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퍼레토크래시(기업국가)의 시대가 열린다

2019-06-28     피에르 뮈소 l 대학교수

최근 서구권 국가들에서 치러진 대선에서는 자유주의와 포퓰리즘의 대립이 통념처럼 받아들여졌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두 인물을 꼽자면 단연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일 것이다. 두 인물은 전혀 다른 듯하면서도, 경영을 통한 정치를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닮았다.

 

1994년에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전 총리, 2016년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그리고 2017년에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단박에 승리를 거두며 서구 강대국의 수장 자리를 거머쥐었다. 파격적으로 등장한 이 세 인물은 성격이나 심리적 특징, 연령, 정계진출 배경 등 여러 면에서 상반된 모습이지만, 정치 무대에 ‘경영’을 끌어들여 기업인으로서의 화려한 경험들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같다. 세 명 모두 국가라는 기업, 즉 ‘기업국가’의 수장직에 오른 것이다. 이런 식의 정치를 펼치는 국가 정상은 이들만이 아니며, 최근 더욱 확대되는 추세다. 예를 들어 아르헨티나의 마우리시오 마크리 대통령이나, “국가를 가족기업처럼 경영”하겠다고 밝힌 체코의 안드레이 바비쉬 총리, 그리고 “터키를 기업처럼 이끌겠다”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등도 이에 해당된다.(1)

당시 이탈리아는 흔히 그렇듯 일종의 실험실이 돼 있었으며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는 이곳에서 개척자적 역할을 맡았다. 그는 실제로 ‘기업가 대통령’을 최초로 구현해냈으며 스스로를 그렇게 칭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1990년대 초, 더 이상 이른바 ‘자유사회’와 동구권을 대립시키지 않기 시작한 국제사회를 향해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는 한 가지 답을 안겨줬다. 언론과 부동산 분야에서 이름을 날렸던 ‘신인’의 갑작스러운 정계 진출이야말로 그가 내놓았던 답이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이번에는 브랜드 등 기업에서나 마주할 법한 요소들이 각 분야에 도입되기 시작했고, 마침내 ‘트럼프’라는 기업 브랜드가 트럼프 그룹에서 백악관으로 자리를 옮기기에 이르렀다. 한편 마크롱 대통령의 경우 기업인 출신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중앙부처-특히 경제 재무부-를 대상으로 조사를 벌이는 고위공무원단인 재무감독국(IGF)에서 짧은 경력을 쌓은 뒤 금융 분야에서 4년간 몸담았던 이력이 있다.(2) 그 역시 현재는 대통령의 자리에서도 기업들이 사용하는 용어나 화법, 목표 등을 계속 주고받으며 효율적이면서도 결단력 있는 대기업 총수와 같은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효율’과 ‘효용’은 본래 경영의 모체인 산업에서 나온 개념으로, 원래의 목적은 정치성을 중화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정치권이 효율이라는 명목하에 기업과 경영의 권력기술을 사용하고 있다. 정치학자 뤼시앙 스페즈가 “신뢰와 타당한 기억, 즉 상징으로 이뤄지는 일”이라고 정의했던 정치와는 거리가 멀어졌다.(3) 이렇듯 정치는 ‘효율적 활동’을 약속한 기업가 대통령의 카리스마로만 축소되고 말았다. 이제 국가는 기업들과 경쟁하고 협력하는 하나의 기계가 돼버렸으며, 정치는 기술된 순간부터 ‘결단주의’에 무릎을 꿇게 된다. 

독일의 법학자 카를 슈미트는 『정치신학』(1922)에서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권위와 결단을 가지고 결정 내리는 방식을 ‘결단주의’라고 칭했다. 결단주의에 굴복한 정치는 ‘결정권자’로 축소된다. 즉 정치는 ‘국가’로, 이 ‘국가’는 ‘결정권자’로 단순화되는 것이다. 국가는 기술적 합리성으로 축소된 반면, 대기업은 정치의 빈틈을 채울 패권과 규범성을 생산하는 존재로 확대돼 정당성을 부여받고 있다. 권력 자체가 소멸된 것은 아니지만, 국가라는 테두리 밖에서 산산이 조각난 권력이 홍보·경영·기술·과학·경제 전문가들이 만든 각종 기술적 허구 속으로 흩어지고 있다.

 

기업가 대통령들의 등장

이런 기업국가 정상들의 등장은, 미셸 푸코가 “국가에 대한 커다란 공포”라고 명명했던 18세기 중반 시작된 자유주의적 통치의 역사에서도 결정적인 순간을 차지한다.(4) 17세기 절대주의 국가가 승리를 거머쥐자 이내 반국가주의가 반향을 일으켰으며, 이와 동시에 산업화가 신속히 힘을 얻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끓어오른 상반된 두 흐름, 즉 국가에 대한 공포 확산과 대규모 기업(Corporation)의 득세는 마침내 1980년대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새삼스럽게 언급하자면, 오늘날 겪고 있는 ‘정치적 대표성의 위기’는 실상 근본적인 현상이다. 국민국가의 약세, 그리고 기술경제와 경영의 합리성을 등에 업은 대기업의 강세 사이에서 나타나는 체제의 전환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 속에서 기업과 국가는 서로 교착되기 시작한다. 균열이 생긴 국가에 기업이 경영논리, 효율성에 대한 강조, 기업총수의 자질 등을 안겨준 것이다. 이렇게 두 기관이 얽히며 제3의 기관이 형성된다. 이 같은 변화는 국가를 재단하고 제한하며 탈정치화해 경영과 관리의 대상으로 축소시키는 반면, 기업을 정치화해 기업 본연의 역할, 즉 생산 이외의 분야로 영역을 확장시킨다.

현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정치의 근원적 변화를 파악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역사적 관점에서 기업가 대통령의 등장을 살펴봐야 한다. 기업국가의 시초는 중세시대 교회국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실제로 국가와 기업은 모두 12~13세기 교회라는 동일한 모체에서 파생된 ‘부산물’들이었다.(5)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국가는 크게 세 가지 형태로 변화해왔다. 그 첫 번째는 그레고리오 혁신(11~12세기)으로 설립된, 교황의 영적 권위와 황제의 세속적 권위를 구분하고 서열을 둔 ‘교회국가’다. 두 번째는 16~18세기 독일혁명에서부터 영국혁명까지 이어진 수많은 혁명을 통해 태어난 ‘주권국가’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19~20세기 산업혁명, 경영혁명으로 발생한 ‘기업국가’다.

특히 경영혁명이 일어난 19세기 말에는 대기업들이 활동 범위를 확장했으며, 나아가 문화적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정치판에 뛰어들었다. 과거 국가권력이 완전한 주권을 얻기 위해 종교와 신학을 굴복시켰던 것과 같다. 한때는 교회의 신성성 형성에 공헌하기도 했던 국가가 이제 신성함을 잃고 그저 기술적으로 관리해야 할 기계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사회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은 20세기 초 당시 기업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중심이 되는 경제기관이라고 보기도 했다.(6) 

그러나 국가와 기업은 경제적·기술적 권력이자 동시에 문화적·사회적 권력이다. 철학자 뱅상 데콩브도 “기관이란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이라고 말한 바 있다.(7) 산업혁명이 힘을 얻으면서 사회의 지적 생산이 한 기관에서 다른 기관으로 넘어갔던 것도 이 때문이다. 사회학자 율리히 벡은 이에 대해 “산업사회의 정치적 성좌는 비정치화됐고, 반면 산업주의의 비정치적 부분들은 정치화됐다”고 요약했다.(8)

2차 세계대전 이후 또다시 정치지도자가 비극적이고 범죄적인 악습들을 저지르는 상황을 막고자 인공지능과 경영이 손을 잡고 보다 ‘효율적’인 자동적 권력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어니스트 르낭은 1848년에 이미 “인류는 앞으로 과학적으로 조직될 것”이라고 예견한 바 있다.(9) 사회를 하나의 기계로 통치한다는 것은, 결국 인류의 프로그래밍이 가능해졌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과 다름없다. 1948년, 도미니코 수도회의 도미니크 뒤바를르 사제는 인공지능에 대해 이렇게 적기도 했다. “우리는 정치 지도자들과 관습적 장치들의 명백한 허점을 (…) 통치기계가 대체하는 때가 오리라고 상상할 수 있다.”(10) 

그리고 그가 상상했던 국가의 ‘사이버 리바이어던’은 오늘날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 애플,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거대기업의 형태로 실현되고 있다. 실리콘 밸리의 정계 진출도 마찬가지다. “캘리포니아에서 만들어진 기성화된 사고방식 속에는 알고리즘 장치들을 통해 스스로 제어하는 자동조종사회가 제시돼 있다”고 말한 언론인 필립 비옹-뒤리의 말도 이를 잘 보여준다.(11) 실리콘 밸리의 리더 중 한 명인 팀 오라일리 역시 “알고리즘 제어”의 시대가 도래했다며 정부도 “‘빅 데이터’의 시대에 들어설 것”이라고 강조했다.(12)

 

정치의 기술화, 정치의 탈정치화, 기업의 정치화

정치의 기술화는, 국가를 무력화시키는 거대 기업들에 의해 정치가 중립화·탈정치화되는 결과를 낳는다. 과거 국가가 교회를 무력화시켰던 것과 마찬가지다.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이 극에 달한 순간이었던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후로 인공지능, 경영, 자유주의의 갈림길에 선 기업국가는 필요불가결한 존재가 됐다. 이제 기업국가는 세 가지 차원을 아우르며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우선 숫자를 통한 거버넌스와 알고리즘 통치를 가능하게 하는 ‘기술적 차원’이 있다.(13) 다음으로 효율이라는 명목을 앞세운 ‘신(新)경영적 차원’, 마지막으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연구·몽페르랭 소사이어티·시카고학파의 연장선에 있는 국가에 대한 공포를 동반한 ‘신자유주의적 차원’이다. 

특히 하이에크는 이른바 시장의 ‘자생적 질서’라는 이름을 내세워 “정치의 왕좌를 빼앗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정치는 과분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과도한 비용이 드는 해로운 존재다. 정치는 엄청난 정신적 에너지와 물질적 자원을 빨아들이고 있다.”(14) 그 왕좌를 이제는 기업에 물려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빌더버그 회의와 삼극위원회를 설립한 데이비드 록펠러는 1999년 이렇게 단언했다. “최근 몇 년 동안 세계 곳곳에서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화 경향이 나타났다. 그 결과 정부의 역할은 축소됐고, 이는 기업인들에겐 유리한 일이다. (…) 그 이면에는 무엇인가가 정부의 자리를 대신해야 한다는 문제점이 남아 있는데, 나는 ‘비즈니스’야말로 그 자리를 맡을 만한 논리적 개체가 될 것으로 본다.”(15)

초산업화의 시대, 그리고 그에 동반되는 세계관의 시대. 즉 산업이 하나의 종교가 된 시대 속에서 대규모 기업들은 새로운 정치문화적 세력이 되고 있다. 기업국가의 등장은 곧 정치의 분열을 의미한다. 정치가 기업 쪽으로 기울면서 스스로를 부정하는 이유다. 바로 그 순간, 비정치적 정치인들은 ‘수동 혁명(안토니오 그람시의 개념)’에 매진하고 있다. 이들은 정치 자체에 대한 정치적 비판을 되풀이하며 권력 유지를 위한 혁명을 목표로 혁신과 복원을 이어가고 있다. 

결국 정치의 비정치화와 국가의 중립화가 기업의 정치화, 나아가 ‘기업지배주의(Corporatocracy)’에 문을 열어주고 있는 셈이다. 사회학자 콜린 크라우치는 “이는 포스트 민주주의의 과정이며, 기업들이 손에 넣은 정치권력의 확대가 기반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16) 이것이야말로 시민권이 공적 영역에서 기업에까지 확대되지 않으면, 정치를 다시 정치화할 수 없는 이유다.  

 

 

 

글·피에르 뮈소 Pierre Musso
대학 교수. 낭트고등과학연구원 소속 연구원. 저서로 『기업국가의 시대: 베를루스코니, 트럼프, 마크롱(Le Temps de l'Etat-entreprise. Berlusconi, Trump, Macron)』(Fayard, Paris, 2019)이 있다.

번역·김보희 sltkimbh@gmail.com
번역위원. 역서로 『미래 대예측』 등이 있다.

 

(1) Andrej Babis, ‘L’Europe à deux vitesses, ça me fait rigoler(두 속도의 유럽, 웃음을 자아내다)’, <르몽드>, 2017년 12월 6일 / ‘propos de M. Erdogan rapportés par le politologue turcIsmet Akça’, <France 24>, 2018년 7월 14일.

(2) François Denord & Paul Lagneau-Ymonet, ‘Les vieux habits de l’homme neuf(피그말리온 에마뉘엘 마크롱이 대선후보되기까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7년 3월호.

(3) Lucien Sfez, 『La Symbolique politique(정치적 상징성)』,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Paris, 1988.

(4) Michel Foucault, 『Naissance de la biopolitique.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78~1979(생명관리정치의 탄생: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 1978~1979년)』, Ehess-Gallimard-Seuil, Paris, 2004.

(5) Pierre Legendre, 『Argumenta & Dogmatica(논의와 교의)』, Mille et une nuits, Paris, 2012.

(6) Thorstein Veblen, 『The Theory of Business Enterprise』, C. Scribner’s Sons, New York, 1904.

(7) Vincent Descombes, 『Les Institutions du sens(의미의 기관)』, Les Éditions de Minuit, Paris, 1996.

(8) Ulrich Beck, 『The Reinvention of Politics: Rethinking Modernity in the Global Social Order』, Polity Press, Cambridge, 1997.

(9) Ernest Renan, 『L’Avenir de la science: pensées de 1848(과학의 미래: 1848년의 사유)』, Calmann-Lévy, Paris, 1890.

(10) Dominique Dubarle, ‘Une nouvelle science: la cybernétique. Vers la machine à gouverner(새로운 과학: 인공지능. 통치하는 기계를 향해)’, <르몽드>, 1948년 12월 28일.

(11) Philippe Vion-Dury, 『La Nouvelle Servitude volontaire. Enquête sur le projet politique de la Silicon Valley(새로운 자발적 복종. 실리콘 밸리의 정치 프로젝트에 대한 조사)』, FYP Éditions, Limoges, 2016.

(12) Tim O’Reilly, ‘Open data and algorithmic regulation’, Beyond Transparency: Open Data and the Future of Civic Innovation, https://beyondtransparency.org

(13) Alain Supiot, ‘Le rêve de l’harmonie par le calcul(숫자놀음 통치의 허구)’,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5년 2월호‧한국어판 2015년 3월호/ Antoinette Rouvroy & Thomas Berns, ‘Gouvernementalité algorithmique et perspectives d’émancipation(알고리즘적 통치성과 해방에 대한 관점)’, <Réseaux>, no.177, Paris, 2013.

(14) Friedrich Hayek, 『Droit, législation et liberté(법, 입법 그리고 자유)』, partie 3,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coll. <Quadrige>, 2013(1st ed.: 1979).

(15) ‘David Rockefeller: Looking for a new leadership’, <Newsweek International>, New York, 1999년 2월 1일.

(16) Colin Crouch, 『Post-démocratie(포스트 민주주의)』, Diaphanes, Zurich-Berlin,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