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연재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가 새로 쓰는 ‘비판경제 교과서’ (9), 부채-협박

『비판경제 교과서』 연재순서 (1) 경제학은 과학인가? (2) 생산 증대, 무조건 더 많이! (3) 노사관계(다리와 버팀목의 관계) (4) 부의 분배 희망과 난관 (5) 고용, 어떠한 대가를 치러야 하나? (6) 시장을 따를 것인가 명증된 법칙을 세울 것인가? (7) 세계화, 국민 간의 경쟁 (8) 화폐, 금전과 현찰의 불가사의 (9) 부채 협박 (10) 금융, 지속 가능하지 않은 약속

2019-08-30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0년 전까지만 해도 ‘채무 위기’를 설명할 때면 제3세계 국가, 특히 80년대에 국가채무의 급격한 팽창을 경험한 중남미의 예를 주로 인용하곤 했다.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채무 위기의 사슬이 개발도상국에 이어 이제는 유럽을 필두로 한 선진국으로 기세를 뻗치고 있다. 과거에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이는 오늘날의 엄연한 현실이다. 그렇다면 채무 위기에 대한 경험치가 누적된 만큼, 과거보다 효과적으로 대처하고 있는가? 이 점은 석연치 않은 의문을 남긴다. 치료사도, 처방전도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채무란 도대체 어디서부터 생겨나는가? 채무는 정말 국가 경제에 백해무익할까? 그리고 이 대목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질문은, 국가채무를 반드시 상환해야만 하느냐는 것이다.

 

편견: “정부는 훌륭한 가장의 역할을 해야 한다”

국가채무에 관한 공공담론은 추상적인 개념을 친숙한 말로 설명하는 특징이 있다. 채무를 나타내는 골치 아프고 복잡한 각종 전문 용어보다는 “허리가 휘청거린다”,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 “나라 살림이 구멍 날 형편이다”처럼 친숙한 일상언어가 일반인들에게는 더 직관적으로 다가온다. 재정 운영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높이고 국민의 뜻을 모아야 하는 정부의 입장에서는 더없이 요긴한 수단이다.

“정부가 제대로 된 가장의 역할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에르베 마리통(Hervé Mariton, 공화당) 국민의회 의원이 2013년 12월 21일에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던진 질문이다. 정부는 나랏돈을 집안 살림처럼 꾸리고, 국민을 감화하는 도의적 책임을 지닌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집안에 돈이 한 푼도 없어 쌀독이 비면 가장은 어떻게든 쌀을 채워넣기 위해 고군분투하게 된다는 통념이 있기 때문이다. 정부도 세출과 세입의 균형을 취하기 위해 애쓴다. 이는 유로 지역이 정한 원칙이기도 하다. 유로 회원국은 국내총생산 대비 국가채무 비율을 60%를 초과하지 않도록 정하고 있으며, 이 합의를 지키지 않을 때는 (분수에 넘치는 호사를 부린다는 비난을 받으며) 긴축 재정을 적용해야 한다. 이른바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상황에 해당한다.

가계, 기업과 달리 국가는 파산하지 않는다. 채무를 상환하지 않으면 해당 국가는 단지 채무상환 불능 상태에 놓일 뿐이다. 국가재산은 압류나 법정 청산 절차를 밟을 일도 없다. 2001년 아르헨티나의 사례가 바로 이 상황에 해당한다. 물론 이 같은 조치가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계와 달리) 국가는 증세 혹은 채무상환 조건 조정 등의 방법을 동원해 ‘갱생’의 기회를 얻는다.

가계나 기업과 국가의 두 번째 주요한 차이는 가계는 임금을, 기업은 상품판매를 통해 얻는 수입이 제한적이지만 정부와 공공기관은 변화 양상에 따라 조건을 조정할 여지가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정부는 먼저 지출 규모를 계획하고 지출액에 따라 일정 부분 수입액을 결정한다는 뜻이다.

 

의사가 사형집행인 노릇을 한다면

어째서일까? 케인스학파의 이론에 의하면, 단기적으로 각종 공공지출(임금, 중간소비, 투자, 실업급여 등)은 총수요를 결정짓고, 기업은 경기의 흐름을 바탕으로 수요를 예측해 생산량과 고용량을 결정한다. 일례로 브라질 정부는 2002년에 제철소 노동자 출신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실바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다양한 사회 복지 사업을 추진했고, 그 결과 3,00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빈곤을 탈출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소비진작 효과까지 거뒀다.

장기적으로 공공지출은 공급에도 영향을 미친다. 교육과 보건 분야에 대한 지출은 노동생산성을 높이고, 연구 분야에 투입된 지출은 새로운 기술과 제품 발명을 촉진해 편리를 제공하며, 자본지출을 통해서는 경제활동에 꼭 필요한 기반시설을 확충할 수 있다.

따라서 공공지출은 수요와 공급, 즉 경제활동에 영향을 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필연적 법칙은 아니지만, 이런 경제활동은 다시 국가 수입으로 이어진다. 경기 부양책과 탈세 방지책이 효과를 거두면 경제가 활성화되고 세수가 늘어난다. 그 결과 국민소득이 증가하는 반면, 부채 의존도는 낮아진다. 국가채무의 증가세는 둔화하는 한편, 국내총생산의 증가세는 가속화되기 때문에 국가채무 비율(채무/국내총생산)은 감소한다. 그러나 경제가 둔화 추세로 반전될 경우, 국내총생산의 감소세가 채무의 감소세보다 빠르게 늘어나 채무비율이 상승한다.

가계 살림을 운영하듯이 정부가 지출을 삭감해 채무를 덜어줘야 한다는 주장은 결국 국내총생산의 크기를 결정하는 총수요 확대에 미치는 공공 투자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환자를 살리자고 한 일이 오히려 죽이는 꼴이 되는 셈이다.

 

행주와 수건의 차이

국가채무 비율은 널리 쓰이는 개념이지만, 국내총생산 대비 국가채무의 비율은 실상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누적치에 해당하는 국가채무와, 매년 갱신되는 유동적 경기 흐름을 나타내는 국내총생산을 단순 비교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나라의 전체 채권 규모를 국가 자산가치의 총계에 해당하는 국부(국민순자산) 등의 누적치와 비교하는 것이 더 논리적인 측정 방법에 해당할 것이다. 참고로 프랑스의 국부는 자산 대비 부채 비율이 10%에 불과하다.

 

빚의 미덕

국가채무는 사람들 뇌리에 위협으로 각인됐기에 결코 미덕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자본가들의 재산 확대를 용이하게 하는 채무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근간이 되고 있다. 사실 국가채무를 다른 정책 옵션과 결합하면, 국가가 경기 변동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도록 한다는 유익한 측면이 있다.

놀랄지도 모르겠지만, 국가채무를 정당화하는 지고한 이유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국가는 여느 회사나 협회, 혹은 조합과 같은 방식으로 유용하다고 여기는 재화와 용역을 생산해낼 뿐이다. 따라서 이들 상품을 생산하는 데 비용이 발생한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그 값을 치러야 한다. 이때 세금은 공공재나 공공복지의 값을 치르는 역할을 한다. 우리가 마트에서 상품을 구매하며 (간혹 그 효용성이 의심스러울 때도 있지만) 응당한 값을 치름으로써 해당 상품의 생산비용을 충당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렇기에 (정의와 적용 범위가 여전히 민주적 논의의 대상으로 남아 있는) 공공재는 주주들의 주머니를 불리는 데 종종 쓰이는 잉여가치를 발생시키지 않는다는 특장점이 있다.

국가가 지는 채무가 당위성을 얻는 이유는 단지 그 돈이 국가 운영에 투입돼 새로운 부를 창출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이상의 특수한 의미가 있는 이차적 고려 사항이 있기 때문이다.

국가가 (세금이 아닌) 채무에 기대는 이유를 정당화하는 첫 번째 이유는, 분할상환 방식을 선호하는 시민들의 성향이다. 오랜 기간 사용하는 내구재를 구매하는 소비자와 마찬가지로, 시민들은 기반시설·교육·보건·법률·치안처럼 장시간에 걸쳐 혜택을 받는 경우, 그 대가를 즉시 치르기보다는 세금을 통해 분할부담하는 방법을 선호한다. 공공 투자로 제공되는 서비스나 혜택을 (복지, 급여, 적립금 등의 형태로) 경험하는 순간, 값을 즉시 치르기보다는 세금의 형태로 추후에 납입하는 방식이 (비록 이자 부담이 가중되더라도) 더 유리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예상되는 저축의 수익률보다 세금이 낮으면 (그리고 정부가 빈민층보다 더 많은 세금을 부유층에 부과한다고 가정하면), 부유한 사람들은 더더욱 장기간에 걸친 분할 상환 방식을 선호할 것이다.

 

‘최후의 해결사’, 국가

재정적자와 그에 따라 발생하는 채무를 정당화하는 두 번째 이유는 바로 경기 조정이다. 경기가 계속 침체돼 있거나 완전고용 보장을 어렵게 하는 경제활동의 둔화가 지속될 경우, 정부는 즉각적으로 자본지출을 통해 기업에 대한 시장의 수요를 확대한다. 이때 만약 국가가 세금을 더 많이 부가하는 정책을 시행한다면 시장의 수요는 위축되고 말 것이다. 제아무리 완고한 원칙주의자라고 해도 경제활동에 활력을 불어넣는 국가지출의 역할과 이때 발생하는 승수효과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울러 활력을 되찾은 기업이 세금납부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게 되는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국가채무의 당위성으로 국가의 경기조정 기능을 내세우는 이유는  또 있다. 해당 주장이 전제하는 바는 기업이 원활한 활동을 펼칠 수 없을 정도로 경제 전반에서 만성적인 수요 부족이 발생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지난 30년간 확대일로에 있는 국가채무의 규모를 생각해보면, 이는 역으로 채무가 발생하는 원인과 경기조정 필요성을 실질적으로 설명하는 하나의 설득력 있는 가설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오늘날에는 퇴직연금 재원의 (재분배가 아닌) 자본화가 진행됨에 따라 세계적으로 과잉저축 현상이 지속되고 있으며, 주주들은 터무니없이 높은 이윤을 기업에 요구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렇듯 여러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세계 경제는 저소비 국면에 들어섰지만, 소비의 감소분을 기업의 투자로 상쇄하지는 못하고 있다. 과잉저축 현상이 기업의 투자에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판로를 위축시키는 상황이기에 기업은 선뜻 투자에 나서지 않는다. 결국 기업의 붕괴를 막고, 나아가 경제성장을 잠식해 국가채무를 유발하는 과잉저축을 보다 효과적인 방향으로 활용해내는, 이른바 ‘최후의 해결사’ 역할을 지난 30년간 국가가 도맡아왔던 것이다.

 

신용카드의 기원

이 물건은 대부분 사람이 늘 소지하고 다니는 작은 플라스틱 조각이다. 이 물건이 있으면 식료품점, 영화관, 수영장을 이용할 수 있다. 행여 분실이라도 하는 날에는 재앙 같은 사태가 벌어지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 대비해 분실신고용 핫라인까지 생겨났다.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물건인 신용카드가 그 유용성을 널리 알리기까지는 많은 궁리와 시행착오를 거듭해야 했다.

언론인 조지프 노세(Joseph Nocera)는 “뱅크오브아메리카가 캘리포니아의 조용한 소도시 프레즈노에 6만 장의 신용카드를 투하한 1958년 9월 중순의 어느 날, 미국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라고 말했다. 누구 하나 요청한 사람이 없었지만 네모난 플라스틱은 말그대로 여기저기에 흩뿌려졌다. 9년 후에 시카고의 여러 대형 은행이 똑같은 작전을 반복했다. 이번에는 무려 500만 장의 카드가 도시를 휩쓸었다. 그 중 일부는 사망자, 수감자, 아동 그리고 앨리스 그리핀이라는 이름을 가진 바셋 하운드종 견공 앞으로 전달됐다. 카드와 함께 동봉된 서신에는 엘리스 그리핀이 손꼽히는 고급식당의 ‘우수고객’으로 등극했음을 축하하는 인사말이 담겨 있었다. 얼마 안 가 수천 명의 고객이 즉각적으로 쓸 수 있는 지불수단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갔고, 일부는 청구대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못해 곤란을 겪었다. 당시 시카고의 은행들 역시 막대한 손실을 보았는데, 그 액수가 2,500만 달러(1967년 가치 기준)에 달했다. 그런데도 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어째서일까?

당시 미국 은행들은 보완성 문제를 극복하는 방법을 고심하고 있었다. 서로를 보완하는 관계에 있기 때문에 동시에 소비할 때 그 효용이 증가하는 재화를 대부분 보완재라고 부른다. 한 재화의 수요가 또 다른 재화의 수요를 결정하는 관계라고도 할 수 있다. 신용카드의 경우가 바로 이에 해당한다. 소비자들은 많은 소매업자가 카드를 받아야 가입을 할 것이고, 소매업자들 역시 소비자의 수요가 충분해야 단말기를 들여 카드를 받기 시작할 것이었다.

 

신용카드 강제 지급은 불법

뱅크오브아메리카의 부국장은 시인했다. “결제 수단으로서 사용자의 숫자가 충분히 확보됐으며 수익성이 보장되는 결제수단이라는 것을 일반 상인들에게 이해시키려면, ‘사용자의 의사와 무관한 방법’으로 신용카드를 발행해 배포하는 것 외에는 뾰족한 대안이 없었다.”

1970년에는 공식적으로 신용카드의 ‘강제 발행’이 불법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러나 이미 신용카드는 미국 전체 50개 주(州) 중 49개 주에서 통용되고 있었고, 2,900만 명(성인의 20%)이 한 번 이상 사용한 경험이 있을 만큼 보편화됐다.

신용카드의 성공적 도입의 비결은 일찍부터 신용 소비가 발달했던 미국 사회의 배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구나 자동차 등의 상품을 취급하던 미국의 소매업자들은 19세기 중반에 이미 할부결제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다. 그 중 일부는 단골고객 앞으로 해당 점포 내에서만 사용가능한 외상카드를 지급하기도 했다. 

현대식 신용카드의 원조는 1950년에 생겨난 다이너스클럽 카드다. 이 카드의 획기적인 특징은 다양한 점포에서 사용할 수 있다는 점과, 기 확보된 회원과 가맹점을 통해 제3의 가맹점을 늘려나갔다는 점에 있었다. 

훗날 뱅크오브아메리카는 단말기가 설치된 모든 매장에서 신용카드를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카드 사용자에 관한 정보를 알 길이 없었다. 점포에서는 신용카드 소지자가 (점포의 과거 거래내역상) 신용불량자에 해당할 경우 카드 결제를 거부할 수 있었지만, 은행으로서는 사용자 개개인의 특징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은행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출자의 지급능력을 평가하는 기술을 도입했다.

 

표적 마케팅 기법의 원조

1960년대 초에 페어 아이작 코퍼레이션(FICO)은 최초의 신용평가사를 설립해 수많은 개인정보(사회적 지위, 재무상태, 신용이력 등)를 최대한으로 수집해 등급을 부여하는 데 활용했다. 해당 등급에 따라 신용카드 사용자의 대출 한도, 대출 기간 및 이자율이 달라졌다. 이는 위험을 측정해 불확실성을 축소하는 미국의 신용평가 시장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2007~2008년 발생한 서브 프라임 사태는 이 시스템의 취약성을 드러냈다. 은행은 저소득 가계를 대상으로도 무분별하게 주택담보 대출을 결정했고, 다른 금융사들은 파생상품이 불러올 잠재 위험을 은폐했다. 파생상품을 발행한 금융 그룹과 밀착돼 있던 신용평가기관은 해당 상품에 우수 등급을 부여했지만, 시간이 흐른 후에는 모두 ‘부실자산’이었음이 드러났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불확실성이 아니라,  평가의 독립성이다.

 

카를로 폰지(Carlo Ponzi)

폰지 사기(다단계 금융사기)는 금융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사기 수법이다. 물론, 카를로 폰지 이전에 다단계로 투자자를 모집해 수익을 장담하던 수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수법에 훗날 ‘폰지 사기’라는 이름이 붙을 줄은 몰랐을 테지만 말이다.

이탈리아 북부 파르마 출신인 카를로 폰지는 1919년에 만국우편연합이 발행하는 국제 반신우표권(이하 반신권)을 이용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당시 국제 반신권은 나라 별로 값이 달라서, 스페인에서 미화 1센트에 구매한 국제 반신권을 미국에서 되팔면 6센트를 얻을 수 있었다. 폰지는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혹은 프랑스 등지에서 100만 달러어치 국제 반신권을 사들이면 바다 건너 미국에서 6배의 수입을 올릴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1919년 12월 26일, 그는 보스턴에 ‘증권거래사(The Securities Exchange Company)’를 설립하고 45일간 투자하면 원금의 50% 수익을 보장한다는 내용으로 보증서를 발행했다. 우정 당국은 우표와 돈을 교환하는 행위를 엄연히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었으나, 카를로 폰지는 투자자 유치를 감행했다. 투자자의 수는 계속해서 늘어났기 때문에 새로 유입된 신규 자금으로 기존 투자자에게 지급할 배당금을 충당할 수 있었다. 사업은 날로 번창해 투자자가 앞다투어 몰려들 정도였고, 금융 귀재로 거듭난 그는 한동안 순탄대로를 달리는 듯했다.

1920년 8월, 〈보스턴 포스트〉는 폰지가 사기죄로 옥살이를 한 전과를 폭로하는 기사를 냈다. 이로 인해 폰지의 사기 수법이 만천하에 모습을 드러냈고, 한때나마 금융의 귀재로 여겨졌던 그는 결국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8개월에 걸쳐 약 2,000만 달러에 달하는 피해를 불러온 카를로 폰지는, 금융사에 자신의 이름을 길이 남기게 됐다.

 

시장에 동조하는 희생양

국가의 입장에서 국가채무에 따른 주요한 고민거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채무조건이고, 두 번째는 채권 보유자의 상환요구 조건이다. 수 세기에 걸쳐 국가의 채무조건은 점점 더 까다로워졌고, 채권 보유자의 상환요구 조건도 더욱 강화되는 경향을 보여왔다.

국가는 매년 한 해 동안 발생할 지출액과 그에 따른 수입액에 대한 계획을 세운다. 프랑스의 경우 정부가 편성한 예산을 의회가 의결을 통해 결정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더라도, 국가의 재정지출이 증가하거나 조세 수입이 감소해 재정적자가 발생한다(일반적으로 국내총생산 대비 재정적자 비중을 가늠한다). 재정적자를 메꾸는 방법 중의 하나는 상환의무와 이자 지급을 조건으로 돈을 빌리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국가채무가 생겨난다.

그렇다면 국가에 돈을 빌려주는 주체는 누구인가? 과거 오랫동안 군주들은 국제 무역의 부상으로 막대한 부를 쌓은 상인들로부터 돈을 빌렸다. 현대에 들어 국가는 화폐를 발행하는 중앙은행을 통해 부족한 돈을 융통했다. 실제로 국가는 중앙은행에 적자 규모에 상응하는 금액의 현금 발행을 요청할 수 있었다. 한 가지 문제는 중앙은행이 너무 자주, 혹은 너무 많은 돈을 한꺼번에 발행할 경우 급격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이는 다시 국민의 구매력 저하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특히 인플레이션은 부자들의 재산을 잠식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따라서 대형 금융회사들은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1970년대에 접어들어 금융회사들은 결국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데 성공했고, 국가는 돈을 빌릴 새로운 경로를 모색해야만 했다. 마침 시장의 많은 투자기관들은 위탁받은 개인저축의 수익률을 확대하는 방법을 찾는데 골몰하고 있었다. 물론 국고채(국가가 발행한 채권)는 수익률이 낮다. 그러나 투기를 유발하기 쉬운 고수익 증권과 비교하면 안정성이 높다는 장점이 있다.

국가채무는 두 가지 시장에서 거래된다. 첫 번째는 국가가 채권을 발행하는 ‘발행시장’이다. 각 채권에는 가격과 이자율이 부여된다. 가격은 돈을 빌려준 액면가에 해당한다. 가령 그 가격이 100유로라고 가정해보자. 이자율은 투자자가 얻는 이윤을 결정하는 비율이다. 예를 들어 3%의 이자율(일명 표면금리)은 투자자에게 연간 3유로의 이윤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만기 시점(주로 2~5년짜리 유통량이 가장 많다)을 채우는 투자자는 많지 않다. 만기가 도래하기 전에 이뤄지는 거래는 2차 시장 즉 ‘유통시장’ 안에서 이뤄진다.

채권투자 수익의 원천은 세 가지다. 즉, 기간마다 정기적으로 발생하는 이자 수입, 채권의 매입가격과 상환액(만기 시에는 액면가격) 간의 차이로부터 발생하는 자본이익(또는 손실), 마지막으로 기간별 이자 지급액을 재투자해 얻는 수입이 있다. 만기수익률에 있어 이자 수입과 자본이익(또는 손실)은 확정적인 현금 흐름을 나타내지만, 이자의 재투자수입은 미래의 기간별 이자 수입이 어떤 수익률로 재투자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세금은 회피하면서 국가에 빚을 권하는 방법

국채의 특장점으로는 현금화할 수 있는 유동성이 크다는 점, 즉 언제든지 상환할 수 있는 2차 시장이 존재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면 채권의 가치가 높아진다. 반면 채권을 보유하려는 사람이 적어지면 채권의 가치는 낮아진다. 후자의 경우 투자자가 100유로에 매입한 채권을 60유로에 상환한다고 가정해보자. 발행 시에 정해진 3유로의 표면금리는 변함이 없다. 반면 액면가 대비 금리 비율은 훨씬 높아진다. 액면가 60유로를 기준으로 할 경우, 3유로의 금리는 3%가 아닌 5%로 높아진다. 따라서 채권 유통가격의 변화는 이자율의 변화로 나타난다. 결국, 이자율 증가는 채권에 대한 수요 감소(가격의 하락)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더 높은 금리를 요구하는 투자 경향으로 인해 증가하는 부채 비용은(실상은 전례가 없는 저금리와 마이너스 금리마저 등장하는 상황이지만) 국가가 예산을 충실히 관리하도록 하며, 결과적으로는 채무를 줄이는 효과를 가져온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모순점을 발견하게 된다. 국가에 돈을 빌려주는 여러 경제주체 중 대자본가들은, 세금감면을 원하는 이들이라는 점이다. 달리 표현하면 국가에 도움이 되는 세금납부는 회피하지만, 자신들의 이익을 늘리고자 국가가 더 많은 빚을 지도록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는 이들인 것이다.

 

유럽, 채무는 민주주의에 역행한다

“한 국가를 정복하고 예속시키는 수단은 두 가지다. 하나는 무기이고, 또 다른 하나는 채무다.” 

미국의 2대 대통령 존 애덤스(John Adams)가 이렇게 말한 이후 두 세기가 흘렀지만, 상황은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1980년대 중남미 국가들을 옥죄던 채무의 악순환이 유럽에서 반복되고 있으며, 설상가상 이들 유럽 국가는 국민의 선택이라고는 보기 어려운 정책적 제약에 손발이 묶여 고전을 거듭하고 있다.

유로화 사용 국가는 통화의 대외가치를 조정할 수 없으므로 통화정책에 제약을 받는다. 1997년에 채택(2005년 개정)한 안정 및 성장 협약은 재정적자와 국가채무의 상한선을 각각 국내총생산의 3%와 60% 이내로 정하고 있으므로, 개별 회원국의 재정정책 시행 범위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안정 및 성장 협약이 제시하는 상한선 수치는 어떤 방식으로 정해졌을까? 재정적자 상한선은 1981년 당시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François Mitterand)의 경제 참모진의 결정으로 정해졌다. 당시의 참모진 중 한 명이었던 기 아베이(Guy Abeille)에 의하면, “3%의 수치를 내놓기까지는 1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론적 근거나 분석도 없이 탁상공론으로 결정됐다. (…) 미테랑 대통령은 끊임없이 예산 증액을 요구하는 정부 각료들을 무력화할 수 있도록 간단명료하면서도 경제학적으로 근거가 있는 듯 보이는 준칙을 단시간에 도출하고자 했다.” 

1%? 아니면 2%? 참모진은 결국 숫자 3을 택했다. “3은 행운의 숫자이며, 역사적으로도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게다가 삼위일체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이 수치는 훗날 경제학자들의 이론으로 발전했으며, 1992년 마스트리흐트 조약에서도 반영돼 유로지역 가입요건으로 삼게 됐다. 과연, 국가채무 상한선에는 엄격하고 과학적인 기준이 적용됐을까?

이 같은 재정 준칙은 2012년 10월 파리에서 비준된 ‘안정, 조율 및 거버넌스 조약(일명 신 재정협약, TSCG)’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재정 운영에 관한 여러 대응조치를 담고 있는 이 조약은 황금률(국내총생산 대비 재정적자 3%, 국가채무 60%)을 넘어서는 국가에 대한 유럽집행위원회와 유럽이사회의 다음과 같은 제재를 담고 있다. ① 구속력 있는 재정구조 개혁, 이른바 긴축조치 이행. ② 국채발행 계획의 사전 통보. 이밖에도 이 조약은 회원국들이 재정적자 상한선을 헌법으로 법제화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연간 구조적 재정적자가 국내총생산 대비 0.5%를 초과할 경우 작동하도록 하는 ‘자동 교정 메커니즘’이 이에 해당한다. 더불어 이 조약은 이런 일련의 조치들이 “의회의 심의 대상에서 제외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국민이 선출한 대표로 구성된 의회가 자국 재정에 대해 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형국인 셈이다.

 

“안전조약이 안정조약에 우선한다”고 주장한 프랑수아 올랑드

정치학자 라울 마르크 제나르(Raoul Marc Jennar)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같은 조치는 공공투자를 꽁꽁 얼어붙게 하고 정책적 자율성을 침식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교육, 건강, 문화, 주택, 교통, 수자원, 에너지에 대한 평등한 접근권 보장에 관한 문제는 또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아마도 그들은 돈 한푼 투자하지 않고 문제가 절로 해결되길 바랄 것이다. 아울러 생태계의 변화나 기후 변화에는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균형재정의 유지 의무는 실질적으로 국가채무를 제한할 것이다. 국가의 활동범위를 축소하고 거의 모든 사안을 민간에 의존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비법이 아니겠는가?”

안정, 조율 및 거버넌스 조약이 아직 비준되지 않았던 2011년 4월에 아일랜드 전 재무부 장관은 자국의 일간지 〈아일랜드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장관직에 갓 임명됐던 2008년 5월 당시에 나는 이미 금융 부문과 국가재정 운영에 관한 각종 난관에 직면해 있는 우리나라가 경제주권을 사실상 상실했다고 느꼈다. 선택지가 단 하나뿐인 권한을 진정한 주권이라 할 수 있겠는가?”라고 역설했는데, 사실 그가 재임하던 시기에 아일랜드의 국가채무는 오히려 큰 폭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재정 준칙이 모든 국가에 똑같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2003년에 프랑스와 독일의 적자는 국내총생산의 3%를 초과했다. 당시 유럽집행위원회는 재정적자 기준 위배에 대한 제재를 적용하려 했지만, 유럽이사회가 나서서 이를 저지했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나 2015년 말에도 재정준칙은 찾아볼 수 없었다. 2015년 당시 유럽은 두 가지 난관에 직면해 있었다. 시리아와 이라크 난민수용 문제와 유럽을 강타한 이슬람 무장단체 지하드의 테러였다. 그해 11월 16일에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베르사유에서 모인 프랑스 국민의회 의원들 앞에서 “안전조약이 안정조약에 우선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만약 그리스가 같은 상황에 놓였더라면, 그 뜻을 과연 끝까지 관철할 수 있었을까?

 

거북을 투자상품으로 만들어 보호하기

현재로서는 멸종 위기에 처한 야생 생물 종을 보호하는 일은 공권력의 책임으로만 남아 있다. 그러나 긴축 재정의 영향으로 생물 다양성 유지에 할당된 예산이 갈수록 감소하고 있다. ‘환경보호에 많은 자본이 소요되는 이유’라는 부제가 달린 2010년 논문에서 3명의 보험 이론가(제임스 멘델〔James Mandel〕, 조쉬 돈랜〔Josh Donlan〕 및  조너선 암스트롱〔Jonathan Armstrong〕)가 시장을 통해 난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증권시장에서 거래할 수 있는 멸종위기종에 관한 금융 파생상품, 즉 ‘생물 종 스와프’를 시행하자는 것이다. 플로리다주(州)가 한 기업과 ‘생물 종 스와프’ 거래 계약을 체결한다고 가정해보자. 해당 상품은 계약을 체결한 기업 인근에 서식하며 예측 가능한 장래에 멸종될 확률이 높은 ‘취약종’ 거북의 개체 수 변화에 따라 거래가 이뤄진다. 

만약 기업이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거북의 개체 수가 증가하면 정부는 기업에 이자를 지급해야 한다. 반면에 거북이의 개체 수가 줄어들거나 멸종 직전의 ‘​심각한 위기종’으로 분류된다면, 기업이 정부에 돈을 지급해 야생동물 구조 작업을 펼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이 논문은 상품을 계약한 기업이 이전할 경우, 야생종물이 처할 운명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약자는 빚을 갚지만, 강자는 협상한다

빚은 도덕률을 내세워 정의로움을 답습하려는 속성이 있다. 대상을 불문하고 한결같이, 공정하고 무차별하며 무자비한 정의의 검으로 채무자를 징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이에게는 ‘모든 빚’을 ‘즉시’ 상환하도록 요구하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그저 빚을 상환해야 할 의무만 남겨둔 채로 빚을 탕감하거나 상환을 유예하기도 한다.

과거 한때는 국가가 채무 부담에서 쉽게 벗어났던 시절이 있었다. 예를 들면, 프랑스 군주들은 채권자들을 처형함으로써 빚을 청산하기도 했다. 원시적이기는 하지만, 오늘날 일반적인 ‘구조조정’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국제법은 채무를 진 국가로부터 이 같은 재량권을 박탈했다. 반대로 국제법은 채무국에 약속 이행에 대한 연속성의 원칙을 강요한다. 이른바 ‘팍타 순트 세르반다(Pacta sunt servanda, 합의는 준수돼야 한다)’를 원칙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유해한 채무

그렇다면 언제든 예외 없이 ‘팍타 순트 세르반다’를 외치며 모든 약속을 엄명으로 지켜야 하는 것일까?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2007년 7월자 자료를 통해 “국제법상으로 채무상환의 의무는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한 바 없으며, 일반적으로는 한계를 두거나 차이를 구분한다”고 명기하고 있다. 불합리한 채무의 효력을 무효로 하는 법적 근거는 이미 충분히 마련돼 있다. 독재정권이 체제유지를 목적으로 돈을 빌려 써서 발생한 ‘유해 채무(Odious debt)’, 국민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은 채 돈을 빌려 생겨난 ‘부당 채무(Illegitimate debt)’, 그리고 ‘합의의 결함’을 지닌 채무처럼 국가를 옥죄는 채무에 대해서는 그 전체 또는 일부에 대한 상환의무를 법에 따라 유예하거나 면제하도록 할 수 있다. 우선 UN헌장 제103조를 살펴보자. “국제연합회원국에 대해 UN헌장 상의 의무와 다른 국제협정상의 의무가 상충하는 경우에는, 본 헌장상의 의무가 우선한다.” 그밖에도 제55조에는 “국제연합회원국은 국제협력을 통해 더욱 높은 생활수준, 완전고용, 그리고 경제적 및 사회적 진보와 발전의 조건을 촉진한다”라는 회원국의 의무도 헌장의 내용으로 포함돼 있다.

2015년의 그리스는 청년 2명 중 1명이 실업자이며, 인구의 30%가 빈곤선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리스에는 채무상환 압력이 가해졌다. 법의 적용은 채무국과 채권국 간의 힘의 균형에 달려 있기 때문이었다.

1898년, 쿠바에 대한 지배권을 미국에 넘겨주게 된 스페인은 식민지 시절에 발생한 쿠바의 채무(이른바 점령 비용)를 상환할 것을 미국에 요구했다. 미국은 식민 지배를 받은 쿠바의 국민으로부터 침략 비용을 돌려받으려는 스페인의 요구를 거부했고, 당시로서는 생소했던 이같은 사례는 저주스러운 채무라는 뜻의 ‘유해채무(Odious debt)’라는 개념의 근간이 됐다.

21세기 초 미국은 이라크를 침략해 전쟁을 벌였다. 이라크 침공 몇 달 후, 〈폭스뉴스〉에 출연한 미국의 존 W. 스노(John W.Snow) 재무부 장관은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현재 도피 중인 독재정권의 치부수단으로 활용됐던 채무 때문에 이라크 국민들이 고통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당시 미 행정부는 미국이 전쟁을 통해 이라크에 세운 친미정권의 상환 능력을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이어 미국은 ‘채무상환은 원칙 준수의 문제가 아닌 산술적 계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를 밝혀 평소 일관되게 ‘국가의 계약 충실 원칙’을 옹호하는 사람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기도 했다.〈파이낸셜 타임스〉는 2003년 6월 16일자 논평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라크의) 채무를 묵인하고 감내할 수 있는지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서독은 되고 그리스는 안되는 이유

하지만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시점에 경제학자들은 “그리스에는 이런 관용이 허용되지 않았다”고 입을 모았다. 2016년에 그리스는 벼랑 끝에서 구제금융 협상을 벌였지만, 채권국들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원금에 대한 채무 탕감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채권국들의 입장이었다.

지난 20세기 중반, 독일 연방공화국(서독)의 채권국들은 오늘날보다 사뭇 관대한 모습이었다. 관련 국가들이 서독의 채무를 탕감하는 데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전례 없는 관대함을 보였다. 〈블룸버그〉 통신의 기자 레오니드 버쉬드스키(Leonid Bershidsky)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서독이 (그리스는 받을 수 없는) 채무탕감의 혜택을 누렸던 한 가지 확실한 이유는, 서독이 공산주의를 봉쇄하는 최전방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조치들로 이득을 본 서독 정부는 철저히 반마르크스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그리스의 채권국들은,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에게는 이런 자질과 정치적 소양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여길 것이 분명하다. 

 

 

글·<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편집부

번역‧이푸로라 poorora@daum.net
번역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