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리크스, 시대가 낳은 구조의 아들
오늘날 기관은 수많은 하부 조직을 거느린다. 또 여러 연계 조직 사이에 신속한 공조를 중요시한다. 그 결과, 기관마다 쏟아내는 전자 문서의 양이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이 기관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것은 유동성과 신속한 대처다. 그래서 대부분 조직의 경계가 모호하고, 서로 간에 정보를 생산하거나 공유하는 일도 잦다. 이처럼 효율적인 업무 수행을 위해 각 기관마다 어느 정도 정보 공유를 허용하다 보니, 요즘은 그 어느 때보다 보안 유지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원문 보기>>
최근 발생한 정보 유출 사건은 다양한 양태를 띤다. 일단 보안시스템 미비로 인한 유출을 꼽을 수 있다. 이를테면 보안관리가 허술한 온라인 쇼핑 사이트에서 수만 건에 달하는 신용 카드 번호를 무더기로 유출하는 것이다. 다음은 ‘내부 고발자’에 의한 폭로다. 위키리크스의 군문서 유출 사건이 대표적이다. 마지막으로 금전적 이익을 목적으로 한 정보 유출이 있다. 비근한 예가 2008년 HSBC은행 스위스 지점의 한 직원이 탈세로 추정되는 고객 명단을 프랑스나 스페인, 이탈리아 등의 세무 당국에 팔아넘긴 사건이다.
정보 공유-보안 유지의 딜레마
금융기관이든 국방부든, 이 기관들이 취급하는 문서는 대부분 기밀로 분류된다. 하지만 매일 봇물처럼 쏟아지는 정보를 취합해 처리하는 중간 직원부터 시작해 기밀문서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의외로 부지기수다. 효율적인 정보 처리를 위해서는 해당 정보에 대한 접근과 공유가 자유로워야 하기 때문이다. 복잡한 행정 절차나 까다로운 보안 조치, 조직 간의 폐쇄성 때문에 정보 처리가 지연돼서는 결코 안 될 일이다. 9·11 테러 조사위원회도 테러의 원인이 부처 간 정보 공유 실패에 있다고 보지 않았던가.
그런데 시스템 자체에서 모순된 문제가 발생한다. 여러 복잡한 하부 조직까지 정보를 전달해 정교한 작전을 수행하려면, 먼저 정보의 흐름이 자유로워야 한다. 문제는 그와 동시에 정보의 보안도 유지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도 엄격한 한계선을 두고 말이다. 그러나 내일 어떤 기관끼리 공조해야 할지 판단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일반적으로 정보를 공유할 한계선을 미리 설정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 결과, 존 콘블룸 전 독일 주재 미국 대사가 말하듯, 국방부 내부 전산망인 시프르넷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무려 250만 명에 이른다.(1) 구조적·기술적으로 정보 유출의 가능성이 얼마나 큰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수치다.
최근 대부분의 정보 유출 사건은 아이슬란드나 미국과 같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발생했다. 이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오히려 민주주의 정부의 기관들이 직면한 위기의 징후다. 오늘날 서구의 정치 지도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도덕적 가치를 부르짖기에 바쁘다. 이를테면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가 ‘인도주의적 전쟁’의 개념을 얼마나 강조했는지 떠올려보자. 아프가니스탄 침공의 공식적인 목적은 아프가니스탄을 개발하고, 사회기반시설을 재건하며, 여성을 해방시키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2) 한편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는 서둘러 이라크를 침공할 또 다른 구실을 찾아냈다. 바로 사담 후세인을 축출함으로써 중동에 법치국가의 길을 열어주고, 새로운 경제적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환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체제의 너스레, 조직원의 환멸
이처럼 조직원이 정체성 위기에 빠지는 현상은 대기업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회사에 별다른 기대를 해서는 안 된다고 노동자들을 끊임없이 설득한다. 끝없이 변화하는 목표에 부합하는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직원은 언제든 회사가 다른 직원으로 교체할 것이라며 겁을 준다. 이처럼 고용 불안정을 조장하거나 자존감에 상처 입히는 방법이 오늘날 기업에서 횡행하고 있다. 가장 낮은 직급부터 시작해, 이제는 중진급 간부, 심지어는 경영진에게까지 이런 불안감이 널리 퍼져 있다. 그나마 퇴직금이나 퇴직 후 다른 기업에 ‘낙하산 발령’을 해주리라는 희망이 있기는 하나, 어쨌든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들려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그렇다. 그 누구도 결코 안전하지 않다. 구조조정이나 예산 삭감의 바람이 불어닥치기라도 하면, 누구나 한순간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실업에 대한 불안감이 확산되면서, 직급 명령 체계에 기반을 둔 기존 기업 체계가 약화되고 있다. 대신 인지적 능력과 적극적 참여를 필요로 하는 노동이 이를 대체하고 있다. 오늘날 조직원에게는 업무에 대한 몰입과 주도성, 자율성 등이 요구된다. 군대도 마찬가지다. 명령을 완수하는 것은 더 이상 큰 의미가 없다. 좀더 개인적 열의를 갖고 창의적으로 임무를 수행할 필요가 있다. 그 결과 또 다른 모순된 문제가 발생한다. 오늘날 기업은 개인이 희생할 가치가 충분한 중대한 계획은 제시하지 못하고, 직원을 언제든 대체 가능한 소모품 정도로 여기기 일쑤다. 이런 상황에서 대체 어떻게 개인에게 기업에 충성하도록 요구할 수 있겠는가?
요즘은 인터넷의 등장으로 누구나 고도의 통신시설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앞서 제기한 문제들은 사람들에게 시스템을 붕괴시키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들거나, 실제로 그렇게 실행하도록 부추긴다. 퍼즐 조각을 모아 전체 그림을 완성할 수 있는 능력과 의욕을 가진 몇 사람만 있으면, 시스템 붕괴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군사전략가들이 ‘초강대 개인’(Superempowered Indivisuals)의 전형인 인물상을 제시했다. “일단 혼자 힘으로도 일련의 사건을 일으킬 능력이 되어야 한다. 시스템을 교란·마비시키거나, 전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법규를 무력화해야 한다. 또한 복잡한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고 연계되는지를 잘 꿰뚫고 있어야 한다. 민감한 정보 네트워크 허브에 접근이 가능하고, 조직이나 시스템에 반대되는 영향력을 지니며, 동시에 그런 힘을 사용할 의지가 있어야 한다.”(3)
퍼즐만 잘 맞추면 누구나 어산지
이런 인물상에 딱 들어맞는 이가 바로 위키리크스를 설립한 줄리언 어산지다. 위키리크스는 어산지라는 인물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이것은 위키리크스의 장점이자 약점이다. 위키리크스는 강인한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이 중심이 되어 돌아가는 조직에 제기되기 마련인 모든 문제들을 안고 있다. 독선, 내부 절차 부재, 인간적인 실수의 가능성, 해당 인물의 명예나 인물을 대상으로 한 내적 혹은 외적 공격의 가능성이 그것이다. 하지만 어산지나 위키리크스에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모델은 존속한다. 다른 어딘가에서 새로운 형태로 계속 재생산될 것이기 때문이다.
미디어의 규제 완화와 언론·통신 기업의 집중화 현상으로 인해 오늘날 민주적 공론의 장은 약화되고 있다. 정치적 혹은 경제적 압력 때문에 언론매체는 국정 운영을 다룬 탐사보도를 기피한다. 대신 논평이나 일상생활에 관한 연성 정보만 다룬다. 정부도 언론을 지배하는 게임의 법칙에 능란해졌다. 공개를 원하는 정보만 추려 슬그머니 언론에 흘린다. 이처럼 언론이 정보를 제공받으며 권력기관과 의존적 관계를 형성하는 대표적인 예가 전시에 군에 투입되는 ‘임베디드 기자’다.
소심한 올드 미디어가 숙주 노릇
이런 상황에서 잠시 블로그나 ‘시민 저널리즘’이 구태의연한 올드 미디어를 대체할 매체로 떠오르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새로운 매체가 기존 언론을 완전히 대체하는 획기적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공론장의 형태가 조금씩 변화해가고 있는 건 사실이다. 여기저기서 새로운 매체가 등장하면서 뉴스 공급이 다채로워졌다. 기존 미디어는 사법적 처벌의 위험이 있는 민감한 정보를 이 새 매체들에 하청을 준다. 민감한 내용의 정보를 직접 보도하는 대신, 새로운 온라인 매체가 공개한 정보를 분석만 하는 것이다. 심지어 극단적 경우에는 민감한 정보를 해당 미디어 그룹과 재정적으로 전혀 무관한 온라인 매체에 맡기기도 한다. 이런 신출내기 매체들은 기존 미디어가 지닌 약점(몸사리기)과 주된 장점(대량 소비에 적합한 이야기를 생산하고 전달하는 능력)을 잘 활용하며 올드 미디어와 협업을 통해 이익을 얻는다. 탐사보도를 생산하는 체계도 확 달라졌다. 더욱이 얼마 전부터는 새로운 자금줄까지 생겨나면서, 탐사보도가 새로운 전성기를 맞고 있다.
2007년 미국에서는 “기존 미디어가 호사로 여기는 분야, 즉 공익 탐사보도를 담당하는 비영리 독립 언론 매체”인 ‘프로퍼블리카’(4)가 탄생했다. 2010년 4월 런던에서도 이와 유사한 매체로 ‘탐사보도국’(Bureau of Investigative Journalism)이 생겨났다. 이 인터넷 매체들은 올드 미디어와 협력 구도를 형성한다. 인터넷 언론이 탐사를 맡고, 보도는 올드 미디어가 담당하는 것이다. ‘다큐멘트클라우드’(Documentcloud)라는 신생 매체도 등장했다. “정보의 출처를 알려주고, 주석 인용을 도와주며, 정보의 중요도를 분류해 보도”하는 이 매체들은 언론과 기관의 장벽을 넘어 가히 막대한 양의 정보를 다룬다고 자처한다. 이런 체계에서는 탐사보도에 필요한 여러 업무(정보원 보호, 문서 조사, 수집, 정보의 사실 유무 확인, 의미 부여, 보도 등)를 여러 협력사가 분담해 진행한다. 각기 다양한 경제 모델(상사 회사, 비영리 단체, 인터넷 기업)에 기반을 둔 협력사가 국민에게 뉴스가 전달될 때까지 협업 체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위키리크스를 설립하기 전, 어산지는 권력과의 투쟁 전략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조직이 공정성을 잃고, 기밀 유지에 집착하면 할수록, 지도층이나 정책결정자들 사이에서 정보 유출에 대한 공포가 가히 편집증 가까운 수준으로 발전한다. 문서 유출은 결국 내부 소통 체계를 약화시키고, 정보의 공유를 억제한다. 그 결과 조직 전체의 정보 수준이 낮아진다.”(5)
정보기관의 분석가들은 기밀 보안 강화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정보의 기밀 수준을 강화하거나 부처 간 정보 공유를 엄격하게 통제하고, 은폐 정보의 양을 늘리는 것은 결코 생산적 방법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정부기관은 이처럼 정보 보안을 강화하는 길을 걷고 있다.(6) 위키리크스 기밀문서가 폭로된 다음날 미국의 국무부가 가장 먼저 내린 조치도 국방부와의 정보 공유망인 시프르넷의 접속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미디어가 권력기관이 제공하는 정보에 의존할수록 민감한 사안에 대한 보도 의지는 약화될 수밖에 없다. 특히 작금의 미국이 그러하다. <뉴욕타임스>는 위키리크스가 제공하는 정보들을 활용하는 문제에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7) 그 밖의 다른 매체들은 아예 위키리크스의 방식에 대놓고 반기를 들었다.
글•펠릭스 슈탈더 Felix Stalder
취리히 예술대 강사이자 빈 기술원의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본 기사의 초고가 이미 Mutemagazine.org에 게재된 바 있다.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각주>
(1) <슈피겔> 인터뷰 기사, 함부르크, 2010년 11월 29일.
(2) 크리스틴 델피, ‘여성을 위한 전쟁인가?’, 세르주 알리미, ‘이성의 빛을 상실한 사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2년 3월, 2010년 9월.
(3) ‘초강대 개인’, Zenpundit, 2006년 10월 28일, http://zenpundit.blogspot.com.
(4) http://www.propublica.org/about.
(5) 줄리언 어산지, ‘The Non-linear Effects of Leaks on Unjust Systems of Governance’, http://cryptome.org, 2006년 12월 31일.
(6) 스콧 스튜어트, ‘WikiLeaks and the Culture of Classification’, Stratfor.com, 2010년 10월 28일.
(7) 글렌 그린왈드, ‘NYT v. the world : WikiLeaks coverage’, Salon.com, 2010년 10월 25일.
[박스 기사] 위키리크스의 폭로 내용
미 국무부와 마찬가지로 여러 논평가들도 한결같이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외교전문은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날 공개된 (25만1287건 중) 1500건에 달하는 문서 가운데는 특종감도 적잖았다. 여기 미 외교관들이 작성한 외교전문 몇 편을 살펴본다.
▲ 나이지리아에서는 석유회사 셸이 “주요 부처에 사람들을 심어놨다”며 으스댔다. 제약업체 파이저도 어린이 여러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카노주의 신약 트로반 임상실험 사고를 담당한 연방 검사를 감시하기 위해 사설탐정을 고용했다.
▲ 니콜라 사르코지는 파리 주재 미국 대사에게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의지를 밝히면서 앞으로 프랑스가 “대처나 레이건 시대와 흡사한 시대를 겪어야만 한다”고 언급했다. 미국 대사관에는 사회당 소속 정치인들의 발걸음이 줄을 이었다.
▲ 힐러리 클린턴은 “어찌 뱅커와 제대로 된 협상이 가능하겠는가?”라며 중국 보유 미국 국채에 대해 우려감을 표시했다.
▲ 뉴질랜드는 1985년 데이비드 롱이 정부 시절 반핵정책으로 악화됐던 미국과의 외교관계를 2009년 ‘완전히 복원’했다.
▲ 미국은 우간다 정부와 협력을 유지하면서도 이 동맹국이 내전을 일으키는 것은 아닌지 노심초사하고 있다.
▲ 사설 경호업체 블랙워터가 아프가니스탄 전투헬기를 수출하기 위해 독일법을 교묘히 위반했다.
▲ 석유를 둘러싼 이탈리아 기업 ENI와 볼리비아 정부의 힘겨루기에 관한 상세한 설명.
▲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가 마스터카드와 비자를 위해 러시아 은행법 개정 로비를 하고 다녔다.
▲ 코펜하겐 기후회의 협상에 대한 방해공작(양자 협상, 간첩 행위, 사이버전 등).
▲ 미 국무부가 해외 ‘핵심’ 시설 목록을 작성했다. 프랑스의 여러 제약업체와 대서양 해저 케이블망이 물망에 올랐다.
▲ 존 칠콧 경이 맡은 이라크전에 대한 조사에서 영국은 “미국 이권 유지를 위한 조처들을 취해두었다”며 미국을 안심시켰다.
▲ 마드리드 주재 미국 대사가 스페인 정부에 모델로 삼으라며 불법 다운로드에 관한 프랑스의 아도피(Hadopi)법을 소개했다.
▲ 블라디미르 푸틴은 러시아 스파이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 독살 사실을 사전에 모르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러시아는 무기상 빅토르 부트의 미국 인도를 막기 위해 증인들을 매수했다.
▲ 미국이 교묘히 법망을 피해 금지 무기로 알려진 집속탄을 계속 보유해왔지만, 영국이 이를 묵인했다.
▲ 미국 대사는 2009년 6월 28일 마누엘 셀라야 전 대통령을 축출한 온두라스 군부의 행동을 쿠데타로 규정했다.
▲ 미 국무부는 아프리카 내 유전자 변형 농작물 검수 및 아프리카 대륙 통신 인프라의 ‘취약점과 개선대책’ 등에 대해 정보를 수집했다.
▲ 베이징 주재 미국 대사의 한 정보원에 따르면, 구글 전자우편 시스템에 대한 해킹 사건은 중국 공산당 정치국의 지시로 이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