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옛날이여!'… 국책 모기지 업체 '파국'
'패니 메이' '프레디 맥' 구제금융, 오바마 당선자에 과제 남겨
각국의 금융계 고위인사들은 요새 매우 바쁜 주말을 보내고 있다. 흔히 이들이 금융위기의 주요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는 때는 주말이다. 금요일, 뉴욕증시가 폐장하면 각국의 은행장들과 재무장관들은 많은 기관이나 기업의 운명을 결정하는 마라톤 협상에 들어간다. 결정은 아시아증시 개장 전인 일요일 저녁에 내려져야 한다. 결정을 내린 다음에는 시장의 판결을 기다려야 한다. 먼저 아시아장의 반응을 살피고, 다음에는 유럽장, 마지막으로 뉴욕장의 반응을 살펴 주말 대작전의 승자와 패자를 가린다.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아침이 되면 예금주들과 납세자들은 변화된 금융 판도를 발견하게 된다. 예컨대 지난 9월 15일 월요일, 이들은 청천벽력의 소식을 들어야 했다. 세계 5위의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가 인수자가 없어 파산했으며, 뱅크 오브 아메리카는 미국 정부 도움으로 세계 최대 증권사 메릴 린치를 인수했고, 미국 정부는 세계 최대 보험사 AIG에 대한 구제조치를 준비 중이라는 소식이었다.
모기지 시스템 '뉴딜 시대'서 연원
그 전 주말도 '깜짝 뉴스'가 넘쳐났다. 9월 7일 일요일은 사라 페일린 알래스카 주지사가 공화당 부통령 후보로 중앙정치무대에 데뷔, 이슈가 된지 일주일이 지난 때였다. 그 날 헨리 폴슨 미국 재무장관은 주택담보대출업계의 '빅2'인 연방전국모기지협회(Fannie Mae : 패니 메이)와 연방주택대출모기지공사(Freddie Mac : 프레디 맥)를 정부 감독하에 둔다고 발표했다. 페일린 공화당 부통령 후보가 연방 정부에 맹비난을 퍼부으며 보수파를 열광시키고 있는 동안, 연방 정부는 금융 사상 최대의 국유화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 주택담보대출의 원칙은 뉴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1) 1938년 중산층의 '내 집 마련'을 돕고 건설경기를 부양할 목적으로 워싱턴 전국모기지협회라는 연방 기관이 설립되었다. 패니 메이는 이 기관의 후신이다. 패니 메이의 법적 지위가 공기업에서 사기업으로 변한 진짜 이유는 경제적 이데올로기가 아니었다. 1968년, 린든 존슨 대통령이 베트남 전쟁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패니 메이의 주식시장 상장을 결정한 것이다.
그로부터 2년 후, 의회는 패니 메이의 모기지 업계 독점을 끝내기 위해 프레디 맥 설립을 결정했고, 프레디 맥은 1989년 상장되었다. 이제 패니 메이와 프레디 맥이라는 두 사기업은 특별한 규제를 받는 '정부지원기관'이라는 지위를 누리게 된다. 덕분에 두 기업은 정부 보증 신용공여와 특혜금리 자금 조달이라는 특권을 갖게 된 것이다.
패니 메이와 프레디 맥의 임무는 대출 보증이나 대출 인수를 통해 부동산 대출 시장의 유동성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런 가운데 정부가 부동산 대출이자를 소득세에서 공제해줌으로써 가계부채가 늘어나기도 했다. 이에 힘입어 패니 메이와 프레디 맥은 유가증권인 주택담보대출채권(RMBS)을 발행, 자금을 조달했다. 미국 정부가 적어도 암묵적으로 보증인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는 투자자들의 인식 덕분에 'RMBS'는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엘런 그린스펀 '버블 조장 장본인'
양대 모기지 업체의 성장은 금융 시스템 완화에 따라 더욱 가속화됐다. 1990년 7천400억 달러였던 두 기업의 대출자산은 1995년에는 1조 2천500억 달러에 달했고, 1999년에는 2조 달러를 넘어섰으며, 2005년에는 4조 달러를 넘어섰다. 국유화 전날 패니 메이와 프레디 맥의 대출자산 총액은 5조 4천억 달러에 육박했는데, 이는 미국 부동산 대출 총액의 45%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더욱이 두 기업은 주택담보대출을 기초자산으로 발행되는 유가증권의 97%를 부양하고 있었다. 두 기업의 급속한 성장은 2001~2006년의 부동산 버블과 금융공학 발전이 결합된 것이었다.
부동산 붐의 입안자이자 가장 열렬한 금융혁신 지지자 중 한명은 물론 앨런 그린스펀이다. 그는 19년 동안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으로 재직했고, 금융계로부터 거의 만장일치로 '마에스트로'라는 찬사를 받았다.2) 그린스펀의 발언들은 이후 금융계를 지배할 사상의 기반을 닦았다. 2002년 그린스펀은 "어떤 정책도 금융 버블의 확대를 제어할 수 없다"고 판단하면서 금리인하 정책을 통해 오히려 버블을 조장했다.
2004년에는 "미국 부동산 시장의 규모와 다양성을 고려할 때, 부동산 시장의 심각한 후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단언했고, 2005년에는 "주택가격이 하락세로 돌아서더라도, 별다른 거시 경제적 영향은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같은 해 그린스펀은 "금융 도구가 점점 더 복잡해지면서 금융 시스템이 4반세기 전보다 더욱 유연하고, 효율적이며, 견고하게 발전하는데 기여했다"고 설명했고,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직에서 물러난 2006년 부동산 버블의 붕괴 직전에는 "부동산 시장 최악의 급락은 지나갔다"고 평가했다.3)
두 업체 '관변 지원속 무한 성장'
그린스펀의 발언들은 패니 메이와 프레디 맥의 주식과 채권에 대한 투자를 부추겼다. 덕분에 두 기업은 기록적인 성장과 수익을 올렸다. 그러나 이 황금시대는 스캔들로 얼룩진 시기였다. 2004년 패니 메이는 보너스 창출을 위해 회계장부를 조작했다는 혐의로 고발당했고, 3명의 핵심 경영진들이 사임과 동시에 1억 달러의 벌금을 물어야 했다. 2006년 프레디 맥은 자사 감독을 담당한 하원의원들에 대한 불법 로비 자금으로 380만 달러를 유용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두 기업은 서민들의 주택 마련을 돕는다는 사회적 임무를 부여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주주 특히 경영진의 소득 최대화를 추구했다. 실제로 패니 메이와 프레디 맥 경영진들의 연봉은 1인당 7천만 달러에 달했다.
사실 두 기업은 정치적으로도 엄청난 영향력을 획득했다. 패니 메이와 프레디 맥은 정당을 불문하고 매우 관대한 태도를 지켰으며, 의회는 두 기업을 구속하던 규제와 속박을 지속적으로 완화했다. 그 결과 경영의 투명성이 사라지고, 신중한 의사결정 원칙은 이론으로만 존재할 뿐이었다.
역설적으로 2007년 8월, 서브프라임 위기가 발생했을 때, 패니 메이와 프레디 맥은 태풍의 영향권 밖에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 당연했다. 두 기업의 성장은 지속되었고, 시장은 두 기업의 기능 저하에 어떠한 주의도 기울이지 않았다. 대출상환 능력이 없는 가계 수가 위험할 정도로 증가하는 상황에서도 규제 당국은 양대 모기지 업체에 새로운 권리들을 부여했다.
JP 모건이 베어스턴스 은행을 헐값 인수한 지 3일이 지난 2008년 3월 19일, 부동산 시장의 급락을 방지하고 금융시장을 안정시킨다는 명목으로 미국 재무부는 패니 메이와 프레디 맥이 지불준비금을 3분의 1이나 축소하는 것을 허가했다. 이 같은 정부의 조치를 공적자금 투입을 향한 수순이라고 보는 사람들에게, 제임스 록하트 연방주택금융지원국 국장은 "공적자금 투입은 말도 안된다"며, "두 기업은 건전하고 견고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대답했다.
주택담보대출 부실로 암울한 처지
그러나 결국 누적 손실은 금융 애널리스트들의 낙관적 시나리오를 무색케했고,4) 주택담보대출 시스템의 작동과 기능 부실이 드러났다. 시장도 이런 심각한 상황을 그대로 반영할 수 밖에 없었다. 패니 메이와 프레디 맥이 보유한 서브프라임 채권의 급락, 지불불능 채무자 수의 증가, 부동산 시장의 계속적인 하락과 경기 후퇴에 대한 두려움 등이 퍼즐조각처럼 맞아 떨어지면서 암울한 밑그림이 그려졌다.
이 같은 긴급 상황에서 행정부와 의회는 부동산 구제안 협상을 시작했다. 지난 7월 30일, 패니 메이와 프레디 맥 구제 법안이 절대 다수로 의회를 통과했고, 조지 부시 대통령은 법안이 의회를 통과하자마자 곧바로 선포했다. 그 결과, 재무부는 패니 메이와 프레디 맥이 발행한 채권들을 대량 인수할 수 있게 되었고, 두 기업에게 긴급 구제 금융을 제공할 수 있게 되었으며, 심지어 연방정부의 이름으로 자본참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반면에 감독기관의 통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금융위원회 청문회에서 짐 버닝 캔터키주 공화당 상원의원은 재무장관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어제 아침 신문을 펼쳤을 때 나는 내가 프랑스에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미국도 사회주의가 지배하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러나 이 법도 불충분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12개월 동안 패니 메이와 프레디 맥은 140억 달러에 달하는 손실을 입었으며, 두 기업의 주식 가치는 90% 이상 하락했고, 조달해야 할 자금은 끝없이 늘어났다. 우선 1조 6천억 달러에 달하는 부채를 상환해야 했는데, 그중 2천 300억 달러가 9월말이 만기인 부채였다. 더 심각한 문제는 유럽, 러시아, 아시아의 중앙은행들이 두 기업의 채권 인수를 중지하겠다고 위협한 것이다.
'유감스럽지만 불가피한 국유화'
따라서 미국정부는 불가피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게 됐다. 미국의 '빅 2' 모기지 업체의 파산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아시아나 중동의 국부 펀드를 통해 두 기업을 구제하는 것도 정치적으로 불가능했다. 수중에 남아있는 패라고는 전면적인 국유화밖에 없었다. 물론 국유화라는 단어는 너무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어 공공연하게 사용되지는 않았다. 패니 메이와 프레디 맥은 공식적으론 '정부관리체제'에 편입된 것이다. 폴슨 재무장관은 이 결정을 "시장과 국민을 현 금융상황이 초래한 시스템 리스크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최적의 수단"이라고 소개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와 존 맥케인 등 정치 지도자들과 경제 지도자들 모두 미국 정부의 결정을 환영했다. 미국, 유럽, 아시아의 중앙은행 총재들도 마찬가지 반응을 보였다. 그중 장 클로드 트리쉐 유럽중앙은행 총재는 "미국의 결정을 환영한다"면서 "이는 매우 중요한 결정이었다"고 평가했다. 정부를 비난하는데 익숙한 일부 보수파는 양대 모기지 업체의 기능 저하는 두 기업의 준(準)공기업적 성격 때문이라는 점을 간과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유감스럽지만 필요한 결정"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같은 국유화의 경계는 여전히 모호하다. 폴슨 장관이 발표한 '타임아웃' 이 후에는 무슨 일이 발생할 것인가? 1개 혹은 다수의 공기업 창설로 귀결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민영화를 초래할 것인가? 중요한 문제들은 여전히 미결로 남아있고, 공적자금 투입 비용 등 납세자들을 걱정시킬 수 있는 세부 조치는 나중에 제기될 것이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에게 또 하나의 과제가 추가된 것이다.
번역|박수현 domyosie@ilemonde.com
1) 뉴딜정책은 미국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집권 당시 1933년부터 1939년에 걸쳐 1929년 대공황 위기 타개책으로 취해진 경제적 사회적 조치이다.
2) 밥 우드워드, <마에스트로 : 그린스펀의 FR-D와 아메리칸 붐>, 시몬 & 슈스터, 뉴욕, 2000년. 이브라힘 와르드(Ibrahim Warde), '신화의 원천: 그린스펀과 40가지 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1년 3월.
3) 그린스펀의 좀 더 최신 논평을 보려면 '경쟁시장 억제 요구를 물리치다', <파이낸셜 타임즈>, 2008년 8월 4일.
4) 찰스 두히그, '패니 메이, 손실에도 불구하고 격려 받다', <뉴욕 타임즈>, 2008년 5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