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연극에 반기를 들며

2019-08-01     올리비에 느뵈 l 연극평론가

지난 2018년 2월 9일, 프랑스의 유명 연극연출자 장마크 뒤몽테는 <프랑스 5> 채널에 출연해, 자신이 주도하는 연극 페스티벌 ‘시민의 발언’을 홍보했다. 한 달 동안 10편의 사회참여형 연극을 선보인 이 페스티벌에 대한 그의 열정은, 흡사 보이스카우트 단원을 방불케 했다. 뒤몽테는 ‘시민의 발언’이 “시대의 주요 사회 문제들에 관한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목표로 하며, “프랑스의 민주주의는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위협받고 있으며, 이를 진정으로 수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최측근이기도 한 장마크 뒤몽테의 직함은 다양하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연극연출가 외에도, 앙투안, 푸앵비에르귈, 보비노 극장 등 파리에 소재한 여러 극장의 소유주이자, ‘몰리에르’ 연극 페스티벌 기획자, 노련한 사업가, 민영 극장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는 전략가다. 무엇보다도, 그는 ‘친마크롱 계열’이라는 휘장을 걸친 인물이다. 성공의 화신으로 알려진 뒤몽테는 현재의 위치에서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만끽하며 만족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마크롱주의’에 의하면, 리더란 세상에서 이뤄낸 것들을 세상에 다시 돌려줘야 하는 사람이다. 뒤몽테 역시 자신이 이룬 것을 세상에 돌려주고 싶어 할 뿐이다. 일각에서 예측한 것처럼 문화부 장관은 아니지만 사회참여 페스티벌의 기획자로 임명된 뒤몽테에게 이 페스티벌은 자부심 그 자체이다. ‘인문주의’야말로 그의 전문 분야가 아니던가. ‘시민의 발언’의 홍보용 브로슈어에 쓰인 문구는 다음과 같다. “시의적 주제, 동시대의 저자들…. 우리가 이 연극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 여기’다.” 

 

열 편의 연극, 열 가지 호소

‘지금, 여기’라는 표현에는 우리 사회의 주요 토론주제들이 담긴 셈인데, 해당 페스티벌의 연극들은 폐쇄적 사회, 급진화, 정의, 타자, 여성 인권, 이미지, 관계 등을 주제로 한다. 뒤몽테는 2018년 2월 15일 <라크루아>지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털어놓았다.
“나는 평범한 시민들의 시민의식을 고취하고 싶었다. 최근 몇 년 사이, 수차례 테러가 발생했을 뿐 아니라 포퓰리즘이 급부상했다. 공고하다고 믿었던 민주주의가 실은 얼마나 취약한지 새삼 깨달았다. 우리는 모두 민주주의를 보강할 책임이 있다. 우리는 모두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각자의 몫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뒤몽테의 견해엔 다소 투박한 면이 있지만, 그의 신념 고백에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면 야박한 사람이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행동에 옮기는 것이고, 뒤몽테는 그렇게 했다. 페스티벌 ‘시민의 발언’의 부제는 명령조에 가까울 정도로 단정적이다. “열 편의 연극, 열 가지 호소. 당신은 공정할 수 있는가?” 프란츠 올리비에 지스베르는 이에 찬사를 보내며 2018년 3월 5일 자 <르푸앵> 지에 “우리가 합의에 이른 것이 아니라고 경고 받은 셈”이라고 말했다.

뒤몽테에게 자선사업가의 비장한 과시욕 외에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연극은 흔히 의식을 고취할 책무를 지닌다. (무거운 쟁점을 다룸으로써) 정치 인식을 제고하고, (정치가 삶의 보완물이라는 인식 아래) 정치적 민감도를 높여야 할 책무를 지니는 것이다. 그러려면 삶과 경험, 다양한 분야에 관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이 지점에서 필연적으로 교훈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연극의 ‘쓸모’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강박

신자유주의는 특유의 실용주의적 강박을 극예술에 결부시킬 수밖에 없다. 이 연극의 쓸모는 무엇인가? 특히 연극의 제작비를 조달해야 할 때라면 준비해야 할 답이다. 요컨대 이 연극이란 것이 애초에 쓸모가 있는 것인가? 마크롱주의는 그 점을 보지 못한다. 여기서 우리는 ‘마크롱주의’의 마크롱이 마크롱 대통령 개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이해해야만 한다. 마크롱주의란 일종의 ‘몰이해’ 방식을 의미한다. 각종 직무와 행위, 사상을 자신들의 논리에 맞춰 굴종시키고, ‘일반적’이라는 무거운 선입견으로 삶을 계획하는 방식이다. 균일화와 계량화를 강요하고, 획일화된 어리석은 기준을 척도로 삼으며, 성공과 찬반투표에 집착하며, 유치하게도 성공을 과시하는 외적 지표에 흥분하는 방식 말이다.

이 마크롱주의는 연극에 세 가지 임무를 부여한다. 첫째는 관객을 즐겁게 하는 것. 이는 시장이 이미 스스로 수행해내고 있는 역할이다. 연극산업의 승자라 할 희극산업, 즉 환상적이고 유희적인 작품들이 일상으로부터의 도피, 위안과 유쾌함의 순간들을 제공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작품들은 사람들이 고된 일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축제의 기분 속에서 일상의 시간을 삶을 보내도록 해준다.

연극의 두 번째 임무는 가치 생산이다. 공연예술이라는 작은 시장에 몇몇 이름들이 등장한다. 이 극소수의 예술가들은 일종의 브랜드처럼 미디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정부 지원을 받는 스타트업 기업처럼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다. 이런 열풍은 때로는 맹목적인 경우도 있는데, 막상 작품만 따지고 보면 그런 만장일치의 열정을 정당화할 근거가 전혀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마지막 세 번째 임무가 남아 있다. 이는 문화계 분야에 우연히 임명된 고위급 관리가 쉽게 이해할 만한 주제의 명확성이다. 명부에 기록하고 수치를 표시하며 몇 개의 슬라이드 사진으로 요약할 수 있어야 한다. 연극의 세 번째 임무는 바로, 사람들을 교화해 의식을 고취하고 바로잡으며 결집시키는 것이다. 아주 오래전, 미풍양속을 널리 퍼뜨리고 ‘(정부의) 연극 지원금의 정당성’(1)을 오래도록 뒷받침하는 데 쓰였던 연극의 사회적 역할을 현대화된 버전으로 반복하는 셈이다. 

어떻게 보면 연극은 이중의 ‘교화’를 맡고 있는 셈인데, 관객들에게 교훈을 주며 설교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연극은 영국 노동당 ‘뉴레이버(new labor)’ 운동의 사례처럼, 평판이 떨어진 공교육의 예비 단계로 여겨지는 셈이다. 1990년대 중반 클레어 비숍은 뉴레이버 운동에 관해 이런 문장을 남겼다. 

“뉴레이버 노선은 사회참여에 따른 예술의 이익과 효과를 평가하는 업무를 싱크탱크에 맡겼다. 예술에서 말하는 ‘이익’은 예술이 적어도 사회통합의 겉치레를 이룬다는 생각으로 정당화됐다. ‘사회참여적 예술’의 모순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시장으로부터의 자유를 갈망하는 예술가들의 기대에도 부응해야 하는 한편, 이들을 재정 지원하는 정부를 위해 ‘포템킨적 기능(소련의 사회주의 혁명 선전영화 <전함 포템킨>의 영향을 말함-역주)’을 수행해야 하는 것 말이다.”(2)

기악극(Instrumentale theater)의 경우, 정부에서 프로젝트 자금을 지원받은 예술가들은 ‘창작할 권리’를 얻는 대신, 그 반대급부로 후원자의 간섭에 시달리며, 교도소에서든 학교에서든 시연을 해야 한다. 불안정한 상태에 놓인 이 예술가들은 언제든 동원가능한 예비군이자, 죄의식에 사로잡힌 부역자들이다. 물론 이런 상황 속에서도 어떤 예술가들은 기쁨과 의미를 발견하며, 이 의무를 기회로 삼아 무엇인가를 창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관점에서는 ‘예술작품’이라는 것이 그 자체로 충분하지 않은, 혹은 부차적인 것이 돼버린다.

 

각종 ‘시도’들에서 배제되는 연극

요컨대 연극은 각종 시도들로부터 점차 배제되는 중이다. 지식인들과 예술인들이 주체가 돼 신자유주의의 패권을 다투는 집단적이고, 사회참여적인 시도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오늘날의 사회투쟁에서 연극의 역할은 소박하기 그지없어서, 큰 반향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규칙에 충실한 리얼리즘에 사로잡힌 연극은, 한층 풍요롭고 창조적인 영감을 구현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표현의 자유’라는 경건한 비약이 아닌, 세상에 대한 저항에 예술과 문화를 포함시킬 수는 있다. 급여노동 이외의 시간에, 고단한 삶을 내려놓고 자유 시간을 갖고서 스스로의 삶에 대해 질문할 수 있다. 1966년 장 빌라는 자신이 속한 정치 진영에 이렇게 호소했다. “휴식할 권리, 여가를 즐길 권리, 즉 문화를 향유할 권리를 달라고 끝없이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거대한 (그러나 소리 없는) 외침이 들리지 않는가.”(3)

예술과 문화를 위해 투쟁한다는 것은 세상과 사회에 관한 다음과 같은 고민을 전제로 한다. 양질의 여가를 위해서는 어떤 재원을 지급해야 하는가? 자본의 포식자적 논리에 저항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자본의 논리가 소비와 생산의 영역을 속박하는 것을 뒤흔들 방법은 무엇인가.

어쩌면 문화와 창조는 보다 급진적인 관점들을 약화하고 교란하는 도구가 됐는지도 모른다. 그것들이 ‘투명하며, 고통을 해결하고자 노력하며,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사회’라는 거대한 사회적 거짓을 구현하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문화와 창조는 사회의 ‘변혁’보다는 ‘개선’을 지지한다. ‘건설적인 주제’라는 명분 아래, 예술과 문화를 동원하는 일은 매년 계속되며, 여기에는 사회적 요구가 어느 정도 함축돼 있다. 

즉, 예술과 문화가 미개함으로부터 공화국을 보호하며, 공화국의 가치를 드높인다는 것이다. 예술과 문화는 민주주의의 위대함을 구현하며, 현재진행형의 괴물들을 교화하고, 통합과 다문화주의를 지향한다. 그리고 가족과 학교를 보완하며, 보편성을 표방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예술과 문화는 ‘공화국’의 또 다른 이름인 셈이다. 이처럼 신중하면서도 명확한 실증성으로 미뤄볼 때, 이제 연극의 사회적 기능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연극의 실상으로 보나 실존으로 보나, 연극은 지금 이 사회에 반하는 논거, 즉 ‘또 다른 사회를 위한 논거’가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글·올리비에 느뵈 Olivier Neveux
리옹 고등사범학교 연극사 미학과 교수. 저서로 『정치적 연극에 반기를 들며』(La Fabrique, Paris, 2019)가 있으며, 본 기사는 해당 저서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번역·박나리 
번역위원

 

(1) Vincent Dubois, 『La Politique culturelle 문화적 정치』, Belin, coll. <Alpha>, Paris, 1999.

(2) Claire Bishop, ‘In the age of the Cultural Olympiad, we’re all public performers’, The Guardian, Londres, 2012년 7월 23일/ Claire Bishop, ‘Nous sommes tous des artistes publics 우리는 모두 공공 예술가다’, / Jean-Pierre Cometti et Nathalie Quintane(sous la dir. de), 『L’Art et l’argent 예술과 돈』, Éditions Amsterdam, Paris, 2017.

(3) Jean Vilar, 『Le Théâtre, service public et autres textes 연극, 공공 서비스 외 기타 텍스트』, Gallimard, coll. <Pratique du théâtre>, Paris, 19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