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로부터 외면받는 노동총동맹의 ‘변절’
제 52차 노동총동맹(CGT) 대회가 5월 13일부터 17일까지 디종에서 열렸지만, 저항운동의 횃불을 쥔 ‘노란 조끼’ 운동 때문에 그 명성에 타격을 입었다. 직장 내 노동자 대표 선거에서도 침체를 겪고 있는 노동총동맹은 자신들의 노선과 행동을 재평가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됐다.
몽트뢰유에 위치한 프랑스 노동총동맹(CGT) 본부, 필리프 마르티네스 사무총장은 사무실 한쪽 구석에 불로뉴-빌랑쿠르에 자리한 옛 르노 공장들의 항공사진을 걸어 놓았다. 르노의 전 노조 대표이자 기술자였던 그는 대화 중에 자신의 ‘직장’에 대해 종종 자부심을 내비치며 언급했다. 이 야금공은 여전히 자동차 회사 기술자다운 은유법을 사용했다. “나의 가장 큰 염려는 우리가 2단, 3단 기어의 속도까지는 올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노동총동맹에는 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다. 먼저, 공식 노조원의 수가 서서히 줄고 있다. 2012년 69만 5,000명에서 2017년 63만 6,000명으로 떨어져 1990년대 초반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다음으로, 직장 내 노동자 대표 선거에서 CGT의 성적이 계속 나빠지고 있다는 점이다. 2018년 말 CGT는 공공 및 민간 분야에서 모두 프랑스 민주노동동맹(CFDT)에 1위 자리를 내줬다. 민간 기업에서 영향력을 잃은 것이 주된 이유다.(1)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얼마 전, ‘노란 조끼’라는 운동이 갑자기 등장했다. 이들은 주말에 원형 교차로에서 모였다. 그러고는 CGT로부터 항의운동의 횃불을 가로챘다. 노란 조끼 운동은 비교적 전면적이고 효과적인 대중결집을 이뤄냈다. 한 달 만에 정부가 100조 유로를 풀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노조의 도움도 없었다! 그러나 2016년 노동법 반대 시위, 2017년 마크롱의 노동법 개혁 반대 시위 그리고 2018년 프랑스 국유철도(SNCF)에서 벌어진 시위에서 볼 수 있듯이 CGT가 그동안 군중을 동원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극우파가 만들어낸 ‘분노의 도구화’
지방 연합(UL) 또는 도 연합(UD)에서 활동하는 ‘CGT 하부’ 활동가들은 이런 상황에 불안감을 느끼지 않았다. 이들에 의하면 ‘노란 조끼’ 시위는 ‘단체행동에 다시 신뢰를 주고’ ‘활력을 되찾아주는’ ‘좋은’ 움직임이다. 그러나 2018년 11월부터 루앙, 오를레앙 또는 투르쿠앙 등 현장에서 “파시스트들이 대중의 분노를 이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란 조끼 시위대’ 편에 서야 할 필요성이 급히 제기됐다. 그럼에도 ‘CGT 상부’에서는 결단력 부족으로 혼란의 씨앗을 뿌리고 말았다. 드니 그라부이 CGT 집행부 위원은 “아무도 노란조끼의 움직임이 생겨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 규모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털어놨다. 노란조끼 시위대는 (유류세 인상 반대라는) 첫 요구사항만큼이나 조직 구성면에서도 놀랍고 당황스러울 정도로 강했다. 그러나 CGT 내부에서는 ‘극우 파시스트들이 대중적 분노를 정치적 도구로 이용할 수 있다’고 우려해, 노란조끼 시위를 관망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이는 2014년 CGT 소속의 파비앵 엥겔만이 국민전선(FN)당 후보로 아양쥬(모젤) 시장에 당선돼 제명된 예처럼, FN(이제는 국민연합당, RN)이 (시위대를 가장해) 자신들의 진영에 침투할 수 있다는 우려였다. 그리하여 지난 2월 5일, CGT가 노란조끼 시위대에 합류하기까지 두 달이라는 암중모색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오렐리오 라미로 루아레 CGT 도연합 사무총장은 “우리는 그런 염려에 동의하지 않았다. 시위대에 파시스트들도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 분노에 찬 이들이었다. 노동조합에 대해 아무 지식이 없는 사람들과 함께한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노란조끼 운동이 CGT의 정체성, 구성, 노선, 행동양식을 참조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사회운동이 노조에 대해 이렇게 강한 적대감을 드러내고, 노조로부터 이렇게 거리를 두고 발전하는 경우는 드물다. 2016년 파리의 레퓌블리크 광장에서 벌어진 밤샘 시위 때는 시위를 응원하러 온 CGT 사무총장에 대한 시위대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CGT는 5만 9,000개의 노동조합 지부 및 하부 조합, 800개의 지방 연합, 96개의 도 연합, 30여 개의 직장 내 조직(동맹 또는 국내 조합)을 가지고 있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심각한 불균형을 겪고 있다. 가입자 중 42%가 공직(의료계 포함) 출신이다. 프랑스 노동자 중 20%에 불과한 집단이다. 그리고 민간 분야에서는, 조합원의 절대다수(68%)가 500인 이상 사업장에서 일하고 있다. 이들은 프랑스 노동자 중 1/3에 속하는 집단으로, 평균 급여가 높다. 반면, 50인 이하 소규모 사업장에서 일하는 조합원들은 9%에 불과하다.
역사학자 스테판 시로는 “CGT는 현재 노란조끼 시위대를 가득 채운 노동자들, 즉 과거 그들의 편이었던 저임금 노동자들과 멀어졌다”고 지적했다. CGT는 비정규직 노동자, 1인 노동자, 소기업 노동자들의 마음을 얻는 데도, 실업자들을 결집하는 데도 실패한 것이다. CGT의 깃발 아래 모인 실업자들은 5천 명 정도에 불과했다. 푸조의 소쇼 공장에서 평생 판금가공을 했던, 열성 활동가였던 크리스티앙 코루쥬(68세)는, “CGT는 빈곤문제와 비참함에 대해 제대로 생각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다”고 덧붙였다.
“노동자의 삶은 하청으로 넘어갔다”
‘오래된’ 활동가들은 CGT를 강타한 첫 번째 위기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이들이다. 됭케르크의 한 정유공장에서 노조 책임자를 지낸 65세의 마르셀 크로크페르는 “1968년 이후, 노동단체가 급증했다. 급여 및 노동조건, 그리고 노조의 대표성에 대한 이들 단체의 영향력은 컸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탈공업화와 함께 광산업, 제철업, 금속공업, 섬유업 등 거대 노조의 조합원들은 태양 아래 눈처럼 사라졌다(CGT에 의하면, 전후 가입자는 4백만이었다). 우편·통신 분야 임금 노동자 동맹(FAPT)의 프레데리크 카라스 알자스 지역 책임자는 “노동자의 삶은 하청으로 넘어갔다”고 말했다. 노동조합주의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넘어갔다는 뜻이다.
통신업체인 오랑쥬 사에서는 노동조합 가입자가 임원의 80%, 비임원의 20% “그리고 주주 사원의 80%에 해당한다!” 기술분야 노동총동맹(UGICT-CGT) 부사무총장이자 집행부 막내인 소피 비네는 “자본도, 노동자들도 변화하고 있는데, CGT 조직만 정체돼 있다”고 지적했다. 경제사회연구소(IRES)의 연구원 장마리 페르노는 더 직설적이었다. “CGT는 자신들만의 관료주의로 스스로를 사슬에 묶고 말았다. 일례로 그들은 트럭운송, 철도운송, 선박운송 등 과거의 산업분류 기준을 고수했다. 세상은 이들 직업을 통폐합해 ‘물류’라는 새로운 직무를 중심으로 재편됐는데도 말이다. CGT가 참조하는 기준들은 과거의 것이고, 더 이상 임금 노동자들의 현실과 맞지 않는다.”
CFDT에서는 이런 기준들을 오래전에 수정했다. CGT의 국내 조직망 역시 수정돼야 한다. 하지만 노조동맹들은 소위 ‘동업조합’, ‘파벌’, ‘특권 지배세력’처럼 행동하며 머리로만 생각한다. 이들은 모두 자신들만의 원칙을 고수한다.
“벌써 10년간, 3번의 대회를 거치며 조직 재정비에 대해 말해왔지만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았다!”고 국내 언론인 조합(SNJ-CGT) 에마뉘엘 비르 사무총장이 씁쓸하게 내뱉었다. 금속공업 노동자 동맹을 지휘했던 CGT 집행부가 책임져야 할 문제 아닐까? “아니다! CGT에서는 각자가 주인이다. 이것이 동맹주의의 원칙이다. 그래서 나는 ‘대표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대표들은, 몇몇의 경우 자신이 원하는 것만 한다! 나는 그저 동맹의 대표일 뿐이다.”
2013년 CGT의 수장자리에 티에리 레파옹의 예상치 못한 당선으로, 베르나르 피보는 연임에 실패했다. 그리고 1년 후에 레파옹은 예상치 못한 축출을 당했다. 원인은 내부 마찰과 레파옹의 무책임한 지출(사무실 및 사택 비용)이었다. 이후, 조직에는 안정이 필요했다. 언론이 관습적으로 부여한 이미지와는 반대로, CGT는 일원화된 조직이 아니라 다원적이며 변화무쌍한 조직이다. 이런 특성 때문에, CFDT보다도 중앙집권화가 이뤄지지 않았다. ‘CGT들’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적합할 정도다.(2) 그렇다면 CGT라는 명칭은 무엇과 연결되는 것인가? “사회정의, 반인종차별주의, 국제연대, 페미니즘 등 강력하고 핵심적인 가치들이다”라고 마르티네스 사무총장은 단번에 대답했다. 물론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느 노동조합에서나 내세우는 가치가 아닐까?
‘사회적 대화’ 속에 숨어있는 함정
지난 2월, 우연한 기회로 한 지방 연합을 방문했다. 그 유명한 가뉴팽 거리 위쪽에 위치한 (옛 노동조합 사무소로 쫓겨난) 빌프랑슈쉬르사온(론) 지방 연합이었다. 1,200명의 조합원이 이곳에 가입돼 있다. 여기에서는 주기적으로 구직을 위한 홍보 활동을 한다. 실업자들의 구직을 돕고자 우체국 등의 건물 앞에 사무소를 여는 것이다. 이것이 CGT 노조원들 사이의 연대인지 묻자, 탁자 주위로 미소가 번졌다.
이 질문에, 몇몇 활동가들이 “계급투쟁!”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이들은 공산당(PC), ‘라 프랑스 앙수미즈(불복종 프랑스)’, 유럽 생태 녹색당 등 다양한 정치색을 지닌 노조활동가들이다. 크리스티앙 리통 지방 연합 사무총장은 이 질문에 대해 “고용주와 노동자 간의 이해충돌을 잘 보여주는 상황”이라고 답변했다. 이 연합 사무실로부터 2km 떨어진 곳에서는 바이엘의 임금 노동자들이 ‘계급투쟁’을 외치며 두 달 전부터 리마 공장 앞을 밤낮으로 점거하고 있다. 이 노조 대표들은 “경영진을 집요하게 괴롭혔다”는 이유로 해고 위기에 놓였다. 2년도 채 안 돼, 지방 연합 주도로 CGT지부 조합원은 35명에서 110명으로 늘었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물리친 ‘이데올로기 투쟁’ 속으로 계급의식이 몰락했다는 사실에 지방 연합의 활동가들은 안타까워했다. 계급의식은 교육수준에 비례한다.(3) 그래서 사회적으로 가장 취약한 저학력 계층에서 계급의식이 제일 약하다. 하지만 ‘노란조끼’ 시위대의 활동은 사기를 진작시켰다. 관계가 맺어지고 환상은 사라졌다. 각자가 스스로를 아는 방법을 배웠다. 회의를 통해 대중교육의 장도 마련됐다.
가치의 조합인가, 투쟁의 조합인가? 루이 비아네(1992~1999) 그리고 티보(1999~2013)의 지휘 하에 지나간 20년은, CGT의 정신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4) 프랑스 공산당이 CGT를 장악한 이후 이어진 노동조합주의가 “신뢰성이 있고 효과적이기를”(5) 조직 지도자들은 바랐었다. 그리고 그 흔적이 남았다. 1990년대, CGT 규약에서 반자본주의 조항들은 삭제됐고, 체제 변화에 대한 비판 조항이 자리 잡았다. 또 최근 디종 노조대회 안내 자료에는 계급 사이의 ‘투쟁’이 아닌 ‘대립’이 언급됐다.(6)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아니 라크루아리즈는 “CGT에는 언제나 전투적인 이들과 개혁주의자들이 존재해왔다”고 분석했다. 그에 의하면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자본주의가 군림하게 됐고 새로운 노조주의, 새로운 CGT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CGT 내에서 개혁파 진영이 세력을 막대하게 확장하는 결과가 초래됐다는 것이다. 정치학자 소피 베루와 언어학자 조제트 르페브르 역시 CGT의 정치적 입장이 변화하는 모습을 확인했다. “이제 관료조직이 되다시피 한 CGT는 단체교섭에서 자신의 모든 영향력을 행사하길 바라면서, 스스로를 ‘시민’이라고 지칭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실제로 이들의 입장은 CFDT(프랑스 민주노동당)와 비슷해졌다.”(7)
마크롱의 개혁에서 외면당한 ‘사회적 대화’를 지지하고, 오루 법(1982)(1982년 장 오루 노동부 장관이 발의해 공표된 노동권 개혁 4개 법안-역주)에 맞서 다수의 단체교섭에 참석했던 것은 CGT의 숙명이었을까? ‘노란조끼’ 시위대와 함께 원형 교차로에서 시위를 한 CGT 조합원들은, 조직에 퍼진 ‘제도화’라는 두 번째 위기를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우리가 변절했다고 생각한다. 이미 몇 년 전에도 조직 구성과 관련해 문제가 있었다”라고 크로크페르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시로는 “사회의 미래에 대한 생각을 조금씩 불어넣던” 공산당과 관계를 단절한 이후, CGT는 이러한 대화 행위를 이데올로기라고 여기며 이에 몰두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 대화의 평화적 목표는 계급투쟁 성격의 노조주의를 해체하고 파괴하는 것이기도 했다.”(8)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제, 사람들은 노동조합이 정치를 할 때 어떤 정당을 통해서 해야 한다고 믿게 됐다.”
‘노란 조끼’ 시위 초기에 벌어진 한 사건은 CGT의 무감각함을 잘 보여준다. 2018년 11월 6일, CGT는 정부에 시위대와의 ‘대화’를 촉구하고, (시위대를 겨냥해) ‘모든 종류의 폭력행위’를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9) 모든 CGT 조합원들은 이 성명서를 읽으며 큰 충격을 받았다. 노조 중 전투적 성격이 가장 강한 화학산업 동맹(FNIC, 조합원 2만 3,000명)은 이 성명을 “CGT답지 않다”고 평가했다. “CGT의 역할은 노동자들 곁에 있는 것이다. 투쟁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는 노동자들을 잠잠하게 만들라는 요구에 맞춰, 경영진이나 정부의 보충부대가 되는 게 그들의 역할인가?” 두 시간 후, 태도를 완전히 바꾼 CGT는 이번에는 폭력의 원인에 조준선을 겨누고 비판했다. “정부는 사회적 방화범 노릇을 하고 있다. 무책임하다!” 그러고 나서 CGT는 국무총리실의 초청을 거절했다. 이후 CGT는 ‘대토론’을 거부한 후, 자신들만의 협의를 준비했다.
관료화되고 전문화된 CGT의 몽트뢰유 연합은 결국 하부 조직과의 관계가 단절됐다. 그리고 25년 전부터, CGT는 더 이상 체제에 대한 문제 제기는 하지 않고 체제에 동조했다. 2007년 CGT에서 제명돼 현재는 SUD 노조에 몸담은, 파리 북역 철도 노조활동의 상징 모니크 다바는 이렇게 내뱉었다. “CGT가 망가진 이유는, 노동자들을 등지고 그 반대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실제로, CGT에는 ‘사회적 대화’를 통해 얻게 될 금전적 이득이 많다. 공공 보조금 그리고 노사 공동 결정주의 또는 기업 내 조합권리 협정에서 나온 자금에 비해, 조합회비의 비중은 미약하다. 2017년 동맹 단일예산 중 조합회비는 수입의 29%에 그쳤던 반면, ‘보조금과 기부금’은 62%를 차지했다. 이후 대회 재정 보고서에, “이런 예산상황은 기관과 경영진들에 맞선 우리의 독립성에 대해 의심을 품게 만든다”라고 기록됐다.(10)
또 다른 세상을 제안할 수 있는가
‘노란 조끼’ 시위 이후 CGT 마르티네스 사무총장은 조합원들에게 “다르게 생각할 것”을 촉구했다.(11) “노동자의 임금 명세서와 작업장의 ‘깨진 타일’을 지키기 위한” 노조주의를 유지할 것을 권장했던 앙리 크라쉬키 전 사무총장(1982~1992)의 지침을 차용하기도 했다. 이 노조주의를 마르티네스의 설명대로 해석하면 이렇다. “우리는 노동자들 곁에서, 쓸모 있고 유능한 존재가 돼야 한다. 만일 깨진 타일을 고칠 능력도 없다면,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큰 쟁점들에 대해 신뢰를 주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에 따라, 그는 “덜 이데올로기적인” CGT 또는 “이데올로기와 일상생활 사이에 더 나은 균형을 이루는” CGT를 권장했다. 그리고 “성공이 확실한” 행동방식을 추천했다. 달리 말해, “동시에, 함께 행동하기 위해 그리고 포괄적인 슬로건이 아닌” 자신만의 고유한 요구사항을 바탕으로 모이자는 것이다. 결국, “불확실한 총파업을 촉구하는 것보다, 파업을 보편화하자”는 개념이다. 이렇게 되면 프랑스 노조활동의 토대가 되는 아미앵 헌장(1906)에 기재된 ‘두 가지 사명’이 현실에 맞게 수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일상 속 당면한 문제해결을 요구하면서, 사회가 미래를 위해 변화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메시지가 내부적으로 원활하게 확산될 수 있을까? 역사학자 스테판 시로는 이렇게 판단했다. “분석이 부족하다. 지난 25년에 대한 종합평가가 이뤄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명확한 노선이 없는 것이다. 최근 CGT는 투쟁 노선으로 선회한 느낌이다. 사회적 대화와 관련해서는 과도하게 관례화된 항의 방식을 유지하면서 말이다.”
계속 반복되는, 효과 없는 결집의 나날들이 이를 증명한다. 툴루즈의 항공 장비 제조업체 라테코에르에서 당선된 CGT조합원 플로랑 코스트는 “이데올로기 혁신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고 평가했다. 정당에 관심이 없는 이 40대의 설계 엔지니어는 다른 많은 사람처럼, “연합이 또 다른 세상을 제안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우리는 더 이상 어떤 꿈도 꿀 수 없다. 부패한 냄새가 난다. 우리는 이데올로기적으로 완전히 실패했다.”
활동가들은 위대한 이상이 사라져가는 작금의 상황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봤다. 1990년대, CGT에 실업자위원회를 만든 샤를 오아로는 “더 이상 기업의 소유권에 대한 문제 제기는 나오지 않는다”고 밝혔다. 카라스는 “전쟁이 끝난 후, 건강과 관련해 민영의료를 없애자는 주장은 CGT의 역사적인 요구였다. 앙부르아즈 크루아자(CGT회원이자 사회보장제도 창시자)는 더 이상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고 설명했다.
“생산성 향상을 위해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종일 같은 작업만 반복하는 노동 방식은 사라졌어야 한다! 우리는 정치에 관심이 많은 세대였다. 우리는 하나의 세력을 상징했다. 우리는 사회를 바꾸려고 했었다.” 소쇼에서 판금공으로 일했던 코루쥬가 덧붙였다. 사실, 노조연합이 대회 때마다 언급했던 ‘임금 노동자의 새로운 지위’를 요구하는 ‘직장 사회보장제도’ 계획이 존재하긴 한다. “다만 그 누구도, 누구에게도 이 제도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게 문제”라고 코스트는 빈정댔다. 실제로 이 내용은 언론에서도 들을 수 없다. 언론은 CGT에 등을 돌리기 전, 주당 32시간 노동이나 최저임금 월 1,800유로 등 단순한 구호들을 강조했었다.
투쟁적인 성격이 점점 시들어가다가, 결국 사라진 것은 비판과 분노의 대상이다. 크로크페르는 분노의 이유에 대해, “청년층은 실패만 맛봤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물론 연장자들도 정부의 대대적인 습격을 받았다. 일례로, 2007년 니콜라 사르코지는 파업을 무력화하고자 최소한의 대중교통 서비스를 즉각 구축하기도 했었다. 정부는 자신들의 관리전략을 통해 노동단체의 활동을 중단시키거나(12) SNCF에서처럼, 파업에 따른 손실금을 임금에서 공제하기도 했다.
“가장 지배적인 것은 두려움이다. 상사에 대한 두려움, 일자리를 잃을 두려움, 미래에 대한 두려움 말이다.” 코스트가 지적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진보적 사명감에 사로잡혀 있던 활동가들은 벽 앞에 가로막힌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런 활동가들의 상황에 대해, 마리즈 뒤마 전 CGT 전국 비서는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경제적, 상황적으로 내일이 오늘보다도 나쁠 것이라는 두려움이다”라고 요약했다. 한편, PSA사의 연합 노조 대표이자, 노동자 투쟁 당의 지도자인 장피에르 메르시에는 이렇게 표현했다. “이것은 포기가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고, 집단의 힘을 믿지 않는다. 반면 ‘노란 조끼 시위대’는 마크롱 보너스를 얻어냈다. 이렇듯 투쟁은 규모가 클 때, 그리고 단호하고 의식적일 때 성공하기 쉽다!”
그러자 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CGT 릴 대학병원 의사, 엔지니어, 임원, 기술자 노조 사무총장인 이자벨 보스만이 물었다. “포기는 오히려 조직 지도부의 투지 결여에 따른 결과가 아닌가?” 그녀의 노조는 동맹의 지지 없이도 노동법 조항에 항의하기 위해 법정 투쟁(몇몇 사안에 대해서는 이기기도 했다)을 지속했다. 그들은, 급진적인 방식 때문에 CGT 내에서 전적인 찬성을 얻지 못하는 굿이어나 앵포콤 등이 포함된 다른 20여 개의 반체제 노조들과 함께, 더욱 적극적인 방안을 대회에서 검토할 것을 촉구했다.(13) “CGT 내부에 이데올로기적 갈등이 있다. 그것을 표현해야 한다”고 CGT의 적극적 동조자인 변호사 피오도르 릴로브가 말했다. 그는 재판에 있어서도 한층 전투적인 태도를 촉구했다.
“공산당이 와해한 이후, CGT 회원들의 성찰도 줄었다.” 오랫동안 공산당에서 활동했던 코루쥬는 매우 유감스러워했다. 공산주의 세계 역시 쇠퇴기를 겪으며 공산주의의 입지가 쇠약해지는 것을 경험했다. 지방 조직과 연합 조직들, 그리고 과거 투쟁의 끈기를 지탱하던 전투적 공조가 위축되는 것을 목격했던 것처럼 말이다.(14)
다른 비등록 CGT 회원도(동맹에 의하면, 현재 정당 가입자는 10% 미만임) 이에 동의했다. “CGT는 더 이상 생각이란 것을 하지 않는다.” 참석자들은 여기에서 조합의 교육시간 중 상황 분석이 부족했던 점에 대해 규탄했다. 당시, 연합을 점령했던 ‘상투적인 표현’인 ‘지속가능한 인간 개발’,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또는 ‘노동의 질(강도는 제외)’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조합원은 말을 이어갔다. “정치적 계획 없이는, 불평등에 맞선 투쟁은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개혁가다”
그렇다면, 여러 가지 의문이 든다. CGT의 정치적 계획은 어떤 것인가? 일단, CGT는 아직도 노동자 운동인가? 그곳에 ‘우버화된(택시 중개 앱인 ‘우버’에서 유래한, 인터넷 직거래를 뜻하는 신조어-역주)‘ 독립 노동자들의 자리가 있는가? 간부들(동맹은 이들의 조합가입을 강조하고 싶어 했었다)의 역할은 무엇인가?
더 이상 노조 사무총장을 노동자가 맡지 않는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처음으로 깨달았다. 분노를 일으키는 사안들은 그 밖에도 많다. 때때로 아주 계획적으로 CFDT와 행동 단결을 추구하고, 어떤 이들에게는 유럽연합에 대한 충성의 상징인, 제도 만능주의라 평가받는 유럽 노동조합연맹에 가입했다. 2005년에는 CGT의 하부조직이 유럽 헌법 조약 찬반 국민투표에서 ‘반대’ 입장을 채택해 중립을 장려했던 지도부에 모욕을 준 일도 있다.
비네는 연합 집행부에서 “정치 문화의 약화로, 이제 개개인 사이에서 공통점을 찾는 일은 훨씬 더 복잡해졌다”고 인정했다. 사람들은 동맹의 역할에 대해 자문한다. “권리를 요구할 줄 아는 견인차”가 되고 “여러 직업에 공통된 정치적 관점을 제공”할 것을 지도부에 지시하는 FNIC은 “만일 CGT 중앙연합이 조직을 총괄하는 것에만 만족한다면, 즉, 투쟁의 결과물이 되는 것으로만 만족한다면 연맹을 맺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라고 물었다.(15) 그러고서 곧바로 이들은 8개 도 연합 그리고 상업 및 서비스 연맹과 함께 4월 27일 파리 시위를 계획했다. 그러나 이런 비판들도 또 다른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직장 내에서 거부 의사를 표명하는 것보다 CGT가 바보 같은 짓을 한다고 말하는 것이 훨씬 쉽다”고 크로크페르는 주장했다. 그는 사무총장을 “세심하고 실용적”이라고 평가하는 사람이다.
세심함과 실용주의. 사람들이 마르티네스 CGT 사무총장의 특징으로 꼽는 측면이다. 긍정적인 의미에서든, 부정적인 의미에서든 말이다. 이런 평가를 받는 마르티네스는 사람들에게 조합이 어떤 이미지로 비치는지, 어떤 기대를 하고 있는지도 잘 알고 있다. CGT가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긴 하지만, 유리한 조건들도 남아 있다. 2018년 두 차례의 여론조사에서 응답자들은 고용 보호나 퇴직연금 보호, 구매력 상승, 양성평등 등의 주제 전체에 대해, CGT를 가장 유능하다고 생각했다. 약 3/4의 응답자들이 CGT가 ‘호전적’, ‘의욕적’이라고 평가했으며, 지난 3월 19일의 2차 파업을 지지했다.(16) 응답자들은 제시된 보기 중에서, CGT가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협상에서 덜 이념적이고 더 현실적인 모습을 보여야 하고, 노동자들에게 더욱 귀를 기울여야 하며(‘깨진 타일’에 신경을 써야 하며), 모든 정치적 유혹을 뿌리쳐야 할 것”이라고 답했다.
사무총장 역시 이 점에 동의했다. “현 시점에서 아미앵 헌장은 그 어느 때보다도(그는 이 말을 세 번 반복했다) 정당으로부터 독립적인 CGT의 필요성을 나타낸다.” ‘독립적 사회 운동 신조’를 없애야 한다는 불복종 프랑스 당의 설립자 장뤼크 멜랑숑의 호소도 상관하지 않는다.(17) 마르티네스에게 CGT 연합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연합은 개혁주의인지 혁명주의인지를 묻자, 그는 이렇게 외쳤다. “당연히 우리는 본질적으로 개혁가다! 사회를 바꾸고자 하는 것, 개혁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사명은 권력이 아니라 사회 개혁을 통해 사회 변화를 이루는 것이다!” 역시 이 야금공의 공구함에는 마치 금속을 정련하듯, 말을 멋지게 다듬는 수사학적 도구들이 들어있었다.
글·장미셸 뒤메 Jean-Michel Dumay
기자
번역‧김자연 jayoni.k@gmail.com
번역위원
(1) Karel Yon, ‘Malaise dans la représentativité syndicale 대표 노조의 거북함’, 2017년 6월, monde-diplomatique.fr / Jean-Michel Dumay, ‘CFDT, un syndicalisme pour l’ère Macron 마크롱 시대의 노조활동은 어디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7년 6월호.
(2) Françoise Piotet, 『La CGT et la recomposition syndicale CGT와 노조 재구성』,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coll. <Le Lien social>, Paris, 2009.
(3) ‘Les Français et la lutte des classes 프랑스인들과 계급투쟁’, IFOP, Paris, 2013년 1월
(4) Leïla de Comarmond, 『Les Vingt Ans qui ont changé la CGT CGT를 바꾼 20년』, Denoël, Paris, 2013, / 공동 집필, 『Histoire de la CGT. Bien-être, liberté, solidarité CGT의 역사. 행복, 자유, 연대』, Éditions de l’Atelier, Institut d’histoire sociale, Ivry-sur-Seine-Paris, 2016.
(5) Bernard Thibault, ‘Pour un syndicalisme crédible et efficace 믿음직하고 효과적인 노조운동을 위해’, <La Nouvelle Vie ouvrière>, Montreuil, 2002년 2월 8일.
(6) ‘Spécial 52e congrès, document d’orientation(52차 특별 대회, 안내서)’, <Le Peuple>, 특별호, n°1, 2019년 1월.
(7) Sophie Béroud와 Josette Lefèvre, ‘Vers une démocratie économique et sociale? Redéploiement et banalisation du discours syndical 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를 향해? 노조의 정치적 입장 재편성 및 보편화’, <Mots, les langages du politique>, n° 83, Lyon, 2007.
(8) Stéphane Sirot, ‘Démocratie sociale et dialogue social en France depuis 1945. Construction idéologique et politique d’une pratique sociale 1945년 이후 프랑스의 사회적 민주주의 그리고 사회적 대화. 사회적 습관의 이데올로기적·정치적 구축’, <Problématiques sociales et syndicales>(저자가 출판한 소책자), Mons-en-Barœul, 2017년 5월.
(9) CFDT, CGT, FO, CFE-CGC, CFTC UNSA 그리고 FSU 노조연합의 성명.
(10) 2017년 12월 31일 재무제표, 관보에서 확인 가능.
(11) Erwan Manac’h, ‘Philippe Martinez: “Nous devons réfléchir autrement” 필리프 마르티네스: 우리는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 <Politis>, Paris, 2019년 1월 30일.
(12) Danièle Linhart, ‘Hier solidaires, aujourd’hui concurrents 어제의 연대, 오늘의 경쟁‘,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06년 3월호.
(13) ‘Proposition de réflexions pour l’orientation du 52e congrès CGT CGT 52차 대회 방향에 대한 숙고 제안’, http://syndicollectif.fr
(14) Julian Mischi, ‘Comment un appareil s’éloigne de sa base 어떻게 한 기관이 자신의 본체에서 멀어지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5년 1월호.
(15) <Éléments de réflexions sur les enjeux et documents du 52e congrès confédéral de la CGT(쟁점들에 대한 성찰 요소들 그리고 CGT의 52차 연합대회 자료)>, www.fnic-cgt.fr
(16) 여론조사, 2018년 11월 Harris Interactive, 2019년 3월 19일 Odoxa.
(17) Jean-Luc Mélenchon, ‘Avoir le point ou pas 유리한 패를 가졌거나 아니거나’, L’Ère du peuple, 2017년 10월 31일, https://melenchon.f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