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자주국가에서의 선거

2011-01-07     알렉산더 메인

 “선거가 능사는 아니다. 하지만 아이티에서 민주주의를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계기는 될 것이다.”(1) 2010년 11월 28일 대선을 치르기 며칠 전, 에드몬드 뮬렛 유엔 아이티 안정화군 과테말라 단장의 설명이다. 지난봄, 유엔 아이티 특사인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더 자신 있는 모습을 보였다. 선거는 “걱정할 게 없는 몇 안 되는 문제 가운데 하나”라고 했다.(2)

선거일이 지났지만, 국민의 분노는 잠잠해지지 않는다. 선거 방식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거리에서 경찰에게 돌을 던진다. 6개 선거감시단은 투표를 치른 ‘참혹한 방식’에 유감을 표한다.(3) 후보 19명 가운데 14명은 투표 취소를 요구하고, 그중 일부는 선거 부정이 심했다고 주장한다. 2010년 1월 12일 지진 이후, 아이티의 ‘안정’을 복원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할 것으로 소개된 선거가 거의 완전한 실패로 끝나는 분위기다. 하지만 유엔 아이티 안정화군과 미주기구, 그리고 미 행정부의 첫 반응은 문제를 최소화하고 결과에 신뢰도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콜레라가 창궐하는 가운데 선거를 치른 것에 대해 케네스 멀튼 주아이티 미국 대사는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아이티 정부는 공중보건 문제가 투표 개최를 막을 사유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고 나서 이렇게 마무리했다. “이는 아이티에 의해 조직된 선거다.”

정말 아이티가 조직한 선거일까? 이번 선거 조직에 필요한 자금의 상당 부분을 제공한 건 바로 민간 기부자들이었다. 그중 1400만 달러는 미국에서 왔고, 유럽연합 쪽에서 700만 달러, 캐나다에서 570만 달러를 지원했다. 미국 재개발청은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 개최의 실현 가능성”을 보장하는 보고서를 후원한 뒤, 기술적·물적 지원을 했다. 유엔 아이티 안정화군은 투표용지와 투표함 운반, 개표 관련 물류 업무를 담당했다.

아이티 감시단은 르네 프레발 현 대통령이 임시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을 임명한 것은 아이티 헌법을 명백히 위반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부분의 공정성에 대해서는 그 어떤 외국 후원자도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다. 가령 선거를 조직하고 감시하는 임시 선관위는 판미 라발라스 정당에 대한 금지 결정을 내렸다. 이 정당은 망명 이후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전 대통령이 이끌던 정당으로, 아이티 정당 가운데 인기가 가장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뿐만 아니라 선관위는 다른 12개 정치조직도 입후보를 금지했다.

‘선거 배제’ 현상은 정당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아이티 국민 수십만 명이 지진 때 주민등록증을 잃어버렸다. 신분증을 가진 일부 사람들은 이후 이재민 캠프에서 생활하는데, 이는 기존 선거구와 맞지 않는다. 임시 선관위와 주민등록부 관리청은 투표일 이전에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약속했으나, 결국 지키지 않았다. 투표 당일, 투표소가 마련된 캠프는 몇 개 안 되었고, 설령 투표소가 있더라도 선거인 명부에 유권자 이름이 없었다.

게다가 콜레라와 선거는 서로 양립할 수 없다. 콜레라가 심한 지역은 사람들이 모이기를 꺼렸고, 시장이든 교회든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이들이 투표일이라고 다르게 행동하지 않는 게 놀랄 일인가? 포르토프랭스 유엔물류본부의 증언을 들으면 그들의 불안감이 괜한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12월 초, 사람들은 투표일이 지나고 2주 후 감염 확인 사례가 늘어날 것을 (조심스레) 예측했다. 아무래도 사람들 모이는 장소는 그만큼 감염 위험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결과는 부정적이었다. 농학자이자 지역개발후원회 일원인 장밥티스트 캉타브는 “물적·인적 자원을 독점한 선거가 콜레라 퇴치에 제동을 걸었다”고 토로했다. 그에 따르면 “투표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한다.

선거 이후의 상황은 불투명하지만, 선거에 따른 결과만은 확실해졌다. 물류 및 보건 차원의 문제를 무릅쓰고 선거를 강행한 명분이었던 ‘안정성 구축’ 및 ‘제도 강화’를 이루기는커녕 (유권자 25%만 참여한) 이번 선거는 나라를 더 약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미 인도주의 위기의 희생양이 된 아이티는 이제 정치위기의 심화에 맞서야 하는 상황이다.

이는 200년 전부터 내려오던 습관이다. (프랑스와 미국을 필두로) 해외 열강은 아이티가 필요로 하는 것을 아이티 주민보다 더 잘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파파 독’과 ‘베이비 독’(4)의 독재를 지원하고 1980년대 말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강요한 것을 비롯해, 2004년에는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대통령 정권을 전복시킨 것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정치 및 경제 후견인 노릇은 아이티의 불안정성을 계속 가중시켰다. 또 아이티라는 한 나라가 잔해 위로 부상하는 것을 방해했다.

글•알렉산더 메인 Alexander Main
워싱턴 경제·정치연구소 연구위원

번역•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각주>
(1) ‘Haiti heads for elections, police keep marches apart’, <로이터>, 2010년 11월 25일.
(2) ‘Haiti able to hold Election poll by year-end: Bill Clinton’, <로이터>, 2010년 4월 15일.
(3) ‘아이티 선거: 국내 감시 기구, 선거가 진행된 ‘참혹한 방식’ 개탄 Haiti-élections: Les organismes nationaux d‘observations ’déplorent la façon désastreuse‘ dont s’est déroulé le scrutin’, <Alterpresse>, 포르토프랭스, 2010년 11월 29일.
(4) 프랑수아 뒤발리에(1957~71년 집권)와 그의 아들 장클로드 뒤발리에(1971~86년 집권)의 별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