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의 아버지’ 이름으로
코트디부아르, 세 의형제의 난

2011-01-07     블라디미르 카뇰라리

로랑 그바그보의 측근인 파스칼 아피 응구에산 전 총리는 2010년 12월 14일 방송 <프랑스 24>에 나와 “조금만 시간을 갖고 기다리면 국제사회의 반발도 잦아들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로랑 그바그보는 범아프리카 기구 및 유엔으로부터 대선 승리를 인정받은 상대 후보에게 대통령직 이양을 거부하고 있다. 힘겨루기의 원인은 ‘독립의 아버지’인 펠릭스 우푸에부아니의 승계 실패에서 찾아볼 수 있다.

 “코트디부아르를 거닐다 보면 펠릭스 우푸에부아니나 로랑 그바그보를 기념하는 건축물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다른 정치인을 기념하는 건물은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다.”(1) 대통령 선거 1차 투표를 앞둔 2010년 10월 4일, 로랑 그바그보 대통령이 기세등등하게 정적 앙리 코낭 베디에와 알라산 와타라를 향해 말했다. 저마다 코트디부아르 ‘독립의 아버지’ 우푸에부아니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정치인들이다. <<원문 보기>>

1993년, 33년간 장기 집권한 우푸에부아니가 서거한 뒤 후계자에 의한 권력승계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지난 17년간 코트디부아르에는 정정 불안이 반복되고 있다. 그바그보·베디에·와타라는 때로는 연합전선, 때로는 적대관계를 형성하며 끊임없이 지형이 변화하는 코트디부아르의 정치판을 무대로 수십 년을 함께했다. 격동의 정치사는 서아프리카 경제 강국 코트디부아르를 파탄에 빠뜨렸다.

초대 대통령의 후계자감으로는 세 명의 정치인이 거론된다. 우선 1934년생인 베디에가 ‘적통’ 후계자로 통한다. 자신의 정치적 성장을 이끌어준 스승 우푸에부아니와 마찬가지로 바울레족 출신이다. 프랑스 유학파인 그는 1960년 코트디부아르가 독립한 뒤 미국과 유엔의 초대 대사로 발탁됐다. 하지만 대중은 그를 11년 동안 재직했던 재정부 장관으로 더 잘 기억한다. ‘코트디부아르 기적’의 시대였다. 카카오 수출에 힘입어 자본이 넘쳐났다. 베디에 장관도 이 기회를 잘 활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결국 베디에의 부정부패 사건이 터지고, 우푸에부아니는 그를 장관직에서 해임한다. 하지만 3년 뒤 우푸에부아니는 또다시 베디에를 국회의장에 앉힌다. 일당(코트디부아르 민주당(PDCI)) 체제 시절 국회는 그저 형식적 기관에 불과했다. 하지만 국회의장은 대통령이 공석일 경우 헌법에 따라 대통령직의 잔여 임기를 승계하는 자리다. 사실상 베디에는 대통령 승계에서 가장 우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충분히 대통령직을 꿈꿔볼 만하다.

하지만 어느 날 불쑥 후계 체제에 새로운 침입자가 끼어든다. 구조조정정책(SAP·Structural Adjustment Program)(2)을 배경으로, 우푸에부아니와 국제통화기금(IMF) 사이에 정략결혼이 성사되면서 탄생한 서자 와타라였다. 여기서 와타라는 ‘가장 빼어난 아들’ 역을 맡는다. 1941년 코트디부아르에서 태어난 그는 오트볼타(현재의 부르키나파소)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미국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국제통화기금(IMF) 부총재로 발탁됐다. 우푸에부아니 대통령이 와타라를 총리로 임용한 1990년, 코트디부아르는 파탄에 직면한다. 카카오 가격이 추락하고, 국가부채가 급증했으며, 기력이 쇠한 ‘어르신’(당시 국민 사이에서 우푸에부아니를 칭하던 별명)은 다당 체제로 정치를 개방해야 하는 어려운 숙제를 떠안고 있었다. 당시 관료 출신의 ‘친미주의자’ 와타라에게는 정치적 암투나 궁중의 음모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다. 사실 권력승계에 욕심을 가진 다른 후계자들은 별로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와타라를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와타라는 위협적인 존재가 된다. 병환으로 프랑스와 스위스 등지에서 요양치료를 받던 ‘어르신’이, 대통령직이 공석일 경우 총리가 정권을 이임하도록 헌법을 개정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바그보, 베디에, 와타라의 각축

자유주의 이력을 밟아온 와타라는 당연히 공공재정 축소와 민영화에 착수한다. 각 부처의 예산 낭비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도 팔을 걷어붙인다. 새롭게 부과되는 세금에 납세자들의 원성이 자자했지만 와타라는 조세제도 개혁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국민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던 와타라는 몇몇 고위 관료가 누리던 넉넉한 연금까지 위협한다. 일찌감치 그에게는 진정한 코트디부아르인이 아니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후계자들은 그동안 막후에서만 치열하게 경쟁을 벌였다. 하지만 1993년 12월 7일을 기점으로 권력쟁탈전이 노골화된다. 이날 와타라는 황급히 라디오 방송에 나와 대통령 서거를 발표했다. 베디에는 TV를 통해 본인이 헌법에 의거해 대통령의 잔여 임기를 승계한다고 발표했다. 다음날 와타라는 프랑스 <AFP>를 통해 자신은 결코 사임할 뜻이 없다고 밝힌다. 하지만 국제사회와 특히 프랑스의 거센 압력에 못 이겨, 결국 와타라는 임시 대통령직을 사임한다. 하지만 국정 마비 사태는 다음에 찾아올 더 심각한 위기를 예고하는 서막에 불과했다.

와타라는 다시 IMF로 돌아가고, 1995년 선거전을 준비한다. 하지만 때마침 베디에가 ‘순수 혈통의 코트디부아르인’이란 개념을 들고 나오면서 와타라의 대선 출마가 또다시 좌절된다.(3) 자유주의 성향의 전직 총리 와타라가 사회당 소속의 그바그보와 손을 잡은 것은 바로 이 무렵이다. 그바그보는 1988년 감히 코트디부아르 독립의 아버지에게 도전장을 내밀고 대선에 출마해 우푸에부아니를 상대로 18%에 달하는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일약 스타가 된 인물이었다. 그런데 와타라와 그의 새로운 정치 동지 그바그보는 정권의 방해 공작이 계속되자 선거 보이콧으로 대응한다. 결국 베디에가 96.44%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대선에서 승리한다. 그 뒤 정적 관계에 있던 같은 당 출신의 베디에와 와타라는 제3의 인물인 그바그보를 경계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역사학 교수 출신인 그바그보는 일종의 ‘반항하는 아들’이라 볼 수 있다. 1945년 가그노아에서 태어난 그는 노동운동가로 활약하다 정계에 입문했다. 코트디부아르 민주당(PDCI)이 대학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 반대하다 여러 차례 감옥 신세를 지기도 했다. (정신교육을 이유로 1971~73년 군대 생활을 하기 전인) 1969년, 그리고 1992년에 각각 투옥됐는데, 1992년에는 우푸에부아니의 충복 와타라 총리가 투옥을 주도했다. 1982년 그바그보는 비밀리에 코트디부아르 인민전선(FPI)를 창당하고, ‘사회주의인터내셔널’에 가입한다. 파리로 망명한 그바그보는 자신을 따뜻하게 환대해준 프랑스 사회당 의원들과 오래도록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하지만 아프리카 식민제국의 수호자를 자처한 우푸에부아니를 의식한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은 그바그보와의 만남을 끝내 거절한다.

1990년대 초 다당제가 실시되면서 그바그보는 공식적인 야당 행보에 나선다. 독립의 아버지가 농촌 표심을 얻기에 몰두하는 동안, 그바그보는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가난한 도시 소시민을 공략한다. 사회에서 소외된 청년과 학생들은 ‘우푸에 시대’로부터 역사의 페이지를 넘기기를 염원했다. 그바그보는 코트디부아르학생연맹(FESCI)을 창설했다. 훗날 그바그보의 정치적 지위 상승에 중요한 구실을 한 단체였다. 1995년 FESCI의 사무총장에 기욤 소로가 내정됐다. 소로는 훗날 반군운동(2006년)을 이끄는 인물로, 2007년에는 와가두구 평화협정에 의해 그바그보의 총리로, 2010년 부정선거 이후에는 와타라의 총리로 임명된다.

외세와 민족감정, 매력적인 카드

총애를 받는 아들 베디에, 특출한 기량을 뽐내는 아들 와타라, 그리고 반항하는 아들 그바그보, 이렇게 우푸에부아니가 남긴 세 형제가 경쟁 구도를 형성한다. 하지만 1999년 12월 24일 대권 경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청년 장병들이 일으킨 쿠데타로 베디에가 실권한 것이다. 이에 로베르 게이 장군이 정권을 잡아, 국민의 지탄을 받아온 부패 정권을 종식한다. 이로써 코트디부아르 민주당(PDCI)의 시대가 저문다.

불충한 후계자 베디에는 ‘순수 혈통의 코트디부아르인’이란 개념을 만들어낸다. 이로써 우푸에부아니 대통령이 그토록 오랫동안 해결하기를 바랐던 사회분열을 더욱 심화한다. 사실상 독립의 아버지는 최대한 형평성을 고려해 인구 비례에 맞춰 다양한 인종에게 두루 권력의 요직을 분배했다. 1994년까지는 ‘코트디부아르의 기적’을 일구는 데 일조한 300~400명의 외국인에게도 투표권을 주었고, 이들은 우푸에부아니에게 표를 던졌다.(4)

게이는 ‘순수 혈통의 코트디부아르인’에 관한 법률을 철폐할 뜻을 내비쳤다가 이를 철회하고 2000년 대선에 출마한다. 물론 대선전에서 주요 정적을 밀어내기 위해 온갖 공작을 서슴지 않았다. 선거운동 기간에 코트디부아르의 아버지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국민은 40년을 장기 집권한 PDCI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주기를 열망했다. 한편, 전 정권 출신의 두 정적 베디에와 와타라가 대선에 출마하지 못하게 된 것에는 북부 주민을 제외하고는 대다수 국민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순수 혈통의 코트디부아르인’이란 독이 조금씩 코트디부아르를 적셔왔다. 결국 코트디부아르는 회생 불가능한 수준까지 이르렀다. 정치적 분열은 인종 분열로 치달았다. 부르키나파소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와타라의 대선 출마를 금지한 사건은 전체 유권자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북부 지역 유권자가 정부에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됐다. 결국 대선전에는 그바그보와 게이 장군만 후보로 나와 격돌했다. 2000년 10월 22일 대선 다음날 패배를 확신한 게이 장군이 개표를 전면 중단시킨다. 그는 선거관리위원회 위원들을 체포하는 한편 <프랑스 국제 라디오>(RTI) 방송에 나와 자신이 대선에서 승리했다고 선언한다.

북부 주민 체계적 배제, 그리고 내전

그해 10월 24일 그바그보는 국제 미디어, 그 가운데서도 <RFI>를 통해 지지자들에게 거리시위를 호소한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내가 바로 코트디부아르의 대통령”이라고 선언했다. 그바그보 지지자들은 여전히 게이 장군에게 충성하는 장병들에 맞서 <RTI>로 향했다. 거리시위에 나섰던 와타라의 지지자들(이들도 재선거를 요구했다) 역시 헌병의 지원을 받은 게이 장군의 군인들에게 무차별적 진압을 당한다.

하지만 결국 게이 장군이 밀리고, 선거관리위원회가 그바그보의 대선 승리를 선언한다. 득표율은 60%에 이르렀지만 투표 참여율은 37%로 저조했다. 대선 후폭풍으로 무려 300여 명이 숨졌다. 프랑스는 다른 나라들보다 먼저 사회당 소속 대학교수 그바그보의 대통령 당선을 인정한다. 그리고 몇 주 뒤 코트디부아르와 1999년 겨울 쿠데타 사태로 전면 중단됐던 협력관계를 재개한다.

지난해 12월 발생한 대선 뒤 정국 혼란 사태는 2000년 선거 때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다만, 각자의 입장이 바뀌었을 뿐이다. 2010년 사태 때 온갖 방법을 동원해 선거관리위원회를 폐쇄하고, <RTI> 방송을 홍보 수단으로 이용해 대통령 수락 연설을 전파한 사람이 그바그보였다. 또 <RFI> 방송(및 기타 해외 언론)을 통해 자신의 대선 승리를 선언하고, 지지자들에게 권력 쟁취를 위해 거리시위에 나서도록 호소한 사람은 다름 아닌 와타라였다. 코트디부아르는 또다시 와타라에 의해 정정 불안의 소용돌이로 휩쓸릴 위기에 처한다. 2002년 9월 소로가 주축이 돼 일어난 반군 저항과 국토 분단 사태도 와타라의 출마 금지 조치로 대표되는, 북부 지역의 오랜 정치적 소외가 불러온 결과였다.

하지만 내전(2000~2006년)과 철권통치로 회복된 평화(5)는 우푸에부아니의 망령을 되살렸다. 카카오 수출에 의한 경제적 번영을 기반으로 한 우푸에부아니의 시대는 평화와 풍요를 의미했다. 국민은 이 ‘잃어버린 낙원’에 진한 향수를 느꼈다. 언제나 TV 방송을 시작하기 전 “진정한 행복은 지나간 뒤에야 깨닫게 된다”고 말하던 ‘어르신’을 떠올릴 때마다 ‘실낙원’의 의미가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다. 물론 국민은 이미 1993년 이전부터 코트디부아르의 경제적·사회적 상황이 악화됐고, 특히 구조조정프로그램(SAP)과 IMF, 세계은행이 부과한 자유주의 처방이 파탄의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너무 빨리 잊어버렸다. 1993년 이후 코트디부아르에 하루도 볕 들 날이 없었다. 게다가 계속되는 권력쟁탈전에 지친 국민은 이제 평화를 갈망했다. 세 명의 ‘아들들’도 이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화합보다는 분열을 조장하는 정치를 펴왔다.

권력에서 밀려난 베디에와 대선참여권을 박탈당한 와타라는 PDCI의 부활을 예고하며 2005년 5월부터 연합전선을 형성했다. 이들은 새롭게 탄생한 연합당에 ‘우푸에니스트진보민주연합’(RHDP)이라는 이름까지 붙였다. 하지만 연합당의 탄생을 단순히 전략적 연합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는 또한 우푸에부아니가 권력 지지 기반으로 삼았던 바울레족과 북부 지역 인종(세누포족·말린케족·디울라족) 사이의 결집을 의미한다. 두 인종은 모두 합해 국민의 다수를 차지한다.

너도나도 우푸에 이름 팔기

이들과는 달리 그바그보는 외세, 특히 프랑스의 간섭에 맞선 코트디부아르의 주권 수호자를 자처한다. 2001년부터 그바그보는 옛 식민제국의 기업들에 계약 재협상을 요구하며 위협하고 있다. 이 기업들은 과거 우푸에부아니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코트디부아르에서 특혜를 누려왔다. 하지만 그바그보도 최대한 더 많은 표를 끌어모으기 위해서는 코트디부아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민족인 바올레족의 지지를 이끌어낼 필요가 있다. 우푸에부아니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우푸에부아니를 선택한 것은 물론 그가 가장 인기 있는 전직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국가 통합을 상징하는 인물이라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그 결과 그바그보도 다른 출마자들과 마찬가지로 온갖 방법을 동원해 ‘어르신’의 후계자임을 자처하기에 바쁘다. 여러 해 우푸에부아니의 독재와 정치에 반기를 들어오고서도 말이다.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2010년 그가 유일한 우푸에부아니의 합당한 후계자로 대선에 출마하는 것이었다.

그 일환으로 그바그보는 우푸에부아니가 그토록 갈망하던 대로, 코트디부아르의 수도를 ‘건국의 아버지’ 고향인 야마수크로로 천도하기 위한 공사를 재개했다. 이미 우푸에부아니는 마을 한복판에 으리으리한 대성당 축조를 계획한 바 있다. 공사는 건축가 피에르 파쿠리에게 맡겼다. 이제 그에게는 대통령궁 신축과 대도시 도로 보수공사, 아비장의 우푸에부아니 기념관 건설까지 추가로 주어졌다. 게다가 이미 건설된 우푸에부아니와 샤를 드골 다리에 이어 ‘로랑 그바그보’교의 건설까지 담당해야 한다. 그바그보는 또 미망인 테레즈 부아니의 지지를 얻기 위해 그녀가 남편과 함께 살던 저택을 매입했다. 얼마 못 가 부아니가 카지노에서 몽땅 날려버렸지만 말이다.

2010년 코트디부아르 정치의 삼각구도를 형성하는 세 명의 정치인 베디에·와타라·그바그보가 대선전에 돌입했다. 어쩌면 우푸에부아니 승계를 향한 마지막 결전이 될지 모른다. 그런데 문득 말이나 이미지 말고 ‘어르신’이 이들에게 실제로 남긴 것은 과연 무엇인가 자문하게 된다.

우여곡절 대선, 다시 내전 위기

베디에가 실제 스승에게 물려받은 유산이라곤 인종에 의거한 정치 기반밖에 없다. 카리스마가 전혀 없는 그는 두말할 것 없이 코트디부아르에서 가장 미움을 받는 대통령 가운데 한 명이다. 임기 말 사람들은 그를 ‘주정뱅이’(N’Zueba)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하지만 2000년 10월 부정선거에 의한 정국 불안 사태 이후 10년이 지난 지금, 베디에는 PDCI 당원이 보기에 ‘어르신’ 곁을 가장 오랫동안 보좌한, 부아니 승계에 가장 적합한 인물로 비친다. 중상모략자들에 의해 ‘외국인’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와타라는, 외국인이라는 지위가 우푸에부아니가 코트디부아르에 부과했던 ‘범아프리카주의’의 사명을 환기시킨다. 하지만 우푸에부아니는 경쟁자인 가나의 콰메 은크루마와는 달리 국내 차원에만 머물렀을 뿐, 국제적인 범아프리카주의에는 이르지 못했다.

한편, 그바그보의 위상은 다소 모호하다. ‘어르신’께서 인생 말년에 그바그보에게 “맙소사, 자넨 정말 나를 많이도 닮았구먼”이라고 말했다는 것이 사실일는지 모른다. 게다가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다. 그바그보는 인종적 지정학을 가장 잘 활용한 인물이다. 이는 그가 그토록 비난했던 일당 체제의 한 특징이기도 하다. 우푸에부아니와 마찬가지로 그바그보도 동년배 정치인 중에 가장 수가 밝다. 그래서 그는 사회주의자라기보다는 실용주의자에 가깝다. 독립의 아버지처럼 그도 ‘국가 단결’을 외칠 줄 알았지만, 때에 따라서는 ‘부족장’으로 행동하는 것도 꺼리지 않았다. 그래서 코트디부아르가 일부다처제를 금지함에도 그바그보는 북부 지역 출신 나디 밤바와 (그것도 전통혼례로) 결혼했다. 물론 유권자를 의식한 정치적 목적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2010년 그바그보의 둘째부인은 특히 북부 민족을 상대로 그바그보의 홍보대사 역할을 톡톡히 했다. 또한 그바그보는 북부 주요 도시 코르호고를 세운 곤 쿨리발리 세도가의 일원인 이싸 말리크 쿨리발리를 자신의 자문관으로 영입했다. 곤 쿨리발리는 우푸에부아니와도 교분이 두터운 인물이다.

정치 노선에서 두 사람을 비교하는 것은 이 정도까지다. 한편, 우푸에부아니는 식민지 시절 강제노역 철폐의 주역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프랑사프리카’(Francafrique·프랑스와 아프리카의 합성어)라는 표현도 만들어냈다. 우푸에부아니는 프랑사프리카를 긍정적 의미로 인식했다. 프랑사프리카란 곧 자유 코트디부아르와 프랑스의 이로운 관계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바그보에게 프랑사프리카는 외세 간섭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그바그보는 프랑스에 대한 의존적 관계를 종식시키겠다고 다짐한다. 우푸에부아니는 샤를 드골에서 자크 시라크에 이르기까지 여러 프랑스 대통령들과 평생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반면 ‘아버지의 프랑사프리카’를 맹렬히 비난하는 후계자 그바그보는 ‘제2의 독립’(7)을 부르짖는다.

프랑스와의 단절은 정치적 과시를 넘어 그저 단순히 하나의 변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바그보는 2003년 아비장 자치항 사업권을 뱅상 볼로레에게 넘겨주었다. 심지어 볼레로는 코트디부아르로부터 국가 훈장까지 받았다. 이런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프랑사프리카를 담당하는 핵심 참모 자크 포카르의 제자이자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의 비공식 자문관인 로베르 부르기와 그바그보의 관계는 또 어찌 설명해야 할까? 2010년 대선 2차 투표 이후 청소년부 장관에 지명된 그바그보의 심복 샤를 블레 구데가 프랑스의 오랑주 그룹이 후원하는 음악 페스티벌을 주최한 것은 어떠한가? 마지막으로, 그바그보가 2002년 반군 저지를 위해 1961년 방어조약 이행을 촉구하며 도움의 손길을 요구한 것은 다름 아닌 프랑스였다. 그바그보의 나라 코트디부아르는 분명 프랑사프리카 국가임이 분명하다. 과거 정치적 관계가 그랬고, 지금은 민간기업과의 관계가 그러하다.

혹 그바그보는 ‘만년 반체제 인사 신드롬’의 희생자는 아닐까? 오래도록 비민주적 방식에 의해 권력의 중심에서 소외됐던 그바그보는 마치 보상 심리가 발동한 듯 더욱 악착같이 권력에 집착한다. 한편, 지지자들은 내전(2002~2006년)으로 그바그보의 대규모 개혁은 물 건너갔다고 말한다.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도 코트디부아르와 공공연히 거리를 두려 한다. 괜히 나섰다가 코트디부아르 내 프랑스 국민과 기업에 부정적 영향이 미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어쩌면 그바그보는 측근들에게 “시라크 대통령이 퇴임한 뒤로는 두 다리 쭉 뻗고 편히 잠을 잔다”고 털어놓았을지 모른다. 게다가 2010년 말 프랑스 대통령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방침을 무조건 찬성하는 게 아니라는 신중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렇다고 프랑스가 그바그보를 지지하는 ‘애국주의자’들로부터 비난의 표적이 되는 일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조국의 참담한 정치 상황에도 불구하고 코트디부아르 국민이 ‘어르신’에게 물려받은 유일한 가치가 있다면 바로 국민 통합과, 더 나아가 국토 통일에 대한 깊은 염원일 것이다. 우푸에부아니의 저주받은 세 아들도 여전히 이에는 동감하지 않을까?

글•블라디미르 카뇰라리 Vladimir Cagnolari
저널리스트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각주>
(1) www.ladepechedabidjan.net.
(2) 국제 금융기관의 주도 아래 실시된 구조조정프로그램에 따라 코트디부아르는 민영화, 자유무역, 공공서비스 축소 등을 시행했다.
(3) 코트디부아르 출신만 선거에 출마하거나 투표에 참여할 수 있게 국가 정체성을 제한한 개념.
(4) 베디에는 1994년 외국인 투표권을 폐지했고, 그바그보는 1990년부터 ‘어르신’을 추종하는 ‘가축처럼 우둔한 유권자 집단’을 비난했다.
(5) www.gbagbo.ci.
(6) 부르키나파소의 주도로 성사된 평화협정에 따라 정치적 이행이 이뤄졌다. 이에 따라 소로가 그바그보의 총리로 임명됐다.
(7) 그바그보의 정당지 <우리의 길>에 게재된 ‘우푸에의 재능, 그바그보의 천재성’이란 제목의 기사, 아비장, 2009년 11월 4일.
(8) 안세실 로베르, ‘제2의 독립에 대한 염원’, <마니에르 드부아>, 제108호, 2009년 12월 ~ 2010년 1월.


[박스 기사]  8년간의 위기 

2002년 9월 19일
부르키나파소로 망명한 코트디부아르 군인들이 코트디부아르 북부를 점령한다. 하지만 수도 아비장을 점령하는 데는 실패한다. 코트디부아르는 두 지역으로 나뉜다.

2002년 9월 22일
프랑스는 자국민 탈출을 위한 ‘리코른’ 작전을 실시한다. 코트디부아르 사태 중재에도 나선다.

2002년 9월 23일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CADEAO)가 평화유지군을 창설한다.

2003년 1월 26일
권력 분담을 명시한 마르쿠시스 협정(파리)이 체결된다.

2004년 2월 27일
코트디부아르 유엔 평화유지군(ONUCI)이 결성된다.

2004년 10월 11일
시위대가 코트디부아르 ONUCI를 공격한다. 이 사고로 부상자가 속출한다.

2004년 11월 6일
코트디부아르 정부군(FANCI)이 부아케 프랑스 기지를 폭격해 9명이 죽고 37명이 다친다. 프랑스는 보복 조치로 코트디부아르 공군을 공격한다. 다음날 프랑스군이 아비장 이부아르 호텔 앞에서 시위 중이던 시위대를 향해 총을 발사하고, 이 사건으로 수십 명이 사망한다.

2007년 3월 4일
와가두구 평화협정(부르키나파소)이 체결된다. 반군 지도자 기욤 소로가 과도정부 수장에 임명된다.

2009년 11월 29일
대선이 예정됐지만 연기된다.

2010년 10월 31일
대선 1차 투표에서 알라산 와타라와 로랑 그바그보가 접전을 벌이고, 앙리 코낭 베디에는 와타라를 위해 기권한다.

2010년 12월 2일
선거관리위원회가 와타라의 11월 28일 대선 1차 투표 승리를 발표한다.

2010년 12월 3일
헌법재판소가 여러 북부 지역(부아케·코로고·페르크세두구·카티올라·분디알리·다바칼라·세구엘라) 표를 무효화하고 그바그보의 승리를 선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