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인스는 프랑스를 외면하고 독일편을 들었다

베르사유 조약 100주년의 회고

2019-08-01     알랭 가리구·장폴 기샤르 l 명예교수

베르사유 조약은 세계질서를 개편해 제1차 세계대전을 종결짓고자, 1919년 6월 28일에 체결된 조약이다. 1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고, 패전국 독일의 배상을 다룬 베르사유 조약은 훗날 나치즘의 부상에 일조했다. 한편 조약의 구체적인 구상 과정은 종종 등한시되는데,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를 비롯한 일부 핵심 인물의 역할이 특히 그렇다. 

 

2019년에 이르러 우리는 이 조약의 백 주년을 기념할 수 있을까? 아마 어려울 것이다. 베르사유 조약의 허점을 지적한다면 모를까 말이다. 베르사유 조약 전문은 전쟁의 종결이 불러일으킨 희망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다. 패자들에게는 불공정한 조약이라고 비난받았고, 승자들 사이에서는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실패했다. 

세간에서는 베르사유 조약이 국제질서의 안정을 도모하는 데 실패했다고 비난했다. 무엇보다 “독일에 너무 가혹한 처사를 강요함으로써 나치즘이 부상하는 데 일조했고, 그리하여 결국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됐다”고 말이다. 심지어 일부 역사학자들은 진정한 의미의 세계대전은 2차 대전이 유일했다고 주장할 정도다. 그렇게 비난받은 이후, 베르사유 조약이 이룩한 평화는 잊히고 말았다. 

1919년 6월, 바이마르 공화국은 울며 겨자 먹기로 베르사유 조약의 조인을 결심해야 했다. 조인은 하되 그것을 실행에 옮길 생각은 없이 말이다.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의 231 조항, 즉 ‘전쟁에 관한 유죄조항’을 경제적이며 정신적인 이중 형벌이라고 봤다. 이 조항은 전쟁의 책임이 온전히 독일에 있음을 명시한 만큼,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지불할 당위성의 근거가 됐다.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오늘날까지도 반복 인용되는 『평화의 경제적 결과』(1919년 출간)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좌절된 평화’라는 개념을 통해 독일의 입장을 지지했다.

케인스는 영국 자유당 당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가 총리로 재직할 당시 자유당 소속이었으며, 파리 강화회의에 재무성 수석대표로 참석했다. 일부 협상에서 매우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던 케인스는 전쟁배상금의 액수나 독일의 물자보급, 영토 문제에 관해 본인의 견해를 주저 없이 밝혔다. 반면 알자스 지방을 프랑스에 돌려주는 문제에 관해서는 유보적인 태도를 고수해 프랑스 대표단을 충격에 빠뜨렸다. 클레망소 총리의 오른팔인 프랑스 외교관 앙드레 타르디외를 기준으로 보면, 협상에 임하는 케인스의 생각은 패전국의 입장에 가까웠다. 

타르디외의 표현을 빌리자면 케인스는 독일의 논거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1) 그대로 인용했을 정도였다.

케인스, 이 고지식한 외교관은 대체 어떤 인물인가?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영향력 있는 교수 아버지, 그리고 역시 명망 높은 대학교수이자 후일 시장으로 선출된, 그리고『더 이코노믹 저널』의 편집자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영국 엘리트주의의 산물이었다. ‘케임브리지 대화회’나 킹스컬리지의 ‘사도회’, 블룸스버리 그룹 같은 배타적 모임의 회원으로서 작가 리튼 스트레이치, 화가 던컨 그랜트, 바네사 벨, 버지니아 울프 같은 지성인들과 친분이 있었다. 케인스는 언제나 명망 높은 지성인들, 영향력 있는 가문 사람들, 유력자들에 둘러싸여 지냈다. 케인스가 대학을 졸업한 후 (학계가 아닌) 재무성 관료가 됐다는 소식에 친구들이 경악했을 정도였다.

베르사유 조약 협상 당시, 케인스는 고전적이며 지식인다운 신념을 피력했다. 친구이자 후일 노벨평화상을 받은 경제학자 노먼 에인절에게서 영향을 받은 케인스의 평화주의에 대한 환상을 1차 대전은 산산이 조각냈다. 에인절은 1910년 큰 성공을 거둔 평론 『거대한 환상』에서 경제적 의존이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1차 세계대전은 경제적 문제에서 직접적으로 기인한 것이 아니며, 빌헬름 시대(1890~1914)의 독일 상황도 경제 위기와는 무관했다.

케인스는 프로이센식의 군사적 계급주의, 제국주의적 야망에 취한 지식인 계급, 그리고 산업계가 이끄는 독일 경제에 매혹됐다. 평화주의자인 동시에 친독주의자라니, 독일을 상대로 전쟁 중인 정부의 공무원으로서는 매우 기이한 성향이다. 

1차 대전이 벌어지는 동안 그는 영국의 중립 및 강화조약을 지지하는 논문을 ‘Siela’라는 필명으로 발표했다. 1916년에는 군 징집이 영국의 생산성을 저해할 것이라며 반대했고, 자신은 국무를 수행한다는 이유로 징집을 면제받았다.

 

‘프랑스 출신 농부’가 된 페르디낭 포슈 장군

파리 강화회의에서 케인스는 독일에 관대한 평화조약을 지지했다. 그는 유럽에 다시금 번영을 가져다줄 강국은 독일이 유일하다고 봤던 것이다. 반면 프랑스가 고수한 입장에 대해서는 적개심을 보였는데, 이는 그의 강력한 반(反) 프랑스적 정서에 기인한 것이었다. 대외정책에 관한 케인스의 견해는 반유대주의에 가까웠으며, 영국 귀족계급 사이에 널리 퍼진 ‘인종적 위계주의’와 맥을 같이했다. 

케인스는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기 위해 영국 외교의 독특한 입장을 이용했다. 영국의 외교는 해외에 대해서는 제국주의적, 유럽에 대해서는 중립주의적 노선을 지키는 한편, 전통적으로는 어느 한 대륙 국가가 패권을 쥐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열강들 간의 힘의 균형을 맞추는 데 염두를 둬왔다. 전자의 태도가 아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1914년에는 이 (힘의 균형을 도모하는) 후자의 입장이 완벽한 우위를 점했다. 영국은 1918년 1차 대전에서 승리를 거뒀음에도, 평화협정 시 독일을 상대로 ‘가혹한’ 배상을 요구하는 데 반대했다. 이는 가혹한 평화협정이 이뤄질 경우 프랑스가 최강국이 될 것을 우려한 데 따른 것이었다. 

베르사유 조약의 조인으로부터 며칠 후인 1919년 6월 9일, 케인스는 (영국의 입장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최종 협정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히며 사의를 표명했다. 그의 결정은 개인적 신념보다는 국가에 대한 충성 의무가 우선시되는, ‘고위 공직자’라는 영국의 귀족적 지위를 보여준다. 한편 독일 측에서는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반대 의사가 외무장관 울리히 폰 브로크도르프란차우 외무장관과 고문관 카를 멜히어의 사임으로 표출됐다. 케인스는 이 멜히어와 친근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멜히어가 은행가로 돌아간 것과는 달리 그는 여전히 물러서지 않았다. “진실을 말하기 위해 정부 고관의 지위를 희생했다”(2)고 주장하던 케인스는 1919년 말 『평화의 경제적 결과』라는 저서를 출간함으로써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경제적 분석서라기보다는 풍자문 혹은 에세이에 가까운 이 책에는, 베르사유 조약 조항들에 관한 비판 및 관련 인물들에 대한 묘사와 일화가 섞여 있다. 케인스는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 클레망소 프랑스 총리, 로이드 조지 총리 같은 대표단 수장들을 처참할 정도로 묘사했다. 예컨대 우드로 윌슨에 관해서는 한때 대학교수로 재직했던 이가 이토록 품위가 없을 수 있는지 진지하게 자문했다. “미국 대통령은 한눈에도 (다른 곳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대학교수다운 성품의 소유자는 아닌 듯 보인다. 게다가 그는 클레망소 총리와 밸푸어 장관이 갖춘, 계급과 연령에 걸맞은 신사의 교양조차 지니고 있지 않다.” 특정 인물을 향한 이 같은 비방은 국적에 대한 개인적인 편견에서 기인한 듯 보인다. 케인스는 페르디낭 포슈 장군을 “프랑스 출신 농부”라고 비하하면서도, 포슈가 이공과대학 출신이었음을 절대 언급하지 않았다.

케인스의 『평화의 경제적 결과』가 출판계에서 큰 성공을 거둔 것은, 아마도 이 신랄한 말들 덕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평화조약에 반대해 케인스가 내세운, 경제주의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비난조의 글도 이 책의 성공에 한몫했다. 케인스가 ‘평화란 무엇보다도 경제적 안정에서 기인한다’고 강조한 것은 그다지 진부한 일이 아니다. ‘경제적 번영’이라는 공통의 이해관계를 위해 패전국에 관대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참신하기까지 하다. 이는 즉 경제주의가 평화주의와 만나는 지점인 ‘온화한 상업(Doux commerce, 몽테스키외를 비롯한 사상가들이 상업은 평화를 가져온다고 주장한 논의-역주)’이라는, 경제적 자유주의의 전통적 논거이기 때문이다.

평화의 조건을 논할 때, 케인스는 협상 테이블에서 거론됐던 논거들을 가져와 확장시켰다. 협상 당시 그는 독일 측과 논의해 결정한 액수를 한꺼번에 지불하자는 원칙을 옹호했다. 당시는 배상금의 액수가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였는데도, 『평화의 경제적 결과』에서 케인스는 독일이 이를 배상할 능력이 없다고 단언했다. 케인스는 1871년 프랑크푸르트 조약의 결과를 근거로 삼아 “전쟁배상금이 역효과를 내며 수혜국에도 악영향을 준다”고 주장했다. “1871년 보불전쟁의 종전 이후 패전국인 프랑스가 지불해야 했던 50억 프랑의 전쟁배상금이야말로 1873년 경제공황의 주원인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 빈곤하기 짝이 없는 주장에 근거를 보태는 과정에서 그는 한 가지 실수를 했다. 프랑스가 지불한 전쟁 배상금(연간 GDP의 1/4에 해당하는)은 1차 대전 동맹국(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왕국) 내의 통화량을 팽창시킨 요인 중 하나지만, 그 자체를 구조적 원인으로 볼 수는 없다. 그보다는 영국에서 대거 수입된 수입 밀과의 경쟁으로 부채를 지게 된 토지 소유주들의 수익 감소에서 구조적 원인을 찾아야 한다. 또한 케인스는 ‘작은 피해 면적’이라는 단순한 기준만 고려하며 프랑스가 받은 피해를 과소평가하고 있다. 점령당한 영토, 전쟁으로 황폐해진 토지에서 생산됐을 부의 규모는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영국과 미국을 대변하고자 집필된 『평화의 경제적 결과』는 미국 상원에서 베르사유 조약의 비준 거부를 이끌어내는 데 기여했다. 이는 결국 조약문의 균형을 흔들기에 이르렀는데, 프랑스가 라인강 좌안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하는 대신 그 보상 격으로 들어간 ‘보장조항’(3)이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조약이 조인된 후에도 케인스는 자신이 반대했던 조항들이 실행되는 것에 끝없이 압력을 가했다. 그는 멜히어를 통해 1922년 제노아 회의에서 (베르사유 조약 협상 과정의 일원이었으며 1923년에 수상으로 취임한) 빌헬름 쿠노와 얄마르 샤흐트(당시 국가은행총재, 이후 제3제국의 경제장관을 지냄)와 만났다. 그리고 볼셰비키당의 게오르기 치체린 소비에트 외무장관도 만났는데, 치체린 역시 멜히어처럼 전쟁의 책임을 제정 러시아에 떠넘긴 인물이었다. 이 만남은 소련과 바이마르 공화국 사이의 기이한 동맹의 시발점이 됐는데, 선견지명과는 거리가 멀었던 케인스는 1919년에 이런 가능성을 부자연스럽다며 아예 배제한 바 있었다.

케인스의 저서는 특히 프랑스에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프랑스 번역판은 프랑스 정부에 대한 케인스의 적개심을 한층 누그러뜨린 채로 발간됐는데도 말이다. 그에 제일 먼저 화답한 것은 군주제 전문 역사학자 자크 뱅빌이다. 뱅빌은 『평화의 정치적 결과』라는, 제목부터 시사하는 바가 아주 명료한 저서를 출간했다. 케인스의 경제주의에 대한 반론으로, 뱅빌은 굉장히 안정적이고 타당한 지정학적 분석을 제기했다. “큰 반향을 일으킨 케인스의 저서는 기실 인문서의 분위기를 풍기는 풍자문에 불과하다. 본문에 가득한 각종 역설들로 호기심을 불러일으켜 성공을 이뤄낸 셈이다. 『평화의 경제적 결과』는 독일이 전쟁 책임에 대한 대가를 치르지 않거나, 최소한으로 치르길 바라는 이들의 필수 교본이 됐다. (…) 독일에 명백하게 호의적인 선입관 속에서, 케인스의 주장은 이미 결론을 내리고 있다.”(4)

 

기울어진 경제주의

결국 베르사유 조약을 나서서 옹호하는 것은 일급 교섭위원 타르디외의 몫이었다. 중재자적인 관점을 피력한 타르디외는 (베르사유 조약이) 날림으로 이룩한 평화라는 비난에 반론했다. 그는 현재의 고착상황이 프랑스에만 부담을 준 것이 아니라, 일부 동맹국들의 행동에도 혼란을 줬다고 설명했다. 타르디외는 그 외의 부분에 대해서는 (클레망소와 마찬가지로) 독일을 완전히 불신했다. 

이후 2차 대전이 한창일 때, 프랑스의 젊은 경제학자 에티엔 망투는 타르디외의 주장을 연구했다. 

그의 아버지 폴 망투는 1919년 프랑스 대표단 소속의 교수 겸 통역사였는데, 아들 에티엔 망투에게 경제학 전문가로서 대응해야 한다는 책무를 남겨준 것으로 보인다. 1919년에 본인의 경제학적 전문성을 강하게 내세웠던 케인스에 대항해서 말이다. 에티엔 망투의 『중상모략당한 평화 혹은 케인스의 경제적 결과』(5)는 저자 사후(死後)인 1941년부터 1942년 사이에 프린스턴대학 출판부에서 영어로 출간됐다(에티엔 망투는 2차 대전의 종전 며칠 전, 제2기갑사단 전투 중 사망했다). 그는 “나치의 폭력성을 고려하면, 케인스의 논증은 전체가 우스꽝스럽다”고 평가했다. 그 사이 1936년에 케인스는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이라는 주요 저작을 발표했는데, 이 책은 그를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경제학자의 반열에 올려놓는 역할을 했다. 

케인스의 경제주의에 대항해, 망투는 각종 수치와 고정관념(더 나아가서는 잘못된 신념), 지정학적 오류에 대한 비판을 개진했다. 또한 케인스의 경제주의가 독일의 설욕전에 도움이 됐을 뿐 아니라 반(反)나치 레지스탕스를 약화시켰다고 규탄했다. 망투는 이를 ‘(독일에 대한) 관용주의자’들의 탓이라고 비난했는데, 이들은 아돌프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 전부터 이미 “베르사유 조약의 개정을 위한 캠페인을 펼쳐왔다. 지극히 당연한 결과지만, 연합국 측의 계속된 양보는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 혁명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조약을 개정하자고 주장했던 이들은 히틀러야말로 베르사유 조약 그리고 독일에 대한 잔혹한 처사가 빚어낸 산물이라고 끝없이 되풀이했다.”

후세에 기이할 정도의 영향력을 자랑하는 책들은, 때로는 읽기도 전에 인용되면서 그 명성이 퍼져나간다. 프랑수아 퓌레의 사례를 들자면, 그는 케인스야말로 베르사유 조약에 관해 최고의 분석을 보여준 2대 인물 중 한 명으로 봤다. 나머지 한 명으로는, 케인스와 정반대의 분석을 보여줬던 뱅빌을 꼽았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케인스의 전기작가 로버트 스키델스키 또한 그런 의견을 고수했다. “1919년 케인스의 계획이 적용됐더라면, 히틀러가 독일 총리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터였다.” 

이처럼 증명할 수 없는 역사적 가정에 관해, 우리는 반대의 명제를 내세울 수 있다. 만약 베르사유 조약이 케인즈의 뜻대로 실행됐다면 나치즘의 급부상을 피할 수 있었을까? 조약 협정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결국 배상금 지불을 중단했으며 이전의 경제적 번영을 되찾았다. 1929년 이후 독일도 대공황의 여파에 시달렸는데, 그 누구도 이 대공황이 과도한 전쟁 배상금의 탓이라고 여기지는 않았다(미국발 대공황이라고 인식했다). 읽은 사람은 적고, 인용은 엄청나게 돼온 책이라면, 그 책이 후대에 누리는 명성의 비결은 책 자체보다는 오늘날 정세에 있을 것이다.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으로 명성이 높아진 덕분에 케인스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베르사유 조약 지지자들을 비난하는 데 이용된다. 1930년대 (대(對) 히틀러) 유화정책 지지자들이 범한 과실을 약화하고, 종국에는 나치즘의 책임을 경감해줄 구실을 찾는 데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글·알랭 가리구 Alain Garrigou
파리 낭테르 대학 정치학과 명예교수

장폴 기샤르 Jean-Paul Guichard
니스 소피아앙티폴리스 대학 경제학과 명예교수

번역·박나리 
번역위원

 

(1) André Tardieu, 『La Paix』, Payot, Paris, 1921.

(2) Robert Skidelsky, 『John Maynard Keynes: Hopes Betrayed(1883~1920)』, Mac Millan, Londres, 1983.

(3) 이 조항은 프랑스 국경에서 독일 측이 도발하지 않았더라도 다른 충돌이 일어날 경우 미국의 즉각 원조를 보장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4) Jacques Bainville, 『Les Conséquences politiques de la paix』, Fayard, Paris, 1920.

(5) Étienne Mantoux, 『La Paix calomniée ou les Conséquences économiques de M. Keynes』, Gallimard, Paris, 19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