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르시카와 프랑스의 역사적 트라우마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진실

2019-08-30     장-프랑수아 베르나르디니 l 그룹 I Muvrini의 보컬

2014년 완전 무장해제를 선언하고 2015년 코르시카 지방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분리독립파 민족주의 정당 연합은 현재까지 코르시카의 행정 전반을 책임지고 있다. 지역생산을 활성화시키고 농촌의 공동화를 억제하는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상태다. 한편 프랑스 측이 헌법 개정안에서 코르시카의 특별지위 인정을 검토하겠다고 했음에도, 코르시카와 프랑스 간의 감정의 골은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코르시카와 프랑스 간의 관계를 떠올릴 때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고통스러운 긴장감이 있다. 특히 축구경기나 프랑스가 코르시카를 공식 방문할 때 두드러지던 이 긴장감은 이제 일상적인 것이 됐다. 예를 들어, 2017년에는 코르시카 팀의 서포터들이 퓌리아니 경기장으로 난입해 리옹 축구팀을 공격한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2018년 2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집권 후 처음으로 코르시카를 방문했을 때, 그리고 4월 방문 시에도 ‘정전 시위’가 있었다. 이를 지켜본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해석한다. “늙은 악마, 코르시카다운 짓이다. 폭력성은 코르시카의 지역문화다.”

이렇게 관계가 나빠진 이유에 대해 단 한 번이라도 자문해본 적이 있는가? 과연 우리는 이 질문을 던질 준비가 돼 있는가? 악마를 정치에 결부시키는 것부터가, 사고의 논리적 허점을 인정하는 꼴이 아닐까? ‘우리는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우리에게는 또 다른 시각이 열린다. 

미국의 심리학자 피터 레빈의 다음과 같은 가설도 있다. 레빈은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의 이해불가한 행동을 연구한 결과, “단 한 번도 인정되거나 의식화되거나, 명명되거나 이해되지 못한” 과거의 상처가 현재의 혼란과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 채 삶을 지속할 경우, 겉은 견고해 보일지라도 결국 그것은 허상에 불과합니다. 트라우마의 영향은 점점 더 확대되고 강화되며 만성화됩니다. 불완전한 해답은 시한폭탄이 돼서, 언젠가는 폭발하게 되지요.”(1)

그렇다면, 코르시카와 프랑스 간의 뒤엉킨 역사 속에 트라우마가 존재하는 것일까? 코르시카와 프랑스에 있어서 가장 큰 위협은 공동의 역사를 알지도 인정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역사를 알지 못한다. 학교에서도 이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다. 굳이 역사학자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몇 가지 중요한 흔적과 지표가 문제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코르시카는 1729년부터 제노바의 지배를 받다가 독립에 성공해 1755년부터 1769년까지 자치공화국을 형성했다. 현대 서구사회 최초의 민주주의 국가였다. 코르시카의 명성은 유럽 전역으로 퍼졌고, 볼테르는 “모든 유럽이 코르시카다!”라는 문구를 남기기도 했다. 코르시카의 독립은 장 자크 루소, 프리드리히 횔덜린, 요한 볼프강 본 괴테, 프리드리히 2세와 같은 유명인사들의 흥미와 찬사를 이끌어냈다. 존 시먼즈와 제임스 보즈웰의 글이 신문과 잡지를 통해 퍼져나가면서 영국, 프랑스, 스위스, 독일의 젊은이들이 파스칼 파올리(코르시카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투사-역주)의 투쟁에 동참하기를 꿈꿨다.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코르시카의 헌법을 참조했고, 몇몇 도시의 이름은 ‘코르시카의 순간’을 기념해 지어지기도 했다. 미국 펜실베니아 주의 파올리 시가 그 예다. 1790년 파올리가 자코뱅 당에 합류하게 되자 막시밀리앵 드 로베스피에르는 코르시카 대표단에 다음과 같은 환영사를 보냈다. “용감한 시민들이여. 희망도 품기 어려운 시기, 당신들은 자유를 지켜냈습니다. 자유를 위해 고통을 감내했고, 자유와 함께 승리했습니다. 당신들의 승리는 이제 우리의 것입니다.”

 

거대한 코끼리의 존재를 잊으려 애쓰다

그러나 프랑스가 코르시카를 무력으로 정복하면서 민주주의 시대는 끝이 났다. 1769년 5월 퐁트 노뷔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프랑스의 탄압은 본격화됐다. 프랑스 왕이 보낸 보 백작의 지휘하에 프랑스군은 ‘굴복하지 않는 자들’의 수확물과 포도밭, 올리브 나무를 모조리 없앴다. 시체들이 마을 입구에 전시됐고, 포로들이 툴롱 교도소를 가득 채웠다. 프랑스에서 마리아 장티를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견디기 힘든 현실 앞에서, 마리아 장티는 안티고네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 젊은 여성은 부당한 법에 복종하지 않고, 올레타 광장에 전시돼 군인들이 감시하던 약혼자의 시체를 목숨을 걸고 수습해 장례식을 치렀다.(2) 1789년 11월 30일 국민의회에서, 미라보는 프랑스의 코르시카 정복을 비판하며 고백했다. “나의 젊은 시절은 코르시카 정복전쟁 참전으로 더럽혀졌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중요한 역사의 한 부분에 대해, 오늘날 그 어떤 추모 행사도, 추모를 위한 공식적인 공간도, 진실을 알려주는 서적도 찾아볼 수가 없다. 슬픔과 애도는 죽음을 겪은 당사자들만의 몫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라우마는 분명히 존재한다. 또한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므로, 우리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진실을 보아야만 한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알 수도 없으며 알기를 원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트라우마는 아주 가벼운 자극에도 폭발하기 쉽다. 프랑스 국가를 부르거나 휘파람으로 흥얼거리기만 해도 축구경기장에는 ‘빌어먹을 프랑스인’이나 ‘더러운 코르시카인’과 같은 욕설이 쏟아진다. 코르시카의 고등학생들은 ‘우리는 프랑스인이 아니다!’라고 외치고, 코르시카어가 아닌 토스카나어로 쓰인 마을 표지판은 총탄을 맞아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프랑스인 물러가라’라는 의미의 그라피티가 곳곳에서 발견되고, 언론에서는 주기적으로 코르시카를 비난한다. 2018년, 코르시카 공동체의 수장은 아작시오에서 열린 클로드 에리냑(1998년 프랑스 정부가 임명한 코르시카 주지사로, 코르시카 분리주의단체 조직원에게 암살됐다-역주)의 공식 추모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프랑스 공화국의 공식대표가 퐁트 노뷔(코르시카는 퐁트 노뷔 전투에서 프랑스에 패배해 프랑스령이 됐다-역주)에 가지 않은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코르시카와 프랑스 간의 불화, 폭력과 고통의 기억은 대를 이어 전해지고 있다.

영미권에는 ‘There is an elephant in the room’이라는 은유적 표현이 있다. 모든 사람이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코끼리의 존재를 외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는 뜻이다. 코르시카와 프랑스 간에도 모든 사람이 부정하려 애쓰는 거대한 ‘코끼리’가 존재한다. 우리는 침묵, 대를 이은 복수, 악마 등 수많은 클리셰와 암시를 만들어내지만, 이 모든 것들은 불편한 진실을 편리하게 우회하기 위한, 무용한 몸부림에 불과하다.

 

‘코르시카인의 이미지’를 설계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TV 시리즈물인 <Mafiosa(마피아 단원)>에서부터 자크 오디아르의 영화 <Un prophète(예언자)>에 이르기까지 언론, 영화, TV 프로그램, 영상 등을 통해 코르시카에 대한 특정 이미지가 형성됐다. 오노레 드 발자크, 알렉상드르 뒤마, 기 드 모파상,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작품들에서도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1829년 5월 3일 <Revue de Paris(파리평론)>에서 ‘Moeurs de la Corse(코르시카의 관습)’이라는 부제로 출간한 『Mateo Falcone(마테오 팔코네)』는 이런 유형의 소설들 중 가장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코르시카를 특정 이미지 속에 가두었으며, 코르시카인들이 ‘위험하고 미개한 유럽의 야만인’이라는 인식을 널리 확산시켰다. 대중들은 ‘코르시카인은 유리한 것만 취한다’든지 ‘그들은 우리와 다르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가지게 됐다. 그러나 실상 메리메가 코르시카를 직접 방문한 것은 1839년, 이 소설이 발표되고 10년이나 지난 후였다.

그러나 코르시카에 대한 선입견은 지금도 여전히 남아있다. 2013년 12월에는 <France 3 Corse> 채널의 한 프로그램에서 훗날 바스티아 검사장까지 된 인물이 법적 근거가 없는 발언을 해 논란을 일으켰다. “코르시카의 진짜 문제는 바로 총기입니다. 코르시카에는 미국 텍사스주만큼이나 총기가 많습니다.” 사실 확인 결과 코르시카 거주민 100명당 총기 수는 14.6개였다. 대부분은 사냥에 사용되는 총기였으며, 수적으로도 스위스의 1/3, 미국의 1/8에 불과했다.(3)

깊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코르시카의 반란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일례로,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당시 코르시카섬에서는 6명의 자녀가 있는 남자들까지 전쟁에 동원됐다. 종전 직후인 1919년, 섬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 있을 만큼 몸이 성한 남자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윗세대로부터 농사기법을 배우지 못한 젊은이들은 우체국이나 세관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그렇게 코르시카는 이전과는 달리 프랑스의 경제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됐다. 그리고 1975년 8월 21~22일에 발생한 알레리아 사건을 마지막으로, 프랑스 정부와의 대화를 통해 상황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은 사라졌다.
비폭력 대화의 창시자 마셜 로젠버그는 갈등의 이성적인 제어 방법과 인간관계에 대해 고민하다가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단어들의 중요성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에 의하면, 우리가 일으키고 또 휘말리는 대부분의 인간관계 문제는 바로 이 일상적인 단어들에서 비롯된다. 로젠버그가 기관이나 제도 내에서 통용되는 언어나 코르시카와 프랑스 간에 사용되는 언어를 특별히 연구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 언어는 트라우마의 흔적들을 명백하게 담고 있기 때문에, 트라우마의 존재를 입증하는 중요한 연구 자료가 될 수 있다.

이제는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지를 가려내는 것 이전에, 이 문제에 관련된 모든 이들을 그 자체로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는지, 누구의 기억이 맞는지, 누가 더 큰 피해를 보았는지를 밝히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에 앞서, 과거의 감옥에서 모두를 해방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투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코르시카인이나 프랑스인 중 한쪽이 아니라, 양쪽 모두여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예상치 못한 해결책’일 것이다. 언젠가 코르시카와 프랑스의 공식 대표들이 퐁트 노뷔와 알레리아의 기념비, 에리냑 주지사와 모든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식에서 함께 고개를 숙이는 것, 우리의 의식이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과연 가능할 수 있을까?

오늘날 우리의 내면에서 트라우마에 따른 불안 증상들이 만들어낸 폭발 에너지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 들끓고 있다. 그럼에도 코르시카와 프랑스는 현재의 도전 앞에서 매일 항복하고 타협한다. 해결책과 답변을 맑은 정신으로 고민하고, 풍부한 창의력으로 고안해내며, 열정을 가지고 찾아내지 않는다. 

오히려 각각의 입장, 코르시카 또는 프랑스와의 힘겨루기 속에 매몰돼 공동의 능력과 지성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민주주의, 그리고 우리를 기다리는 뜨거운 미래로 함께 나아갈 기회를 놓치고 있다.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낼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코르시카는 천혜의 자연환경과 내부자원들을 활용하는 데 실패했고(12면 하단 기사 참조), 프랑스 역시 코르시카와의 관계에서 실패했다.

 

“내일의 진실은 어제의 실수로 성장한다”

트라우마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해결될 수는 있다. 해결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폴 리쾨르의 아름다운 표현을 빌리자면, ‘기억의 비판적 활용’을 시작해야 할 때다. 종교계에서는 레지스 드브레가 이렇게 말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우리가 속해 있는 생물학적 환경에는 저항이 존재한다. 집단적 자아(Moi collectif)는 방어기제를 가지고 있다. 이 방어기제는 무의식적이지만 효과적이다. 무의식적이기 때문에 효과적이다. 무엇에 대한 방어기제인가? 매우 고통스럽고 우리의 이데올로기적 안정성을 저해하는, 오랫동안 억압된 부분이 표면에 떠오르는 것에 대한 방어기제다.”(4) 그중 뜻하지 않게 용기를 주는 대목이 있다. “귀찮고 성가신 문제를 계속 외면한다면 그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 문제해결은 당연히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불가능하지도 않다. 다만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트라우마를 외면한다 해서, 그 결과까지 외면할 수는 없다. 트라우마의 존재 자체로도 우리는 해결책에서 멀어진다. 트라우마를 외면한 대가는 양쪽 모두에 파괴적이다. 치유를 향한 과정에서 폭력이 발생할 수도 있는데, 코르시카의 입장에서 이는 덫이다. 폭력은 우리를 선동하지만 명분, 특히 가장 고귀한 명분을 잊게 만든다.

레빈은 “해결된 트라우마는 축복”이라고 말했다. 아마도 긴 여정이 될 것이다. 마법 같은 치유책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를 시작으로 양쪽 모두를 트라우마로부터 서서히 해방시킬 수 있다. 2019년 6월 21일에는 코르시카와 프랑스의 시민들 수백여 명이 모여 단체 ‘코르시카 공동체의 땅 Terra di u cumunu-Terre de liens Corsica’의 탄생을 함께했다. 이 단체는 프랑스 전역의 시민들과 농민들을 연대시켜, 투기세력으로부터 농업지역을 지켜내고, 생명존중을 바탕으로 한 생산 활동을 활성화하고자 한다. 작은 움직임이지만, 큰 희망으로 나아가는 소중한 한 걸음이다. 

이제는 시대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정치적, 환경적, 윤리적, 정신적 변화와 재탄생(Renaissance)을 함께 이뤄보자. 과거 우리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어떤 변화가 생길까? 에리냑은 자신의 노트에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가 남긴 말을 적어놓았다. “내일의 진실은 어제의 실수로 성장한다.” 

 

 

글·장-프랑수아 베르나르디니 Jean-François Bernardini
이 무브리니(I Muvrini, 코르시카의 민속음악 그룹)의 보컬. 주요 저서로 『L'Autre Enquête corse. Le trauma Corsica-France (코르시카에 관한 또 다른 조사. 코르시카와 프랑스의 트라우마)』(L'Aube, La Tour-d'Aigues, 2019년) 등이 있다. 

번역·김소연 dec2323@gmail.com
번역위원

 

(1) Peter A. Levine, 『Réveiller le tigre. Guérir le traumatism 호랑이 깨우기, 트라우마의 치유』, InterÉditions, Paris, 2019(영문판 초판은 1997년).

(2) 이런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극작품으로 Marie Ferranti의 『La Passion de Maria Gentile 마리아 장티의 열정』(Gallimard, Paris, 2017년)과, Rinatu Coti의 『U maceddu, Cismonte è Pumonti』(Pedicroce, 1988년, 코르시카어)가 있다. 

(3) Politique internationale sur les armes à feu(총기에 관한 국제 정책), www.gunpolicy.org

(4) Régis Debray, 2015년 5월 7일 자신의 보고서 『L’enseignement du fait religieux dans les écoles laïques 비종교 학교 내에서의 종교적 사실 교육』(2002년 2월) 설명을 위한 이사회를 앞두고 한 발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