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자산가’ vs. 매판자본의 허상

2019-08-01     비벡 쉬버 l 뉴욕대 사회학과 교수

2차 대전 이후 남미와 중동, 아시아 남부 지역 일부 국가들에서 진행된 개발전략에 대한 분석은 보통 세 가지 통념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그 중 첫 번째는 급격한 산업화다. 해당 국가들은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들여 단기간 내에 산업화를 이뤄냈다. 그 핵심은 바로 수입대체산업화(ISI) 전략에 있었는데, 이는 두 가지 단계를 거쳐 국내 산업의 성장을 꾀하는 것이었다. 1단계에서는 먼저 관세와 품질관리 규정을 통해 수입품을 제한함으로써 국내 사업자들의 시장진입 기회를 확보한다. 이어 2단계에서는 막대한 보조금으로 자국 기업의 빠른 성장을 도모한다. 이로써 내국 기업들은 관세와 보조금이라는 두 가지 든든한 무기를 쥐고 선진국과의 경쟁을 피하며, 기업의 성장에 유리한 환경을 구축할 수 있었다.

두 번째 통념은 조국의 산업화가 정계 지도자, 고위 공무원, 내국인 기업대표 간 합동계획으로 여겨졌다는 점이다. 여기에 (소극적으로나마) 직원들이 포함될 때도 있지만, 실질적인 주체는 기업가들, 그리고 당시 실세를 쥐고 있던 정계 지도자들이었다. 마지막 세 번째 통념은 정부가 재계와의 동맹관계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는 것인데, 오늘날 더 이상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이들 국가가 급격한 산업화를 이룩해온 과정은 정부주도식 개발계획의 일체라고 볼 수 있다. 국내 산업이 아직 미숙하고 그 규모도 작은 데다 시장이 고루 발전하지 못하고 금융시장도 여유롭지 못한 까닭에, 정치권에서 산업화의 주도권을 쥘 수밖에 없었다는 이유다. 

그러나 정부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의 난관들은 고려되지 않았다. 즉, 막대한 수익이 보장되지만 사회적 가치 창출이 저조한 분야에 투입된 공공 및 민간 투자금을, 사회 환원성이 높은 분야로 옮기는 정부의 역할 수행에서의 걸림돌을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남미지역과 중동지역, 아시아 남부 지역에서 정부주도식 개발전략은 대체로 원하는 방향에 따라 경제를 주무르는 방식으로 이뤄지는데, 문제는 그런 경제구조의 변화가 마구잡이식으로 이뤄지며 막대한 공적 자금을 소모한다는 점, 그리고 민간 부문의 비효율성까지 야기한다는 점이다. 

개발과정이 진행될수록 정부에는 예산압박이 가해지므로, 과도한 정부재정의 소모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국가에서는 민간 부문에서 야기된 손실액의 상당 부분을 처리해주는 한편 기업에 계속해서 보조금을 투입해줘야 하고, 점점 늘어나는 무역 수지 불균형도 보전해야 한다. 수출 부문으로의 투자 금액이 자본재의 수입 규모를 상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정부가 제대로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면, 정부가 개발 중심의 정책을 종료하고 신자유주의로 돌아설 정도로 난관에 처할 이유가 없지 않았을까?

대다수 사람들에게 있어 이를 설명하는 가장 설득력 있는 답변은 정치권의 무능을 강조하는 것이다. 개발우선 정책을 선택한 후진국 다수가 산업정책을 시행하는 데 필요한 제도적 역량을 갖지 못했음을 지적하는 연구는 한두 개가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또 다른 의문점이 제기된다. 국가주도식 계획경제를 위해서 어느 정도 정부 기구의 안정화가 필요하다면, 정치권에서는 왜 적절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건 아마도 이 과정에서 함께하는 ‘친구들’의 반대, 즉 ‘민족자산 계급’의 반대가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여기에서 말하는 ‘민족자산 계급’이라는 표현은 이를 만들어낸 마르크스주의자들, 즉 제2인터내셔널(1889~1914), 특히 제3인터내셔널(1919~1943)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정의한 바와 같이 자국 시장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국내 자본가 계급을 말한다. 이들은 열강의 지배에서 벗어나길 원하면서, 산업화라는 명목하에 자국의 정부와 손을 잡았다. 이런 정의에 비춰볼 때, 민족 자본가들이 정부기능의 확대에 반대할 리 만무했다. 이에 덧붙여 50년대의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매판 자본가’라는, 또 다른 자산계급 모델을 활용해 국가 간 무역 활동의 의미를 찾고자 했다. 농산물 수출과 관계될 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무역 활동이나 투기 활동을 통해 외국(식민통치 하에서는 본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이 내국인 자본가들은 자국의 발전을 위한 활동에는 참여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는 세력이었다. 물론 내국인 기업가들이 사회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동맹으로 간주되진 않았지만, 이들에게 하나의 자산 계급개발 모델 정립을 위한 노력은 기대해볼 수 있었다. 게다가 그와 같은 모델이 부상하려면, 자본가 계급의 동원이 필수적이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남미와 인도, 일부 중동지역의 정계 인사들은 신속한 경제 산업화를 원했다. 그런데 이전의 수많은 경험으로 미뤄볼 때, 기업들은 장기적 차원에서의 성장만이 가능한 부문에는 투자를 꺼리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단기간에 높은 수익을 보장하는 생산품은 사회 환원성이 낮거나 전무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정부는 산업발전 계획을 시행하는 데 있어 경제적·사회적 환원성을 모두 만족하는 방향으로 기업들을 끌어가고자 했다. 계획주의경제 정책을 추구한 정부들은 대개 온건한 방식으로 기업들을 설득했다. 보조금을 지급하고 저금리 대출을 해주며, 세제 혜택을 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산업정책의 기조에는 기업들의 저항이 있는 경우 강제적 조치를 불사해서라도 원하는 방향으로 공적 자금이 사용되도록 하겠다는 의지도 깔려 있었다. 정부가 기업에 지원을 하는 만큼, 기업이 마음대로 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본가들의 생각은 달랐다. 수입대체 산업화 덕분에 이들은 외국과의 경쟁에서 보호받을 수 있었고, 곧 국내 시장에서는 상당수의 부문들이 소수기업에 의해 장악됐다.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자면 생산수단에 대한 막대한 투자가 필수적인데, 이 점에 있어 선발주자들은 상당히 유리한 입장이었다. 게다가 수입 대체 산업화 전략으로 또 한 가지 이득을 본 점이 있었는데, 정부가 해당 부문에서 행정조치를 통해 생산자의 수를 제한해준 것이다. 시장의 규모가 작은 만큼, 기업들이 과도한 유혈 경쟁을 우려했기 때문에 내려진 조치였다. 

외국과의 경쟁을 피할 수 있게 된 현지 자본가들은, 결국 각 분야를 독점하다시피 한다. 이들에게는 더 이상 혁신이나 현대화, 투자가 필요 없어진 것이다. 이 같은 생산체제에서는 기존 설비를 개선하는 데 정부보조금을 쓸 필요가 없다. 그보다는 사업영역을 넓혀가는 것이 선발주자로서의 우위를 확보하는 길이었다. 따라서 민족 자본가들에게 수입대체 산업화 전략은 자신들의 수익을 높여주는 신이 내린 선물인 셈이었다. 그러나 이 정책은 보조금 지급에 그쳐야지, 정치권에서 보조금 이용내역을 통제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자본가들에게 수입대체 산업화 전략의 규제는 결코 용인할 수 없는 장애물이었다. 

계획주의 경제를 실현하려는 정부와 민족자본가들 사이의 갈등은 늘 눈에 띄지 않았다. 기업들은 개발을 위한 노력에 힘써 달라고 호소했으나, 실상 그들이 원했던 것은 공적 자금을 손에 쥐는 것이었다. 그들은 시장에 계획주의 경제의 요소를 도입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즉 위험요소는 공유화하되 수익은 사유화한다, 그것이 기업의 바람이었던 것이다.   

 

 

 

글·비벡 쉬버 Vivek Chibber
뉴욕대 사회학과 교수. 저서로 『후식민지이론과 자본의 스펙트럼(Éditions de l'Asymétrie, Toulouse, 2018)』등이 있다. 이 글은  <소셜리스트 레지스터(Socialist Register)>지 2005년 발간호에 게재된 바 있다.

번역·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번역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