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교과서, 망각을 넘어 왜곡으로
진실보다는 일본 정부의 ‘사회적 묵인’에 동조하는 방향으로 법원의 판결이 내려지자, 일본의 역사쓰기에 관한 해묵은 논쟁이 다시 일어났다.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은폐’에 관한 문제다.
1993년 3월 16일 일본 대법원은 ‘정부의 교과서 검정 승인’은 현행법과 1946년 헌법에 명시된 기본 조항을 ‘위반하지 않는다’라고 판결 내렸다. 고교 3학년 교과서 『일본의 새로운 역사』의 저자이기도 한 역사학자 사부로 레나가는 1965년부터 정부가 역사의 해석에 개입하는 것이 정당하지 않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일본 대법원은 정부가 교과서 검열권을 행사할 수 있는 진정한 주체라고 판결했다. 이번 판결의 내용을 잘 살펴보자. 일본 문부과학성(이하 문부성)에 힘을 실어주며, 정부가 교과서 집필 전반에 개입하는 것을 사실상 인정한 셈이 아닌가?
이번 판결로 교과서 검정을 반대하는 소송 지지 연맹을 비롯해 사부로 레나가 교수를 약 30년간 지지해 온 사람들의 실망감은 매우 컸다. 1992년, 아시아 순방에 나섰던 미야자와 키이치 총리가 “1945년 이전에 일본이 전쟁으로 아시아에 피해를 입혔다”고 인정하면서, ‘진실된 역사’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다.(1) 그러나 그 기대는 이번 판결로 꺾였으며, 그에 따른 실망감은 환멸에 가까운 정도가 됐다. 당시 미야자와 총리는 “현대사를 다룰 때 아시아 국가들의 입장도 고려하겠다”고 약속했다. 한편, 1992년 10월 중국을 방문한 아키히토 일왕은 일본군이 중국인들에게 안긴 고통에 ‘깊은 슬픔’을 느낀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모든 약속과 발표는 일본 정부의 역사교과서 검정 승인 앞에서 빛을 잃었다.
침략은 ‘사건’, 또는 ‘진격’으로, 능욕은 ‘위안’, 학살은 ‘집단자결’로 둔갑
3차례의 소송(1965년, 1967년, 1984년), 대법원의 2차례 판결을 포함해 총 8차례의 판결이 있었다. 이후 일본 문부성의 방침에 따라 역사가 어떻게 은폐되고 축소되고 왜곡됐는지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역사교과서 안의 ‘적극적’ 거짓말은 현대사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역사교과서 속 거짓말은 상당히 다채로워, ‘망각과 미화의 사례목록’을 작성하자면 끝이 없을 정도다.
개인보다 집단이 우선시되는 세계관 속에서 외부는 위협의 대상이 되고, 고대사는 물론 중세시대와 근대사와 관련된 논쟁도 검열과정에서 교묘히 은폐된다. 일본 제국주의 피해자들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가운데, 절대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이 있다. 역사 다시 쓰기는 일본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 즉 일본 제국주의에 피해를 당한 중국, 한국, 태국 등 다른 아시아 국가들도 과거 왜곡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
‘15년 전쟁(1931~1945년, 중일전쟁)’의 예를 통해 일본의 태도를 설명할 수 있다. 현재 문부성은 15년 전쟁에 대한 윤리적 비판이나, 당시 식민지 국가들이 처했던 현실은 인정할지언정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는 부분이 하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일본군의 행위를 침략 전쟁의 논리로 보는 관점이다. 검열대상이 되는 표현은 바로 이 ‘침략 전쟁’이다.
전쟁 선포 없이 일어난 침략은, 일본교과서에서 ‘사건’(만주사변, 중일전쟁의 도화선이 된 노구교사건, 1939년 만주와 몽골 국경지역 노몬한에서 일어난 대규모 충돌사건) 또는 ‘진격’(1937년 중국, 1940년 인도차이나)으로 표현됐다. 또한 일본군에게 능욕당한 20만 명의 여성들은 ‘위안부(피해여성 대부분은 조선인)’로, 학살은 ‘시민들의 집단자결’로 둔갑했다(1945년 4~6월 오키나와 전투).
문부성은 침략 전쟁 사실을 숨기며 중국인들의 저항, 태평양 전쟁, 그리고 1945년 패전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당시의 전쟁 상황이 해결됐다는 착각을 끝없이 불러일으켰다. 검열로 역사의 진실이 묻히고 약 1세기 전부터 논란이 되던 문제는 베일에 뒤덮였다.
탁월한 망각능력, 암묵적 묵인의 나라
1948년에 구성된 일본 전후 체제는 메이지 유신(1868년) 이후 오랜 기간 이뤄진 변화의 산물이다. 1880년 문부성은 서구권에 동조한다고 판단되는 출판물의 ‘블랙리스트’를 작성했다. 블랙리스트에는 1871년 문부성이 직접 발행한 출판물도 포함됐다. 이어서 문부성은 교과서 독점 발행권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잠시 출판권을 포기했었던(1886~1903년) 문부성은 이후 단독 집필한 교과서를 채택했다(1903~1945년).
그러나 1945년 일본이 패전한 후 초등 교과서에서는 ‘조국을 위한 무장 호소, 호전성에 대한 찬사, 평화에 대한 위협, 종전 반대, 학생들의 심신발달 저해를 부추길 수 있는 모든 내용’이 삭제됐다. 정부가 교과서 집필을 더 이상 통제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이 잠시나마 싹텄다. 일본의 패전 직후, 미군정은 출판의 자유, 개인의 자유 보장을 법으로 규정하며 일본 사회의 민주화를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현대사를 말끔히 잊게 해줄 ‘검열’이라는 구원투수가 부활한 것이다.
미군정은 스스로 민주주의 이상을 가볍게 무시하는 모순을 보였다. 미군정은 ‘반공’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히로히토 천황(1903~1989년)의 전쟁 책임을 따지지 않고 넘어갔으며, 일본 정부의 교과서 통제권도 인정해줬다. 모든 수정주의(역사 수정주의, 헌법 수정주의)를 지지하던 세력들이 이 틈새를 폭넓게 이용했다. 미군정의 허술한 정책으로 민주주의가 악용되며 변질돼 버렸다.
교육제도의 민주화는 미군정이 시작된 1945년 이후 만장일치로 채택된 목표였지만, 일본 지배 세력은 교과서 통제를 부단히 시도됐다. 당시 일본은 미군정(1945~1952년)의 관리 허점을 기회로 삼아, 교과서에서 자신들이 침략전쟁을 저지른 사실을 은폐하고, 평화를 위한 노력을 했다고 주장하는 역사왜곡을 벌였다. 1945년 일본은 미군정의 방침에 따라 미군정에 교과서 검열권 일부를 넘기는 대신, 외부 집필진의 교과서를 문부성의 이름으로 발행했다.
그러나 1948년 당시에는 교과서를 심의하는 책임의 주체를 명시하는 조항이 없었던 탓에, 교과서 논쟁이 1953년까지 계속됐다. 1948년에서 1953년까지 교과서 감독이 이원화되면서 문부성이 발행하는 교과서와 정부의 승인을 받은 외부 집필진의 교과서, 이렇게 2종의 교과서가 공존했다.
1952년 미군정 지배가 막을 내리고 일본이 주권을 회복하던 시기, 교사들은 검정 교과서에 회의적이었다(검정 교과서 채택률은 1948년에 80%, 1952년 3%). 교과서 검정 승인 독점권은 문부성에 있었다. 그리고 교과서위원회의 창설(1956년), 교과서 승인 시 교육 지침 수용, 문부성의 방침에 우호적인 교과서 채택 시스템의 가동(1962년)과 이에 따른 교과서 검열 강화로 교과서 집필은 정부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됐다.
일본의 패전 이후에도, 일본 정부의 교과서 통제는 계속됐다. 뿐만 아니라 미군정은 정치적 필요에 따라 일본에 대한 처벌보다는 반공주의를 우선시하면서 일본 정부의 독단적 행위를 묵인했다. 그 결과 검열이 일본에서 사회적으로 용인됐다. 이는 교과서 위원회의 활동을 명시하는 내용에도 분명히 나와 있다. “교과서의 내용이 교육 지침과 맞는지 확인해야 한다.”
역사관 회복에 달린 일본의 민주주의
그러나 사부로 레나가 교수는 “교과서의 내용을 검열해 무엇을 적고 말지를 판단하는 것은 문부성의 소관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파문을 일으켰다. 사부로 레나가 교수는 “형식적인 법보다 우위에 있는 것은 도덕이다”라며, 교과서 집필진을 시작으로 일본 국민에게 정부의 독단적 결정에 암묵적으로 동의하지 말고 검열이 중립적이라는 순진한 감언이설에 속지 말자고 호소한 인물이다. 하지만 이런, 사부로 레나가 교수의 호소는 전체주의가 지배하는 일본 사회에서 결국 허공의 메아리로 끝나지 않을까?
사부로 레나가 교수는 과거를 덮어버리려는 정부의 의지가 매우 강하므로, 일본 정부의 태도를 바꾸려면 외국의 압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물론 1980년대 이후 일본은 매년 이웃 국가들의 압박을 받았고 1910년 조선 강제병합, 만주 괴뢰국 수립, 1937년 난징 학살, 1933년에서 1945년까지 인체실험으로 악명 높은 ‘731부대’에 관한 교과서 내용을 수정했다.(2)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문부성이 기미가요, 히노마루(일본 국기), 교육칙어 등 대동아 공영권의 피해자들에게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상징을 부활시키거나 헌법 9조에서 금지된 집단적 자위권을 교과서에 기재하라고 집필진에게 압박을 주면서 다시 주변 국가들을 자극해 금세 상황이 시끄러워졌다. 그러나 왜곡되고 미화된 일본의 이미지가 굳건하게 버틸 수 있는 것은, 일본 정부의 망각의지 이상으로 강렬한 일본 국민의 망각능력 때문이다.
교과서든 언론이든, 정치적 선언이나 공식 슬로건에서 자주 등장하는 형용사가 ‘아카루이(明るい: 빛나는, 공명정대한)’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일본을 가장 잘 표현하는 형용사 ‘아카루이’가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실, 묵인을 허용하는 집단의 내부에는 다른 의견도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일체화되고 완전히 묵인된 사회가 되려면 은폐와 축소 메커니즘이 작동해, 일본 국민이 아주 어릴 때부터 변화하고 갈등하는 사회가 지닌 다양한 면을 아예 볼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
즉 일본에서 소위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일본 학교가 왜곡 없는 역사관을 위해 노력을 시작했다는 신호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글·크리스토프 알방 Christophe Alban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이 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993년 6월호에 실린 것으로 현재 상황에서도 유효한 것으로 판단돼 게재합니다.
번역·이주영 ombre2@ilemonde.com
번역위원
(1) Antoine Halff, ‘La mémoire retrouvée des crimes de Nankin(되살아나는 난징 대학살의 기억)’,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1991년 8월호
(2) Jacques Decornoy, ‘Cobayes humains pour l’Unité 731(731부대의 마루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1991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