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대열에 나선 파리 코뮌의 여성들

2019-08-01     엘루아 발라 l 화가, 만화가

세탁부부터 수녀, 식당 종업원, 기자에 이르기까지. 파리 코뮌 당시 많은 여성은 ‘방화하는 여자들’이라고 내몰리면서까지 여러 전투에 참여해 인상적인 활동들을 남겼다. 이들은 총을 들고 일어나, 보다 정의롭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투표권도 가지지 못했던 여성들은 파리 곳곳에서 열리는 투쟁집회에 참여해 목소리를 냈고, 임금평등화, 탁아소 설치 등을 요구했으며 나아가 자유결혼을 천명하기도 했다. 파리 코뮌은 결국 막을 내렸지만, 그들의 이념과 이상들은 계속해서 살아남았다.

 

1871년 3월 26일, 파리 시민 22만 9,167명은 투표를 통해 ‘자유로운 도시’ 파리의 코뮌 평의회를 선출했다. 투표 결과는 혁명파의 승리로 돌아갔으나 이렇게 구성된 코뮌에는 사회주의, 블랑키주의, 급진공화주의, 온건공화주의 등 다양한 이념을 가진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코뮌 위원 중에서도 숙련노동자들의 비중이 가장 높았고, 그 밖에도 사무원, 수공업자, 언론인, 자유전문직 등 젊은 남성들이 대부분이었다. 투표권조차 없었던 여성들은 코뮌 위원으로 선출될 수 없었다. ‘사회주의 공화국’을 세우는 곳에 여성 시민의 자리는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여성들은 매우 적극적이고 참여적이었다. 쥘 발레스는 “이것은 위대한 신호다! 여성들의 참여가 이어질 때, 여성들이 남편의 등을 떠밀 때, 여성들이 냄비 위에서 휘날리던 검은 깃발을 뽑아 길거리에 세울 때, 바로 그때가 반란의 도시 위로 태양이 떠오르리라는 신호인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1)

평의회 선거로부터 약 10일 전인 1871년 3월 17일 밤, 프랑스 임시 정부의 행정 수반이었던 아돌프 티에르는 뷔트 쇼몽, 바티뇰, 몽마르트르 등 파리 시내에 배치된 국민방위군의 대포를 탈취할 것을 명령했다. 정부의 용의주도한 작전이었다. 하지만 이 대포들은 파리 시민들의 모금으로 구입한 것이었으므로 국민방위군의 저항을 피할 수 없었다. 18일 새벽 5시 반, 정부군은 파리의 거리 곳곳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급한 전보가 이어졌다. “10시 20분, 12구에서 대치 중, 로케트 가(街)에 국민방위군 바리케이드가 두 곳 설치됨, 일부 방위군 바스티유 방향으로 하강 중. 10시 30분, 몽마르트르 상황 좋지 않음, 정부군 병사들 명령 불복종, 하강하지 않은 방위군이 언덕, 대포, 도로 모두 점령함.”(2) 

 

벨빌부터 당페르에 이르기까지 파리 서민 지역 곳곳에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경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몽마르트르에는 여성들과 아이들이 나와 88연대 사병들과 격렬하게 대치했다. 주부들은 말의 고삐를 부여잡고 마구(馬具)를 잘라냈다. 곳곳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민중들에게 총을 쏘지 말라!” “방어선을 지키자!”

이내 88연대는 군중들에 가담했다. 여성 코뮈나르(코뮌 지지자) 루이즈 미셸은 외투 속에 소총을 품고 현장에 뛰어들었다. 그녀는 그날의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는 쉬지 않고 언덕을 향해 올라갔다. 전투 준비를 갖춘 병사들이 언덕 위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우리는 자유를 위해 죽을 각오였다. 마치 땅이 뒤집히는 것과 같았다. 우리는 죽고 파리는 일어설 것이었다. 어느 시점이 되자 군중들의 뒤로 인파가 이어지고 있었다. 언덕은 희게 눈 부신 빛으로, 해방이라는 찬란한 새벽으로 뒤덮여 있었다. (…) 언덕 위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놀랍게도 죽음이 아닌 (…) 민중의 승리였다.”

결국 정부군 측 사령관이었던 르콩트 장군과 토마 장군은 코뮌군에게 붙잡혀 로지에 가에서 총살됐다. “혁명이 이뤄졌다. 르콩트 장군은 사병들에게 총격을 세 번째로 지시하는 순간 붙잡혔다. 로지에 가로 끌려간 그는 그곳에서 사복을 입고 몽마르트르의 바리케이드를 염탐하다 붙잡힌 토마 장군과 마주하게 됐다. 두 사람은 전쟁법에 따라 처형됐다. (…) 18일 저녁, 르콩트 및 토마 장군과 함께 포로로 붙잡혔던 정부군 사병들은 풀려났다.”(3)

 

코뮌이 여성에게 열어준 세 가지 길

 

한편 코뮌군 측에 섰던 가스통 다 코스타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명확히 선을 그었다. “정부군이 발을 빼던 순간까지만 해도 그곳을 장악했던 이들은 여성들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총살이 이뤄지던 로지에 가에서는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코뮈나르였던 가스통 다 코스타는 코뮌의 반대파들이 곧잘 왜곡하던 참여 여성의 이미지를 망설임 없이 반박했다. “하지만 가정과 자녀가 있는 여성들의 뒤를 이어, 샤토-루주에서 붙잡힌 포로들을 언덕까지 끌고 간 다양한 군중 중에는 호텔과 다방과 사창가에서 뛰쳐나온 (…) 젊은 여성들도 강렬한 기세로 모여 있었다. (…) 그녀들은 포주들과 함께 나타나서, 방어선에 섰던 사병들과 팔짱을 끼었다. 혁명의 물결 위로 ‘매춘부’라는 이름으로 묻혀있었던 이들이 떠오른 것이다. 이들은 (…) 권력의 참패에 대한 기쁨을 큰소리로 외치며 곳곳에서 열광하고 있었다. (…) 여기에 우동 가의 모퉁이에서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병의 말을 도축하던, 의기소침한 채 살아가던 가난한 여성들 역시 포함해야 할 것이다. 이 여성들 모두는 광기 어린 분노와 도취를 품에 안고 몽마르트르의 곳곳에 흩어져 가련한 르콩트 장군과 그의 사병들이 저 갈보리 언덕을 오를 때 악착같이 그들을 에워쌌다.”(4)

또다시 10일이 지난 3월 28일, 파리 시청 앞 광장에서는 마침내 파리 코뮌이 “민중의 이름으로 선포”됐다. 성대한 의식이 치러졌다. 코뮌 선언을 축하하는 대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빅토린 브로셰는 당시의 일을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는 마침내 코뮌을 얻었다! (…) 수많은 패배와 비극과 애통을 지나 드디어 휴식의 때가 도래한 것이다. 모두가 함께 기뻐했다! (…) 휴식하는 군인들의 선봉에는 다양한 옷을 입은 식당 여종업원들이 기관총 위에 팔꿈치를 괸 채 쉬고 있었다. (…) 한 코뮌 구성원이 민중들이 뽑은 평의회 의원들의 이름을 외자, 이구동성으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코뮌 만세!”(5)

 

코민 평의회에 여성들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끊임없이 시위에 참여했고, 위원회(구별 지역위원회, 감시위원회 등)를 구성했으며, 각종 글과 선언문을 작성했다. 또한 요새를 사수하기 위한 전투 기간이나 ‘피의 주간’에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두고 벌어진 시가전 등에서는 코뮌군과 함께 구급병이나 종군 상인 등을 자원하고 나섰다.

4월 12일, ‘여성시민단체’는 <코뮌 공보>를 통해 이렇게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파리는 포위됐고, 폭파됐다. (…) 외세에 의한 프랑스 침공이었는가? 그렇지 않았다. 민중의 목숨과 자유를 압살한 이들은 다름 아닌 프랑스인들이었다! 그들은 민중들이 ‘권리 없이는 의무도 없고, 의무 없이는 권리도 없다’고 외치며 봉기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우리는 일자리를 원할 뿐, 착취나 구속은 원하지 않는다! 모두를 위한 노동이자 복지, 민중 스스로에 의한 민중의 정부인 코뮌은 자유롭게 일하며 살거나, 맞서 싸우며 죽어 가리라.”

<코뮌 공보>에는 ‘파리 수호 및 부상자 간호를 위한 여성 동맹’의 글도 실려 있었다. “민중의 대의를 위해, 또한 혁명을 위해 싸우는 것은 모두의 의무이자 권리다. (…) 코뮌은 모든 특권과 불평등-그리고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모든 국민의 정당한 요구를 고려할 것이라는 약속이 나왔다-을 파괴하고, 지배층의 특권을 다지기 위해 유지돼온 모든 차별을 파괴하리라는 대원칙을 표방하고 있다.”

같은 날인 4월 12일, <민중의 외침>에는 이런 글이 실렸다. “그러므로 코뮌은 여성들에게 즉각 이 세 가지 길을 열어준 셈이다. 무장 전투원, 부상자 간호병, 구급병이 바로 그것이다. 여성들은 자신들의 심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고귀한 열정을 기꺼이 쏟을 것이며, 함께할 것이다.”

한편 파리 시내의 여러 교회에서 열렸던 투쟁 집회는 때로는 여성들만의 집회로 구성되기도 했다. 집회에서의 논의는 활발했다. 혁명수비, 여성 교육, 임금평등, 사회법, 자유결혼, 남성들의 무기력, 노동착취 종식 등 모든 주제가 연설과 토론의 대상이 됐다. 5월 3일 바티뇰의 생-미셸 교회에서 열린 ‘사회 혁명 투쟁집회’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한 사람이 “우리는 남편들이 코뮌을 위해 싸우러 집을 나서면서, 견고한 혁명적 이념의 씨앗을 전하고 갔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집회 참석자들은 ‘출발의 노래’와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며 집회를 마무리했다. 그들이 정한 다음 토론 의제는 ‘교회에서의 여성, 혁명에서의 여성’이었다.(6)

 

 

“사제들을 총살에 처해야 한다!”

 

베르사유 정부 편에 섰던 폴 드 퐁투리외는 자신이 집회에서 보고 들었던 것들을 신랄한 문체로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엘루아 집회에 참석한 여성 연사들 중(…) 발랑탱이라는 매춘부는 자신이 5월 22일 포주의 머리에 총을 쏘았다고 밝혔다. 발랑탱이 바리케이드에 참여하려 하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라고 했다. 모렐이라는 여성은 자기 입으로 다섯 번이나 유죄 판결을 받았다고 밝히며, 수녀들을 모조리 센 강에 던져버리기를 요구했다. 그녀는 이 성당이 운영하는 병원 내에도 코뮌군에게 독을 먹이는 이들이 있다고 덧붙였다. 보지라르의 생-랑베르 교회에서 열린 애국주의 여성 클럽은 레이덴흐레트라는 이름의 오스트리아 출신 여성이 주도해 열린 것이었다. (…) 그녀는 여성 혁명가로, 빈에서 사회풍습을 해치는 범죄로 형을 선고받은 일을 훈장처럼 여기는 인물이었다. (…) 트리니테 교회에서 열린 해방 집회에서는 (…) 오로지 여성들밖에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날의 의제는 ‘사회 재생을 위한 해결 방법’이었다. 

30대로 보이는 한 여성은 이렇게 의견을 피력했다.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사회적 문제는 바로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노동자들의 땀으로 배를 채우는 고용주들 문제다. 대부분의 고용주들이 노동자를 생산기계로만 여기고 있다. 노동자들이 서로 단결하고 힘을 합친다면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오늘날의 사회가 지니고 있는 또 하나의 악덕은 부유층이 아무런 수고 없이 먹고 마시며 즐기고만 있다는 점이다. 이런 부유층과 사제들, 종교인들 역시 도려내야 할 필요가 있다. 고용주도, 부유층도, 종교인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됐을 때, 비로소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생-슐피스 집회에서는 (…) 가브리엘이라는 젊은 여성이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사제들을 총살에 처해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살아갈 수 없도록 가로막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이 사제들이다. 내가 아는 바로는 여성들이 고해성사를 하러 가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사제들을 모두 붙잡아 총살할 것을 모든 여성에게 권하는 바다. 이런 자들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

특히나 가장 격앙된 폭력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루이즈 미셸이었다. 그녀는 프롤레타리아 계층의 운명이 해방과 굴복의 갈래에 섰던 중대한 날에 열린 집회에 참석해 이런 말을 남겼다. “위대한 날이 도래했다. 그러나 시민들의 용기, 시민들의 에너지가 존재하므로 파리는 우리의 것이리라. 그렇다, 단언컨대, 파리는 우리의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리라. 이는 민중들에게 있어 삶과 죽음의 문제인 것이다.”(7)

 

‘방화하는 여자들’이라는 누명

 

이어서 1871년 5월 21일, 정부군이 베르사유에서 파리로 진격하며 이른바 ‘피의 일주일’이 시작됐다. 빅토린 브로셰는 “비극의 밤이 일곱 번이나 이어졌다”고 말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5월 27일 토요일, 무장한 정부군의 사격이 우리를 향해 쏟아졌다. 일순 혼란이 빚어졌다. 군중들은 ‘벨빌 지역은 일부 점령됐고, 구청은 넘어갔다. 거리마다 사망자와 부상자들이 넘쳐나고 있으며 사방에서 총알이 쏟아지고 있다. 코뮌군과 자원군들이 사자처럼 싸우고 있다’고 외치며 몰려들었다. 우리는 깃발을 높이 휘날리며 최후의 전투를 위해 모여들었다. 부대마다 손실이 컸다. (…) 5월 28일 정오, 파리 가 위쪽에서 마침내 코뮌군의 마지막 포탄이 쏘아 올려졌다. 두 배로 장전해 쏘아 올린 이 마지막 포탄에는 죽어가던 코뮌의 마지막 숨결이 담겨 있었다. 꿈은 끝나고 말았다. 인간사냥이 시작됐다. 체포와 학살이 시작된 것이다!”(8)

루이즈 미셸은 글을 이렇게 끝맺었다. “나는 61연대의 파견대와 함께 몽마르트르 묘지로 향했고, 그들과 함께 그곳에 포진했다. (…) 밤이 되자 우리 쪽 인원은 크게 줄었지만, 우리는 더욱 결연해졌다. 일정한 시간 간격을 두고 포탄들이 곳곳에 쏟아졌다. 그래서 우리는 그 포탄을 ‘죽음의 시계 소리’라고 불렀다. 맑은 밤이 지나는 동안 무덤 곳곳의 꽃들은 향기를 뿜어냈고 비석들도 살아있는 듯했다. (…) 붉은 깃발을 높게 든 여성들이 지나갔다. 블랑슈 광장에 바리케이드를 세운 이들이었다. 거기에는 엘리자베트 드미트리에프, 르멜 부인, 말비나 풀랭, 블랑슈 르페브르, 엑스코퐁 등도 있었다. 앙드레 레오(여류 기자 빅투아르 레오딘 베라의 필명)는 바티뇰의 바리케이드에 있었다. 5월 그때, 1만 명이 넘는 여성들이 곳곳에 흩어져, 혹은 한데 모여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

 

최근에는 ‘방화하는 여자들’에 대한 광기 어린 소문이 퍼지고 있다. 하지만 방화하는 여자들은 없었다. 여성들은 암사자처럼 용맹하게 싸웠을 뿐, 오로지 “불을 붙이자! 저 괴물들 앞에 불을 쏟아내자!”라고 외쳤을 뿐이었다. 이 여성 투사들이 아니라, 이미 포위된 지역에서 우유통을 보호책이라 믿으며 가족을 위해 먹을 것을 찾아 헤매던 어머니들이 ‘석유통을 든 방화범’으로 몰려 죽어갔던 것이다! (…) 

베르사유 군은 파리에 피로 얼룩진 거대한 붉은 수의를 덮어버렸다. 길모퉁이마다 시체가 즐비하다. 막사 안에서는 기관총이 주조되고 있다. 그들은 사냥하듯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 인간도살의 현장이나 다름없다. 사람들은 길에 선 채로, 혹은 벽 앞에 몰린 채로 불행히 살해됐으며 멋대로 목숨을 빼앗겼다. (…) 코뮌이 사망하던 그때, 정규군들의 뒤를 이어 학살에 이끌린 여성 흡혈귀들이 파리가 날리는 시체더미 앞에 나타났다. 먼 옛날에는 그저 ‘미친 여자’ 취급을 받았을 그녀들은 피 냄새에 취해 극심한 분노를 표현했다. 우아한 모습의 그녀들은 학살 현장을 오가며 기꺼이 죽음을 지켜보고, 양산 끝자락으로 핏빛 눈알을 파내곤 했다. 그중 일부는 방화범으로 체포돼 다른 이들과 함께 즉석에서 총살됐다.”(9) 

 

 

 

글·엘루아 발라 Eloi Valat
화가, 만화가. 저서로는 『루이즈들, 파리 코뮌의 여성들(Louises, les femmes de la Commune)』(Bleu autour, Saint-Pourçain-sur-Sioule, 2010)가 있다.

번역·김보희 sltkimbh@gmail.com
번역위원. 역서로 <미래 대예측>등이 있다.

 

(1) Jules Vallès, ‘L’Insurgé(반란자)’, 작품집에서 발췌, Gallimard, coll. 『Bibliothèque de la Pléiade』, Paris, 1990.

(2) 조세프 비누아 장군과 루이 에르네스트 발랑탱 장군이 아돌프 티에르 행정 수반에게 보낸 전보문, 『Marc-André Fabre, Vie et mort de la Commune(코뮌의 탄생과 죽음)』, Librairie Hachette, Paris, 1939.

(3),(9) Louise Michel, 『La Commune(코뮌)』, Stock, Paris, 1898.

(4) Gaston Da Costa, 『La Commune vécue(코뮌의 경험)』, Ancienne Maison Quantin, Paris, 1909.

(5),(8) Victorine B. (Brocher), 『Souvenirs d’une morte vivante(살아있는 죽은 자의 기억)』, Librairie Lapie, Lausanne, 1909.

(6) Journal officiel de la République française(프랑스 공화국 관보), <Partie non officielle>, 1871년 5월 5일.

(7) Paul de Fontoulieu, 『Les églises de Paris sous la Commune(코뮌 당시 파리의 교회들)』, E. Dentu, Paris, 1873.

 

[연대표]

1870년 9월 4일
제3공화국 선포, 국민 방위 정부 구성

1870년 9월 17일
프러시아, 파리 포위

1871년 1월 28일
프러시아와 휴전 협정 체결

1871년 2월 8일
2월 12일 보르도에 소집할 국민의회 투표

1871년 3월 15일
국민방위대 중앙위원회 결성

1871년 3월 18일
국민방위대 대포 탈취에 맞서 민중 봉기, 정부는 베르사유로 도피, 국민방위대 중앙위원회의 파리 시청 점거

1871년 3월 26, 28일
투표, 파리 코뮌 선포

1871년 4월 2일
쿠르브부아 및 퓌토 지역에 베르사유군의 공격

1871년 4월 3일
코뮌군의 베르사유 행진이 실패로 돌아감, 파리 여성들 “베르사유로 가자!” 호소

1871년 4월 4일
베르사유 행진을 위해 여성 대표단 시청 소집

1871년 4월 11일
파리 여성 시민들, “노동하며 자유롭게 살거나, 맞서 싸우며 죽음을 맞거나!” 호소

1871년 5월 1일
공안위원회 결성, 베르사유군 파리 포격

1871년 5월 18일
파리 코뮌(교육위원회), “교육의 측면에서 볼 때 여성의 노동과 남성의 노동이 동일하다는 점을 생각하라”고 선언

1871년 5월 21~28일
베르사유군 파리 시내 진격, ‘피의 일주일’ 시작, 군사재판소의 공식 기록에 의하면 코뮈나르 1만 7,000명 총살, 3만 8,568명 투옥, 투서 30만 건 이상 접수, 여성 1,051명 체포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