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면초가의 내우외환' 파키스탄 새 정부

알카에다·탈레반 봉기, 경제난, 테러, 미국의 압박, 군부세력 득세…

2008-12-01     장 뤽 라신 | 사회학자

지난 9월 9일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 파키스탄 대통령 취임을 전후해 두 사건이 벌어졌다. 2001년 10월 아프가니스탄에서 '대테러 전쟁'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헬리콥터로 수송된 미군 특공대가 9월 3일 남와지리스탄에서 지상 작전을 수행했다. 남와지리스탄은 파키스탄 접경 지역을 통칭하는 '연방직할부족지역(FATA)' 7개 지구1) 중 하나다. 9월 20일에는 이슬라마바드 중심가에 위치한 매리어트 호텔에서 자살 폭탄 공격이 발생해 50명 이상이 숨을 거두었다. 호텔은 파키스탄의 상류층 사람들과 외국인 여행객들이 자주 드나드는 장소였다. 이 끔찍한 행위는 2007년 7월 이슬라마바드의 '레드 모스크'를 피로 물들게 한 테러의 연장선상에 있다. 대통령 선거가 있던 9월 6일에도 페슈와르에서 25명의 목숨이 테러에 희생되었다.
 
 자르다리, 배우자 암살후 급부상
 새 민선 대통령은 미국의 압력, 접경 지역의 봉기, 테러리즘의 기승, 강력한 군부 사이에서 진퇴양난의 처지다. 그는 의회 민주주의 정착, 극단주의 및 테러리즘 척결, 경제 위기 극복이라는 세 가지 중요 문제들을 해결해야 함에도 불구, 극히 지엽적인 대안만을 동원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극단주의 및 테러리즘과의 대결은 인도 및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파키스탄의 정책이나 지정학적 패러다임과 밀접하다.
 2007년 12월 27일 배우자인 베나지르 부토가 암살당한 지 몇 달 후 자르다리는 노련한 정치가로서의 재능을 아낌없이 보여주었다. 폴로 경기 선수였고, 한 번도 정식 재판을 받지 않은 채 부패 죄목으로 10년간 투옥생활을 했던 이 미지의 인물은 자신의 어린 아들 빌라왈을 파키스탄인민당(PPP) 대표로 밀었다. 당시 '공동대표'를 맡았던 자르다리는 곧 PPP의 실질적 주인이 되었으며, 이 당은 2008년 2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파키스탄 제1정당 자리에 올랐다.2)
 그러나 다수당은 되지 못해 자르다리는 무슬림 리그(나와즈)의 역사적 지도자인 나와즈 샤리프와 동맹을 맺었다. 무슬림 리그는 파키스탄 제2의 정당이다. 또 자르다리는 북서 변경주 파슈툰 지역에서 승리를 거둔 아와미 연맹과 동맹을 맺으면서, 열정적인 기회주의자 파즐루르 라만을 끌어들였다. '자미아트 울레마 이 이슬람'당의 지도자 라만은 탈레반과의 협력 관계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나 페르베즈 무샤라프 장군의 정보 조직이 2002년 급조한 이슬람 정당연합체 '무타히다 마질리스 이 아말'과는 관계를 끊은 터였다.
 
 노련한 수완과 협상으로 대통령 권좌에
 대통령이자 장군인 무샤라프가 권좌에 있음에도 불구, 자르다리 등의 연립정부가 국정을 떠맡은 가능성이 대두됐다. 그러나 2007년 3월 최고재판소 소속 판사들의 파면에 항의, 시위를 벌인 때처럼 민주주의가 다시 부활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자르다리는 연립정부에서 유수프 라자 질라니를 총리로, 또 페미다 미르자를 국회의장으로 임명하면서 자기 진영의 비중 있는 인물들은 제거해버렸다. 또 파면당한 판사들의 복귀 문제에 대해서는 강?온 양면작전을 구사했다. 반면 독립적인 정신의 소유자로 유명한 이프티카르 무하마드 초우더리 전 최고재판소장의 복귀는 허락하지 않았다. 무샤라프 대통령의 운명과 관련해 자르다리는 또한 이중 게임을 벌이기에 이른다. 그는 무샤라프를 제거하기 위해 또 다시 무슬림 리그와 연합했다. 무슬림 리그는 판사들에 대한 조치가 늦어지는데 항의하며 정부를 떠난 바 있다. 그 결과 무샤라프는 의회의 파면 절차와 사법부의 위헌 해석에 저항하는 대신 8월 18일 자진 사임하고 말았다.
 그러자 자르다리는 치밀한 협상을 무수히 벌인 끝에 자신이 동맹자들에게 했던 약속을 부인하면서 대통령 후보에 출마했다. 결국 9월 6일 국회와 지방의회로부터 75% 지지를 얻으며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노련하고도 섬세한 수완가인 자르다리가 국가 수반이 된 것이다.
 
 통제 불능의 접경지역 분쟁과 테러
 현 상황을 이해하려면 독립에 이은 1947~48년의 제1차 카슈미르 전쟁 이래 파키스탄의 역사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특히 인도와 아프가니스탄의 틈바구니를 빠져나오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한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당시 파키스탄은 접경 바깥쪽에서는 비밀경찰 'ISI'의 지휘를 받는 용병을 개입시키는 방식을 채택했다. 'ISI'는 1980년대 소련군에 맞서기 위해 미국의 재정적 지원을 받으며 아프간 무자헤딘들을 지지했고, 1994년부터는 탈레반을 지원했으며, 1990년대에는 카슈미르 지방에서 인도의 역할을 줄이기 위해 카슈미르 반군과 파키스탄 지하드주의자들을 지원했다.
 2001년 9.11 테러가 발발한 직후 무샤라프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이 주창한 '대테러 전쟁'에 합류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러나 다소 모호한 방식으로 동참했다. 그 결과 카슈미르 지방의 지하드주의자들은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으며, 접경지역이나 발루치스탄에 은신한 아프간 탈레반보다, 알카에다 조직들에 진압 작전이 집중됐다.

 


 그 때문에 당시까지 집권 세력의 도구로만 기능하던 이슬람주의자 전투원 일부가 2003년 말부터 체제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접경 지역에 최초로 정부군이 투입되고, 인도와의 대화가 재개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결국 아프간 탈레반, 알카에다 조직과 파키스탄 반도들을 분리시키려는 그 어떤 군사 작전이나 협상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부족 지도자들이나, 이슬람주의를 채택한 정치인들도 젊은 용병 지도자들에게 압도당했다. 수천 명의 병력을 거느린 젊은 지도자들은 파키스탄 정부군과 미국의 소형 무인정찰기들에 저항했다. 소형 무인정찰기들은 2006년부터 소위 '식별된' 표적을 폭격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방식은 아군과 적군 양쪽에 점점 더 많은 피해를 낳았다.3)
 2008년 9월 자르다리가 대통령이 되면서 이런 상황은 통제 불능할 정도가 됐다. 아프간 쪽에서는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가 유엔 평화유지군 지휘를 떠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탈레반이 득세하고 있었다. 파키스탄에서는 반군이 강력히 대두하는 중이었다. 남와지리스탄에서부터 바자우르에 이르는 모든 'FATA' 지구는 반란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파키스탄 도시들에서도 자살 공격이 점점 늘어났다. 2007년 7월 이후 사망자 숫자만도 1천 200명에 육박할 정도다.
 
 미국 개입에 '테러 위협 가중' 반발
 미국은 미국대로 자르다리 정부가 페샤와르를 장악한 아와미 연맹 소속 파슈툰의 지원으로 별다른 소득 없이 반도들과 협상하는 모습을 불안하게 지켜보는 처지가 됐다. 결국 진작부터 파키스탄 군대의 비효율적 모습에 짜증이 난 미군 지휘부는 2008년 9월 3일 마침내 무력 개입을 결심했다. 이러한 단호한 결정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파키스탄의 전략이 여러 달 전부터 문제를 드러냈기에 더욱 그랬다. 마침내 미군과 파키스탄 군대는 스와트 계곡 내 여러 지점을 겨냥하고, 바자우르 지구에서 격렬하게 항공 폭격과 포격을 가해 약 25만 명의 난민이 발생하게 됐다.
 임기 말의 부시 행정부는 버락 오바마의 전략 일부를 자기 것으로 삼아 아프가니스탄 병력을 보강하려고 이라크로부터 군대를 철수시키기 시작했다. 필요할 경우 파키스탄에서도 작전을 벌이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지난 9월 25일 유엔총회에서 자르다리는 "파키스탄의 주권을 침해하는 일은 테러리즘의 위협을 제거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그러한 행위는 테러 위협을 가중시킬 수 있다."고 미국의 전략에 반하는 발언을 했다.4)
 양분된 여론, 테러, 그리고 군사작전과 소형 무인정찰기 공습에 불편을 느낀 파키스탄 당국은 자신이 직접 대테러 전쟁을 주도하고 있으며, 이 전쟁이 '미국의 전쟁'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어한 것이다.
 한편으로 자르다리는 인도와 계속 대화하기를 원했다. 9월 24일 이루어진 맘모한 싱 인도 수상과의 첫 대면에선 발전적 내용을 담은 성명서를 발표하게 됐다. 성명서에는 대화 재개, 카슈미르 양 진영 사이의 통과 지점 추가 설치, 쌍방 관계의 강화 등의 내용이 담겨있다. 지난 여름 이래 인도 쪽 카슈미르 지방에서 힌두교도와 무슬림 사이에 긴장이 지속적으로 고조된 현실을 감안할 때 이는 희망적인 소식이었다. 2008년 7월7일 카불 주재 인도 대사관에 대한 테러로 인한 양국간의 냉각 상태도 종식되었다.
 미국 정보통은 당시 테러엔 'ISI' 조직원들이 관여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 때문에 'ISI'의 지위도 불안하게 됐으며, 그 수장인 나딤 타지 장군이 보직을 맡은 지 불과 1년만에 해임 당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인도 및 아프가니스탄과의 관계 정상화 여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군으로선 현재의 접경이 '전략적 요충지'라는 인식이 너무 강하고, 자신들의 이해 관계와도 충돌하기 때문이다. 군부는 정부기구 내에서 요직을 차지하면서 오랫동안 특권을 누려온 터다.
 
 테러와 경제난 등 '험난한 앞길'
 그런 가운데 영국의 지지와 사우디 아라비아의 중재 덕분에 카르자이 아프간 대통령의 특사들이 아프간 탈레반과 신중하게 협상을 시작했다. 새로운 상황 속에서 자르다리 대통령은 접경 지역 전선에서 두 가지를 명확히 해야 했다.
 먼저 옥석을 구분해내는 것이다. 9월 1일 내정 담당 수상 자문역인 레만 말리크는 파키스탄 및 아프간의 탈레반들이 알카에다와 밀접히 연계되어 있으며, '테리크 이 탈레반 파키스탄'이 알카에다 외부조직이라고 확신했다.
 2008년 10월 31일 데이비드 페트라우스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지역을 총괄하는 미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것도 기존 판도를 뒤흔들어 놓을 변수로 작용했다. 일부 수니파 용병들을 이라크로 되돌려 보냈듯이, 페트라우스가 아프간 탈레반들을 알카에다 조직으로부터 분리시키려 들 경우 상황은 급변할 것이다.
 이에 파키스탄이 동조할 경우 또한 어떤 대가를 치를지도 알 수 없다. 이미 페트라우스의 전략으로 인해 접경지역 등지에선 자살 테러 공격, 군대와 반란군간의 전투가 매일 반복되며 수십 명의 사망자를 낳고 있다. 미국 무인소형정찰기도 공습을 계속하고 있다.
 자르다리는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해있다. 파키스탄 전체, 특히 접경지역의 사회?경제적 문제다. 미국은 재정 지원을 늘려주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원유값 상승과 외국 투자 급감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파키스탄은 유동성 위기, 화폐 폭락, 50억 달러 미만에 불과한 중앙은행 예치금 등 악조건과 힘겹게 맞서고 있다. 세계 경제가 위기를 맞이한 상황속에서 파키스탄은 국제 기구들 뿐만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중국 등 이웃 국가들의 재정 지원을 얻어내려 애쓰고 있다.
 무샤라프 체제 하에서 극도로 자유화된 경제를 물려받은 자르다리 대통령은 에너지 및 농업과 관련된 사회 개발 프로그램들을 의회에 보고했다. 그러나 재정 문제에 대해서는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 2007년 7%를 달성했던 성장률은 올해 절반으로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런 가운데 경제 전선에서 새 대통령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좁기만 하다.

 번역 | 이상빈
 malraux21@ilemonde.com

 


 

* 국립과학원(CNRS) 및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 인도 및 남아시아연구소 연구팀장. <파키스탄. 국가와 사회의 윤곽>(Ox-ford University Press. Karachi, 2002)이라는 공저로 유명하다.

1) 접경지역은 키베르, 쿠람, 바자우르, 모흐만드, 오라크자이, 북와지리스탄 및 남와지리스탄의 7개 지구로 나뉜다. 5개의 접경지역은 페슈와르, 코하트, 탄크, 반누, 데라 이스마일 칸이다.
2) '만들기 가장 어려운 지역 파키스탄'을 읽어볼 것. <발리즈 디플로마티크> 2008년 2월 27일자.
3) 시에드 살림 샤자드,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신(新)탈레반들의 난입',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08년 10월호.
4) 출처 :
www.embassyofpakistanusa.org/news288a_25Ssep08.ph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