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가 최후의 심판을 피하는 법

[Corée 특집] 민주주의와 이상한 벗들

2011-01-07     오동석/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2010년이 저물어가던 12월 28일 헌법재판소는 이른바 ‘미네르바’ 사건과 관련해 휴대전화 등으로 허위사실을 유포하면 처벌하도록 한 전기통신기본법 조항을 헌법에 어긋난다고 결정했다. 또한 감청 등 통신 제한 조치를 허가하는 경우 그 기간 연장의 총기간 내지 총연장 횟수에 제한을 두지 않아 무제한 연장이 가능하게 했던 통신비밀보호법 조항에 대하여도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같은 날 국회의 새해 예산 날치기에 대해서는 헌법보장기관으로서의 생색만 내는 데 그쳤다.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위원장이 2008년 12월 18일 회의실 출입문을 폐쇄한 상태로 개의한 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을 상정해 처리한 행위가 소수파 의원에게 보장된 조약동의안 심의·표결권을 침해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에 대해 무효라고 선언하지는 않았다. 대리투표와 재투표로 얼룩진 신문법·방송법 개정안에 대해 위헌이지만 무효는 아니라고 판단(2009년 10월 29일)한 것과 같은 논리다. 그뿐 아니라 위헌적 과오에 대해 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은 국회의 부작위에 대해서까지 ‘합헌’의 면죄부를 주었다(2010년 11월 25일).

국방부의 이른바 ‘불온서적’ 지정과 영내 반입 금지에 대한 합헌 결정(2010년 10월 28일)도 충격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인권의 사각지대인 군대를 ‘헌법의 사각지대’로까지 공식화했기 때문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천안함 침몰사건이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현실로 확인됐다는 점이다.

그 결과 주권자 인민의 뜻에 따라 국가권력을 행사하도록 통제하는 법으로서의 헌법이 어처구니없게도 헌법재판을 거치면서 국가권력의 오용을 정당화하는 들러리 노릇을 하고 있다. 어찌 보면 1989년에 업무를 개시한 헌법재판소가 이듬해 4월, 악법의 대명사 국가보안법에 대해 위헌이라는 정의의 칼을 휘두르지 못하고 미적지근하게 ‘한정합헌’으로 살길을 열어준 것이 불행의 전조였다. 2004년 10월 21일 한국의 수도는 서울이라고 ‘관습헌법’론을 끌어대서 헌법을 창작했던 대목에 이르면, 헌법재판소가 헌법에 따라 국가권력을 재판하는 것이 아니라 헌법 자체를 정치적으로 재단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권력 오용 들러리 서는 헌법

오히려 지금 한국 사회에서 헌법재판소는 역설적으로 헌법의 부재증명(알리바이)일 뿐이다. 한국 헌정사에서 4·19, 5·18, 6·10 등의 민주적 저항이 있었지만, “헌법은 법적 타당성은 있으나, 법적 실효성이 극히 의심스러운 한 조각의 휴지”(국순옥)에 지나지 않았다. 강압적으로 헌법 충성과 지배체제에 대한 복종을 강요하는 상황에서 헌법은 공동체의 생활을 규율하기 위한 행위규범일 수 없다. 단지 지배체제의 현상을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시민도덕장전’이나 ‘정치적 행동강령’으로 전락한다. 인격적 주체로서 향유해야 할 사상·이념의 자유와 그 표현의 자유는 위축되고 신민의 순응과 복종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헌법학자인 카를 뢰벤슈타인은 헌법을 분류할 때, 헌법 조항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헌법이 실질적으로 규범력을 발휘해 그 사회에서 준수되고 있는지 중시했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고 현실의 권력 과정을 규율함으로써 실효성을 발휘하는 헌법이 규범적(normative) 헌법이다. 형식적으로 헌법전이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제대로 규범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헌법은 명목적(nominal) 헌법일 뿐이다. 헌법으로서 이름값도 못하면서 권력자의 지배를 유지하는 단순한 장식물에 불과한 헌법전은 의미론적(semantic) 헌법에 불과하다.

물론 헌법의 명목화에 대한 책임이 오롯이 헌법재판소의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의 임기 도중에는 파면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인민주권을 허울 좋은 정당성으로 축소하는 헌법이론, 헌법재판소 판결을 금과옥조로 여기면서 헌법재판소에 헌법 해석의 독점권을 확보해주는 헌법해석론, 인민의 자기결정권으로서 정치적 권리를 개인적 투표권으로 환원하는 기본권론, 민주주의론의 발전 없이 구시대 용어를 고스란히 사용하는 ‘통치구조’론 등 강단 헌법학의 총체적 부실도 그 원인이다.

헌법 훼손 자처하는 헌재

과거 청산의 실패 또한 규범적 헌법이 제자리를 찾는 데 걸림돌로 작용했다. 군대를 발판 삼은 직업군인 출신 인사가 더 이상 대통령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민주헌법으로의 질적 변화가 이뤄지지는 않는다. 정기적 선거에 따라 대통령을 선출하는 정치체제가 자리잡고, 심지어 병역 의무를 다하지 않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도 헌법은 순식간에 장식물로 전락하는 일이 일어난다. 모름지기 민주주의에 대한 학습은 몸으로 하는 실천이 감당해야 하는 법인데, 한국의 헌정사는 그러지 못한 까닭이다. 전면적으로 구시대의 인적·제도적 청산을 하지 못한 채 단지 독재자와 그 주변 인사만 축출하는 선에서 봉합된 것이다. 아직 한국의 공직자들은 인민권력의 뜨거운 맛을 보지 못했다. 입법부·사법부·집행부를 망라해 고위 공직자들이 권위주의적 통치자로서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는 까닭이다.

헌법은 민주주의를 다지는 끊임없는 과정 위에서만 서서히 실효성 있는 규범으로서 실속을 갖춰간다. 허약한 민주주의 위에 헌법재판소가 쌓는 입헌주의는 오히려 민주화에 장해물이 된다. 정작 주권인 인민은 헌법적 쟁점에 대해 스스로 결정하거나 인민 대표자를 윽박질러 민주적으로 결정하게 하지 못하고, 헌법재판소에 신탁함으로써 손쉽게 헌법적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 때문이다. 부지불식간 헌법재판관의 협소한 세계관이 인민의 민주적 상상력에 울타리를 친다. 동시에 헌법재판은 객관의 환상을 만들어낸다. 그렇지만 헌법 해석은 “헌법적 규범의 객관적 의미 내용을 결정하는 가치 중립적 인식 행위가 아니라 해석 주체의 주관적 가치판단이 논리의 틈새로 끊임없이 끼어드는 고도의 정치적 실천 행위”(국순옥)이다.

2010년에 타계한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은 1970년 5월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상징적 행위로서 징집자 운송버스를 가로막았다고 교통방해죄로 기소됐다. 그는 재판정에서 개인의 양심을 정부의 권위에 굴복시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역설하면서 국민 대중이 전쟁에 대한 정부의 자의적 결정에 순응하는 결과로 나타나는 것임을 주장했다. 판사는 의사봉을 마구 두드리더니 “그 점은 증인이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증인은 지금 문제의 본질로까지 소급해가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법정은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도록 허용되는 장소가 아니다. 재판관이 그럴 자격이나 능력 또는 권한을 가지고 있지도 못하다.

헌법은 헌법재판관이 말하는 판결의 집적체가 아니라 민주주의 투쟁의 과거 기록이자 장래의 투쟁을 계속 써내려가야 할 공간이다. 헌법은 주권자인 인민에게 민주주의적 의사결정의 숨길을 항상 열어놓고 있다. 그렇다면 헌법재판소는 헌법이 담고 있는 과거 기록을 확인함과 아울러, 현재 인민의 뜻을 헤아리며 미래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열어놓아야 한다. 인민주권을 헌법에 박제화하고 헌법국가를 헌법재판국가로 변질시키는 것은 정치적 타협을 최우선시하는 ‘열린’ 헌법관이 아니라, 헌법의 실체에 국민적 합의를 화석화하는 ‘닫힌’ 헌법관이다.

헌법재판소가 의회 다수파의 전횡으로부터 소수파를 보호하기 위한 사법적 통제 장치로 기능하려면 양자를 한데 묶을 수 있는 헌법 이데올로기가 필요하다. 한국 사회에서 그 필요조건의 충족은 그간의 헌정사를 뒤틀고 민주적 헌법의식·사상·실천을 질식시키는 반공 이데올로기를 걷어내는 일이다. 새가 좌우 날개에 의해 균형 잡힌 비행을 할 수 있듯이,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도 좌우 균형을 유지하면서 지속 가능한 발전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그것이 헌법의 최소한이며, 헌법재판소는 평형상태가 유지될 수 있게 조정하는 구실을 해야 한다.

민주주의 과정이자 소수파 보호 장치

헌법재판소가 현상 유지에만 골몰한다면, 헌법재판소는 민주주의의 방해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동안 헌법재판소는 주로 법률에 사용된 개념이 명확하지 않다면서 위헌 결정을 내리기도 했지만, 정작 헌법적으로 중요한 절체절명의 문제에는 침묵해왔다. 예를 들어 집행부조차 10년 이상 사형을 집행하지 않아 한국을 실질적 사형폐지국가 반열에 올려놓은 마당에, 헌법재판소는 ‘제도적 살인’이라는 사형조차 여러 차례 기회가 있었음에도 위헌으로 선언하지 못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헌법재판소가 “국민투표식으로는 자신의 권리를 보호받을 수 없는 소수자,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자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야말로 사법부의 구실”이며, “가장 악한 자와 가장 약한 자의 권리까지 보호할 의지가 있을 때에만 우리의 권리는 온전히 보호받는다”고 사형제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린 것과 대비되는 대목이다.

다른 한편으로, 헌법재판은 모든 헌법적 쟁점의 정답이 담겨진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요설 상자’로 헌법을 신격화한다. 헌법재판소는 필요한 대로 헌법 조문을 버무려 써먹으면서 주권자 없는 헌법 물신주의를 유포해 스스로 신이 되는 것이다. 비단 우리나라만 그런 것도 아니다. 독일연방헌법재판소도 1951년 10월 23일의 결정에서 헌법 제정 권력까지 구속하는 초실정적 법을 위헌 판단의 기준으로 제시함으로써 그 오만함을 과시한 바 있다. 헌법재판소가 호랑이를 배경 삼아 숲 속을 누볐던 토끼처럼 헌법의 후광을 이용해 그때그때 정치적 가치 형량의 무기를 휘두르면, 헌법재판소는 주권자 인민의 심부름꾼이 아니라 권력의 앞잡이로 전락한다.

그들도 주권자 심판대 위에 있다

헌법재판소는 2004년 5월 14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건에서 다음과 같이 판시했다. “대통령의 권한과 정치적 권위는 헌법에 의해 부여받은 것이며, 헌법을 경시하는 대통령은 스스로 자신의 권한과 권위를 부정하고 파괴하는 것이다. 특히 짧은 민주정치의 역사 속에서 국민의 헌법 의식이 이제야 비로소 싹트기 시작하였고 헌법을 존중하는 자세가 아직 국민 일반의 의식에 확고히 자리를 잡지 못한 오늘의 상황에서, 헌법을 수호하고자 하는 대통령의 확고한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제 ‘대통령’을 ‘헌법재판소’ 또는 ‘헌법재판관’으로 바꿔 찬찬히 읽어보기를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에게 진지하게 권한다. 아울러 헌법의 핵심으로서 인민주권 원리와 ‘기본권의 최대한 보장과 최소한 규제’ 원리를 새롭게 가슴 깊이 새기기를 부탁한다.

헌법재판소가 인권과 민주주의를 보장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서 국가권력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헌법은 쓸모없는 법이 된다. 헌법이 쓸모없으면 헌법재판소 또한 쓸모가 없다. 민주헌법에서 헌법재판소를 비롯한 모든 국가기관의 행위는 항상 주권자 인민의 심판대에 올라 있다. 다만, 그때그때 국가권력 행위를 심판하는 헌법재판소와 달리 주권자는 일정한 시점에 몰아서 단번에 심판할 뿐이다. 이미 계륵이 되어버린 헌법재판소에 대해 인민의 최후 심판이 머지않은 느낌이다. ‘정치적으로’ 운신하며 권력에 순응했던 과거를 반면교사 삼고 가장 약한 자의 편에 서려는 혁신을 통해 헌법재판소는 거듭나야 한다. 헌법재판관들이 여간 탈바꿈하지 않고서는 ‘국헌문란’ 또는 반(反)헌법의 벼랑 끝에 선 헌법재판소를 구할 수 없다.

글•오동석
지방자치제도, 국가보안법, 군 사법제도, 집시법, 교사의 정치적 기본권 등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경기도 학생인권조례 제정에 참여한 이래 학생인권과 교육자치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