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 개정을 위한 쿠바식 대토론

2019-06-28     시몬 가르네·그레과르 바르렉스 l 기자

라울 카스트로는 2006년 쿠바의 수장이 되자마자, 쿠바 체제를 ‘업그레이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선 경제 개혁에 집중했고, 이를 통해 쿠바의 정치조직을 변화시킬 것을 약속했다. 이런 변화는 2019년 2월, 1976년의 헌법을 대신할 새로운 헌법에 대한 쿠바인들의 논의에서 시작됐다. 헌법개정 안내문이 엘리베이터, 계단, 건물 입구 등에 게시됐다. 벽보의 내용은 ‘여론조사를 위한 시민들의 논의’에 관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모여 논의를 시작했다. 논의는 일상생활에서 주민을 인솔해온 혁명수호위원회(CDR)(1)를 비롯해 곳곳에서 열렸다. 직장이나 학교 회의실, 때로는 길 한복판에서 열리기도 했다. 쿠바섬 주민들은 국회에서 작성한 새로운 헌법 초안에 대해 의견을 표명했다. 공식집계에 의하면, 2018년 8월 13일부터 11월 15일까지 13만 건의 논의가 이뤄졌다. 수도 아바나 내 하층민들의 주 거주지역인 알타아바나에는, 월요일 오후 6시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일터나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한 집에 한 명꼴로 참여한 것이다. 

헌법 초안은 무료로 배포되거나, 1일 치 빵값에 해당하는 1쿠바페소에 판매됐다. 헌법 초안을 가져온 카밀라 E.부인도 모임과 논의의 주체가 누군지는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혁명수호위원회 위원장들이 시 차원에서 모였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임과 논의를 이끄는 이들 모두가 혁명수호위원회 소속은 아니었다. 그들은 지역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거나 지역구 대표로 선출된 자들, 또는 쿠바 공산당 당원들이거나 법 분야의 전문지식을 갖춘 일반 시민들이었다. 

같은 시간, 아바나의 중심지 베다도 지역에서도 논의가 진행됐다. 회의 진행자들은 수정헌법안 자체에 대해 토론하기보다는 수정안을 제시하는 방향으로 논의를 이끌었다. 삭제할 조항과 추가할 조항, 그리고 진술문에 대한 수정 및 특정 부분에 대해 명확히 할 것을 요구하는 등 여러 제안이 나왔다. 즉, 논의는 새로운 헌법에 대한 찬반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헌법 작성 참여를 촉구하기 위해 이뤄졌다. 헌법전문이 낭독됐고, 일부는 호세 마르티,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레닌과 같은 조국의 ‘정치 지도자들’ 명단에 ‘피델’을 추가할 것을 제안했다. 한 역사학자가 1959년 혁명 이전 지하조직들의 투쟁을 언급해야 한다고 발언하자, 회의 서기들은 그 발언을 기록했다.

 

투표과정이 생략된 국민 논의

논의가 끝난 후, 보고책임자들과 지역 대표들은 전산처리 단계로 넘어가기 전에, 제안사항들을 정리하기 위해 도시별로 모였다. 국민들의 기대에 부합하지 않는 항목들, 문제가 제기된 항목들이 분류됐다. 회의에서 투표는 시행되지 않았다. 따라서 특정 조항에 찬성하는 이들이 몇 명이고, 또 반대하는 이들이 몇 명인지 알 길이 없었다. 단지 기록을 위해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식이었는데, 이런 방식을 긍정적으로 보는 이들도 있었다. 지지자의 수와 무관하게 의견을 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투표가 생략돼 정권에 거슬리는 다수 의견이 은폐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50년 동안 ‘정치적 만장일치’에 익숙했던 국가에서 헌법 초안에 대해 78만 3,174건의 수정·첨가·삭제 안이 제기됐다. ‘민주주의의 실현’을 자부하는 정권은 헌법안을 재검토해야 했다. 헌법작성 위원회는 초안의 60%를 수정했다. 사실상 국민들에 의한 논의가 끝나자 모든 제안이 단일 보고서에 기록됐다. 이 보고서는 헌법 개정위원회로 전달됐다. 법률가, 대학교수, 연구원, 컴퓨터전공자들로 구성된 시·지방·국가 차원의 실무진들이 모여 제안들을 선별하고 정리했다. 그들은 최종안을 작성했고, 이는 국회에서 발의 및 토론을 거쳐 표결됐다. 

위원회의 조정위원인 오메로 아코스타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이 헌법은 국민들의 민주적인 참여를 통해 진실하게 구현됐다. 헌법이 국민으로부터 비롯됐고, 헌법에 국민들의 정서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하투쟁과 관련된 역사학자의 제안도 최종안에 수용됐다.

베다도 구역에서 이런 과정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살펴보자. 헌법 개정안이 열거됐고, 그에 대한 수정 제안들도 뒤따랐다. 헌법의 심층적인 의미보다는 형식적인 부분에 대한 제안들이 대부분이었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들도 있었다. 1976년의 헌법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인간을 모든 형태의 착취로부터 해방시킨다’고 주장한 쿠바의 공산주의적 성격은 초안에서 삭제됐다. 쿠바는 더 이상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였다. 

그러나 국민들의 논의 끝에, 쿠바는 사회주의 국가이면서 동시에 공산주의 국가임을 다시 표명하기로 했다. 자영업자들과 기업의 직원채용을 정권이 조금씩 허가해주는 시점에, 모든 고용주는 노동을 부분적으로 착취한다는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착취’가 자리 잡는 것을 국민들은 막고자 했다. 새로운 헌법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쿠바는 인간이 다른 인간을 착취하는 체제인 자본주의로 결코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며, 우리는 오직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만이 인간으로 하여금 충만한 존엄성을 누리게 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국민들에 의해 제기된 개정안의 ‘이념 노선’은 전혀 견고하지 않았다. 헌법 초안의 제 22조는 사유재산권을 인정했다. 공산주의 개념과 모순됨에도 불구하고 이 조항은 유지됐고, 쿠바 거주 외국인들의 주택 구입을 허가하는 방향으로 확장됐다. 쿠바 국민들이 수정하지 않았던 제 28조에서도 ‘국가는 경제발전을 위해 외국인 투자를 보장하고 장려한다’고 선언했다. 마찬가지로 제 36조는 국민들의 논의 이후에 ‘외국 국적을 취득한다고 해서 쿠바 국적을 상실하지는 않는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는 초안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던 내용이다. 원래 이중 국적 취득은 1976년의 헌법에서 금지됐으나, 수많은 국민들은 이 금지사항을 무시했다. 

이처럼 새 헌법은 기존의 탈법적인 기준을 합법화해 많은 쿠바인들의 실질적인 삶에 초점을 맞췄다. 이런 식으로 새 헌법은 경제 분야에서 라울 카스트로가 시행한 현실주의를 계승했다.

 

19만 5,000건의 제안을 부른 동성혼 논쟁 

가장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킨 사안은 동성혼 문제였다. 헌법 초안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아니라 ‘두 사람’ 사이의 결합을 언급했다. 무엇보다 몇 년 전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교회가 동성애 결혼 문제와 관련해 상상외의 대항세력으로 등장했지만, 그것만으로는 국민들의 거부를 설명하기 어렵다. 베다도에 거주하는 한 주민은 쿠바가 ‘그런 격변을 받아들이기에는 심리적으로 그리고 역사적 측면에서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고 발언했다. 

그때 한 여성이 일어나 “동성애는 기본권으로, 제 42조에서 보장하고 있다”며 분개했다. 그녀는 제 42조를 인용했다: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며, 동일한 법적 보호를 받으며, 생물학적 성별, 사회적 성별, 성적 지향성, 성 정체성, 나이, 민족적 출신, 피부색, 종교적 신념(…) 또는 인간 존엄성의 측면에서 모든 개인적 상황에 따른 차별 없이 동일한 권리와 기회를 누린다.’ 쿠바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산티아고의 대주교인 디오니시오 가르시아는 동성혼을 ‘이념적 식민주의’로 간주했다. 

이 조항과 관련된 총 19만 5,000건의 제안이 공개 논의에서 기록됐다. 찬성은 3만 5,000건이었고, 반대는 16만 건이었다. 헌법의 최종 본문은 가족 법령의 잠재적 변화를 허용하기 위해서 모호성을 선택했다. 제 82조는 다음과 같다: ‘결혼은 배우자들의 권리와 의무, 법적 능력에서의 평등과 자유로운 동의에 근거한 (…) 사회적이고 합법적인 제도다.’ 이 문구는 원래의 제안에서 한걸음 뒤로 물러난 것이었지만 1976년의 헌법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었다. 정부는 2년 이내에 동성혼 문제에 대한 새로운 국민투표를 약속했다. 아마도 정부는 상당수의 국민들이 이 조항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기 위해 헌법에 반대표를 던질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국가 권력의 재조직에 관한 조항 제 109조에서는 대통령(국가평의회 의장직에 해당) 및 총리직을 신설했다. 기존 헌법에는 국가수반과 정부수반의 직무를 수행했던 국가평의회 의장직만 있었다. 따라서 새 헌법은 카스트로가 약속했던 정치권력의 분권화를 이행했다. 또한 국가평의회 의장직 연임을 2번으로 제한하고(최장 10년), 국가평의회 의장직 출마 연령을 65세까지로 제한했다. 

 

정권은 민주주의를 흉내만 내고 있다

한편 새롭게 주목받는 조항은 ‘언론의 자유’를 확립하는 제 55조다. 1976년의 헌법은 ‘사회주의 사회의 목적에 부합하는’ 언론 및 표현의 자유만을 시민들에게 승인했다. 그러나 새 헌법 초안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볼 수 있듯, 여전히 갈 길이 멀다. 공적 연설에만 제한돼 자기 생각을 개진해야 한다면, 게다가 익명을 쓸 수 없다면 비판적 견해를 밝히기는 어려울 것이다. 여러 증언들은 같은 패턴을 보였다. 공개회의에서 어떤 사람이 정권에 거슬릴만한 요구를 표명하거나 민감한 조항을 재구성할 것을 제안하는 경우, 그의 발언은 일상적 절차에 따라 기록됐다.(2)

그러나 그 사람은 며칠 후 경찰서로 소환돼 그런 수정안을 제안하게 된 이유를 설명해야 했다. 때로 당국이 선동자로 지목된 이가 자신의 발언을 대가로 보수를 받지 않았는지(특히 국외 세력에 의해) 확인하는 과정에서 긴 심문이 뒤따르기도 했다. 이런 방식은 위에서 언급된 아코스타 위원의 낙관주의적 발언과는 거리가 있다. 게다가, 헌법 최종안 국민투표에 대해서는 찬성 선거운동만 진행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텔레비전에서도, 라디오에서도, 벽보에서도 반대의견은 찾을 수 없었다.

쿠바 음악원과 문화부는 찬성투표를 독려하는 노래를 작곡하도록 음악가들에게 요청했다. 공항에서 아바나 중심부로 연결되는 보예로스 도로는 지난 55년간 쿠바섬의 운항 금지를 알리는 위압적인 표지판으로 유명했다. 이곳에 국민투표 선거운동 기간 새로운 대형 게시판이 등장했다. 세 번의 ‘찬성’ 구호를 배경으로 다음과 같은 문구를 볼 수 있었다: ‘우리 문화를 위해, 전통을 위해, 신념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젊은이들을 위해, 민주주의를 위해, 사회주의를 위해, 그리고 조국을 위해.’

반대투표를 위한 선거운동은 2018년 12월 6일 3G 개통 이후, 접근이 수월해진 SNS에서만 찾아볼 수 있었다. 반대 선거운동을 주도하는 이들 중 대부분은 반체제 인사들이었다. 이들은 “정권이 민주주의를 흉내만 내고 있다”고 지적했으며, 미겔 디아스카넬 국가평의회 의장직에 대한 신임을 묻는 국민투표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2019년 2월 24일 일요일, 국민투표가 시행됐다. 16세 이상의 모든 시민은 해외 거주자를 제외하고 투표할 수 있었다. 개표는 당일 저녁 공개적으로 진행됐다. 그러나 국가 선거위원회에서 나온 전체 결과가 관영매체인 그란마에 발표될 때까지 2일을 기다려야 했다. 기권자, 백지표 및 무효표가 고려됐다. 투표율은 84.41%, 찬성표 86.85%, 반대표 9%, 백지표 2.53%, 무효표 1.62%였고 최종 결과는 찬성 유효표 73.31%였다. 2019년 4월 10일, 쿠바 공화국 공식 관보에 게재되며 새 헌법이 발효됐다.  

 

 

글·시몬 가르네 & 그레과르 바르렉스 Simone Garnet & Grégoire Varlex
기자

번역·권정아
번역위원

 

(1) 마리옹 지랄두, ‘쿠바 혁명수호위원회의 ‘내부 혁명’, <르몽드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2016년 2월호. 

(2) 공식통계에 의하면, 다당제에 찬성하는 총 1만 건의 제안이 집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