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폭력에 ‘이중실종’된 레바논 사람들

2019-08-30     에마뉘엘 하다드 l 기자

레바논 당국은 “국가재건을 위해” 미련을 버리고 과거를 잊을 것을 권장한다. 당국은 내전기간(1975~1990년)에 실종된(대부분 납치를 당한) 사람들의 행방에는 전혀 무관심해 보인다. 한편, 실종자 가족들은 합심해서 사람들이 망각에 빠지지 않기 위해, 내전기간에 일어난 가장 비극적인 사건들을 기록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18년 11월 28일 오전, 30명 남짓한 여성들이 베이루트 중심가에 있는 칼릴 지브란 공원에 모였다. 깔끔하게 재건된 현재 모습에서는 1975년부터 1990년까지 있었던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이들은 역사적인 기자회견을 들으러 전국 각지에서 모였다. 2주 전이었던 11월 13일, 실종되거나 억류된 사람들에 대한 ‘105법’이 레바논 의회에서 가결됐다.(1) 해당 법률의 제2조에는 “(내전 중) 실종되거나 억류된 이들의 가족들은 그들의 행방에 대해 알 권리가 있다”고 명시돼있다. 해당 법률은 전국에 흩어져 있는 공동묘혈의 위치를 파악하고, 유해발굴과 신원파악을 위한 독립위원회를 설치하는 것에 관해서도 규정하고 있다. 

 

내 가족의 행방을 알 권리

공원에 모인 여성들은 대부분 굽은 어깨에, “우리는 알 권리가 있다”라고 적힌 띠를 두르고 있었다. 손에 든 빛바랜 사진 속에는 어딘가를 응시하는 젊은 남성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 남성들은 대부분 내전 당시 실종된 그들의 가족이었다. 레바논 내전은 공식적으로 사망자 15만 명, 실종자 1만 7,415명을 내고 끝났다.

작은 체격의 여성이 마이크가 있는 플라스틱 테이블까지 사람들을 헤치고 나왔다. 납치 피해자 및 실종자 가족 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와다드 왈와니라는 이 여성은, 카메라 앞에 서서 엄숙한 말투로 공식 성명을 낭독했다. “의회가 실종자에 대한 법률을 가결했습니다. 이 결과를 성취한 것은 가족 여러분들입니다. 1982년 11월 17일에 코르니쉬 엘 마즈라에서 처음 모였던 때를 기억하십니까?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고통 때문에 한 자리에 모인 것이죠.”

교사였다가 이제 실종자 가족의 주요 대변인이 된 왈와니는 자신이 겪은 비극을 조금도 잊지 않고 있었다. “제 남편, 아드난은 1982년 9월 24일 납치됐습니다. 그를 찾으려고 총리실에서 무프티(종교적 지도자 중 최고의 이슬람 법률가―역주)까지 곳곳을 찾아갔지만, ‘가엾으신 분, 당신만 저를 찾아오신 게 아닙니다’라는 말이 전부였습니다. 저는 저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연락하면 어떨까, 궁금해져서 라디오를 통해 모이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기껏해야 4~5명 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도착해서 보니 사람들이 엄청나게 모여 있어서, 또 충돌이 일어난 건가 생각했어요. 실은 200명 이상의 여성들이 제 말을 듣고 모인 것이었습니다.”

 

고통은 개인이, 용서는 국가가?

내전이 시작되자마자, 레바논 민병대의 각 병기창이 중심이 돼 상대편 민간인에 대한 공격수단으로 무차별적인 강제실종(국가권력에 의해 불법 연행·납치·구금됐지만 정보의 은폐·통제로 소재도, 생사도 확인할 길이 없는 상태-역주)이 자행됐다. 당시 <뉴욕타임스>의 특파원이었던 조나단 랜달은 자신의 저서 『레바논의 비극(The Tragedy of Lebanon)』에서 훗날 피랍된 사람들을 석방하는 데 있어서 전문가가 된 타리크 미트리의 이야기를 다뤘다.(2) 

“미트리는 (납치에 연루된 사람들을) 세 범주로 나눴다. 첫 번째 부류는 자신들이 속한 조직의 방침을 뛰어넘는 광신도적인 민병대원들이었다. (…) 두 번째 부류는 자신들의 조직원을 석방하기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납치하라는 명령을 받은 여러 무장조직의 조직원들이었다. (…) 세 번째 부류는 개인적인 이유로 또는 제3자가 제기한 ‘의혹’ 때문에 납치를 한 경우였다.”

내전 당시 기독교 민병대의 핵심세력 중 하나였던 레바논군단에서 정보부 2인자였던 아사드 샤프타리는 누군가를 석방하기 위해서는 정교한 외교적 감각과 독보적인 네트워크, 신속한 실행력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샤프타리는 자신도 과거에 여러 건의 납치를 저질렀음을 인정하면서 이렇게 고백했다. “우리는 정치 지도자와 군 장교나 사회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을 석방해 달라는 요청을 10여 건 받았었습니다. 대부분 중개인을 통해서였고, 바로 행동에 옮겨야 했습니다. 내전 초기에는 사람들이 곧바로 죽임을 당했거든요. 그리고 끌려간 사람의 가족들이 복수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그는 2000년 레바논인들에게 회개의 편지를 보냈고, 희생자들에게 용서를 구했다. 민병대나 시리아 주둔군 및 이스라엘 주둔군(시리아군은 1978~2000년, 이스라엘군은 1976~2005년 주둔)이 강제실종이나 기타 여러 범죄를 저지른 지 15년이 지난 후, 레바논 정부는 돈이 되는 재건사업에 관심을 돌리고 범죄자들을 사면해주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리고 내전 중에 일어난 모든 범죄를 사면한다는 법이 1991년 8월 26일에 가결됐다. 

그 이후 1995년의 ‘434법’은 자녀가 실종된 지 4년이 넘은 경우 사망신고를 할 것을 실종자의 부모에게 종용했다. 이에 대해, 레바논 내 NGO ‘리걸 아젠다(Legal Agenda)’의 변호사이자 ‘105법’의 원법안 작성자인 니자르 사그히에는 이를 두고 “내전을 덮겠다는 생각”이라고 설명했다. “부르주아 계층 가족들은 실종된 친족들의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 사망신고를 했다. 1995년부터 실종자의 행방을 알기 위해 투쟁해온 이들은, (상속받을 재산이 없는) 서민층이다.”

 

국가로 인해 ‘이중 실종’ 당하다

즉, 1995년의 ‘434법’은 내전을 은폐하겠다는 계획의 시작인 셈이다. 왈와니 위원장의 장남인 가산 왈와니는 이를 ‘이중 실종’이라고 불렀다. 그는 자신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팔림세스트, 눈에 보이지 않는 자들의 승천>(팔림세스트는 고대문서의 양피지 위에 계속 고쳐 쓴, 문자가 겹친 흔적을 말함-역주)(2018 몽펠리에 지중해 영화제 율리스상 수상작)에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실종자들을 망각에서 되살리려고 노력했다. 관객들은 화면에서 다음과 같은 자막을 볼 수 있었다. “범죄는 두 가지 행위로 진행된다. 우선 죽이는 행위, 다음은 증거를 인멸하는 행위다.” 

이 영상에서는 내전이 휩쓸고 간 베이루트의 위성사진이 나왔다가 재건된 현대 모습으로 배경이 바뀐다. 유명 나이트클럽, 골프장, 해변 산책로 등 고급스러운 장소들이 화살표로 표시돼 있다. 그 중에는 공동묘혈이었던 곳도 있다. 그는 베이루트에서 가장 비싼 지역 두 곳을 언급하며 가슴 아픈 진실을 털어놓았다. “함라와 마르 미카엘 사이의 길을 걷다 보면, 공동묘혈들과 만날지도 모른다.”

내전 중에 만들어져서 발굴되기만 기다리고 있는 공동묘혈은 도대체 몇 곳이나 될까? 2000년 1월 21일 설립된 공식조사위원회는 여러 질문 가운데 특히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내놓아야 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해당 위원회는 두 페이지의 보고서를 발표했는데, 이 보고서는 실종자 수를 2,046명이라고 집계하고 이들의 죽음을 ‘직권에 의한 사망’이라고 선언했다. 공동묘혈의 존재도 인정됐으며 그 중 일부는 위치도 파악됐지만, 나머지는 더 이상 위치를 파악할 수 없다고 기록돼 있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해당 위원회의 위원장을 맡고 있는 살림 아부 이스마일은 레바논의 우맘 기록·연구센터(Umam Documentation and Research)로부터 공동묘혈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그는 그 질문에 놀라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무엇 때문에요? 수천 구의 유골을 발굴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나, ‘실종자를 위해 행동하라(Act for the Disappeared)’라는 NGO는 레바논에 115개의 공동묘혈이 있다고 파악했다. 해당 단체는 각 묘혈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고, 앞으로 ‘105법’에 의해 설립될 위원회에 이를 전달할 예정이다. 

카디자 D.는 눈앞에서 17세 아들, 아마드가 끌려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녀는 1982년부터 34년간, 자신이 사망하던 2016년까지 실종자 가족 시위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카디자의 뒤를 이은 그녀의 딸 수산은 “어머니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아마드는 돌아올 거야’라고 말씀하셨어요. 저도 계속 같은 말을 하겠지요”라고 증언했다. 다른 수천 명의 실종자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수산에게 있어서 사랑하는 이의 유해를 찾아낸다는 것은 끝없는 애도기간 또는 큰 정신적 고통의 근원인 ‘상복 입는 기간’을 끝낼 수 있다는 의미다.(3)

수산은 작년에 자신의 유전자 샘플을 국제적십자위원회(ICRC)에 보냈다. 국제적십자위원회는 2015년부터 1,500개의 유전자 샘플을 받아 DNA를 추출한 뒤, 공동묘혈에서 유해가 발굴되면 그 당일에 유해의 신원을 파악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이는 레바논 당국의 나태함에 대해 임시방편으로나마 대응할 방법이다. 수산은 어머니 나디자가 처음으로 심장마비를 일으켰던 때를 회상했다. “1998년 엘리아스 흐라위 대통령이 실종자에 대해 말했을 때였어요. 모든 실종자는 바다에 버려졌거나 타르에 묻혔을 것이니, 과거는 묻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요.”

 

침묵과 망각의 감옥을 깨려는 노력들

당시 흐라위 대통령은 시리아나 이스라엘 감옥에 수감된 레바논인은 “아무도 없다”고 밝혔다. 시리아의 여러 감옥에서 15년간 수감됐던 무사 사브는, 그렇게 국가가 자신의 존재를 지우려했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시리아의 사드나야 감옥에 갇힌 지 4년이 지났을 때였어요. 엘리아스 흐라위 대통령의 그 말을 레바논 라디오에서 들었어요. 시리아에 갇혀 있던 수백 명의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말을 들었던 겁니다!” 

사브는 2000년 12월 12일 풀려났다. 사브 외에도 시리아에 갇혀 있던 53명이 석방됐다. 그리고 레바논 곳곳에서 주기적으로 공동묘혈이 발견되고 있다. 이런 사실들을 실종자 관련 사건을 은폐하려는, 레바논 지도부의 시도들을 무산시켰다. 베이루트에서 활동 중인 기자 겸 감독인 모니카 보그만과 작가 겸 발행인인 로크만 슬림(우맘 기록·연구센터의 소장이기도 함)은 시리아에 억류됐던 약 20명의 레바논 정치사범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도 했다.(4)

즉, ‘105법’에 대한 표결이 뜻하는 바는 범죄자들 사이에서만 머무르던 내전에 대한 이야기가, 지금까지 침묵의 감옥 속에서 소외당해온 희생자들에게 처음으로 도달했다는 것이다.(5) 하지만 이 법안도 위와 같은 진전이 가지는 진정성에 대한 의구심을 모두 해소하기엔 역부족이다. 슬림은 “왜 지금인가?”라고 자문했다. 그는 해당 법률이 채택됨으로써 지난 36년간의 실종자 가족의 투쟁이 종식될 것이라는 생각은 ‘낭만주의적인’ 태도라고 말했다. 그는 해당 법률의 채택에 대해,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 체면치레’라고 봤다. 그는 “국제사회가 반길 만한 법을 가결하는 것은 레바논 의회의 전통적인 절차”라며, 이 법도 이미 가결됐지만 여전히 시행명령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39건의 다른 법안들처럼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105법’에는 공교롭게도 의회 본회의에서 최종적으로 논란이 될 만한 조항 하나가 추가됐다. 사실상 이 조항은 해당 법률의 시행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 바로 제37조인데, 여기에는 “강제 실종의 주모자와 가해자나 공범은 5년에서 15년간 강제노역이 수반된 징역형을 받아야 한다”라고 명시돼있다. 이 조항에 대해 왈와니 위원장은, ‘피해자 가족들의 바람에 반하는 조항’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제37조에 책임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알 권리가 형법보다 앞섭니다.”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는 퇴역 군인들이 모인 NGO ‘자유를 위한 전사들(Fighters for Peace)’의 회원이기도 한 샤프타리는 이 조항이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걱정했다. “내전기간에 범죄를 저질렀던 사람들의 머리 위로 다모클레스의 검(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의 긴장과 불안, 행복에 따르는 위험을 뜻하는 말-역주)을 겨눠도, 그들이 증언하러 오지는 않을 것이다.”

레바논 정치인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에 이골이 난 왈와니 위원장은 “나는 쉽게 속지 않는다”고 말했다. “해당 법안이 가결된 것은 하나의 단계에 불과합니다. 앞으로 설립될 위원회에 10명의 위원을 지명하기 위해 우리는 계속 투쟁할 겁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레바논에서 그래왔듯 위원회의 후보자들이 정치적인 기준이나 종교적인 기준에 따라 결정되지 않게 할 것입니다”라고 예고했다. 

왈와니 위원장의 아들, 가산은 레바논 사회 전체가 실종자들에 대해 기억하도록 촉구할 방법을 찾고 있다. 그는 앞서 언급한 다큐멘터리 외에도, 자신의 어머니가 사람들 사이에서 모아온 기록을 2015년부터 디지털화하고 있다. 그 자료들은 왈와니 위원장이 지난 36년간 실종자 가족들에 대한 기사, 연설, 성명 등을 오려서 꼼꼼하고 악착같이 모아놓은 것들이었다. 이 자리에 없는 사람들을 한 번이라도 더 보여줌으로써 내전의 망각을 다시 일깨우기 위한 노력의 흔적이다. 가산은 자신의 다큐멘터리 마지막 부분에서 내전 중 실종된 리처드와 크리스틴 부부의 일화를 전했다. 한 부동산 개발업자가 이들 부부의 재산을 사들이려고 했지만, 판사는 공식적으로 이들 부부가 죽지 않았다고 판단했고 그의 요청을 기각했다는 이야기다. 

 

 

글·에마뉘엘 하다드 Emmanuel Haddad
기자

번역·이연주
번역위원

 

(1) 2018년 12월 6일자 레바논 관보, 레바논의 NGO 우맘기록연구센터(Umam Documentation and Research)에서 해당 법률을 영어로 번역했다(www.umam-dr.org).

(2) Jonathan Randal, 『The Tragedy of Lebanon : Christian Warlords, Israeli Adventures and American Bunglers』, Chatto and Windus, London, 1983.

(3) Pauline Boss, 『Ambiguous Loss. Learning to Live with Unresolved Grief』, Harvard University Press, London, 2000.

(4) Akram Belkaïd, 『L’ombre du bagne de Palmyre plane sur la Syrie 시리아에 평평하게 드리워진 팔미르 감옥의 그림자』, Orient XXI, 2016년 12월 29일, www.orientxxi.info

(5) Carla Eddé, 『Les mémoires des acteurs de la guerre : le conflit revisité par ses protagonistes 전범들의 기억: 주모자들에 의해 재해석된 갈등』dans Franck Mermier et Christophe Varin (sous la dir. de), Mémoires de guerres au Liban (1975-1990), Actes Sud, Arles, 201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