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수엘라, 위기의 지정학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보고타까지

2019-08-01     알렉산더 메인 l 정치분석가

미국은 현재 중남미 대부분을 장악한 보수주의 지도자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베네수엘라 대통령 니콜라스 마두로에게 공세를 펼쳐왔다. 이들의 지지 덕분에 미국의 개입주의는 인도적 관심으로 위장될 수 있었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의 극단적 행보는 온건파도 예외 없이 중남미 우파 지도자들을 자극하고 있다.

 

 

처음에 베네수엘라는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의 주요 관심사 축에 끼지 못했다. 트럼프는 대통령 선거운동에서 베네수엘라라는 단어를 거의 언급하지 않았고, 베네수엘라에 개입하겠다는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황은 2017년 급변했다. 트럼프 대통령과 그의 정치적 숙적인 마르코 루비오의 잇따른 회동 직후였다. 

쿠바 이민자 출신의 마르코 루비오는 공화당 경선에서 트럼프와 맞붙었으며, 현재는 플로리다 주 상원의원이다. 루비오는 아바나(쿠바)와 카라카스(베네수엘라)에 적대적이며 마이애미에 터를 잡은 기부자 및 유권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루비오는 차기 대선을 의식하고 있는 트럼프가 베네수엘라에 대해 강경노선을 취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한 듯하다. 루비오는, 베네수엘라가 정권교체에 성공하면 차기 대선의 열쇠를 쥐고 있는 플로리다 주에서 트럼프가 확실히 승리할 수 있다고 설득했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임자인 버락 오바마가 시작한 쿠바와의 국교 정상화 방침으로 회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베네수엘라에 대해서는 제재를 가하기 전에 아직 군사적 해결책이 ‘협상 테이블’ 위에 있다고 재차 언급했다. 믿기지 않겠지만 10여 년 전, 중남미 주요 국가들은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을 무너뜨리려는 미국의 노력에 동참한 바 있다.  

문제는 중남미 상황이 변했다는 것이다. 2009년 1월 오바마가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 중남미 및 카리브해 국가들에는 대부분 좌파 정부가 집권하고 있었다. 과거 미국의 공화당 행정부가 21세기 초, 중남미 및 카리브해에 들이닥친 좌파 정부의 물결인 ‘핑크 타이드’를 저지하기 위해 애썼음에도, 이 지역의 정치 지도자들은 독립을 지켜냈다.    

 

중남미의 우회전, 미국에는 청신호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자, 중남미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남미국가연합(Unasur)이나 중남미·카리브해 국가공동체(Celac) 등 좌파가 결성한 주요 지역 통합기관들은 기능이 마비되고 폐지될 위기에 처했다. 한편 미국이 지지하는 새로운 연합체 태평양동맹(Pacific Alliance)이 등장했다. 칠레, 콜롬비아, 멕시코, 페루가 결성한 이 조직은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고, 남미국가연합, 카르카스, 아바나를 공공연히 적대시하며 신자유주의를 내세웠다. 게다가 1980년대와 1990년대를 잇는 20년간 경기침체와 불평등 심화를 초래한 정책을 재개했다.

중남미 세계의 이런 변화는 베네수엘라에 개입하려는 미국에는 이상적이다. 2017년 8월 중남미 10여 개 국가의 우파 정부 대표들(1)이 페루의 리마에서 ‘리마선언’에 서명했다. 리마선언은 베네수엘라에서 벌어지는 ‘민주주의 질서의 파괴’와 인권 침해를 규탄했다. 마두로 정부를 고립시키겠다고 나선 ‘리마그룹’은 오로지 한 가지 의제, 즉 베네수엘라 사태를 해결하고자 수차례 회동했다. 그러나 온두라스 및 콜롬비아(둘 다 리마그룹 소속)의 민주주의 및 인권 탄압에는 그다지 큰 관심이 없는 듯하다. 

미국은 리마그룹의 공식 회원이 아니지만, 미 고위급 대표들이 매번 회의에 참석한다. 오바마 행정부는 태평양동맹 결성에 환영하는 입장이었으나, 동맹 창설 당시 미국의 역할에 대해서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트럼프의 측근들은 이와 정반대의 거취를 표명했다. 이들이 베네수엘라 문제에 관한 중남미 국가들의 합의사항을 제시할 기회를 놓칠 리 없다. 이들은 대형 언론사를 거느리고, 맹목적으로 동맹의 이념적 통일성을 홍보하느라 애쓰고 있다.  

2019년 1월, 베네수엘라의 야당 지도자 후안 과이도가 자신을 베네수엘라의 임시 대통령으로 선언하자,(2) 미국과 리마 그룹은 즉각 과이도를 지지했다. 이들은 2018년 5월 불법선거 논란 속에서 연임에 성공한 마두로 대통령을 끌어내리고자 군대를 투입했다. 리마그룹과 거리를 두고 있는 중남미 국가로는, 좌파 성향의 대통령(안드레스 오브라도르)이 있는 멕시코가 유일하다. 멕시코는 역시 진보주의자들이 공직에 진출해 있는 몬테비데오(우루과이)와 협력해, 베네수엘라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대화법’을 제안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리마 그룹은 트럼프 행정부에 결정적인 지지를 제공하는 셈이다. 1990년대 말부터 미국에 별로 우호적이지 않았던 이 지역에서, 그나마 남미의 동맹국들은 타협적인 자세를 취해왔다. 그러나 미국은 점차 동맹국들의 입장과 거리를 두고 있다. 과이도가 외국 군대의 개입 가능성을 시사했을 때, 리마그룹 회원국들은 “베네수엘라에 대한 군사행동을 암시하는 모든 위협”을 엄중히 비난했다(2019년 4월 15일). 트럼프 측에서 무력 배치를 고려하고 있다고 설명했을 때도 이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했다.  

카라카스의 상황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리마그룹은 정치적 협상이라는 해결책에 동조하고 있다. 이 발상은 베네수엘라의 정권교체에 안간힘을 쓰고 있는 미국이 거부하는 이슈다. 지난 4월 30일 과이도가 계획했던 민중봉기가 완전한 실패로 끝나면서, 리마그룹은 협상에서 쿠바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정치적 협상’이라는 발상은 엘리엇 에이브럼스 같은 인물이 활개 치는 트럼프의 참모진들을 펄쩍 뛰게 했다. 베네수엘라 담당 특사 엘리엇 에이브럼스는 1980년대에 중미에서 암살조직의 인권유린을 방조했으며, 레이건 정부가 벌인 이란-콘트라 사건과 관련해 미 의회에서 위증죄를 선고받은 바 있다.(3) 

에이브럼스는 쿠바가 베네수엘라에 수천 명의 군인과 정보요원을 배치해 마두로를 지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 정보기관들은 이런 가설을 뒷받침하는 어떤 구체적 증거도 없다고 일축하지만,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캐나다의 저스틴 트뤼도 총리가 리마 그룹을 대표해 쿠바 당국과 접촉했을 때, 미국 부통령 마이클 펜스가 트뤼도에게 전화를 걸어 강한 유감을 표시했기 때문이다. 펜스 부통령은 카라카스에 쿠바의 ‘해로운 영향력’이 미치는 상황을 염려하고 있다.(4)

 

중남미 우파 기구들의 초라한 성과

미국이 밀어붙이는 베네수엘라에 대한 경제제재에 대해 리마그룹 회원국들이 거부감을 표시하면서, 골은 점점 깊어지고 있다. 중남미의 가장 온건한 보수주의자들조차도 트럼프 행정부가 내세우는 개입주의에 불쾌감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보좌관은 먼로주의(미국은 유럽에 간섭하지 않겠으니 유럽도 미 대륙에 간섭하지 말라는 원칙. 두 세기 동안 아메리카 대륙에서 미국의 제국주의를 정당화한 낡은 세계관)를 찬양하는가 하면, <폭스 비즈니스>를 통해 베네수엘라의 석유매장량이 미국의 주요 동기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미국 기업들이 베네수엘라의 자원을 이용할 수 있다면 경제적으로 미국에 많은 변화를 가져올 것(2019년 1월 24일)”이기 때문이다. 그의 이런 발언에도 리마그룹 회원국들의 우려는 전혀 가라앉지 않고 있다.  

이런 지정학적 대립은 종종 다른 것, 이를테면 경제적 본능과 결합한다. 중남미의 일부 새 보수주의 지도자들은 정권을 잡으면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다. 그러나 중상주의 성향의 공화주의자 트럼프가 백악관에 입성한 것은 낙담할 만한 상황을 만들었다.(5) 양자 회담에서 어느새 자유무역이라는 의제가 사라지고 말았으니 말이다.  

결과적으로 트럼프 행정부는 별로 공들이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한 동맹국들에 대해서는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미국 대통령은 콜롬비아 두 곳의 순방을 취소했고, 페루에서 열리는 제8회 아메리카 정상회담에도 불참했다. 심지어 마두로 사태를 어떻게 결론지을 것인가라는 회담 의제는 국무부를 끌어들이기 위해 고안된 발상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이 글을 쓸 당시, 미국 대통령의 유일한 중남미 순방은 2018년 12월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G20 정상회담뿐이었다. 

트럼프는 동맹국들과의 협상에서 다른 국가의 정상들에게 들려준 달콤한 감언이설도 준비하지 않았다. 이에 콜롬비아의 극우를 대표하는 이반 두케 대통령은 3월 29일, 자국의 코카인 산업을 근절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 발언에, 콜롬비아를 제1의 정치·군사동맹국으로 여겨온 미국의 주요 외교관들이 혼비백산했다.(6)

트럼프의 측근들은 서둘러 중남미 지역을 방문해 마찰을 무마하려고 애썼다. 펜스 부통령은 다섯 차례나 콜롬비아를 방문했다. 마이크 폼페이오는 미 중앙정보부(CIA) 국장 재임 시절 콜롬비아와 멕시코 땅을 밟았고, 이후 국무부 장관에 취임한 첫해에 다시 여섯 차례 이곳을 방문했다. 볼턴도 이 지역을 순회했다. 특히 브라질을 직접 방문해 극우 성향의 자이루 보우소나루 대통령을 면담하면서 “미국과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파트너”의 당선을 환영했다.(7)

그러나 이런 노력들은 결국 별 성과가 없었다. 트럼프가 중남미를 멸시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이곳 보수주의 지도자들의 지정학적 입지가 복잡해진 것이다. 이들 지도자는 어떤 이익을 기대하며 미국이 ‘리더십’을 구축하는 데 보탬이 되려 했으나, 트럼프의 냉랭한 태도에 당황하고 있는 것이다. 우파가 다져놓은 중남미 지역 기구들의 초라한 성과가 바로 이 난국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태평양동맹은 8년을 존속했으나 회원국들의 금융시장 통합을 이룩했을 뿐, 동맹의 활동은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지 못했다. 보주수의의 가장 중요한 연합체인 리마그룹은 베네수엘라 위기만을 염두에 둔 단발총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의 정권교체 논리에 대한 지지와 극단주의 사이에 낀 리마그룹은, 협상이라는 해결책을 성공시킬 가능성이 가장 높은 시도, 즉 노르웨이가 행한 것과 같은 시도(8)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 

2019년 3월에는 남미의 친미 우파 8개국(아르헨티나, 브라질, 콜롬비아, 칠레, 에콰도르, 가이아나, 파라과이, 페루)이 모여 ‘남미 진보 및 발전을 위한 포럼(Prosur)’을 설립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친미’ 등을 표방하는 이 포럼의 목적은, 좌파인 남미국가연합(Unasur)의 위신을 지금보다 더욱 실추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좌파의 경제적, 사회적, 지정학적 정책에 반대한다는 것을, 하나의 강령으로 내세울 수 있을까? 베네수엘라의 위기는 역설적으로 리우 브라보(미국과 멕시코를 관통하는 강) 양쪽의 보수주의 동맹 세력에 유일한 응집력을 제공하는 것 같다. 훗날 베네수엘라 문제가 해결된 이후에, 이 포럼의 운명은 장차 어떻게 될까? 

 

 

 

글·알렉산더 메인 Alexander Main
워싱턴 DC 경제정책 연구소(CEPR) 국제정치부 부장

번역·조민영 sandbird@hanmail.net
번역위원

 

(1) 리마그룹 소속국가로는 아르헨티나, 브라질, 캐나다, 칠레, 콜롬비아, 코스타리카, 과테말라, 온두라스, 파나마, 파라과이, 페루다.

(2) Julia Buxton, ‘Où va l’opposition à Nicolás Maduro? ‘미국이 관리하는 베네수엘라 야당’,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9년 3월호·한국어판 2019년 4월호.

(3) Eric Alterman, ‘Le retour du “secrétaire d’État aux sales guerres 미 베네수엘라 특사의 어두운 과거, 에이브럼스는 누구인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9년 3월호.

(4) ‘Pence calls on Canada to do more to engage Cuba over Venezuelan crisis’, <Reuters>, 런던, 2019년 5월 30일.

(5) Alain Bihr, ‘Une autre histoire du mercantilisme 중상주의의 또 다른 역사’,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9년 5월호.

(6) ‘How Trump undermined Washington’s best friend in Latin America’, <World Politics Review>, 2019년 4월 11일, www.worldpoliticsreview.com.

(7) ‘Bolton praises Brazil’s Bolsonaro as a “like-minded” partner’, 2018년 11월 1일, <Politico>, www.politico.com

(8) 2019년 5월, 마두로 정부 대표들과 베네수엘라 야당이 노르웨이 정부의 중재로 협상을 위해 오슬로에서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담은 2017년 말 이후의 첫 고위급 협상에 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