일은 자신의 몸에 라이터를 당겼다. 그의 결단이 그나마 오늘날 이 정도의 근로 환경을 만들었다.

하지만 40년이 지난 지금, 신자유주의자들에게 노동자들의 결단은 화염이라는 코스프레에 지나지 않는다. “시장에서 벌어지는 적자생존의 완전경쟁이 진화적 최선이라 믿는”(2) 그들의 영혼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불타 없어지는 저기 저 한 인간의 육체가 아닌 전광판 숫자들의 하락이다. 1970년 전태일의 분신이 그들에게 “죽음의 무딘 감각을 뒤흔든 죽음”(3)으로 다가왔다면, 2010년의 전태일의 분신은 보험조차 적용받을 수 없는 자멸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전태일들은 라이터를 당긴다. “모멸 속에서 사느니 존엄을”(4) 택하는 것이다.

살아남아, 바꾸는 노동자 되자

하지만 이제 나는 같은 노동자로서 노동자들의 분신에 반대한다. 이제 우리는 몸과 마음을 아껴 그 기력을 모아 무언가를 철저히 파괴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하기 때문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역할에 따라 또는 투쟁의 장에서 함께 권리를 외치는 데 소중한 몸을 써야만 한다.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성공적으로 치러낸 의장국의 일꾼들답게 격 높고 강도 높은 운동을 영리하게 전개해 권리를 찾는 데 몸을 소진해야 한다. 따라서 그 누구보다 더 잘 먹고 잘 자고 독서도 하며 몸과 마음을 관리해야 한다. 40년 전의 전태일에게 마침내 대학생 친구가 한 명 생겼더라면 그는 진보적 사회운동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전태일들의 죽음은 숭고하지만, 여전히 안타깝다.

전태일 40주기, 북쪽에선 사회주의를 표방한 비정상적 체제의 명목을 상실한 포탄이, 남쪽에선 존엄을 찾으려는 노동자들의 봉기가 내게 가져다준 ‘거대한 전환’은 칼 폴라니의 책 제목이다. 내 ‘거대한 전환’은 혼란을 틈탄 노동자가 한낮에 꿈꾸던 새로운 세계에의 상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금융위기 이후 끊임없이 나타나는 여러 징후로 보아 ‘거대한 전환’은 머지않아 도래할 것으로 보인다. 어서 빨리 그날이 오길 바라며, 나는 오늘도 일터로 향한다.

<각주>
(1) 원제 <La Classe Operaia Va In Paradiso>, 감독 엘리오 페트리, 1971. 제25회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2) 손아람, ‘전태일은 마침내 진화한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2010년 11월호.
(3) 손아람, 위의 글.
(4) <Gloomy Sunday>, 감독 롤프 슈벨,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