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킨게임, 한국만 멈출 수 있다
[Corée]
역사로서의 현재
현재 세계의 역사를 좌지우지하는 대사건은 2008년 가을 이래, 이제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게 된 대침체(Great Recession)이다. 미국의 법과 제도를 이식해 한국을 서비스 전문 국가로 탈바꿈하고, 미국과의 경제동맹을 강화해 중국을 견제하려던 고 노무현 대통령이 훗날 한-미 FTA 재협상까지 시사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중국과 미국이 세계의 패권을 두고 다투리라던 미래학자들의 예언은 이제 현실이 되었다.
“기존 패권은 무너지고 있지만 신흥 패권은 아직 확립되지 않은 상태, 신자유주의는 무너졌지만 새로운 축적의 원리는 발견되지 않은 상태…. 미국은 어떤 선택을 할까? 아마 1980년대 중반의 플라자협정, 그리고 미-일 반도체협정을 떠올리며 만만한 나라에 비용을 치르게 하는 단기 해법을 들고 나올 것이다. 다만, 이제 그 상대는 일본이 아니라 중국이라는 사실이 미국의 고민일 테고, 훨씬 만만한 상대로 한국이 자동차 등에서 먼저 시험대에 오를 가능성이 높다. 목숨을 건 환율전쟁, 금리전쟁, 통상마찰, 심지어 군사적 전쟁…. 그 한복판에 한반도가 있다.”(1)
치킨게임과 안보 딜레마
북한이 연평도를 공격한 것은,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미친 짓’이다. 그리고 뒤이어 한국이 서해와 동해에서 무력시위용 군사훈련을 한 것도 마찬가지로 ‘미친 짓’이다. 그러나 때로는 미친 짓이 더 나은 성과를 거둘 때도 있다. ‘치킨게임’이라면 그렇다. 영화 <이유 없는 반항>에서 짐과 버즈는 주디 앞에서 자신의 용감성을 증명하기 위해 절벽을 향해 나란히 질주한다. 아이들에게는 그 짓이 얼마나 절박한지 몰라도 어른, 또는 제3자가 보면 분명 미친 짓이다. 만일 똑같은 조건이라면 잃을 게 많은 쪽이 먼저 핸들을 틀 것이다. 미친 짓에 대한 외면이 이 게임의 균형해이다.
따라서 이기려면 진짜 미친 놈이 되거나 상대방이 “저 미친 놈”이라고 혀를 내두르게 해야 한다. 실제로 냉전시대의 핵무기 경쟁 때 닉슨 미국 대통령은 “미친 놈”이라고 욕을 먹자 “미친 놈으로 보이도록 하는 게 내 전략”이라고 대답했다. 군비 경쟁, 나아가서 무력 경쟁을 한다면 거의 100% 한국이 이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잃을 것이 많다. 전쟁 개시와 함께 발사된 북한의 포탄에 서울 인구 100만 명 정도는 희생될 것이다. 북한이 초토화되고 김정일 정권이 무너진다 해도 이것은 이긴 게임이 아니다. 설령 중국이 참전하지 않는다 해도 그렇다. 이런 게임을 만들어놓았다면 당연히 ‘미친 놈’이 될 각오를 해야 한다. 지금 조·중·동 등 수구언론의 주장이 그러하다.
사춘기 철부지 정도의 정신연령에 머물러 있는 조·중·동이야 그렇다 쳐도 설마 한 나라를 운영하는 집단이 이런 게임을 유도했을까? 한나라당과 청와대가 표방한 대북정책의 지침은 ‘상호주의의 원칙’이다. 그렇다면 원래 이들의 대북정책은 ‘반복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 기초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정말 그랬을지는 의심스럽지만). 액셀로드의 유명한 실험이 증명했듯이 이 게임에서 최선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Tit for Tat) 전략이다. 상대방이 직전에 한 행동을 따라 해야 이 게임에서 승리한다. 아니 정확히 얘기해서 이긴다기보다 지지 않는다. 일단 선의(협력)로 시작하고 상대방이 배반하면 우리도 배반(협력의 중지 또는 무력 경쟁)하는 것이다. 단, 배반과 대결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을 막기 위해, 즉 양쪽 다 패자가 되는 걸 막기 위해선 어느 순간 다시 협력을 선택해야 한다.
현실에서 이런 전술의 반전은 여유 있는 쪽에서 결행할 것이다. 지속적 대결에서 잃을 것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동안 정부·여당은 ‘선에는 선’을 잊어버린 듯 오로지 배반을 선택했다. 이제 협력으로 얻을 게 별로 없는 북한은 ‘미친 짓’을 선택한다. 북한은 현재 상황을 치킨게임으로 인식한 것이다. ‘미친 짓’ 중 비용이 가장 적은 선택이 핵개발이다. 연평도 포격은 ‘미친 짓’ 좀 봐달라는 ‘미친 짓’이다. 우리 정부의 대규모 군사훈련은 북한이 파국을 선택할 수준 바로 밑까지 나아간 ‘미친 짓’이다. 물론 전쟁의 역사가 말해주듯 예기치 못한 어떤 사태에 의해 둘 다 ‘미친 짓’을 선택하는 파국으로 나아갈지는 알 수 없다.
죄수의 딜레마보다 더 나은 것이 사슴사냥게임(Stag-Hunt Game 또는 Assuarance Game)이다. 이 경우 협력에서 얻는 이익이 더 크기 때문에 한 번 좋은 균형에 도달하기만 하면 더 이상 배반할 이유가 없어진다. 이렇게 게임을 설계해서 양쪽 모두 배반할 이유가 없는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대북정책의 뼈대가 그러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저비스(R. Jervis)는 저 유명한 ‘안보 딜레마 아래서의 협력’이라는 논문에서 국제정치란 안보 딜레마 등의 제약이 걸린 사슴사냥게임이라고 갈파했다.
불행하게도 현재 남북은 정확히 안보 딜레마에 빠졌다.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남한도 핵무기를 보유하게 될 것”이라는 음울한 예측을 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북한의 핵은 이제 일반 국민에게도 공격용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날치기로 통과시킨 2011년 예산 중 안보·외교 분야는 9% 증가했다(지난해에는 0.4% 증가). 보수주의자들 속에서 그래도 합리적이라던 박세일 교수도 북한 붕괴를 입에 올렸다. 가히 악무한의 집단 광증이다.
미-중 대립과 한반도 상황
우리를 둘러싼 국제 상황은 ‘미친 짓’의 전제를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지난해 주요 20개국(G20) 서울 정상회의에서 현실로 드러났듯이, 미국과 중국은 만만치 않은 기세로 경쟁하고 또 대결할 것이다. G2의 대립은, 우리가 어떤 게임을 선택한다 해도 그 뒤에서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절대적 환경이다.
세계경제의 혼란은 중국에도 크나큰 도전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정부가 택할 길은 현재의 지나친 대외 의존도를 줄이고 거품을 빼서 가능한 한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5일 공산당 중앙위 제17기 5차 전체회의에서 채택한 ‘국민경제와 사회발전을 위한 제12차 5개년 규획(規劃)’은 이런 사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중국의 동북부를 발전시키려는 ‘동북진흥계획’ 역시 북한의 안정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다. 남한이 북한의 배반을 응징하기 위해 봉쇄정책이나 군비 경쟁을 강화한다 해도 이런 중국이 존재하는 한 별 효과가 없다.
미국 사정은 훨씬 더 어렵다. 내부 개혁으로 위기를 돌파하려던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시도는 좌절됐다. 내부의 합의를 끌어내지 못하는 정권이 항상 그러하듯이, 오바마 정권은 칼끝을 외부로 돌렸다. 수출을 50% 증가시키기 위해 통화 증발(양적 완화 2)을 단행하고, ‘공정무역을 위한 통화개혁법’이라는 지극히 보호주의적인 법안까지 통과시켰다.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에서 간단하게 일본을 제압하는 등 예상을 넘어서는 중국의 급부상은 미국의 아시아 개입을 강요한다. 별 여력이 없는 미국이 택할 길은 ‘동맹국’의 일방적 희생일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반복되는 치킨게임은 남북 모두를 악화시킬 뿐이다. 북한은 3대 세습에, 그리고 남한은 정권 유지에만 유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있을 뿐 단기 실리 면에서 보아도 납득할 수 없는 전략이다. 1960년대 중-소 대립 속에서도 ‘주체’ 외교의 길을 걸은 북한은 이제 일방적으로 중국에 의존한다. 예컨대 중국과 러시아의 경쟁을 이용해 최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던 나진·선봉 지역의 개방이 그러하다. 한국은 천안함, 연평도, 한-미 FTA로 이어지는 연쇄 속에서 일관되게 ‘대미 퍼주기’에 골몰하고 있다. 안보 딜레마는 미국 무기 수입의 급증을 초래할 것이다. 남북 양쪽이 찢어져서 미·중의 앞잡이 노릇을 계속한다면 경제적 실리를 넘겨주는 것을 넘어서 최악의 경우 민족적 비극을 되풀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딜레마 탈출- 협력게임과 안보 공동체
물론 장기적으로 볼 때는 더욱 협력 게임이 유리하다. 논리적으로는 간단하다. 협력의 이익이 배반의 이익보다 커야 하고(햇볕정책의 핵심이 이것이다), 수비 전략이 공세 전략보다 유리하도록 판을 짜야 한다. 게임의 환경을 이루는 미-중 대립 속에서 어느 한쪽 편을 들어서는 안 된다. 미·중 모두에 사슴사냥게임의 협력해가 최선의 해법이며, 장차 안보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 안보 딜레마를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길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은 한반도 전체가 평화지대, 적어도 중립지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북 양쪽 지배세력의 단기 이익 추구 때문에 현재의 위기가 초래됐을 뿐이다. 행여 북한의 3대 세습을 들어 북한 지배세력의 한계를 예단해서는 안 된다. 지난 60여 년의 외교사를 보면 북한 정권이 정확히 게임이론 논리에 따라 행동한 것을 알 수 있다. 협력의 이익이 크다는 것, 즉 미국이 북한을 공격해 정권을 무너뜨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남한과의 지속적 경제협력이 최고의 이익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주기만 한다면, 즉 북한이 치킨게임으로 현실을 인식하지 않도록 만든다면 현재의 경제력이나 군사력 격차에 비춰볼 때 북한이 협력해를 택할 가능성은 높다.
앞에서는 논리로 얘기했지만, 현실적으로 남북 간 게임의 성격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남한이다. 문제는 정권의 단기 이익과 대기업의 단기 이익이 버무려져 탄생한 근시안이다. 일반 국민뿐 아니라 자본 전체의 장기 이익은 명확히 평화와 협력에 있다. 물론 한반도만으로 더 큰 틀을 좌지우지할 수는 없다. 우리 주변의 모든 나라는 중국의 패권도, 미국의 패권도 원하지 않는다. 아세안은 물론 러시아나 일본도 그렇다. 양대 강국이 한반도의 영구 평화를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들 나라와 합의가 필수적이다. 공동의 이익을 위한 사업을(예컨대 환경문제 해결, 공동의 정보 인프라 구축, 유라시아 철도 건설 등) 진척시키면서 이런 합의를 강화해가는 것, 나아가서 아시아 공동체를 만드는 것은 결코 꿈이 아니다.
글•정태인
성공회대 겸임교수, 전 청와대 국민경제 비서관.
<각주>
(1) 정태인,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 역사로서의 현재-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경향신문>, 2009년 1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