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은 없다! 자본주의의 붕괴가 있을 뿐

인류세인가? 자본세인가?

2019-08-01     장바티스트 말레 l 기자

발아래 모든 것이 요동치고 있는 상황인데, 더 이상 피할 곳 없이 궁지에 몰려야만 대책을 짤 것인가? 오늘날 일부 환경주의자들의 주장도 이와 맥락을 함께한다. 인류의 환경파괴로 생태계의 붕괴가 눈앞에 닥쳤으니 이제는 다음 세상을 살아갈 물리적·정신적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통찰력 있는 격변설로 봐야 할까, 몽매주의적인 공포감 조성으로 봐야 할까?

 

기후변화부터 과잉채굴, 삼림파괴, 생물 다양성 감소, 자연재해 급증에 이르기까지 계속 늘어가는 각종 환경 문제들이 학계에서 매일 상세하게 다뤄짐에 따라 이제는 공공 논의의 장에서도 환경에 대한 우려가 뜨겁다. 인간의 활동으로 인한 대격변의 순간이 코앞으로 다가왔거나 이미 시작됐으며, 이것이 결국 문명의 붕괴를 일으킬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일부 붕괴론 지지자들은 종말에 대한 두려움이 이에 맞서 행동할 촉매가 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하지만 일부는 정치권의 무관심을 꼬집으며 재난 이후의 상황을 고려한다. 이제는 언론에서도 ‘붕괴론의 예상치 못한 성공’(<르몽드>, 2019년 2월 5일), ‘붕괴, 끝의 시작’(<리베라시옹>, 2018년 11월 7일), ‘붕괴론: 붕괴를 건 내기’(<프랑스퀼튀르>, 2019년 3월 16일), ‘이브 코셰 “인류는 2050년 사라지고 말 것”’(<르파리지앙>, 2019년 6월 7일), ‘붕괴론: 세상의 끝은 기회가 될 것인가?’(<제오>, 2018년 10월 24일) 등의 기사들을 뽑아내고 있다.

 

미디어, 서점, 총리실까지 점령한 ‘아마겟돈’

종말에 대한 관심은 미디어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프랑스 방송국 <France2>에서는 2029년 12월의 미래에 대한 ‘예측’을 담은 다큐멘터리 <세상의 종말이 실제가 된다면>을 방송했다(2019년 6월 20일). 이 다큐멘터리는 프랑스 군인들이 마지막 남은 수원(水源) 앞에 늘어선 줄을 통제하고 있으며, 수도와 전기시설이 모두 파괴되고, 강도들이 어슬렁거리고 살인을 저지르며, 대규모의 기후 난민들이 유럽으로 밀려드는 미래 현실을 그리고 있다.

2019년 다보스 세계경제포럼(WEF)에선 ‘기후를 위한 등교 거부 운동’의 창시자인 스웨덴의 학생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가 참석해 “나는 여러분이 희망을 품기를 바라지 않는다. 여러분이 놀라 겁에 질리기를, 내가 느끼는 공포를 매일 똑같이 느끼기를 바란다. 그리고 마침내 행동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연설했다. 이런 기후재앙에 대한 경고들은 전 세계 경제지도층의 방향을 바꿔놓지 못했지만 서점가에는 행복한 비명을 안겨준 것이 확실하다. 실제로 여름 휴가지에서 읽을 만한 추천 도서 자리에는 아마겟돈의 향기가 가득하다.

이를테면 『모든 것은 어떻게 붕괴될까: 현 세대를 위한 붕괴론 매뉴얼(Comment tout peut s'effondrer. Petit manuel de collapsologie à l'usage des générations pésentes)』(파블로 세르비뉴·라파엘 스티븐스 저, 2015), 『왜 모두 붕괴될까(Pourquoi tout va s'effondrer)』(쥘리앙 보스니자 저, 2018), 『붕괴의 다섯 단계(Les Cinq Stades de l'effondrement)』(드미트리 올로프, 2016), 『인류세에서 살아남기: 내전과 붕괴 뛰어넘기(Survivre à l'anthropocène. Par-delà guerre civile et effondrement)』(엔조 르소르 저, 2018), 『또 다른 종말이 가능하다: (붕괴에서의 생존을 넘어) 붕괴를 겪어내기(Une autre fin du monde est possible. Vivre l'effondrement (et pas seulement y survivre))』(파블로 세르비뉴·라파엘 스티븐스·고티에 샤펠 저, 2018), 『위기에 처한 인류: 전원 항로를 변경하라!(L'Humanité en péril. Virons de bord, toute !)』(프레드 바르가 저, 2019), 『추하게 떠 있기보다 아름답게 흘러갈 것: 붕괴에 대한 사유(Plutôt couler en beauté que flotter sans grâce. Réflexions sur l'effondrement)』(코린 모렐 다를뢰 저, 2019) 등이 나란히 놓여 있는 모습이다.

붕괴에 대한 공포는 프랑스 총리실까지 뻗어갔다. 2018년 7월, 프랑스의 에두아르 필리프 총리는 환경·지속가능개발·에너지부의 니콜라 윌로 장관과 나란히 앉아 “이 문제는 상상 이상으로 나를 몹시 괴롭히고 있다. 만약 올바른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면 이 사회는 말 그대로 붕괴해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으로 중계된 이 대담 자리에서 두 사람은 미국의 유명 작가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저서 중 전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문명의 붕괴』의 주장에 동조하는 의견을 보이기도 했다.(1)

 

행복한 붕괴를 기다리는 사람들

환경운동가이자 지리학자인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지금은 사라진 과거의 인류문명들이 모두 자연환경 파괴를 저지른 뒤 몰락했다고 주장하며 현대사회의 경제특권층을 향해 ‘이성적’인 선택, 즉 환경보존과 인구통제를 선택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런 그의 견해는 주장의 타당성 자체가 도마에 오를 만큼 큰 파급력을 몰고 왔다. 실제로 2009년에는 한 전문가 집단이 책에서 언급된 과거 문명들에 대한 그의 주장을 전면 반박하기도 했다.(2)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규탄하기보다는 과거의 문명사회에 대해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었다.

유명 작가의 정확성 논란은 접어두더라도, ‘붕괴론’이 제기하고 있는 핵심 문제는 결국 ‘붕괴에 대한 공포의 자극이 일반 대중과 지도층에게 환경파괴를 막을 동기를 부여할 방법인가?’라는 질문으로 요약할 수 있다. 붕괴를 두려워해야 한다는 주장은, 정치마저도 천년지복설의 신비주의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드는, 오늘날의 생산양식에 대해 지겹게 반복돼온 표현에 불과한 건 아닐까? 혹은 자연과의 ‘진실’된 관계 즉 채소를 가꾸며 살아가는 소규모 신농촌주의 공동체 안에서의 인간관계를 꿈꾸며, 오염과 감시와 고비용으로 점철된 도시를 떠나 시골로 향한 참을성 없는 지식인들의 정당화 논리에 불과한 건 아닐까? 격변설적 이론의 폭이 넓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붕괴론’의 견해 역시 이 모든 것을 다룬다고 볼 수 있다.

붕괴론자들은 종말에 대한 공포가 행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행동이 어떤 것일지는 아직 모른다. 르네 뒤몽은 이미 1974년에 저서 『선택은 당신의 몫: 환경인가, 죽음인가(A vous de choisir. L'écologie ou la mort)』를 통해 “만약 지금의 인구 성장과 산업생산이 다음 세기까지 그대로 이어진다면 우리의 문명은 완전히 붕괴하고 말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1970년대 당시 프랑스의 환경학자들은 보수적 농촌주의나 전통적 가톨릭의 수중에서 환경문제의 주도권을 가져왔고, 이를 사회문제와 연계하며 정치생태학이 좌파 진영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했다.

르네 뒤몽은 여러 사회주의 국가들을 비판하는 동시에 자본주의 사회 내 기술 진보의 의미를 부정했고, 제3세계를 위한 투쟁에서 이성과 합리성의 가치를 높이 치켜들었다. 농업공학자였던 그가 격변설의 논조를 사용했던 것은 자연 생태계와 인간의 생활조건을 무너뜨리는 동시다발적인 파괴의 원인을 논의의 장으로 끌어오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뒤몽은 노골적으로 “부유한 국가의 부유층”을 지목하며 자본주의를 비판했다. 『유토피아인가 죽음인가(L'Utopie ou la mort)』에서는 “과거의 사유 집단은 1789년을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도 이런 과업”이라고 결론 내리기도 했다. 과학 연구에 기반 한 당대의 정치생태학은 근대주의와 과학주의, 자유주의적 이상이 지키지 못한 약속들을 직시하면서도, 반근대주의, 반이성주의, 유사과학에 빠지는 오류를 범하지는 않았다.

정치생태학의 후손들은 이 발걸음을 이어갔다. 파블로 세르비뉴와 라파엘 스티븐스는 약 7만 부의 판매고를 올린 『모든 것은 어떻게 붕괴될까』에서 “붕괴론에서 중요한 것은 -견고한 지식을 갖춘- 직관이다”라고 적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붕괴에 맞서 물리적, 정신적인 준비를 하는 것인데, 이는 이미 영속농업 등을 실천하고 있는 “전환주의자”들의 삶을 비롯해 “지속가능한 소규모 공동체들”의 검소한 농촌생활과 연계된다. 냉전 시기 핵 공격을 피해 각자 대피 시설을 갖추자고 주장했던 미국의 개인주의적이고 편집증적인 ‘생존주의 운동’의 변형인 셈이다.(3)

하지만 이런 변화를 1970년대의 신농촌주의 운동에 비교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오늘날의 움직임은 20세기 후반의 반체제운동보다 레프 톨스토이가 주장했던 19세기의 기독교적 무정부주의에 더 가깝다. 파블로 세르비뉴는 “영성이란 종교보다 더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현실이다. 종교의 출현을 좌우할 뿐만 아니라 종교적 체계가 부재할지라도 사회적으로 필요불가결한 존재라는 점에서 심지어는 원시적인 현상이라고도 볼 수 있다”고 말하며 “비종교적, 세속적, 나아가 무신론적인 영성도 존재한다”고 덧붙였다. 

오랜 유토피아적 공동체 전통을 회복하자고 주장하는 붕괴론의 정의를 잘 보여주는 말이다. 즉 종교적인 색채를 빼고 표현하자면, 붕괴론은 결국 대격변을 통해 사회가 재탄생할 것이라는 천년지복주의적 약속인 것이다. 대홍수부터 이집트의 10대 재앙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신약성경의 계시록부터 지진·태양의 은폐·산의 사라짐·바다의 끓어 넘침 등을 예견한 코란 속 종말의 장에 이르기까지, 여러 유일신 종교들은 지난 2천여 년간 커다란 재앙으로 선과 악의 최종 대립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며, 그 재앙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기다림의 공동체’를 만들어냈다.(4)

파블로 세르비뉴, 라파엘 스티븐스, 고티에 샤펠은 『또 다른 종말이 가능하다』에서도 “세속적인 방식으로 세상의 종말을 논하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라는 의견을 밝혔다. 이들은 “신화는 사실보다 강력한 법”이라며 “명상가들과 운동가들을 한 데 묶어야” 할 뿐만 아니라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동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파블로 세르비뉴는 최근 종말에 대한 계간지 <위그드라실>을 창간했다. 오스트리아에서 생산된 재생지로 인쇄한 이 잡지는 총 5만 1,000부가 간행돼 잡지 가판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피에르 라비의 측근이며 잡지 <카이젠>의 창립자이자 <위그드라실>의 발행인인 이방 생-주르는 “위그드라실은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우주 나무의 이름”이라고 말했다.(5) 여기에 “위그드라실은 하늘과 땅, 죽음과 생명을 연결하는 세계수(世界樹)”라는 세르비뉴의 설명이 더해졌다. 결국 비종교적 천년지복주의자인 붕괴론자들은 행복한 종말을 약속하고 있다. 

“우리는 고통과 기쁨의 감정을 겪을 것이다. 고통은 우리의 생존, 삶의 터전, 미래, 애정이 무너지는 데서 오는 것인 반면, 기쁨은 화석연료와 각종 독성물질을 사용하던 산업사회가 (마침내!) 무너진다는 점,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점, 단순한 존재로 회귀한다는 점, (기억상실이 아닌) 기억의 회복과 (감각의 마비가 아닌) 감각의 회복이 이뤄진다는 점, 자율성과 역량을 다시 갖추게 된다는 점, 아름다움과 진실함을 키우게 된다는 점, 마침내 되찾게 된 원시의 자연과 실제 관계를 맺게 된다는 점에서 오는 것이다. 종말과 행복한 붕괴는 완전히 양립 가능하다.”(6) 

세르비뉴와 스티븐스의 저서에 후기를 쓰기도 한 환경운동가 이브 코셰 역시 붕괴에 대해 정확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붕괴를 “법이라는 틀 안의 서비스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기본적 필요(물, 식량, 거주지 등)를 제공할 수 없게 된 뒤에 일어날 불가역적인 과정”으로 봤던 것이다. 물론 명확히 하면 이는 이미 전 세계의 수억 명의 사람들이 계속 겪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인구는 8억 2,100만 명이다. 빈민가에 살고 있는 사람은 10억 명, 가정에서 식수를 공급받지 못해 매일 오염된 수원에서 물을 얻어야 하는 사람은 21억 명, 화장실 시설을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9억 명에 달하고 있다. 

 

인류세인가, 자본세인가?

종말에 대한 반향과 함께 기후변화에 대한 선지자들도 나타났다. 스웨덴 소녀 그레타 툰베리는 제2의 메시아와의 의사소통에 실패한 정치인들을 가로막으며 “나는 메시지를 전하는 전달자일 뿐(『동참하세요(Rejoignez-vous)』, 2019)”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장발의 머리와 새하얀 옷, 그리고 목에 건 ‘피스&러브’ 목걸이가 특징인 프랑스의 천체물리학자 오렐리앙 바로도 최근 『인류 역사상 최대의 도전(Le Plus Grand Défi de l'histoire de l'humanité)』(2019)을 발표해 큰 성공을 거뒀다.

이 제목은 2018년 9월 3일 <르몽드>지 1면에 발표됐던 한 성명서의 제목을 본뜬 것이다. 그 역시도 참여했던 이 성명서의 부제는 ‘지구를 보호하기 위한 200인의 촉구’로 영화 제작자부터 랩퍼, 연출가, 작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들이 참여한 바 있다. 당시 “우리는 전 지구적인 대격변을 경험하고 있다”고 말했던 오렐리앙 바로는 최근의 한 인터뷰에서 “전략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 문제에서 정치색을 뺄 필요가 있다. 기후 문제를 계속 좌파적인 시선과 연계한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수 세기 동안 ‘위대한 밤’을 기다려 왔지만 아직도 안 왔지 않은가!”라고 답하기도 했다(<르푸앙>, 2019년 6월 13일).

금으로 뒤덮인 궁전 속 권력자들을 향해 촉구의 목소리를 높이든, 신비주의 집단에 틀어박히든, ‘붕괴론자’들은 결국 ‘자연’과 ‘인류’라는 두 범주 간의 대립을 토대로 삼는 하나의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 바로 우리가 ‘인류세(人類世)’, 즉 인간의 행위로 지구의 생태계가 악화된 지질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미국 빙엄턴 대학교수이자 세계생태학연구네트워크(WERN)의 조정관인 제이슨 W. 무어는 “인류세라는 개념이 자본주의로 인한 문제들의 책임을 인류 전체로 돌려온 부르주아적인 구습을 강화하는 것은 아닐지 우려가 크다”라는 의견을 내놓았다.(7) 그는 인류세 대신 ‘자본세’의 개념을 주장한다. 오랫동안 아무런 대가 없이 원자재를 과잉 채굴하고 환경 자원을 남용해 온 지금의 경제체제가 기후변화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결국 한정된 양의 비재생 자원을 계속 값싸게 사용하려던 경제 전략이 끝을 맞이했을 뿐, 이를 인류의 끝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제이슨 W. 무어는 “우리는 현재 자본주의의 붕괴를 겪고 있다”면서 “이것은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낙관적인 자세다. (…) 이 붕괴를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인간이나 건물이 붕괴되는 것이 아닌, 인류와 인류를 제외한 모든 자연을 마치 자본주의를 위해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사물처럼 여겨온 권력관계가 붕괴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라고 덧붙였다.

이처럼 또 다른 붕괴는 가능하다. 

 

 

 

글·장바티스트 말레 Jean-Baptiste Malet
기자. 저서로 『L'Empire de l'or rouge. Enquête mondiale sur la tomate d'industrie 붉은 황금의 제국: 전 세계 토마토 산업 조사보고서』(Fayard, Paris, 2017)가 있다.

번역·김보희 sltkimbh@gmail.com
번역위원. 역서로 『자신감: 단 한 걸음의 차이』 등이 있다.

 

(1) Jared Diamond, 『Effondrement. Comment les sociétés décident de leur disparition ou de leur survie(문명의 붕괴: 과거의 위대했던 문명은 왜 몰락했는가?)』, Gallimard, coll. ‘Folio Essais’, Paris, 2006년(1쇄: 2005년); Daniel Tanuro, ‘L'inquiétude pensée du mentor écologiste de M. Sarkozy(사르코지 전 대통령의 환경 멘토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우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07년 12월호.

(2) Patricia A. McAnany & Norman Yoffee, 『Questioning Collapse: Human Resilience, Ecological Vulnerability, and the Aftermath of Empire』, Cambridge University Press, New York, 2009년.

(3) Peirre Charbonnier, ‘Splendeurs et misères de la collapsologie. Les impensés du survivialisme de gauche(붕괴론의 화려함과 비참함. 좌파 생존주의의 이면)’, <Revue du Crieur>, no.13, Paris, 2019년 6월.

(4) Henri Desroche, 『Dieux d'hommes. Dictionnaire des messianismes et des millénarismes du 1er siècle à nos jours(인간의 신들. 오늘날 첫 세기의 메시아주의와 천년지복주의 사전)』, Berg International, Paris, 2010년.

(5) Jean-Baptiste Malet, ‘Le système Pierre Rabhi(‘농부 철학자’피에르 라비는 구세주인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8년 8월호·한국어판 2018년 10월호.

(6) Pablo Servigne & Raphaël Stevens & Gauthier Chapelle, 『Une autre fin du monde est possible. Vivre l'effondrement (et pas seulement y survivre)(또 다른 종말이 가능하다: (붕괴에서의 생존을 넘어) 붕괴를 겪어내기)』, Seuil, Paris, 2018년.

(7) Kamil Ahsan, ‘La nature du capital: un entretien avec Jason W. Moore(자본의 성격: 제이슨 W. 무어와의 인터뷰)’, <Période>, 2015년 11월 30일, http://revueperiode.net; Joseph Confavreux & Jade Lindgaard, ‘Jason W. Moore: “Nous vivons l'effondrement du capitalisme”(제이슨 W. 무어 “우리는 자본주의의 붕괴를 겪고 있다”)’, <Mediapart>, 2015년 10월 13일, www.mediapart.f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