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면 다른 페미니즘이 있다
종종 아프리카·아시아·중동 여성들의 운명을 내비치는 ‘가족주의’ 프리즘은 이곳 여성들이 주도하는 투쟁을 은폐하는 경향이 있다. 이곳 여성들은 르완다와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인도와 모로코의 사례를 증언하며 새로운 권리를 쟁취하고 폭력이나 차별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
2010년은 프랑스의 여성해방운동(MLF) 40년을 맞이해 페미니즘 역사를 회고하고, 페미니즘 쇄신을 위해 투쟁과 헌신을 다한 개발도상국 여성들을 잊지 말자고 다짐한 해로 기억될 만하다. 이들은 기존의 질서와 불평등에 맞서 투쟁했지만, 우리는 너무 쉽게 이들의 희생을 잊어버린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이 의회 다수를 차지한 세계 유일국가가 르완다라는 사실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2008년 총선 이후, 이 나라에서는 여성이 국회의석의 56.3%를 차지했다. 이 기록은 유럽의 남녀 균등정치의 챔피언인 스칸디나비아 국가들까지 머쓱하게 만들었다. 르완다 여성들은 투표권을 1961년 독립과 함께 획득했다. 1965년 첫 당선자가 의회에 진출했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정치계에 입문한 여성은 거의 없었다. 이런 상황을 반전시킨 것이 1994년 후투족에 의해 투치족이 대량학살된 사건이었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맞선 단체, ‘국민연합’의 리더 이마퀼레 앵가비르는 여성의 정치진출에 다음과 같이 의미를 부여했다.
르완다엔 여성 의원이 더 많다
“많은 남성이 사망하거나 행동할 수 없는 처지에서, 여성이 소임을 맡아 남성 못지않은 능력을 보여줬다. 많은 여성이 강간을 당하는 등 고초를 겪었지만, 그래도 나라를 혼돈에서 구한 것은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전통적 남성 우월주의의 틀을 깼다.”
대량학살 이후, 르완다 가정의 1/3은 여성이 맡고 있다. 이들은 남성이 예전에 종사하던 직업, 특히 건설과 기계 부문은 물론 정당에도 대거 진출하고 있다. 여성 정치인들은 2001년 헌법 초안 작성에 참여해, 의사결정권을 가진 모든 기관의 인력 30%를 여성에게 할당하도록 한 여성할당제와 여성의 상속권 등을 도입했다. 또 이들은 여성 문제와 젠더 문제를 주관하는 여성가족부를 설립하고, 동네 지도자뿐 아니라 국가 최고 지위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진출을 지원하는 국가여성자문단을 가동했다. 그 결과, 여성들은 르완다 정부의 산업, 농업, 외무 및 에너지 장관직에 잇달아 진출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남은 과제가 있다. 중앙정부의 한 보고서에 의하면, 중앙부처 장차관의 74%, 국장의 81%, 전문가의 67%가 남성이다. 여성은 주로 행정보조나 비서로 일하고 있으며, 민간 부문에서도 비정규직이나 임금이 낮은 비공식 부문에 종사하고 있다. 여성이 기업에서 정규직으로 일하는 경우는 18%에 불과하다.(1) 여성이 폭력에 노출된 현실 또한 암울하다. 앵가비르는 “폭력문제를 해결하려는 정치적 의지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의식수준을 높이는 게 우선이다. 문화는 불변하는 것이 아니며, 사회 구성원 각자가 스스로 전통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르카를 쓰고 해방을 외치다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은 르완다보다 훨씬 열악하다. 하미드 카르자이 정권 치하에서 가정폭력, 살인, 강간, 테러 등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여성들은 침묵하지 않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2005년 27세 때 르완다 최연소 국회의원에 당선된 말라라이 조야가 이들을 대변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조야는 파키스탄 난민촌에서 유년기의 한때를 보내며 공부하고, 영어도 배웠다. 탈레반 정권 때, 고향 파라로 귀환한 그는 보건소와 여성을 위한 공부방을 몰래 운영해야 했다. 그는 정치에 입문한 뒤, 마약밀매 활동과 이슬람 전사들을 무조건 지원했던 군벌의 과거행적을 들춰내며, 그들에 대한 저격수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끊임없이 인권, 특히 여성인권을 무시하는 국가정책을 비판하고 있다.(2)
조야는 몇 차례 암살의 위험에서 벗어났다. 그를 노리는 주적은 반정부 운동과 회교 원리주의를 주도하는 정당들이다. 그는 수도 카불에서 남성 정치인들의 공격을 받았다. 2007년, 그는 “저들은 나 개인은 죽일 수 있을지 몰라도, 아프간 여성의 대변인으로서의 나는 죽일 수 없다. 나는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외쳤다.(3) 부르카를 쓴 여성들이 종종 파라, 잘라바드, 카불 등에서 그를 지지하는 피켓시위를 벌였다. 이후, 그는 한 TV 채널과의 인터뷰에서 아프간 의회를 ‘동물원’에 비유한 발언 때문에 의원직에서 제명 처분을 받았다.
아프간 주요 여성단체 중 하나인 네가르의 회장 수크리아 하이다는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이 2010년 1월 런던 강연 때 자신의 유화정책을 서방 열강에 소개한 이후 탈레반 정권의 복귀 가능성을 걱정하고 있다. 2010년 6월, 카르자이 대통령은 여세를 몰아, 아프간의 국민대의회, 로야 지르가 소속의 부족장과 시민사회 대표 등 1,600명을 소집했다. 탈레반 정권의 몰락 뒤 남녀평등 원칙을 쟁취하기 위해 2년 간 투쟁한 하이다는 헌법에서 남녀평등 조항이 삭제될까 우려한다.
인도의 경우는 다르다. 인도 정부는 남녀평등 원칙을 채택하고 젠더 개념을 헌법에 명시했다. 뉴델리에서 20여 년 간 출판사를 운영하며 여성문제 전문서적을 펴내고 있는 우르바시 부탈리아는 말했다. “현재 인도 여성들은 훌륭한 공공정책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5개년 계획에 따라 여성이 특별한 지위를 얻고 있다. 최근 인도 정부는 도로보수나 거리청소 등 공공시설에 투입된 극빈층, 특히 여성이 많은 일용직 노동자에 대한 최저임금제를 신설했다. 2005년 가정폭력에 대한 세계최고 수준의 법도 제정했다.”
이 법은 여성을 남편이나 아들뿐 아니라 시댁의 횡포로부터 보호해준다. 그러나, 신부들이 ‘지참금 살해’를 당하는 비극은 뿌리 뽑히지 않고 있다. 시댁의 끊임없는 지참금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해 살해당하는 여성의 수는 매년 약 2만5천 명에 달한다고 한다.(4) 1961년부터 법으로 금지했음에도, 지참금 관행은 1980년대 후반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또한 인도는 성비 상 4천만 명의 여성이 부족하다. 이런 수치는 남아선호 사상으로 여아가 뱃속에 있을 때 죽이는 관행과, 이미 태어난 딸의 존재를 무시하는 관행으로 인한 것이다.
반면, 정치무대에서는 인도 여성이 비교적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인도는 1992년부터 자치단체장 선거에 여성할당제를 도입했다. 부탈리아는 “이것이 지역에서 큰 변화를 일으켰다. 여성할당제가 성공을 거두자, 이와 유사한 시스템을 총선에 도입하는 것을 남성 정치인들이 거부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인도 여성의 정치적 성장과 시련
대부분 식민지나 보호령이던 개발도상국에서 현대 페미니즘을 주도하는 여성 선구자들은, 서구에서와 마찬가지로 친(親)마르크스 계층, 즉 피지배계층 출신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반식민지주의 독립투쟁을 통해 전투적인 자신들의 입지를 공고히 했다. 이집트에서는 1920년대, 후다 샤라비가 ‘이집트여성연합’을 창설해 민족투쟁에 나섰다. 그는 1929년 히잡을 쓰지 않은 채 카이로 기차역에 내려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몇 달 후, 많은 이집트 여성들이 영국의 위임통치에 반대해 같은 방식으로 시위를 했다.
카말라데비 차토파디야는 영국의 식민통치 하에서 여성운동과 민족운동을 주도했다. 특히 독립 전후로 간디, 네루와 함께 투쟁했다. 인류학자 마틴 반 위킨스는 차토파디야에 대해 “부와 교양을 갖춘 브라만 귀족이었는데, 민족주의자에 개혁주의자였다”고 회상한다.(5) 간디가 영국의 인도 통치에 반대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평화시위, 일명 ‘소금행진’을 벌일 때, 차토파디야는 간디에게 “여성도 시위에 참여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코란에서 급진적 메시지를 찾다
1980년대 이란에서 태동한, 종교색을 띤 여성운동은 현재 많은 논란이 되고 있다. 열렬한 정교분리 신봉자들은 “이슬람 원리주의 정치에 여성운동이 이용되고 있다”고 규탄한다. 하지만 조지타운 아메리칸대학 ‘무슬림과 기독교인 간의 이해를 위한 연구소’의 연구원 마르고 바드랑은 “이슬람 페미니즘은 이슬람 내부의 변화에 불을 지피고 있다. 개혁이 아닌 변화의 불길이다. 페미니스트는 가부장적인 사고와 관습을 뜯어고치겠다는 것이 아니라, 코란 깊숙이 묻혀 있는 남녀평등과 사회정의의 메시지를 찾아내고, 급진적 변혁을 통해 이 메시지를 따르려는 것”이라고 말했다.(6) 이런 페미니즘 운동은 중산층 여성이 고등교육을 받고 가정을 떠나 일터로 나가던 1980년대부터 부각됐다. 이와 동시에 무슬림 신학자들은 미국에서 창안된 젠더 개념을 코란 텍스트 연구에 참고했다.
바드랑의 말처럼, 2005년 경 사고의 독립을 한층 확고히 한 ‘학식을 갖춘 여성투사들’은 신성한 이슬람 관행과 율법을 만든 것은 인간과 역사이므로, 이에 맞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이슬람의 틀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이들은 다국적 네트워크를 구축해 자신들의 각성을 실행에 옮겼다. 바드랑은 이슬람 문화 속에서 정교분리를 주장하는 페미니즘과 이슬람 페미니즘이 연대하는 것은 “무엇보다 (페미니즘) 공동체의 목표, 남성우월주의를 극복하고 이슬람 평등주의, 특히 가정에 이슬람 평등주의를 실현하려는 열망 때문”이라고 말한다.(7)
낙태문제도 페미니즘 운동의 중요한 이슈다. 여성문제 연구가 수아드 에두아다는 “낙태를 주제로 한 공개토론이 시작됐다”며, “이슬람이 여성의 존엄성을 옹호한다는 명목 하에 일부 아랍국가에서는 낙태의 합법화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아라비아반도에서도 비종교단체와 종교단체의 동맹이 여성의 투표권(2002년과 2005년 바레인과 쿠웨이트에서 여성 투표권 획득)을 쟁취했다.
카미유 사레| 언론인
환경과 여성에 관심이 많으며, 기사작성을 비롯해 다큐멘터리 및 인터뷰 등 다양한 방식으로 언론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의 활동상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를 비롯해 <TV5Monde>, <Rue 89>, <RFI>에서 자주 볼 수 있다.
번역 | 조은섭 chosub@ilemonde.com
파리7대학 불문학 박사. 주요 역서로 <착각>(2004) 등이 있다.
(1) 르완다 ‘공공 서비스와 노동부’, <젠더와 노동 시장> 보고서, 2008년 1월 참조.
(2) 카롤 만, <말라라이 조야와 진실의 용기>, 웹사이트 Sisyphe.org, 2007년 11월 18일 참조.
(3) ‘Afghanistan approves amnesty for warlords’, <Guardian Unlimited>, 2007년 2월 1일.
(4) 스테파니 타와 라마레왈, <인도의 여성들>, Rayonnement du CNRS, n°47, 2008년 3월호.
(5) 마틴 반 위킨스, <우리는 꽃이 아니다: 2세기에 걸친 인도의 페미니스트 투쟁>, Albin Michel, 파리, p.95, 2010.
(6) 마르고 바드랑, ‘이슬람 페미니즘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Critique internationale>, ‘오늘날 이슬람 페미니즘’, <Les Presses de Sciences Po>, n°46, 2010년 1~3월호, p.25.
(7) Ibid., p.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