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극단은 서로 만난다”

정치세력들의 융합

2019-08-01     콩스탕탱 브리소 l 스트라스부르대학교 정치학 박사과정

요즘 정치판에서는 서로 대립하는 두 명의 인물, 혹은 두 개의 정당에서 공통점을 찾아내, 양측 모두를 거부하거나 ‘한통속’이라고 비난하는 일이 마치 게임처럼 유행하고 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프랑스 앵수미즈와 국민연합(RN, 전 인민전선), 두 정당은 모두 유럽연합조약을 비판하고 있는데, 이는 양극단의 의견이 일치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게다가 두 정당 모두 ‘노란조끼’ 운동을 지지하고 있다. 이 또한, 양극단이 명백한 협력관계에 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공화당(LR) 소속의 툴루즈 시장 장뤼크 무뎅크는 2018년 12월 8일 툴루즈에서 벌어진 시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트윗을 남겼다. “우리는 두 극단주의 세력이 바리케이드 앞에 모여 프랑스공화국을 혼란스럽게 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나는 그들이 서로 공모해 폭력사태를 일으킨 점을 규탄한다. 그들은 혼돈의 씨앗을 뿌렸으며, 일부 거리에서는 아직도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유유상종이라더니….” 물과 불처럼 상극 관계에 있는 둘을 유사한 부류로 취급해, 정치적 반대 세력을 폄훼하는 이런 전략의 역사는 길다.

‘극단적인 것’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역사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양극단 사이의 균형’이라며 ‘중용’을 최고의 미덕으로 꼽았다. 굳이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다. ‘극단적’이라는 말은 오래전부터 과격한 기질이나 행동을 비판하는 데 쓰였다. 14세기 철학자 니콜 오렘도 “미덕이란 중간적인 것이고, 악덕이란 극단적인 것”이라고 봤다. 3세기 뒤 역시 ‘중용’의 사도를 자임한 블레즈 파스칼도 “극단적인 정신은 극도의 결함과 마찬가지로 광기로 치부된다. 평범함이 최고의 미덕이다”라고 썼다. 1782년에는 철학자 루이-세바스티앵 메르시에가 그의 저서 『파리 풍경(Tableau de Paris)』에서 “양극단은 서로 닮는다”고 주장하면서, 그 이유는 “선인과 악인이 극단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유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1) 

‘극단성’이라는 주제는 프랑스대혁명을 계기로 도덕적 영역을 벗어나 정치적 영역으로 편입됐다. 1789년 8월, 새로 구성된 국민의회는 국왕의 거부권 행사, 즉 ‘의회가 결정한 법안을 국왕이 저지할 권리가 있는가?’라는 문제를 놓고 찬반 의사를 표시해야 했다. 의회의 왼쪽 의석을 차지한 공화국 지지자들은 국왕의 거부권 행사에 반대했고, 의석 오른쪽의 입헌군주제 지지자들은 찬성표를 던졌다. 

 

“기질이 달라도, 흥분하면 비슷해진다”

이렇게 의석을 왼쪽과 오른쪽으로 구분하는 것 외에, 또 하나의 새로운 구분법이 생겨났다. 1791년부터 ‘극좌파’와 ‘극우파’라는 표현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사람들은 특히 이 두 극단이 서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탈레랑, 라파예트, 아베 시에예스 같은 입헌군주제 지지자들은, 지체 없이 스스로를 중용과 이성의 화신으로 소개했다. 역사학자 우베 바케스는 “무엇인가에 ‘극단’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은, 반혁명적 비판을 드러내는 상투적 표현이 됐다”고 썼다.(2) 

<라 상티넬>의 편집국장이자,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와 왕당파들에게>라는 제목의 팸플릿을 제작한 장바티스트 루베는 줄곧 ‘광신적인 자코뱅파’와 절대왕정 지지자들이 한통속으로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주장했다. 1796년 5월 12일, 그는 “민주주의자 바뵈프는 가면을 쓴 왕당파에 불과하다”고 비난했고, 사흘 뒤에 또다시 바뵈프에 대해 “미치광이 귀족이며… 외국 제후들의 대리인이다”라고 힐난했다. 루베는 “내가 장 폴 마라 및 자크 에베르와 이 부류의 모든 잔당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란다”며 공격했다. 당대 언론은 음모론을 주장하는 루베의 장광설에 대해 입을 모아 예찬했다. 루베의 동지들은 대부분 나폴레옹을 이용해 열정적인 개혁 의지를 불태웠고, 나폴레옹의 패기, 정신, 통찰력을 칭송했다.(3) 

한때 프랑스대혁명을 지지했으나, 입헌군주제 지지자들 사이에서 저명인사로 자리매김한 스탈 부인도 이런 입장을 공유했다. 스탈 부인은 1796년에, “프랑스대혁명 중에 사람들은 귀족들과 자코뱅파가 같은 어법을 구사한다고 지적했다. 그들은 자기 의견을 절대적으로 고집했으며, 어떤 상황에서든 편협한 행동방식을 택했다. 이런 특징은 똑같이 정열적인 성향을 지닌 데서 비롯된 걸로 여겨져야 한다. 기질이 달라도 사람들은 흥분하면 다 비슷해진다. 마찬가지로 정열은 사람들을 서로 닮게 만든다. 모든 정열 중에서도 가장 한결같은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무엇보다 당파 정신이다”라고 썼다.(4)
브뤼메르 18일(1799년 11월 9일)의 쿠데타 이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그의 동맹들은 ‘정치적 분열’이라는 개념 자체를 아예 지워버리려 애썼다. 새로운 체제만이 합리적인 방도라고 천명했고, 이런 담론으로 10여 년 전부터 ‘온건파’를 자처해온 수많은 이들을 유혹했다. 변호사였던 앙투안 불레 드 라 뫼르트는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부르주아지의 대변인으로, 나폴레옹의 등장에 환호한 최초의 부류에 속했다. 

1799년 12월 앙투안 불레는 프랑스를 탈출한 귀족들의 신문인 <북부의 관중(Le Spectateur du Nord)>에 기고한 글에서, 대혁명에 맞서 질서를 옹호하고, “선동자들과 악한들”에 맞서 “노동, 공장, 풍습의 가치”를 강조했다. 그는 “공화국은 선동자와 악한이라는 이 양극단 사이에 존재한다. 공화국은 왕당파와 민중 선동파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대다수 시민들 속에 있다”고 썼다. 그는 제정 치하에서 이런 견해를 밝힌 덕분에, 훈장을 받고 법무부 장관도 될 수 있었다.  

거의 두 세기에 걸쳐 ‘양극단의 융합’이라는 대의가 대혁명 이후 20년 동안 정교하게 다듬어졌고, 사회 변화를 꾀하는 모든 계획을 무산시키는 데 이용됐다. ‘극단주의자들’의 제안은 비현실적이고 선동적임은 물론, 각 진영의 맨 끝에 자리한 모든 극단주의자는 정치공동체를 약화시킬 것이며, 나라를 위험천만한 비탈길로 이끌 것이라는 식이었다. 따라서 민중을 계몽해 유일하게 합리적인 중도의 길로 이끄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나폴레옹을 따라, 프랑스대혁명 이후의 체제에서는 대체로 중도와 절제가 강조됐다. 좌파 부르주아지와 우파 부르주아지를 화해시키고자 했던 루이 필리프가 1831년 1월 표명한 정부의 입장은, 지금도 여전히 회자되는 유명한 문구로 남아 있다. “우리는 민중의 과도한 권력 장악과 왕권의 남용, 두 가지 모두에 같은 거리를 두고, 중도적 입장을 고수하려 노력할 것이다.”

왕의 지지자들은 <베일을 벗은 중도파>(1832), <모든 분야의 중도, 특히 정치적 중도>(1832), <중도의 승리 혹은 7월 혁명과 혁명의 실질적 결과들>(1833)(5) 등과 같은 다양한 전단지를 만들어 중도적 입장을 지속적으로 홍보했고, 풍자 화가들은 이를 신랄하게 조롱했다. 샤를 필리퐁의 석판화는 비밀경찰의 회계장부와 그다지 위협적일 것 같지 않은 중도파의 무기(예를 들어 관장용 주사기)(6)와 ‘민중의 무기’(창, 등불, 빗자루 등)를 대조적으로 묘사했다. 샤를 필리퐁의 다른 판화 작품인 <중도파, 혹은 두 자리 사이에서>는 민중의 의자와 왕좌 사이로 맨땅에 넘어져 있는 한 남자를 보여준다. 

역사가 에릭 앙소에 의하면 1848년 2월 혁명과 6월 혁명 이후, 루이-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역시 “양극단을 흡수하고 대립을 무너뜨리는 중도주의”를 장려한 중재자를 자처했다.(7) 1841년에 보나파르트는 “모든 나라에서 민중의 요구와 불만이 사상과 원칙으로 정립되고, 당파를 형성하고 있다. 이런 개인들의 연합은 (…) 정치적 정열을 넘어 하나의 공통된 합의에서 국가적 진리를 도출할 때까지 충돌하고 서로를 파괴한다. 따라서 중도라는 명분을 굳건히 다지기 위해서는 자신의 이익 외에 다른 이해관계가 없는 대표자에게 권력을 일임해야 한다”고 썼다. 그러므로 훌륭한 통치자는 대립을 뛰어넘어, 자신의 양 떼를 인도하는 양치기로서 진리의 길을 따르는 사람이 될 것이다.

1870년 제2 제정이 몰락하고 정치적 무게중심이 이동했으나, 담론의 핵심에는 변함이 없었다. 과거에 극단주의자로 분류됐던 온건 공화주의자들은 이제 이성을 내세운 새로운 단체를 구현하고 나섰으며, 그곳에서 가능성의 한계들을 시험했다. 1901년에 창당한 급진당은 특히 경쟁자인 사회당 및 공산당을 상대로 이런 주장을 끈질기게 활용할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급진당의 대표 기관지 <르 라디칼>은 호전주의자와 평화주의자,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는 입장을 고수했다. 

 

 

 

 

 

 

 

독일 제국주의와 소련 볼셰비즘의 융합

1913년 8월 25일 <르 라디칼>은 한 기사를 통해 “극단주의자들을 규탄하며, “정직한 사람들과 품위 있고 열정적으로 조국을 사랑하는 애국자들”에게 신중한 태도를 호소했다. 당시 급진 성향의 외무부 장관 스테판 피숑도 물론 이 ‘품위 있는’ 부류에 속했고, 언론은 “발칸 문제에 언제나 신중하고 온건하게” 접근하는 그의 태도를 칭송했다. 양극단의 융합을 끈질기게 비난해온 급진주의자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르 라디칼>은 1918년 7월 10일 자 간행물에서 “독일 제국주의와 볼셰비키의 사회주의적 제국주의의 극단성”을 공격하면서, 이들은 “서로 닮았을 뿐 아니라, 한 지점에서 융합된다”고 비난했다. 

독일과 소련의 이런 융합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단 하나의 합리적인 경제·정치 모델을 유지하기 위해, 공산주의, 파시즘, 나치즘을 한데 몰아넣을 수 있는 통합적 개념인 ‘전체주의’에 대한 비난과 함께, 큰 변화 없이 오랜 번영을 누릴 터였다. 전체주의라는 개념은 1920년대에 이탈리아의 두체(이탈리아 파시스트 집권기의 국가 원수직)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붓끝에서 탄생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나 아렌트의 저작들이 전체주의의 윤곽을 명확히 설명하면서 비로소 그 실체가 드러났다. 

한나 아렌트는 1951년에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전체주의 운동은 한두 가지 이유로 정치조직의 욕구를 발견한 대중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가능하다”고 썼다. 카를 프리드리히와, 훗날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을 맡게 될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처럼, 여러 연구자가 ‘전체주의 체제’를 식별할 기준을 정의함으로써 전체주의를 객관화하려고 노력했다. 즉 전체주의는 절대 권력을 지닌 한 명의 지도자가 지배하는 단일 정당, 공포의 일상화, 경제의 중앙집권화, 권력의 통신 수단 장악 등으로 정의할 수 있다. 

전체주의 노선은 소련의 붉은 군대가 동부전선에서 수백만 나치 병사들을 궤멸한 사실을 비롯해, 이오시프 스탈린과 아돌프 히틀러를 갈라놓는 모든 것을 부정하며 두 인물을 연결시켰다. 이 노선은 냉전 기간 서구 진영에서 큰 성공을 거뒀고, 특히 프랑스가 효과적으로 그 맥을 이어나갔다. 1957년 철학자 레몽 아롱이 소르본 강의에서 한나 아렌트의 저작들을 종합적으로 다뤘고, 그 뒤 1978년에 창간된 잡지 <코망테르>가 ‘전체주의’라는 개념을 특히 많이 거론했다. 

1978년에서 2018년까지 <코망테르>에 실린 전체주의 관련 기사는 162개 호, 381개 기사에 달했다. 1982년에 역사가 프랑수아 퓌레는 ‘우파 지성에서 좌파 지성에 이르기까지’, 지식인, 저널리스트, 정치 지도자, 사업가들을 한데 모으고자 ‘생시몽 재단’을 창설했는데, 이 재단도 이런 이데올로기적 해석의 장려를 목표로 삼았다. 생시몽 재단은 ‘극단성’을 비난하면서 ‘합리적인 정부’를 설파했는데, 합리적인 정부란 ‘지성과 정치의 만남으로 더 만족스럽게 도출해낼 수 있는 것’을 의미했다.(8)

이 재단에는 역사학자 피에르 로장발롱, 자크 쥐야르, 피에르 노라 같은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참여해 인적 네트워크도 신속하게 구성됐다. 이들의 의견은 칼만-레비 출판사에서 레몽 아롱이 구성한 전집으로 출판됐고, 일간지 <르몽드>는 수시로 이 전집 광고를 내보냈다. <르몽드> 감독위원회 의장을 역임한(1994~2008) 알랭 맹이 바로 이 재단의 회계 담당자다. 이런 지지에 힘입어 ‘양극단의 융합’ 이론은 이제 학계에서도 입지를 다져나가고 있다. 

일례로, 2014~2015년 파리 정치연구소는 연구원들에게 ‘양극단에서 정치를 생각하기’라는 제목의 강연을 제공했다. 강연의 목적은 “극우와 극좌를 더 잘 이해함으로써 여러 형태의 극단주의에서 공통점을 식별하기 위함”이다. ‘융합 지점들’이라는 제목의 강연 제2부의 한 섹션은 ‘세계의 음모와 대립적 시각’이라는 주제를 길게 논의했는데, 장마리 르펜과 노동투쟁당 관련 문제들을 중점적으로 비교했다. 또 한 섹션에서는 양극단이 공통으로 드러내는 ‘유로포비아와 반세계화’를 연구했다. 

이런 유형의 강연은 정치학자 파스칼 페리노가 매우 선호하는 ‘좌파 르페니즘(근본적으로 좌파를 지지하는 유권자가 좌파의 전통적 가치인 진보적 사상이나 이민문제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드러내는 현상. 1995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시 인민전선 소속 장마리 르펜을 지지한 유권자들 중 노동자 및 실업자가 높은 비율을 차지한 현상을 분석하면서 파스칼 페리노가 사용한 표현-역주)’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학계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분분하다. 좌파 르페니즘은, 무엇보다 경제적·문화적 자산이 충분치 않았을 과거의 공산주의 지지자들이, 인민전선이 설파하는 단순한 화법에 무의식적으로 끌릴 것이고, 따라서 인민전선의 득세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오믈렛의 양끝’을 잘라내는 문제

20여 년 전부터, ‘양극단은 서로 만난다’는 생각은 마침내 프랑스 정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논거가 돼버렸다. 르 펜은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득표율 2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는데, 이는 극좌파의 ‘군소 후보들’ 때문이었다. 뿔뿔이 흩어져버린 좌파 후보들의 표는 리오넬 조스팽의 당연한 패배를 재촉했고, 이것이 본의 아니게 극우 쪽에 유리한 상황으로 전개되면서 좌파가 우파의 명백한 우군이 된 것이다. <리베라시옹>의 기자 장 카트르메르는 당시 유럽연합 선거 집행위원을 맡은 파스칼 라미에게 “극단주의에 찬성표를 던지는 유권자들의 행위를 유럽과 세계의 복잡성에 대한 거부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은가?”라고 물었다(2002년 5월 3일). 그러자 프랑스 유권자들의 지성에 별로 확신이 없는 파스칼 라미는 “프랑스인들은 자국 체제의 복잡성을 이해하는가?”라고 되받아쳤다. 

그리고 2005년, 유럽헌법조약(TCE)에 대한 국민투표가 시행됐다. <르몽드>는 사설을 통해, 유럽헌법조약에 대한 반대 결과는 오로지 ‘극우, 극좌, 기권표로 구성된 거대한 반대 전선’의 승리일 뿐이라고 해석했다. 당시 사회당의 마르틴 오브리는 유럽헌법조약에 대한 거부가 ‘포퓰리즘’을 표방할 뿐이라고 평가했다.(9) 양극단이 커다란 ‘반대 전선’을 이루면서 프랑스 앵수미즈, 국민연합(RN)은 물론, ‘노란 조끼’ 운동, 브렉시트, 도널드 트럼프, 버니 샌더스, 이탈리아의 연정 등에 대해서도 포퓰리즘이라는 잣대가 더해졌다.(10)

페리노는 한동안 ‘좌파 르페니스트들’을 몰아세우더니, 이제는 유럽연합을 비판하는 이들을 죄다 ‘국가-포퓰리스트’로 규정한다. 언론은 우파와 좌파라는 대립이, 이제 유럽연합 지지자와 반대자, ‘자유주의자’와 ‘반자유주의자’, ‘열린사회’ 옹호자와 ‘폐쇄사회’ 예찬론자라는 새로운 이분법에 자리를 내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현 프랑스 총리 에두아르 필리프의 자문역인 알랭 쥐페 전 총리는 4년 전 프랑스공화국 대통령이 장차 제시해야할 계획을 알린 바 있다. “언젠가는 오믈렛의 양 끝을 자르는 문제를 심사숙고해야 할 것이다. 합리적인 사람들이 통치하고, 우파든 좌파든 세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극단주의자들을 제쳐놓으려면 말이다.”(11)

그밖에 이 ‘양극단의 융합’ 게임에서, ‘자유주의자’인 앙겔라 메르켈과 에마뉘엘 마크롱, ‘반자유주의자’인 마테오 살비니(이탈리아 부총리 겸 내무부 장관)와 빅토르 오르반 사이에서도 쉽게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이들은 모두 사유재산과 ‘중산층’을 찬양하고, 세금 및 사회분담금 인하와 노동법 유연화를 꾀한다. 또한 ‘빈민층’과 노동 쟁의권 통제를 꿈꾼다. 그러나 양극단의 이런 유사성에 주목한다는 생각은 공식 발언이나 언론에 그렇게 흔히 등장하는 사안은 아니며, 시앙스포(정치학 연구소)의 강의 주제도 아니다.   

 

 

 

글·콩스탕탱 브리소 Constantin Brissaud
스트라스부르대학교 정치학 박사과정

번역·조민영 sandbird@hanmail.net
번역위원.

 

(1) 앞에서 인용한 부분이나, 프랑스대혁명 이전에 사용된 ‘극단주의’ 용법에 대한 정확한 출처는 Uwe Backes(우베 바케스), ‘Extrême, extrémité, extrémisme. Une esquisse de l’histoire de ces mots dans la langue politique française(극단적, 극단성, 극단주의. 프랑스의 정치적 언어에서 이 단어들의 역사에 관한 스케치)’ 참조. <Mots>, n°55, Paris, 1998년 6월.

(2) Uwe Backes, 『Les Extrêmes politiques. Un historique du terme et du concept de l’Antiquité à nos jours(정치적 극단성. 고대부터 현대까지 극단성이라는 용어와 개념의 역사)』, Cerf, coll. <Politique>, Paris, 2011.

(3) Laura Mason, ‘Après la conjuration: le Directoire, la presse, et l’affaire des Égaux(공모 이후: 총재정부, 언론, 평등 문제’, <Annales historiques de la Révolution française(프랑스대혁명 연보)>, n°354, Paris, 2008년 10~12월호.

(4) Germaine de Staël, 『De l’influence des passions sur le bonheur des individus et des nations(개인과 국가의 행복에서 정열의 영향에 관해)』, 1796.

(5) Xavier Landrin, ‘“Gauche”, “droite”, “juste-milieu”: la formalisation politique de l’entre-deux sous la monarchie de juillet(‘좌파’ ‘우파’ ‘중도’: 7월 왕정 하에서 중도의 정치적 형성)’, ‘Gauche-droite: usages et enjeux d’un clivage canonique(좌파-우파: 일반적 대립의 용법과 쟁점’ 학회의 발표문 참조, Université Paris X-Nanterre, 2008년 6월 17일, www.hal.archives-ouvertes.fr 

(6) 관장할 때 쓰는 금속 재질의 대형 주사기. 

(7) Éric Anceau, 『Napoléon III(나폴레옹 3세)』, Tallandier, coll. <Texto>, Paris, 2012.

(8) ‘Droite, gauche, centre. L’exception française: fin ou recommencement? Entretien avec Jacques Julliard(우파, 좌파, 중도. 프랑스의 예외: 끝인가 아니면 새로운 시작인가? 자크 쥐야르와의 대담’, <Le Débat>, n°52, Paris, 1988.

(9) RTL, 2005년 3월 20일. <PLPL>, n°24, Paris, 2005년 4월.

(10) ‘Tous populistes(모든 포퓰리스트들)’, <Manière de voir>, n° 164, 2019년 4월 20일.

(11) <Le Point>, Paris, 2015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