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륀지’, 그들만의 랑그
[Coré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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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생까지 보는 영어 인증시험
한편, 1990년대 초 ‘세계화’라는 미명으로 시작된 국제학부의 편성은 이제 모든 대학에 보편적 현상으로 자리잡았고, 한발 더 나아가 영어로 강의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일부 지역에서는 지난 3년 동안 영어 강의 수가 5배 이상 증가했다. 대학에서 영어 강좌가 해마다 급증하는 것은 외국인 교수와 외국인 학생, 해외 파견 교환학생 비율과 함께 영어 강의가 ‘대학 국제화 지수’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지표이기 때문이다. 영어로 강의하는 과목은 시험에도 영어 서술형 문제가 나온다. 학생들은 이 영어시험을 위해 시험 유형의 답안이 담긴 ‘족보’를 구해 영어 답안을 만들어 외운 뒤 그대로 시험지에 옮기는 경우도 많다. 영어로 말하고 쓴다는 것은 한국 대학생들을 아무런 비판의식도 없는 순응적 인간형으로 만드는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다. 더구나 국문학이나 국사학과에서도 영어로 강의하는 교수에게 더 많은 평가점수를 주며, 영어 논문과 한국어 논문 2배 이상이다. 이 상황이 10년 정도 더 지속되면 한국에서 인문학은 영문과를 제외하고 모두 사라지고 말 것이다. 프랑스어문학이나 독일어문학, 서어서문학도 차라리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오는 사례가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왜냐하면 영어 강의 우대를 내세우는 교수 초빙 공고에서 미국 유학파가 압도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다. 한국 학술진흥재단에 등록된 박사학위 신고자 중 미국이 2만1031명으로 압도적인 1위이며, 그다음 일본·독일·프랑스 순으로 나타난다. 이제 대학 서열만이 아니라 박사학위에 분명한 서열이 생겼다. 미국 박사학위가 아니라면 교수로 대학에 자리를 잡는 데 불이익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국내에서 박사를 한다는 것은 후일 교수 시장에서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대학 서열? 박사학위 나라 서열!
한국에는 국산품 애용을 애국심과 관련해 인식하는 문화적 풍조가 있었지만, 지식만큼은 민족주의적 자존심을 지켜본 일이 없다. 미국으로 유학 가는 시기도 과거에 비해 현격하게 빨라졌다. 학자로서 꿈을 키우는 계기는 주로 학부 시기를 지나면서 서서히 생기는 게 보통이다. 사회 현실에 점차 눈을 떠가며 한국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면 석사과정에 진입하고, 이 기간에 자신이 무엇을 공부할지 고민한다. 그때 박사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외국 유학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것이 과거 30년 전 학자가 만들어지는 대체적인 과정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고등학교 혹은 대학 재학 시절에 유학을 간다. 물론 미국이다. 학문의 내용이나 문제의식은 필요 없다. 어학 능력이 가장 중요하며, 어학을 위해서는 조기유학을 하는 것이 유리하다. 최근에는 서울의 이른바 명문 사립대학들이 미국에서 가르친 경력을 교수 초빙의 중요한 조건으로 요구하기 시작했다. 교수의 자질을 평가하는 기준마저 미국에 의존하겠다는 뜻이다. 이것은 비단 대학 사회에만 국한된 얘기는 아니다. 일부 대기업이나 외국계 기업에서는 서울대·고려대·연세대 같은 명문대학이 아닌 외국에서 학위를 취득한 사람을 우대한다. 영어를 잘한다는 것은 대학에서는 물론이고 기업 현장에서 학문의 내용이나 일의 종류를 불문하고 중요한 자산이 돼버렸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영어 실력이 대학교수의 자질과 기업에서 일의 능력과 비례하는 것일까? 대학에서는 영어 강의가 많이 필요하며, 입사시험이나 승진시험에서 영어만을 기준으로 사람을 선발해도 되는 것일까? 초등학생 때부터 시작된 영어 공부가 대학을 넘어 성인에게까지 확산된 계기는 무엇일까?
오늘날 한국 사회는 비정상적인 ‘영어 열풍’에 사로잡혀 있으며, 이로 인해 심각한 불평등이 생겨나고 있다. 그리고 이 불평등은 기득권자가 자신의 경제적 능력과 신분적 차이를 유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든 것이다. 이른바 학력을 통해 계급을 재생산하려는 현대적 신분제도의 통과의례가 바로 영어 능력, 미국 박사학위라는 것이다. 간단하게 한 가지 상상만 해보자. 부모가 경제력이 있어 그 덕에 조기유학을 경험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영어 실력 차이는 분명하다. 따라서 이것은 사회적으로 평등한 경쟁이 될 수 없으며, 올바른 기준도 아니다. 이런 불합리하고 불평등한 경쟁 기준인 영어시험이 어째서 사회적으로 공인되고 있으며, 모두가 이토록 광기 어린 모습으로 영어 공부에 매진하는 것일까? 어쩌면 이 질문은 오늘날 한국 사회가 당면한 위기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문제와 직결돼 있다. 왜곡된 현실을 직시하려면 국제정치의 역학 변화와 더불어 한국에서 권력투쟁 형태가 변화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우선 1980년대를 전후로 한 국제정치 변화부터 알아보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무대에서 헤게모니 권력을 쟁취한 미국은 전 지구적 수준에서 정치와 경제를 운영하기 위한 기저를 근대화의 논리에서 찾았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제3세계 국가들의 경제성장을 유도하고 미국식 민주주의를 답습하도록 격려하는 원조정책의 성격을 띤다. 이때 미국은 제3세계 국가들이 반공 논리에 순응하기만 하면 경제발전을 위해 그들의 발전정책을 적극 지원하며, 국내 정치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는다는 대외정책의 원칙이 있었다. 그런데 세계정치가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미국 경제가 호황기를 누렸고, 제3세계를 지원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1973년 닉슨 대통령의 달러 불태환 선언 이후 미국 경제는 점차 자국 경제를 보호하기 위한 관세장벽을 높이기 시작한 반면, 다국적기업 형태를 넘어 제3세계의 경제에 직접 개입하는 직접투자 방식이 나타난다. 레이건 행정부의 등장은 근대화 논리를 대신해 세계화 논리가 미국 세계정책의 기저로 자리잡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이때부터 미국은 제3세계의 경제에 개입해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금융자본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관료·대학 사회, 미국 통치 실현
그런데 이 세계화의 논리가 제3세계 국가에는 위협이 되며, 국가주권의 위기감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이 불안감을 극복하기 위해 미국의 대외정책은 문화정책을 강하게 실시하는데, 그중 대표적인 사례가 국책연구소나 사단법인 형태의 재단을 만들어 제3세계에 통용될 수 있는 학문의 언어를 만들어내고, 유학 온 제3세계 엘리트들을 교육하는 것이다. 특히 미국 대학은 프로젝트형으로 교수들의 연구 업적을 관리하는 경우가 많은데, 스탠퍼드·시카고·뉴욕·워싱턴에 위치한 대학들은 정치적·경제적 프로젝트의 영향권에 들어 있는 학교들이다. 이 대학들에 한국의 관료나 교수가 유학한 사례가 많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다시 말해 미국이 과거에는 군사력이나 경제적 제재를 통해 한국을 지배하려 했다면, 이제는 문화력으로 한국의 지식인 그룹을 포섭하고 훈련해 한국 엘리트 스스로가 미국의 세계화 정책에 순응하도록 만들고 있다. 또 이들이 귀국해 여론을 형성할 때 미국의 논리가 한국의 국가 이익에도 유익한 것으로 보이도록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21세기 미국 학벌과 영어 지배가 실현되는 국제정치적 맥락이다.
계급재생산, “어디 한번 따라와봐”
한편, 한국의 기득권자들도 미국의 세계화 논리를 이용해 경제적 능력과 신분적 우월감을 유지할 수 있는 재생산의 회로를 발견한다. 미국 조기유학과 영어능력시험을 통한 대입시험 등이다. 19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서울대 입학률은 지방의 엘리트가 더 많았다. 그러나 세계화 정책 이후 입학 선발 방식이 바뀌고, 미국 조기유학자들이 영어 능력을 인정받으면서 대학에 진입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면서, 서울대 입학정원 가운데 지방 엘리트 비율은 현격하게 줄어든다. 서울대가 자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사회대학 신입생 40% 이상의 부모가 고위 관료와 경제적 능력이 있는 기업인으로 나타났고, 거주 지역 역시 서울 강남이었다.
불평등한 현상을 무마하기 위해 교육학의 이데올로기가 적극적으로 동원된다. 창조적 인간형, 세계적 리더십, 자기계발 논리, 감성지수, 사회적 네트워크 능력 등 다양한 용어가 동원되면서 교육개혁이 주도된 것이다. 김영삼 정부 시절에 발표된 이른바 7차 교육개혁 과정의 핵심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교육학자들은 교육개혁을 주도하면서 과거의 교육이 주입식이었고, 이것은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데 많은 결함이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 교육이념의 논리마저 사실은 미국의 세계화 전략과 깊숙이 맞물려 있으며, 국내 정치적으로는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한국 보수 세력의 계급재생산 전략이 은밀히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한국은 국내 정치 수준에서 정치의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고민해왔고, 그 성과도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었다. 그런데 1990년 후반 세계화의 물결이 밀어닥친 이후, 1998년과 2008년 두 번의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한국의 정치와 경제가 더 이상 국내적 수준에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과제는 세계화라는 논리가 미국이 자신의 세계 지배를 위해 만들어낸 정치적 이데올로기이며, 이것이 국내 수준에서 기득권의 재생산 전략과 맞물려 영어 광풍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영어를 배우는 것이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고, 학력과 밀접하게 관련되며, 세계적 우수 인재가 되는 지름길이라는 교육학적 이데올로기를 넘어 정치권력 차원에서 영어시험, 영어강의, 영어논문 쓰기 등의 관행을 심각하게 반성해야 하는 진정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늘날 지식인과 대학교수가 이런 이데올로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한국 사회의 미래는 매우 불안하다.
글•홍성민
파리10대학 정치학 박사. 주요 저서로 <문화와 아비투스> <지식과 국제정치: 학문 속에 스며 있는 정치권력> <문화정치학 서설: 한국 진보정치의 새로운 구상>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