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용의 세계문학 오디세이(8)-잔여화하는 주체에 가능한, 어떤 부르짖음의 모색

2019-08-01     안치용(한국CSR연구소장)

프란츠 카프카가 강한 애착을 보인 소설로 알려진 『법 앞에서(Vor dem Gesetz)』는 짧지만 매우 흥미로운 작품이다. 1914년에 집필해 이듬해 유대인 주간지 <자기방어>에 단독으로 게재된 『법 앞에서』는 나중에 카프카의 소설 『소송』의 9장에 삽입됐다.

시골에서 온 한 남자가 ‘법(Gesetz)’ 안으로 들어가려고 시도하지만 문지기가 그를 가로막는다. ‘법’ 안으로 들어가려는 전 생애에 걸친 노력이 무위로 돌아가고 난 뒤 죽음을 앞둔 그 사람에게, 문지기는 이 입구가 단지 그만을 위한 것이었다고 말하고 문을 닫는다는 내용이다. 

“그 입구가 오직 너만을 위한 것이었다”라는 말을 듣지만, 생의 막바지에 자신의 눈앞에서 문이 닫혀버리는 기가 막힌 상황을 이 남자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했을까. 그래도 내가 올바른 입구 앞에 있었다는 최종 확인에 따른 안도? 혹은 그럼에도 마땅히 들어갔어야 할 문 앞에서 평생을 허비했다는 자책이나 회한이었을까? 안도나 회한이 아닌 전혀 다른 감정을 느꼈을 수도 있다. 인터넷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해석은 다음과 같다.

“시골에서 온 남자의 태도를 비판적으로 검증하고 반사회적 태도로 인식하게 되면, 이 비유의 핵심은 더욱 분명해진다. 그는 문지기의 주장을 단호한 행동을 통해 시험해보려고 시도하지 않은 것이다. 문지기의 위압적인 설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자유의지를 활용해 반항이나 재시도를 통해 법 안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했어야 했다.”(1)

이런 해석은 너무 평면적이다. 법의 문은 에덴동산의 유사품이 아니다. 『법 앞에서』에서 사용된 법에 해당하는 독일어는 ‘Recht’가 아니라 ‘Gesetz’다. ‘Gesetz’는 일반적 의미의 법률이자 동시에 종교적 의미의 율법이기도 하다. 카프카가 유대인임을 감안하면 율법 앞에 선 시골 사람이 ‘율법’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는 이야기는 있음직한 이야기이다. 이때 카프카가 어떤 존재 일반의 시작과 끝을 한꺼번에 말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텍스트에 집중하면, 그 시골 사람은 외견상 실패했지만 또한 응답을 받았다고도 할 수 있다. 통보받은 내용은 그 문이 열려 있으며 자신에게 허락된 문이었지만, 그 문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리라는 것이었다. 열려 있고 허락된 문은 응답을 뜻하고, 들어가지 못한 것은 실패로 보인다. 과연 그럴까? 이스라엘의 출애굽 전승에서 모세는 가나안 복지를 약속받지만 정작 자신은 그곳에 들어가지 못할 운명임을 야훼로부터 통보받는다. 널리 알려진 대로 가나안 복지에 들어간 이는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였다. 여기서 『법 앞에서』의 관점을 원용해, 모세는 선취된 근대인이었다고 말한다면 분명 논리의 비약이다. 그럼에도 모세와 카프카 『법 앞에서』의 시골 사람이 어느 정도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음은 직관적으로 드러난다. 

당연하게도 모세는 율법과 신 앞에서 불확실성이란 것을 모른다. 실제 근대인과 다른 점이다. 모세는 비록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고, 또한 가나안이 너(희)의 땅이라는 확증을 미리 받았다. 그것을 모세에게 몸소 통보한 이는 신이다. 

『법 앞에서』의 시골 사람은 ‘율법’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문이 자신에게 허락된 문이었음을 생의 최후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알게 된다. 그러나 비록 죽음의 순간에 도달해서이긴 하지만 그 문이 자신의 문이라는 확언은 그에게 마땅히 은총으로 해석돼야 한다. 신과 대면하는 관계인 모세와 달리, 신을 등지고 살아가는 근대인에겐 아마도 확언이 신에게서 허용된 최대의 은총일 터이다. 만일 근대인이 ‘문’ 밖으로 추방된 존재라는 명제를 수용한다면, 이향(離鄕)해 율법 밖의 존재로 살아가는 그에게 귀향(歸鄕)은 허락되지 않는다. 나아가 본향은 잊힌다. 

따라서 근대인에게 허락된 최선의 은총은 귀향의 성취가 아니라 본향의 확인이다. 그는 이향된 존재로 살아가며 신(神)(세계)과 대립하는 존재다. ‘문’ 밖의 존재인 그는 <‘문’ 밖>이란 존재의 근거에 입각해 응당 ‘문’ 안으로 들어가는 존재론적 기도(企圖)를 꿈꿔야 하지만, 현실에서 그는 ‘문’ 자체를 확인하는 것으로 삶의 좌표를 설정한다. 과거 ‘문’ 안에서 그는 신(세계)과 통일된 상태였지만 ‘문’ 밖으로 내쳐진 다음에 그는 신(세계)과 대치한다. 그리하여 그는 역설적으로 비로소 대치를 통해 주체로 정립된다.

안티테제는 테제와 동급일 수밖에 없다. ‘신의 형상(Imago Dei)’을 닮은 그는 ‘문’ 밖에서만 주체이며, 그 ‘문’을 인식함으로써 최고의 주체로 고양된다. 그러나 ‘문’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금지된다. 신이 아니라 근대성에 의해 금지된다. ‘문’ 저편에서가 아니라 ‘문’ 이편에서 금지된다. 저편으로 그 ‘문’을 통과하는 순간 그의 주체는 소멸하기 때문이다. 

 

A′ 없는 A는?

근대인은 ‘문’ 밖의 존재로서 스스로를 끊임없이 연장하고 확장한다. 출구는 전면적으로 잊히고 그는 출구가 망각된 세계에 당당히 맞선다. (세계로의 출구? 그렇다면 그곳은 동시에 신으로의 입구여야 한다. 만일 반대로 그곳이 세계로의 입구로 먼저 표현된다면 동시에 그곳을 신으로의 출구라고 불러야 한다. 남자에게도 여자의 자궁은 출구이자 입구이고, 이향이자 귀향이다. 남자에게 여자의 자궁으로 귀향은 정신분석학적 근친상간이듯, 내쫓김 이후에 스스로의 결단으로 신으로 되돌아갈 길을 뚫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그는 잠시 자신을 존엄한 주체라고 상상할 수 있다.  

중국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모옌의 『홍까오량 가족』(2)에는 주체가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넌 영웅을 숭상하지만 개자식은 미워하지. 하지만 가장 영웅적인 사내이면서 또한 가장 개자식이 아닌 이가 어디 있겠느냐?”

‘영웅과 개자식’은 ‘주체와 세계’처럼 대립관계로 설정되지 않았다. 영웅은 개자식이며 개자식은 영웅이다. 영웅과 개자식은 주체가 세계와 대립하는 양상일 뿐이다. 영웅과 개자식 사이의 간극이 클수록 세계에 대한 주체의 대응은 성공적이라고 판단된다. 주체의 영역이 확장됐고 주체는 웅장하고 확고하다고 말할 수 있다.

잭 런던의 소설 『강철군화(The iron heel)』의 주체도 확고한 주체이다. 파시즘에 맞선 투사들은 『홍까오량 가족』의 ‘가족’만큼은 아니지만 영웅적이다. 주인공 어니스트 에버하드는 충분히 영웅적이다. 하야마 요시키(葉山嘉樹)의 소설 『바다에서 사는 사람들』의 사람들 또한 『홍까오량 가족』과 『강철군화』의 등장인물들만큼 당당하고 매혹적이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영웅’으로 분류될 수 있다. 

『홍까오량 가족』 『강철군화』 『바다에서 사는 사람들』의 주인공들은 모두 확고한 주체다. 자신들만큼이나 확고한 세계와 늠름하게 맞선다. 제국주의 파시즘 자본가 등 이들이 적대하는 상대는 분명한 악으로 그려진다. 악은 세계를 지배하고 이들은 악이 지배한 그 세계와 용감하게 대결한다. 세계와 대치해 세계에서 악을 몰아내고 세계를 선으로 채울 것이란 희망은 불가피하게 종말론과 성전과 결부된다. 신이 없는 세계에서도 이들은 성별(聖別)된 존재이어야 한다. 

신으로부터 탈주한 또는 신으로부터 버림받은, 신의 형상을 닮은 주체는 스스로 신이 되는, 보통 ‘근대’라고 명명되는 세상을 기획한다. 『강철군화』에서 사용하는 기년법은 ‘B.O.M(Brotherhood of Man)’으로 B.O.M은 신의 아들 혹은 신 자신인 예수의 탄생을 기준으로 한 서력기원 BC(Before Christ), AD(Anno Domini)을 대체했다. 그리스도(Christ)나 주(Domini)의 자리를 인간(Man)이 차지한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 포드력을 쓰는 것과도 비교되는데, 포드력은 BC, AD의 대척점에 서지만 인간의 입장에서는 동일하다. 

B.O.M은 인간이 역사의 주체임을 선포하는 반면, 포드력과 BC·AD는 인간이 아닌 것을 역사의 주체로 선포한다. 인간이 아닌 것, 즉 비(非)인간적인 것의 정체는 기계문명이 인간을 밀어내버린 시스템이거나, 역사에서 친숙한 신이다. 

B.O.M의 세계관은 변증법에 의지한다. 변증법은 동일률에 입각한다. 테제는 안티테제를 만나 신테제로 진화하거나 발전하는데, A가 B와 대치하다 A′로 상승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여기서 B와의 대치를 블랙박스로 표시하면 A가 블랙박스를 거쳐 A′로 업그레이드되는 구조다. 간단히 A가 A′로 가게 된다. 그러려면 확고한 A는 필수적이다. 주체 없는 변증법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때 변증법적 주체 A는 B.O.M이 표현한 그대로 인간이다. A→A′, A→A″, A→A′′′‴로 변증법적 상승을 전개해야 한다면 A는 인간일 수밖에 없다. 신이 A→A′와 같은 방식으로 진화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A가 항상 A인 존재가 신이자, 그것이 신의 정의이기 때문이다.     

 

숨은 신, 숨은 주체

밀란 쿤데라의 소설 『농담』에서 변증법은 흔들린다. 『농담』의 주인공 루드비크와 『강철군화』의 주인공 어니스트의 채도를 비교하면 누구라도 어니스트의 채도가 훨씬 높다고 대답할 것이다. 『강철군화』에서 뚜렷하게 나타난 선악의 대비는 『농담』에선 모호해진다. 결연하게 맞서다 장렬하게 죽어간 어니스트와 비교할 때 루드비크의 삶은 속된 말로 ‘찌질하다’. 관계를 똥칠로 매조지는 끝부분 설사의 서사는, 소설 속의 헬레나처럼 수치 속에서 주체를 나뒹굴게 한다.

A는 B와 대치해 A′로 단련돼야 하지만 그러기엔 A가 너무 허약하다. 세계 또한 주체만큼이나 허약하고 흔들린다. 주체와 세계는 분명 구분되고 대립하지만 변증법을 감당할 만큼 확고하고 강인하지 않다. ′의 무게를 견뎌낼 수 없는 주체는 A에서 a로 가든지, 아예 A에서 B로 전환한다. 변증법이 작동을 멈추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주체의 계열은 유지된다. A′로 가지 못하는 A는, A이어도 B이어도 무방하다. A의 자리였던 곳을 A이든 B이든 C이든 그저 채우기만 하면 그만이다. 

주체의 이런 탈주체화는 일상적이 된다. 동시에 숨은 신의 숨어있음은 새삼 부각된다. 그동안 숨은 신이 숨었는지 죽었는지 전혀 관심사에 속하지 않았지만, 탈주체화와 함께 숨은 신의 ‘탈(脫)숨어있음’이 발생해 숨은 신은 비로소 숨어있는 존재가 된다. 숨은 신과 탈주체화하는 주체는 공존한다. 때로 숨은 신과 탈주체화하는 주체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다. 물론 대화는 불가능하다. 

탈주체화하는 주체라 해도 탈주체화하는 동안에는 주체임이 부인되지 않는다. 탈주체화하기 위한 주체라도 주체이기 때문이다. 보다 중요하게는 동일률의 율법이 A′의 지평이 닫힌 상태에서도 변함없이 A를 고수한 까닭에 몸 없는 가현(假現)의 A라도 존재해야 한다. 숨은 신에 이어 숨은 주체가 출현한 셈이다. 

이처럼 곤혹스런 사태에서 실존은 의심받고 대신 부조리가 해명된다. 한데 이 의심과 해명의 주체가 비록 잔여화하는 주체라 해도 여전히 악착같이 주체임을 고집하고 있음을 잊지는 말아야 한다. 

실존주의에서 설명하는 부조리는 관계욕구의 열망이자 고통이다. 부조리는 인간의 이성적 호소에 대해 침묵하는 세계를 논한다. 기본적으로 인간과 세계의 대립 구도다. 종교적으로는 출애굽의 좌초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에서 야훼는 이집트에서 노예살이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고통의 부르짖음에 응답한다. 근대의 인간은 이성의 부르짖음을 내뱉고 세계는 침묵한다. 신은 숨어버렸다. 마침내 인간도 마땅히 숨어야 하지 않겠는가. 숨은 주체와 숨은 신이 마찰을 빚은 곳에 부조리가 생긴다.    

중국의 또 다른 노벨문학상 수장작가 가오싱젠(高行健)의 부조리극 『버스정류장』엔 앞서의 작품들에서 살펴본 것과 같은 투철하고 분명한 주체는 없다. 그러나 부르짖음은 여전히 확고하다. 또한 잘못된 버스정류장에서 오지 않을 버스를 기다리는 등장인물들은 확고하게 근대적이다. 『버스정류장』의 세계관은 『강철군화(The iron heel)』와 『홍까오량 가족』과 달라 보이지만, 연장선상에 위치한다. 이들은 모두 숨은 신이 숨었음을 제대로 인식한다. 신이 추방된 것이 아니라 다만 숨어 있을 뿐임을 알고 있다. 문제는 주체다. A는 A′로 상승하기는커녕 a로 a로 a로 잦아들거나 B나 C로 달아난다.

알베르 카뮈에 이르면 주체는 바위 뒤에 숨겨진 실존으로 명맥을 유지한다. 언덕 위로 끊임없이 바위를 밀고 올라가는 행위에서 찾아지는 의미는 고통 감내의 형식을 블랙박스로 등치하는 마조히즘과 그래도 위로 올라간다는 변증법의 잔영일 것이다. 마조히즘적 변증법의 잔영은 코기토 철학의 끝자락을 부여잡은 실존주의의 그늘이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의 실존은 그늘 없는 실존일까. 그럴 리가 없다. 그늘 없는 실존이 형용모순에 가깝다는 원론을 확인하지 않아도 기다림을 기다리는 『고도를 기다리며』는 기다림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린다. 실존은 주체의 그늘에 숨은 코기토의 열망이자 고통이다. 물론 열망에 방점이 찍힐 수가 있는가 하면 고통에 찍힐 수도 있다.

다음은 『고도를 기다리며』의 마지막 장면이다.

 

“블라디미르: 내일 같이 목이나 매자. 고도가 안 오면 말이야.

에스트라공: 만일 온다면?

블라디미르: 그럼 살게 되는 거지.

(…)

블라디미르: 그럼 갈까?

에스트라공: 가자.

둘은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부서져 내리는 주체의 고통을 여실히 보여준다. 반면 『버스정류장』은 짙게 드리운 그늘 속에서도 엿보이는 주체의 열망을 감추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을 보자.


 
“사람들은 서로 끌어주고 부축하며 함께 떠나려고 한다.

마 주임: 어이, 어이… 기다려요, 기다려! 신발 끈 좀 묶고!”

 

이 결말에서 배어 나오는 안타까움을 눈감을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함께 떠나려 하고 신발 끈을 묶는 행위에서 맞닥뜨리는 동감(同感)은 불가피하다. 숨은 신의 침묵이 부르짖음의 결과물이라면, 먼저 부르짖음이 있었음은 자명하다. A′로의 전환이 완전히 차단되지 않았다면 A는 숨어서 또 다른 숨은 존재인 신에게 부르짖지 않았을 것이다. 고도처럼 오지 않을 존재임이 분명함에도 말이다. 부르짖지 않을 수 없어서 나온 부르짖음은 종국에 주체(A)를 향한 바위의 무게로 돌아온다. 바위를 밀거나 깔리거나, 둘 중에 하나만 남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주체를 부여잡고 버티는 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숨은 신의 도주와 숨은 주체의 분열과 해체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이제 새로운 동전이 던져진다. 

독일의 생태철학자 한스 요나스는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 개념’에서 “도대체 어떤 신이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둘 수 있는가?”를 물었다. 그는 유대교 신비주의 Zimzum 사상에 기대어 태초의 영원자가 자기 자신 안으로 스스로 수축해 자기 바깥에 ‘무(das Nichts)’를 만들어냈다고 설명하는 방식으로 신의 행동을 이해했다. 아마도 신을 너무나도 사랑했을 요나스는 인간의 고난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고난(passio Dei)’을 직시함으로써 세계를 파악하려고 했다. 

아우슈비츠로 대표되는 ‘무고한 자의 고난’으로부터 ‘전능하지 않은 신’이 추론되며 피조물에 자신의 힘을 양도하는 모험을 감행한 이 전능하지 않은 신은 세상과 함께 변화하고, 인간에 의해 고난당하고, 인간사를 염려하며, 선의 요구로 인간의 정신에 개입한다.  

신의 무능의 증명은 신의 알리바이(부재증명)였고, 어떤 이들은 신이 숨은 게 아니라 도망갔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신이 아주 다른 세계로(세계 밖으로?) 도망갔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요나스 같은 이에게 신은 세상을 지켜볼 수 있는, 멀찍하지만 분명 세상 안의 어떤 지점으로 도망갔을 것으로 간주된다. 요나스에 따르면 신은 무능해 고통받으며 도망갔지만 세상 안에 남아 있다. 신은 인간의 고통에 동참한다.

인간 주체는 온전할 수 있을까. 부활을 전제로 신이 매 맞고 고통받은 것과, 매 맞아 고통받으며 신이 쫓겨난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좌절해 숨는다고 주체가 세계의 살의(殺意)를 피해갈 수 있을까. 주체는 세계로부터 살해를 모면하기 위해 광인처럼 분열되거나 아예 스스로를 해소하는 선택 앞에 놓였고 그 선택은 점차 피할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 

윌리엄 스타이런의 소설 『소피의 선택』에 등장하는 폴란드 여인 소피와 그의 연인 네이선은 해소된 주체와 분열된 주체의 전형이다. 모더니즘과 근대의 이성에 대한 일말의 미련마저 사라진 사건은 주체의 결정적 몰락과 궤를 같이한다. 소멸한 주체에게 실존을 요구한다면 폭력이 될 것이다. 카뮈는 『시지프의 신화』에서 실존주의 관점에서 자살은 선택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종교와 대치하는 것처럼 보이는 실존주의가 가톨릭 등과 마찬가지로 자살금지를 말한 것이 공교롭다. 주체의 어떤 잔여도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삶의 지속은 어떻게 가능할까. 

『법 앞에서』의 장면에다 소피를 데려다 놓으면, 소피는 이미 그 문이 자신의 문인 줄 알고 있지만 열려 있기를 기대하지 않고 열려 있다손 쳐도 문 안으로 들어가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자신의 문임을 이미 알고 있기에 『법 앞에서』의 그 시골 남자처럼 평생을 걸 이유가 없다. 문턱에 선 소피에겐 주체의 미미한 잔여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소피에겐 부조리란 호사일 따름이다.

실존주의가 말하는 부조리는 모더니즘의 현상이다. 아닌 척하지만 여전한 데카르트식 주체에 집착하는 모더니즘의 망령이다. 철 지난 유행가 같은 실존주의지만, 만일 세계가 카페라면 신과 더불어 커피를 마시지는 않더라도 실존주의든 무엇이든 음악은 나와야 할 텐데, 그러려면 주체는 여전히 탐색 돼야 한다. 그것이 어떤 형태를 취하든 말이다. 

모더니즘 이후 망실되고 잔여화하는 주체. 만일 주체라는 표지를 뽑지 말아야 할 아주 사소한 증거라도 발견된다면, 일단 도망간 신을 향해서라도 (부르짖어야 한다면!) 부르짖어야 할까. 아니면 소피처럼 신과 세계를 전면적으로 거부해야 할까. 거부할 힘이라도 남아 있을 때, 주체의 연료가 완전히 소진되기 전에 거부를 결행하는 행위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하게 지혜로운 행위일까.

신의 거대한 섭리라는 기대가 사라지고 (만일 신이 있다면) 신의 남루함이란 의혹이 사실로 증명돼 가는 시점에서, 신과 세계가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대답할 수 없다는 사실을 파악한 다음에도 만일 그래도 부르짖음을 택한다면, 잔여화하는 주체의 부르짖음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 돼 세계에 전파되지 못하고 주체 안에 계속해서 쌓이기만 한다. 주체는 아우성 자체가 된다. 이것은 주체인가?    

 

 


편집자주
[안치용의 세계문학 오디세이]는 “르몽드 북클럽 ‘금오문향’(금요일 오후, 문학의 향기에 빠지다)-안치용과 함께 하는 죽어서도 꼭 읽어야 할 세계문학 100”의 매과정 결과물을 정리해 격월로 연재합니다. 

100권의 세계문학 명저를 읽는 르몽드 독서스쿨 “금오문향”은 2달에 6권씩 모두 17개의 2개월짜리 과정으로 구성돼 34개월에 걸쳐 진행됩니다. 매주 한 권씩 미리 정한 책을 읽고 금요일 오후에 모여 토론회를 진행한 뒤 7번째 주에 특강을 듣는 ‘6+1’ 방식으로 각 과정이 이뤄집니다. 안치용 한국CSR연구소장이 독서길잡이 겸 인문학 멘토로서 함께 합니다.

“금오문향”은 7~8월에 9과정 ‘인형의 집에서 피아노 치는 여자’가 진행됩니다. 9과정은 ▲인형의 집(헨릭 입센)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필립 K.딕) ▲피아노 치는 여자(엘프리데 옐리네크)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하인리히 뵐) ▲나를 보내지마(가즈오 이시구로) ▲적과 흑(스탕달) ▲특강(안치용)으로 진행됩니다.

 

글·안치용
<지속가능저널> 발행인 겸 한국CSR연구소장으로, 영화평론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지속가능성과 CSR을 주제로 사회활동을 병행하며 같은 주제로 청소년들, 대학생들과 소통 및 협업하고 있다.

 

(1) 『카프카 전집 사전』, 2005년 12월 27일, 프란츠 카프카, 이주동, 한석종, 오용록(네이버 지식백과 발췌, 강조는 필자).

(2) 영화 <붉은 수수밭>의 원작소설. 원제는 『홍까오량 가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