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민족주의 성향의 새로운 ‘아이언맨’
이탈리아에 새로운 아이언맨이 등장했다. 많은 이들이 ‘구원자’라 칭하는 이 새로운 정권의 실세는 주세페 콘테 총리도 아니고, 지난 총선에 승리한 좌파정당 ‘오성운동(M5S)’의 루이지 디 마이오 대표도 아니다. 다름 아닌 마테오 살비니 내무장관이다. 밀라노 시의원직을 지냈고, 이탈리아 북부의 분리 독립운동을 주도한 ‘북부동맹’의 골수 당원인 그는 갑작스럽게 이탈리아의 최고 실세로 떠올랐다. 덩달아 북부동맹도 골동품으로 전락할 신세를 면하고, 이탈리아 정계의 중심축으로 거듭났으며, 심지어 유럽 전역까지 영향을 미치는 추세다.
이 놀라운 변화의 근간은 시간적 배경이 아닌, 지리적 배경에서 찾아야 한다. 2014년, 전쟁과 빈곤으로 인해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수백만 명이 자유와 평화, 일자리를 찾아 지중해를 건넜다. 오랜 역사와 부(富)를 지녔으나 여전히 불평등한 유럽을 향해서였다. 그러나 유럽은 그들을 외면했고, 그들의 절망적인 상황이 만들어낸 환상을 악용했다. 그들에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그들끼리 원한을 품어 반목하고 굴욕적인 경쟁을 하게끔 부추겼다. 그리하여 지구상의 최고 보유층은 평온한 반면, 빈곤층과 극빈층 간에는 끊임없이 경쟁하고 갈등하게 됐다. 이탈리아에서는 이런 ‘빈자들의 갈등구도’가 마테오 살비니 (부총리겸) 내무부 장관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는 가난한 이들의 심리를 꿰뚫어보고, 그들을 휘두르는 화법을 터득했다.
북부동맹은 1991년에 창당됐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를 지배했던 3대 대중 정당들(기독교민주당, 공산당, 사회당)이 분열하기 직전이었다. 북부동맹은 1980년대 중반에 등장한 움베르토 보시(1)의 롬바르드동맹과 북부의 소규모 정당들이 연합해서 탄생했다. ‘좌파도 우파도 아닌 정당’을 표방하며, 파다니아 독립을 목표로 조직됐다. ‘파다니아’는 북부의 ‘포(Po)’ 평원을 둘러싼 가상의 국가다. 근면하고 독립적인 북부가 부족하고 의존적인 남부를 먹여 살리는 데 지쳤으니, 각자 갈 길을 가자는 것이다.
이 시기에 ‘마니 풀리테(깨끗한 손)’라는 부패추방 운동이 벌어지면서 기독교민주당이 무너졌다.(2) 분열의 움직임은 널리 확산됐고, 이탈리아 공산당(PCI)은 베를린장벽 붕괴 이후 공산주의 색채를 포기했다. 북부동맹은 1994년 총선에서 첫 성과를 거두었다. 이탈리아 전체에서 8.7%, 밀라노가 주도인 롬바르디아주에서 17% 이상을 득표한 것이다. 그 다음 행보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이끄는 중도우파 정권에 참여했다. 그러나 움베르토 보시는 워낙 원색적이고 독자적인 성향이 강했던 탓에 하위신분에 만족하지 못했다. 곧이어 연정을 탈퇴하고 덩달아 베를루스코니도 타도했다. 북부동맹은 1996년 선거에서도 10%를 득표하며 연이어 독주하더니, 1999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4.5%의 득표율로 주춤세를 보였다.
베를루스코니 퇴장 후 활발한 행보를 펼치다
이후 다시 베를루스코니 정부와 연정체제로 돌아갔다. 10년간 소수 파트너로서 목소리만 컸을 뿐, 영향력은 미미한 존재로 지냈다. 설상가상 뇌졸중과 부패사건으로 타격을 입은 움베르토 보시는 2012년 2인자 로베르토 마로니에게 당수자리를 넘겼다. 북부동맹은 2013년 총선에서 득표수가 4.1%로 하락하면서 그대로 존재가 잊히는 듯했다. 이런 가운데 로베르토 마로니가 롬바르디아 주지사로 선출되고, 북부동맹의 당대표를 그만둔다. 마로니는 지역구에 자리가 있을 때 기회를 잡기 위해, 전국구에서 승산이 없는 북부동맹을 내려놓은 것으로 보인다.
2013년 12월 15일, 북부동맹은 차기 당대표를 선출하기 위해 당내 경선을 열었지만, 이는 실상 형식적 절차에 불과했다. 정당의 미래는, 마로니 전 대표와 마테오 살비니, 플라비오 토시 베로나 시장과의 아침식사 자리에서 이미 결정됐던 것이다. 당대표는 살비니가 맡고, 베를루스코니가 지지율 하락으로 인해 더 이상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 되면, 토시 시장에게 그 자리를 차지할 기회를 주기로 약속한 것이다. 살비니는 경선에서 82%를 득표하여 대승을 거뒀다. 이때만 해도 그는 이탈리아 유권자들 사이에서 거의 무명에 가까웠다.
마테오 살비니는 1973년에 기업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같은 해에 태동한 자율주의(Autonomism, 보통 독립적인 급진좌파 경향 및 아나키즘적 경향을 말함-역주)자율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17세에 고등학생 신분으로 롬바르드동맹에 가입했고, 이로부터 7년 후 시의원에 당선됐다. 이 시기에 그는 밀라노에서 가장 큰 사회센터였던 레온카발로에 자주 출입했다. 좌파성향을 띤 각양각색의 이탈리아 대안운동가들과 급진주의자들이 모여드는 장소였다. 이곳에 모여서 맥주를 마시고, 공연을 관람하고, 아나키스트 가수인 파브리지오 데 안드레의 음악을 음미했다. 살비니는 같은 북부동맹 출신인 마르코 포르멘티니 밀라노 시장이 레온카발로를 없애려고 하자, 그에 맞서기도 했다.
1997년, 북부동맹은 파다니아 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파다니아 선거’를 열었고, 살비니는 로고에 낫과 망치가 그려진 ‘파다니아 공산당’의 리더가 됐다. 그가 밀라노 시의원의 자리에 있다는 것은, 그의 반대편 세력에게 공격거리를 선사했다. 살비니에 대한 비판은 주로 집시, 무슬림, 안보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도둑에게 총을 쏜 가장을 두둔하는 한편, 이민자 범죄 고발을 위한 무료전화 설치를 제안했다. 또 시장 축제에 빠짐없이 참석하다가 갑자기 TV방송의 정기적인 초대 손님이 됐다. 북부동맹이 관리하는 미디어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했고, 당 기관지 <파다니아>의 기자로 활동하다가 <라디오 파다니아 리베라>의 국장이 됐다. 북부동맹은 방대한 분야에서 종횡무진 활동하는 당원들을 거느린 전지전능한 조직으로 부상했다.
2004년, 살비니의 활발한 행보는 유럽의회 의원 당선이라는 결실을 맺었다. 밀라노의 소외지역에서 결정적인 득표수를 얻어낸 것이다. 2006년에 밀라노 시의회의 북부동맹 대표직을 위해 유럽의회 의원직을 사퇴하지만, 2009년에 재선출된다. 2012년, 북부동맹 산하 국내지부인 롬바르드동맹의 대표가 된다. 이때 마로니의 뒤를 이을 차기 북부동맹 지도자로 눈도장을 찍게 된다.
살비니, 렌치 총리의 패배 속에 전면 등장
살비니가 이렇게 승승장구하게 된 데는 역사적 상황도 한몫했다. 유럽연합 창설의 아버지인 알티에로 스피넬리(3)는 유럽연방제(다양한 주권을 보유한 단위가, 더 큰 지배단위로 통합돼 가는 구조를 ‘연방제’라고 함. 따라서, ‘유럽연방제’는 유럽 각국이 ‘유럽’ 단위로 통합되는 구조를 가리킨다-역주)를 강력히 주장했지만 그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반면, 유럽연합은 민주적 직무를 망각한 채 정책을 정부에 강요하는 관료들로 가득했다. 이들은 다른 길을 가려는 국가들에게 재난이 일어날 것이라고 위협하며 신자유주의 재정긴축을 강요했다.
이탈리아는 마스트리흐트 조약(4)으로 가장 큰 고통을 받은 국가다. 2014년, 세계대전 이례 가장 교만한 정권이 들어서서 행정명령으로 노동법을 무효화시켰으며, 1946년 헌법의 핵심규정까지 무산시켰다. 2014년 2월, 의원 경력이 전무한 마테오 렌치가 총리에 선출됐다. 그는 민주당을 장악했고, 좌파세력을 구현하라는 당의 전통적 요구를 묵살하고 베를루스코니와 협정을 맺었다.
대통령, 기업연합, 은행, 다국적 기업의 아낌없는 지지를 등에 업은 렌치 총리는 헌법개정안을 국민투표에 부쳐도 될 만큼 자신의 인기에 대해 자만했다. 그러나 모든 정치 세력들이 반기를 들었고, 유권자들은 그에게 처절한 패배를 안겨줬다.(5) 특히 렌치 총리는 자신이 대변한다고 믿었던 청년층으로부터 80%의 반대표를 받았다. 그날 밤, 개정안에 거세게 반발했던 살비니는 전국적인 유명인사가 됐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북부동맹 수장은 두 가지 큰 변화를 감행했다. 새로운 선거전략과 혁신적인 디지털 보고방식이었다. 본래 분리독립을 위해 보시가 창설한 북부동맹은 로마와 남부를 적으로 간주했다. 전자는 공직부패의 온상이고, 후자는 나태한 기생충의 본거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2010년 초, 이 전략은 극명한 한계에 부딪힌다. 독립은 성공은커녕 시도될 가능성조차 없었다. 더군다나 정당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당시 설문조사의 예상 득표율은 3~4%를 오르내렸다.
살비니는 당대표가 되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비난의 화살을 로마에서 유럽연합으로, 남부에서 이민자로 돌린 것이다. 그렇게 모든 이탈리아인을 대변해서 ‘압제자’와 ‘침입자’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남부와의 대립을 포기한 대신 풀리아주 농민, 시칠리아 어부, 베니스 상인, 롬바르디아주 고위간부의 표를 얻게 됐다. 그들은 모두 냉정한 권력의 희생자인 동시에, 밀려드는 이민자들에게 거부감을 가진 이들이었다.
살비니의 페이스북, 신문에 버금가는 역할
살비니는 먼저 유럽연합에 대한 불만부터 건드렸다. 이탈리아는 모든 예산안에 대해서 유럽위원회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유럽연합은 이탈리아의 희생을 거듭 요구했고, 중도우파와 중도좌파도 이에 동의했다. 살비니는 취임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선공을 날렸다. “우리는 유럽연합에 빼앗긴 경제주권을 되찾아야 한다. 유럽연합은 우리를 방해한다. (중략) 이는 유럽연합이 아니라 소련이다. 누구든 의지만 있다면 함께 이 강제노동수용소를 벗어나고자 한다.” 당시 2014년 유럽의회 선거가 다가오고 있었다. 살비니는 계속해서 유럽연합을 공격하며 이탈리아는 유로존을 탈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이제까지 좌파와 우파 모두 정치담론에서 미뤄뒀던 사안으로, 민심을 얻는 것은 실패했다. 북부동맹은 점수를 올리기는커녕 유럽의회에서 의석 9개 중 3개를 잃었다.
이 시기에 루카 모리시가 등장한다. 파트너와 함께 ‘시스테마 인트라넷’을 운영하는 45세 IT전문가였다. 직원 한 명 없이 여러 기업고객만 보유한 이 회사는 살비니를 고객으로 유치하는데 성공했다. 태블릿을 손에서 놓지 않는 살비니는, 트위터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알았다. 하지만 페이스북에서는 존재감이 없었다. 새로운 디지털 고문은 전략을 바꾸라고 조언했다. 루가 모리시의 표현을 빌리자면, “트위터는 자신 안에 머무는 굴레와 같다. 사람들은 페이스북에 페이스북에 있다.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페이스북이다.” 곧이어 SNS전담팀이 꾸려졌고, 금세 북부동맹의 핵심 부서로 등극했다.
모리시는 당대표의 10계명을 발표했다.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는 것은 살비니 본인, 한 명이다. 그렇지 않으면 혼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글을 올리는 임무는 연중무휴다. 하루도 빠짐없이, 항상 최근 있었던 행사를 언급해야 한다. 문장은 일정한 길이를 유지하고, 간결해야 한다. 사람들의 행동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남겨야 한다. ‘우리’라는 대명사를 최대한 많이 사용해야 한다. 사람들에게 동질감을 주기 위함이다. 댓글을 자세히 읽고 종종 댓글에 대한 댓글을 달아야 한다. 여론을 알기 위함이다. 이렇게 계명을 충실히 따른 결과, 살비니의 페이스북 계정은 신문에 버금가는 기능을 수행하기에 이른다.
매일 일정한 시간에 게시물이 올라왔고, 수많은 계정이 게시물을 퍼날랐다. 방문자의 반응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됐다. 모리시와 동료들은 매주 80~90개의 글을 올린 반면, 렌치 총리와 그의 팀은 10개를 넘기지 못했다. 모리시는 방문자를 단골로 만들기 위한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같은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해서 기성 정치인들보다 단골 방문객을 늘리겠다는 것이다.
메시지는 회유적이거나, 때로는 다소 공격적이었다. 살비니는 사람들의 비방을 유도하는 ‘오늘의 적(불법이민 노동자, 부패관료, 민주당, 유럽연합 등)’에 대한 게시물을 올렸다. 그리고 바다, 자신이 먹는 음식, 지지자와 포옹하는 모습, 낚시하는 사진 등을 올렸다. 대중은 살비니가 누텔라(초콜릿 스프레드)를 먹고, 토르텔리니(만두 모양의 파스타)를 요리하고, 오렌지를 베어 물고, 음악을 듣고, TV를 보는 이미지를 끊임없이 소비했다.
수백만 명의 이탈리아 국민에게 살비니의 삶이 매일 공개되면서, 전략대로 공과 사가 자연스럽게 뒤섞였다. 이 절충적 전략은 인간적이고 든든한 이미지를 구축해서 원하는 바를 관철시키기 위함이었다.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다음과 같았다. “나를 반동적인 괴물이나 가벼운 포퓰리스트로 보는 관례가 있지만, 사실 나는 소탈하고 정직한 사람이다. 나도 당신과 같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나를 한번 믿어보라.”
유럽 지도자중 최고의 페이스부커, 살비니
모리시의 또 다른 전략은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이었다. 먼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TV에 내보내고, 동시에 페이스북에도 올린다. 온라인에 댓글이 올라오면 몇 개를 골라서 다시 방송에 내보낸다. 방송이 끝나면 그 부분을 발췌해서 페이스북에 다시 올리는 방식이다. 살비니도 이미 잘 알고 있는 이 접근방식은 단시간에 성과를 냈다. 2015년 1월 중순부터 2월 중순 사이 렌치 총리의 2배에 달하는 방송시간을 따낸 것이다. 페이스북 방문자도 2013년 1만 8,000명에서 2015년 중반 150만 명으로 늘어났고, 현재 300만 명을 넘어섰다. 유럽 정치지도자들 중에서 단연 최고 성적이다.
반대세력들은 살비니를 변덕스럽고, 제멋대로이며, 여론몰이만 잘하는 인물로 여겼다. 그러나 극단적 개인화가 특징인 이탈리아 정치계에서 북부동맹 당수는 강력한 무기를 갖고 있었다.(6) 베를루스코니는 롬바르디아주 아르코르 별장의 집무실에서 TV를 통해 대중에게 모습을 비췄고, 렌치는 피렌체에서 멀티미디어 행사를 통해서 작가와 가수를 대동한 모습을 보여줬다. 주세페 ‘베페’ 그릴로의 경우, 코미디언 시절에는 날카로운 성향을 보였으며, 대규모 시위를 조직하는 역량을 가졌었다. 그러나 오성운동 창당 이후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뒤에서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자처했다.
반면, 살비니는 대중적이고 진정성 있으며 국민과의 소통을 즐기는 인물로 비춰지고 있다. 클럽에서 음료를 마시며, 함께 사진을 찍으려는 지지자들에게 둘러싸인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이탈리아 지도자들 중, 이토록 자연스럽게 대중과 어우러진 이미지를 연출한 이는 살비니가 유일하다.
좌파의 경우, 과거의 표상 뒤에 숨은 채, 내부적 불화로 인한 분열과 자멸의 길을 걸었다. 좌파는 무의미한 단합을 외치며 협정과 연맹을 늘리는 방식으로 선거구를 관리하고, 해외이전에 반대하고, 노동자 권리를 짓밟는 국가들의 비열한 경쟁에 맞서고자 보호무역주의를 주창했다. 그동안 살비니는 방송국 카메라를 대동하고 공장 앞에 모인 노동자들을 만나러 갔다. 그리고 수십 년간 소외됐던 그들에게 미디어 앞에 설 기회를 선사했다. 결과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2016년, 북부동맹은 몇몇 지역에서 최고 성적을 거뒀으며, “붉은 토스카나”에서 제2정당으로 등극했다. 북부의 에밀리아로마냐주, 중부의 움브리아주, 한때 PCI의 선거구였던 중부의 마르케주까지 북부동맹이 휩쓸었다.
2018년 3월 4일 총선이 결정적이었다. 북부동맹은 베를루스코니와 이탈리아형제들(FDI·세계대전 이후 마지막 남은 신파시스트 정당)과 연합한 덕에 득표율이 4배 증가한 17.3%라는 쾌거를 올렸다. 이 과정에서 ‘북부’라는 명칭을 포기하고 당명을 ‘동맹’으로 바꿨다. 기반은 여전히 북부지만, 이제 남부에도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동맹은 처음으로 베를루스코니가 소속된 전진 이탈리아(FI)를 앞질렀다. 최종적으로 중도우파 연합은 37%를 득표했고, 중도좌파의 2배에 달하는 의석을 차지했다. 사실 진정한 우승자는 나폴리 출신 30세 청년인 루이지 디 마이오가 이끄는 오성운동이었지만 말이다. 오성운동은 32%를 획득하며 다른 정당들을 크게 앞섰다.
3개 진영 모두 의회 과반석을 확보하기 못했기 때문에 연립정부를 구성해야 했다. 3개월간의 속임수와 뒷공작 끝에 오성운동과 동맹은 연정을 구성하는데 합의했다. 연립정부는 6월에 꾸려졌다. 살비니와 디 마이오가 부총리를 맡고, 오성운동의 콩테가 총리가 됐다. 콩테 총리는 법학교수로 대중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주류 언론들은 이 ‘황색-녹색 연합’에 아연실색했다. 사실 두 정당은 정책보다는 행동 면에서 유사한 점이 많다. 지칠 줄 모르는 격렬함, 반체제적 수사법, 대내외 적들에 대한 끊임없는 고발, ‘대중’을 향한 탄원, 온라인에서의 모든 이슈를 슬로건이나 지속한 농담으로 바꿔버리는 공격성 등이다. 이데올로기 면에서는 유럽연합에 호전적이고 단일통화에 회의적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탈리아가 긴축재정과 경제침체를 겪게 된 원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놓은 주요 정책들은 서로 대립한다. 동맹은 일률과세를 도입하길 원한다. 북부의 사회기반을 구성하는 소기업들의 표심을 잡기 위해 우파가 전통적으로 내놓는 방책이다. 반면 오성운동은 최저수입을 보장해서 특히 남부에 몰려있는 실업자, 임시직, 빈곤층을 돕고자 한다. 결국 좌파와 우파의 고전적인 대립구조의 문제로 돌아간다. ‘분배’ 문제에 있어서 판이하게 다른 두 정책 때문에 두 정당 사이에 금이 그어진다.
내각 안에서 오성운동은 사회경제적 비중이 높은 부처들을 장악했고, 동맹은 상징성, 정체성과 관련된 영역을 맡았다. 새로 임명된 장관 중 90%가 행정부에서 일한 경험이 전무했다. 살비니는 내무부 장관, 디 마이오는 노동산업부 장관이 됐다. 처음에는 총선에서 승리한 오성운동이 인프라부, 보건부, 문화부 등 요직을 차지한 듯 보였다. 유권자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부처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 정부가 들어선 순간부터 ‘딥 스테이트’(7)의 감시가 시작됐다. 세르지오 마타렐라 이탈리아 대통령, 이탈리아은행, 증권거래소, 유럽중앙은행 등이다. 특히 유럽중앙은행은 재무부, 유럽부 등 경제와 밀접히 관련된 부처들을 예의주시했다. 또한 마타렐라 대통령은 연립정부가 내놓은 후보가 유럽연합을 순순히 따르지 않을 것으로 판단될 경우, 거침없이 거부권을 행사했다. 예산안에 대한 오성운동의 영향력은 순식간에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오성운동이나 동맹이 발의한 법안(최저수입 보장, 퇴직연령 하향조정 등)이 통과될 것 같으면 유럽위원회와 내통자들이 즉시 개입했다.
한편 살비니는 그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극대화시켰다. 내무부 장관으로서 군경재킷을 장착한 채, 든든한 보안관 이미지를 구축했다. 또한 그의 심복에게 가족부 장관직을 맡겼다. 강력한 미디어 효과를 톡톡히 볼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러나 성실한 정부로서 가장 중요한 도덕적 책임은 이행하지 않았다. 민간 비정부기구 난민구조선의 이탈리아 진입을 막는 불법이민 반대운동을 벌인 것이다. 오성운동은 이민자의 ‘침공’을 막자는 프로파간다를 수년간 벌여왔는데, 이제는 동맹이 그 족적을 따라 때로는 “잔인한 외국인 혐오”라는 질책을 감내하며 지뢰밭을 걷게 됐다.
총선 이후 연정에서 살비니 ‘북부동맹’이 주도
‘황색-녹색’ 연합정부가 들어선 지 몇 달 만에, 어떤 색이 우위를 점했는지 명확해졌다.(8) 총선결과는 오성운동 득표수의 절반에도 못 미쳤지만, 실질적으로는 동맹이 오성운동의 두 배 이상은 득표한 것처럼 압도적인 주도권을 행사했다. 이처럼 주객전도된 상황은 2019년 1~4월에 치러진 3차례의 지방선거를 통해 냉정한 정치적 사실로 굳어졌다. 이 모든 일은 남부에서 벌어졌다. 2018년만 해도 남부는 황색(오성운동)에 우호적이었던 지역이다.
중부의 아브루초주에서 오성운동의 득표율은 39.8%에서 19.7%로 하락한 반면, 녹색(북부동맹)은 13.8%에서 27.5%로 대폭 상승했다. 사르데냐섬에서도 전자는 42.4%에서 9.7%로 하락하며 참패를 당했고, 후자는 10.8%에서 11.4%로 소폭 상승했다. 남부의 바실리카타주에서도 전자는 44.3%에서 20.3%로 반토막이 났고, 후자는 6.3%에서 19.1%로 무려 3배나 증가했다.
동맹은 전진 이탈리아(FI), 이탈리아 형제들(FDI) 등 여러 정당과 연합한 덕에 앞의 세 지역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이처럼 지역적으로는 전진 이탈리아, 이탈리아 형제들과 손을 잡고, 로마에서는 오성운동과 연합을 유지함으로써 거국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현재 동맹은 이탈리아 정계의 중심을 장악했다. 살비니 장관은 카드를 나눠주고 게임규칙을 설명하며, 미디어가 자신의 말을 맹목적으로 뒤쫓길 종용한다. 자신이 내뱉은 약속과 선동하는 말들은 물론, 오래 전부터 TV, 신문, 인터넷에서 워낙 자주 언급했기에 진짜처럼 굳어져버린 ‘상식’들까지 말이다. 이탈리아 정치는 ‘북부동맹화’하는 중이다. 이제는 민간 비정부 기구(NGO)를 난민 밀입국업자와 결탁한 ‘수상택시’라고 비난하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국민에게 안보가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주장하고, 이민자를 모든 문제의 원흉이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해졌다. 한때 동맹과 신자유주의자들의 전유물이라 여겼던 논리들을 이제는 모두가 납득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유럽연합 회의론자로 거론되는 유럽연합 주요국 우파 지도자들 중에 유일하게 살비니에게서만 정권을 잡을 가능성이 보인다. 사실 그에게는 강력한 무기가 있다. 이탈리아 정치시스템은 오래 전부터 신(新)파시즘에 동화돼 있었기 때문에 동맹은 ‘차별화’ 전략을 쓸 수 있었다. 동맹은 이데올로기적으로 극우에 속하지만, 살비니는 뿌리의 절반이 좌파임을 잊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나더러 파시스트라고 하면 나는 웃는다. 로베르토 마로니는 내가 공산주의자일거라고 생각했다. 옷차림부터 시작해서 북부동맹 안에서는 공산주의자와 비슷한 면이 가장 많았기 때문이다.” 2015년까지만 해도 살비니는 그리스 시리자(급진 좌파연합)을 숭배했기에, 공공투자은행 설립이나 신자유주의 연금제도 개혁안 폐지 등 전형적인 좌파 논리를 선전하고 다녔었다. 살비니는 운 좋게도 급진좌파와 개혁주의가 거의 사라진 상황에서 변화를 꾀할 수 있었다. 프랑스, 스페인, 영국, 독일에서도 정권의 근거 없는 주장에 저항하는 민중세력은 정치 스펙트럼에서 항상 좌파 쪽에 위치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정반대로 흘러갔다. 사회, 경제, 지리적 상황도 한몫 했다. 유럽연합 주요국 중 이탈리아만큼 유로 때문에 피해를 본 국가도 없다. 단일통화 도입 이후 1인당 소득은 거의 오르지 않은 반면, 성장률은 참담했다. 게다가 유럽연합을 통틀어 가장 긴 반도를 가진 이탈리아는 이민자들의 교차로 신세가 됐다. 이탈리아는 그동안 이민자를 대거 배출하며 세계 인구이동률을 책임졌던 입장에서 이런 상황이 별로 익숙하지 않다. 더군다나 경기침체로 일자리와 사회보조금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말이다. 이렇듯 긴장상태가 과열되는 가운데 살비니가 계급갈등을 잠재우고 이를 빈곤층 간의 싸움으로 전환시킬 이상적인 존재로 등장했다.
살비니, ‘제2의 베를루스코니’가 될 것인가?
살비니가 팔라조 키지(총리궁)에 입성한다면, 제2의 베를루스코니가 될 수 있을까? EU에 대한 태도가 결정적인 관문이 될 것이다. ‘카발리에레(기사)’라 불렸던 베를루스코니는 수많은 호언장담에도 아무런 큰 변화도 일으키지 못했다. 게다가 유럽이사회에서 벌인 작태보다는 스캔들로 더 유명했다. 살비니는 그보다 더 냉철하고 이데올로기적이다. 그는 2019년 유럽의회선거에서 우파 포퓰리즘 진영의 도래를 약속했다. 트럼프 수석고문이었던 스티븐 바논이 창시한 ‘국제적 주권주의’을 말한다.
살비니는 오래전부터 블라디미르 푸틴을 찬양했다. 그러나 러시아보다는 미국이 더 중요했고, 그의 성향이나 스타일도 크렘린 주인보다는 백악관 주인과 훨씬 더 비슷했다. 다시 말해,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을 굴복시키려는데 동조한다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디 마이오 부총리는 ‘신 실크로드’에 관한 선물을 한아름 들고 이탈리아를 방문한 시진핑 중국 주석을 맞이해서 살비니의 심기를 건드렸다.
유럽연합 내에서도 이 두 사람의 차이점이 드러났다. 오성운동 수장인 디마이오 부총리는 프랑스 ‘노란조끼’를 열렬히 지지하는 급진적인 모습을 보였고, 북부동맹의 살비니는 이들을 파괴자로 여겼다. 살비니는 유럽연합이라는 ‘감옥’을 무너뜨리는 대신 창살을 두드리는 수준에 그쳤다. 그는 유럽위원회의 ‘권고’를 마침내 충족한 현재의 이탈리아 예산안에 동의했다. 유럽과의 제도적 대립 안에서 했던 약속보다 현 상황에 유용하게 적응하는 편이 더 현실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동맹의 사회적 기반은 메이저 은행, EU 규정, 다국적 기업에 적대적일지는 몰라도, 성향은 의심할여지 없이 자본주의에 가깝다. 보시도 한창때 EU를 적대시했지만, 북부동맹이 마스트리흐트 조약과 리스본 조약에 찬성표를 던지는 걸 막지는 못했다.
살비니에게 단일통화는 출세에 필요하기는 하지만, 일단 정상에 오르면 버려야 할 것이다. “국경 여과장치”에 대한 고발이야말로 권력으로 직행하는 티켓이다. 게다가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유럽연합도 특별히 방해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글·마테오 푸치아렐리 Matteo Pucciarelli
이탈리아의 저널리스트. 저서로는 『Anatomia di un populista-La vera storia di Matteo Salvini(포퓰리스트의 해부-마테오 살비니의 실화)』(2016), 『Una storia di Democrazia proletaria(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역사)』(2011) 등.
번역·이보미 lee_bomi@hotmail.com
번역위원.
(1) Umberto Bossi(1941~) 이탈리아의 정치인. 이탈리아 북부 독립을 목표로 북부동맹을 창당.
(2) L’affaire Tangentopoli, qui a éclaté en 1992, était un vaste système de pots-de-vin entre dirigeants politiques et industriels. Elle a donné lieu à l’opération judiciaire “Mani pulite”(mains propres).
(3) Altiero Spinelli(1907~1986) 이탈리아의 정치인. 유럽 국가들의 연방화를 주장.
(4) 유럽공동체(EC)가 유럽연합(EU)으로 출범이 가능하게 한 조약. 1991년 12월 11일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에서 유럽공동체 12개국이 참석한 가운데 체결됨.
(5) Raffaele Laudani, ‘Matteo Renzi, un certain goût pour la casse’, ‘Matteo Renzi se rêve en Phénix’,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4년 7월호, 2017년 1월호.
(6) Mauro Calise, ‘La Democrazia del leader’, Laterza, Rome-Bari, 2016년.
(7) Deep state. 숨은 권력집단.
(8) Stefano Palombarini, ‘En Italie, une fronde antieuropéenne? 유럽연합에 반항하는 이탈리아 연립정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8년 11월호, 한국어판 2019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