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 자유의 숨은 적들
“표현의 자유가 사라진다면,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묵묵히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의 신세가 되고 말 것이다.”(조지 워싱턴)
미국 건국의 아버지도 울고 갈 명연설이었다. 2010년 1월 21일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인터넷 자유’를 주제로 연설했다. 이날 연설에서 클린턴 장관은 “전자 장벽을 세워 국민이 글로벌 네트워크에 접속하지 못하도록 차단하거나, 검색엔진 결과에서 특정 단어, 인명, 구문이 뜨지 못하게 삭제”하는 국가들을 맹렬히 비난하며, 이른바 “정보의 전파가 자유로울수록 나라가 부강해진다”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신조를 재확인했다. 미 행정부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신앙’에 가까운 믿음과 “사람들이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정부가 더욱 책임감 있게 행동하도록 만드는 정보 네트워크”의 순기능을 내세워, “시민들이 정치적 검열을 피해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는 새로운 도구 개발”을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또한 과거 독재정권처럼 이런 도구를 활용하는 독립적 사상 운동가들을 억압하는 정부를 향해 경고의 목소리를 높였다.
힐러리 “어산지, 법정 세우겠다”
분노의 불길은 삽시간에 논평가들에게로 옮겨 붙었다. 여야를 막론하고 수많은 논평가들이 잇따라 방송에 출연해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 불한당 작자를 체포해야 한다”(<폭스 뉴스>의 봅 베켈)거나, “‘테러’ 혐의로 기소해야 한다”(국토안보위원회의 피터 킹)고 목소리를 높였다. 심지어 “관타나모 수용자들과 똑같이 ‘적군’으로 취급해야 한다”(<폭스 뉴스>의 뉴트 깅리치)는 주장까지 나왔다. 한 유명 반전운동가는 이런 현상을 두고 주기적으로 미국을 휩쓰는 집단 린치 열기가 가미된 일종의 매카시즘이라 표현했다.(1)
어산지는 위키리크스를 설립하면서 대중에게 철저히 은폐된 실력자들 간의 막후 협상이나 개연성 높은 ‘공모’를 만천하에 낱낱이 폭로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의 바람은 하나둘 이루어졌다. 외교전문이 폭로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중국 정부는 위키리크스 접속을 차단해버렸다. 미 정부는 학생들에게 블로그에서 이 사이트에 대해 언급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미 공군도 폭로 자료를 기사화한 <뉴욕타임스><슈피겔><가디언> 등의 홈페이지 접근을 차단했다.
주요 인터넷 결제 서비스 업체 3곳도 KKK단에 대한 기부금 송금은 여전히 허용하면서도 유독 위키리크스를 대상으로 한 송금 서비스는 중단해버렸다. 이를 두고 위키리크스 대변인은 사실상 비자, 마스터카드, 페이팔이 “미국 대외정책의 도구적 성격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라고 비판했다. 스위스 우체국은행 포스트파이낸스는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이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해커’의 계좌를 동결했다.
인터넷 계정 폐쇄하는 무법자들
시각 데이터 제공 업체 ‘태블로 소프트웨어’도 위키리크스가 “데이터에 대한 권한이 없다”는 석연치 않은 이유를 내세워, 관련 데이터를 웹에서 삭제했다. 인터넷 서버 업체 아마존도 제3자가 생산한 콘텐츠에 대해 법적 책임이 없지만 굳이 자진해서 위키리크스 계정을 폐쇄했다. 한편 위키리크스는 프랑스 루베에 위치한 웹호스트업체 OVH로 서버를 옮겼다. 그러자 몇 개월 전만 해도 프랑스의 정체성 수호에 열을 올리던 에리크 베송 디지털 경제부 장관이 인터넷 관장기구인 CGIET에 “프랑스 내 위키리크스 서버 제공을 중단시킬 방안을 조속히 알려달라”고 지시했다. 이에 대해 OVH 쪽은 법원에 급속심리를 요청했다. 하지만 법원은 이 사건을 본안판결(형사소송에서 사건의 실체 자체에 대해 형벌권의 유무를 판단하는 재판, ‘실체적 재판’이라고도 부른다)로 넘겼다.
네트워크상에서 특정 인터넷 사이트의 위치를 확인하는 업무를 하는 도메인 업체 에브리DNS도 위키리크스의 도메인 Wikileaks.org를 삭제 조치했다. 미 정부는 인터넷 운용이 미국 중심으로 이뤄지는 약점을 백분 활용하는 한편, 여러 해 동안 인터넷 ‘자유주의자들’이 깊은 우려 속에 예견해온 강압적 방법까지 서슴지 않고 동원했다. 위키리크스 운영자 어산지의 이미지를 흠집내기 위한 시도도 더욱 거세졌다. 어산지는 스웨덴에서 성폭행 혐의로 기소됐다. 하지만 그는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다”며 혐의 사실을 전면 부인했다. 영국 남부로 도주한 이 오스트레일리아인을 법정에 세우기 위해 한바탕 추격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영국이 성폭행 사건을 이유로 어산지를 체포해 스웨덴에 인도한다면, 또다시 스웨덴이 미 국무부 외교문서 유출 사건을 이유로 미국에 인도하려 들지 않을까? 한 편의 외교·사법 드라마가 숨가쁘게 펼쳐졌다. 덕분에 위키리크스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인터넷 매체로 부상했다. 위키리크스의 대변인 어산지 또한 마크 주커버그 페이스북 최고경영자에 이어 <타임>이 뽑은 ‘올해의 인물’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위키리크스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단 하나의 인물, 어산지로 환원된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이 문제의 인물이 본인의 주장과는 달리 언론의 자유를 누릴 만한 자격이 없음을 설득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제기된다. 미국 장병(유출자는 브래들리 매닝 정보분석관으로, 2010년 5월부터 버지니아주에 위치한 콴티코 기지에 수감돼 24시간 중 23시간을 독방에서 지내고 있다. 그는 기밀문서를 유출한 죄로 52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에게서 넘겨받은 외교전문을 만천하에 폭로한 위키리크스의 행위는 저널리즘인가, 아니면 간첩 행위인가? 국가안보 및 저널리즘에 관한 책을 저술한 가브리엘 쇼엔펠드는 2010년 12월 9일자 <월스트리트저널>의 지면을 빌려 “어산지를 간첩법 위반 혐의로 처벌하려면 재판 과정에서 피고인의 고의성을 증명해야 한다. 그런데 위키리크스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필립 크롤리 미 국무부 차관보도 위키리크스가 ‘언론기관’이 아니라는 점을 알리는 데 총력을 기울이면서 사법적 처벌을 위한 정지 작업에 나섰다. 만일 위키리크스가 단순히 은닉자, 간첩, 그리고 더 나아가 테러리스트에 불과하다면 그를 처벌하는 것은 미 헌법상 언론의 자유에 대해 규정한 수정 헌법 제1조를 위반하는 것은 아닌 셈이다. 크롤리 차관보는 “어산지는 특별한 정치적 목적을 갖고 행동했다. 그렇기에 그를 언론인이라고 보는 데는 무리가 있다”고 설명했다.
언론과 비언론, 그 임의적 잣대
저널리즘이란 이른바 ‘비정치적’이라는 해괴한 정의는 ‘펜타곤 페이퍼’ 재판 때도 이미 도마 위에 오른 적 있다. 1971년, 군사분석관 대니엘 엘스버그는 국방부에서 7천 쪽 분량의 기밀문서 사본을 유출해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17개 언론사에 폭로했다. 베트남전쟁을 두고 “존슨 정부가 국민은 물론 의회까지 체계적으로 속여왔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문건이었다. 정부는 문서 공개를 막기 위해 연방 최고재판소에 제소까지 했다. 하지만 재판소는 결국 언론의 자유에 손을 들어줬다.
이후 거짓말의 수위가 더욱 높아졌다. 미국은 조작된 정보로 이라크를 공격했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미국에서 ‘기밀’로 분류된 문서는 1996년 560만 건에서 2009년 무려 5460만 건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글•필리프 리비에르 Philippe Rivièr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각주>
(1) 톰 헤이든, ‘The Lynch-Mob Moment’, http://tomhayden.com, 2010년 12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