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정치의 전사가 된 정치적 개신교도들

2019-08-30     강인철 l 한신대 교수

 2016년 가을,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둘러싸고 대한민국 사회가 둘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탄핵에 찬성하는 이들은 그해 10월부터 ‘촛불집회’를, 반대하는 이들은 11월부터 ‘태극기집회’를 시작했다. 많은 이들이 태극기집회에서 개신교인들의 뚜렷한 존재와 주도적 역할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주로 주말에 펼쳐진 두 진영의 세력 대결은 6개월 동안 23차례에 걸쳐 1,700만 명을 동원해낸 촛불집회 쪽의 일방적인 승리로 종결됐다. 탄핵안이 국회와 헌법재판소를 통과함으로써 박근혜는 대통령직에서 파면된 것이다. 박 대통령이 여러 죄목으로 구속, 수감돼 재판받는 가운데 촛불집회를 대변하는 대통령이 당선됐다. 

태극기집회는 2017년에도 이어졌으나, 새 대통령이 선출된 그해 5월부터 대폭 위축됐다. 이후 2018년 9월까지 세 차례의 남북정상회담과 사상 최초의 북미정상회담이 숨 가쁘게 진행됐다. 이어 6월 치러진 지방선거에서도 여당이 압승을 거두자, 태극기집회는 침체상황을 벗어나지 못했다. 태극기집회에 참여했던 개신교인들은 2018년 2월 평창올림픽 이후 한반도 냉전적 대립 구도의 급격한 해체조짐에 당혹감을 드러냈다. 미국 보수 개신교의 지지에 힘입어 당선된 트럼프 대통령이, 한반도 해빙의 핵심주역 중 한 명이었다는 사실은 대한민국 보수 개신교인들의 당혹감을 가중시켰다. 

 2019년 2월 말에 일어난 두 사건은 혼란과 실의에 빠진 보수 개신교인들에게 생기를 되찾아줬다. 그중 하나는 2월 27∼28일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정상회담이 결렬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박근혜 대통령 재임 당시 여당이던 자유대한민국당의 2월 27일 전당대회에서 황교안이라는 인물이 당대표로 선출된 것이었다. 공안검사 출신의 극단적 반공주의자인 황교안은 박 대통령의 마지막 국무총리이자, 신학교까지 졸업한 독실한 보수 개신교인이기 때문이다. 개신교인들의 열광적인 지지에 힘입어, 황교안은 단숨에 차기 대통령 후보들 중 선두주자로 올라섰으며 자유대한민국당의 정당 지지율 역시 급상승했다. 

매주 열리는 태극기집회의 참여 인원도 3,000∼4,000명에서 1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주목할 사실은, 박근혜 정부 시절의 은밀한 자금줄이 정권교체 이후 대부분 끊어진 탓에 활동성이 크게 약화된 전통적인 극우단체들을 대신해, 대한민국 극우정치 안에서 개신교의 비중이 급상승했다는 것이다. 2019년 들어 보수 개신교는 태극기집회로 대표되는 극우 정치집회의 확고부동한 주축이자 핵심동력으로 평가받고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 개신교가 극우정치의 행동대처럼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어느 사회든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개신교인들(복음주의자들)은 사회나 정치 문제에 관여하기를 꺼리는 경향이 있었고, 이는 과거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약 30년 전부터 다양한 사회적 쟁점들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년 전부터는 정치 영역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지난 과정을 간략히 되짚어보자.

 

개신교, 대한민국 제1의 종교 지위에 오르다

 대한민국 개신교는 그 짧은 역사 속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공 스토리를 써왔다. 20세기 이후 대한민국 사회는 무종교인 비율이 이례적으로 높은 반면, 종교 다원주의적 환경에서 치열한 종교 간 경쟁이 전개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 경쟁에서 탁월한 능력을 과시한 종교는 개신교였다. 일본의 식민지에서 벗어난 1945년 당시 남한의 개신교 신자 수는 약 1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0.5%에 불과했다. 그러나 1950년대 대한민국전쟁을 거치면서 개신교는 불교 다음으로 많은 신자를 거느린 제2의 종교로 급성장했다. 2015년의 통계청 조사 결과, 개신교 인구는 약 967만 6천 명으로 총인구의 19.7%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제 개신교가 국내 제1의 종교 지위에 올라섰음을 확인시켜준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개신교는 5개 TV방송국, 100여 개의 대학을 비롯해 약 500개에 달하는 학교들을 운영하고 있다. 사회복지와 의료 영역에서도 개신교는 큰 비중을 차지하며, 지난 20여 년 동안 국회의원 중 개신교인 비율도 31∼41%로 나타나고 있다. 대한민국 개신교의 가시성은 국제무대에서도 점점 뚜렷해지고 있다. 대한민국인 개신교 해외선교사 숫자는 1989년부터 폭발적으로 증가해 20년 후인 2009년에는 2만 명을 넘어섰으며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19년 현재 3만 명에 육박해, 미국과 함께 개신교 세계선교를 이끌어가고 있다. 1990년대 초에 이르면 신자 수 기준 세계 최대 개신교회 50개 중 약 절반이 대한민국 교회들로 채워졌다.

 중요한 점은 현재 대한민국 개신교 인구의 압도적 다수가 보수주의자들이라는 것이다. 미국인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대한민국 개신교인의 대부분은 신학적 보수주의자 혹은 근본주의자가 됐다. 1950년대부터 본격화된 일련의 교단 분열들을 거치면서,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에 걸쳐 대한민국 개신교 안에서는 교단별로 신학적 지향과 정치적 지향이 수렴되는 변화가 진행됐다. 즉, 이 시기 신학적 보수성은 정치적 보수성과, 신학적 진보성은 정치적 진보성과 결합됐다. 

그런데 이런 변화가 완료될 무렵인 1970년대 초에는 신학적-정치적 진보주의자들은 전체 개신교인의 20%에도 미치지 못했었다. 개신교의 양적 팽창기였던 1970∼1980년대에 보수 교단들은 진보 교단들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했으며, 그로 인해 개신교 안에서 보수-진보 간의 양적 격차는 더욱 벌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파인 개신교 보수집단들은 뿔뿔이 흩어진 가운데 사회참여와 거리를 유지해왔다. 반면, 소수파인 진보집단들은 대한민국기독교교회협의회(The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in Korea: NCCK)로 단단하게 결집한 채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을 주도해나갔다. 덕분에 1970∼1980년대에는 개신교의 대외적 이미지도 진보적인 편이었다. 1980년대에는 일부 복음주의자들도 사회참여 대열에 새로 합류함으로써 대한민국 개신교의 진보 이미지가 더욱 강해졌다.

그러나 1990년대에 대반전이 일어났다. 1989년 말 대한민국기독교총연합회(The Christian Council of Korea: CCK)의 등장이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우선, 지리멸렬했던 개신교 보수집단이 CCK를 중심으로 똘똘 뭉쳤다. 그다음, CCK는 오랫동안 고수해온 성속이원론을 버리고 재빨리 사회참여 노선으로 갈아탔다. 재창조는 신자·교회 규모와 재정동원 능력 측면에서 처음부터 N재창조를 압도했다. 뿐만 아니라, 1990년대 중반에는 보수 교단들이 재정위기에 빠진 N재창조를 사실상 장악한 후 N재창조 특유의 진보성을 질식시켰다. 그 결과 (1970∼1980년대와는 정반대로) 2000년대 이후 대한민국 개신교는 대외적으로 뚜렷한 보수 이미지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대한민국 정치무대에서 개신교 우파의 존재감은 미미했다.


정치적 행동주의로 나아간 개신교 우파

 2003년에 또 한 번의 중대한 변화가 진행됐다. 보수 개신교 그룹의 사회참여가 이때부터 ‘정치적 행동주의(Political activism)’로까지 나아갔던 것이다. 나는 이처럼 정치화된 개신교 보수세력을 ‘개신교 우파(Protestant right)’로 칭하고자 한다. CCK를 중심으로 한 개신교 우파세력은 2003년 1월 서울시청 광장에서 수만 명이 참여하는 시국기도회를 단독으로 두 차례 거행한 데 이어, 3월 초에는 기존 우익단체들과 공동으로 약 10만 명이 참여해, 정치집회를 개최했다. 대규모 집회의 스펙터클을 연거푸 창출해내면서 개신교 우파가 정치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하자, 이를 주목해온 우익 정치·사회단체들과 언론들은 열광적인 환영으로 반응했다.

 2003년이 상반기가 채 지나지 않아 개신교는 대한민국 우익의 핵심 세력 중 하나로 공인받았다. 자신감을 얻은 개신교 우파세력 일부는 2004년부터 개신교 정당을 결성해 직접선거에 뛰어들었고, 2004∼2005년에 걸쳐 다른 개신교 우파세력은 이른바 ‘뉴라이트운동’을 개척해나갔다. 처음에 ‘개신교 뉴라이트’ 그룹들은 몇 가지 측면에서 ‘개신교 올드라이트’와의 차별성을 내세웠지만, 둘 사이에 실질적인 차이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명확해지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여하튼 개신교 정당과 뉴라이트 그룹들까지 가세함으로써, 개신교 우파의 폭은 이전보다 한층 넓어졌다.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약 5년 동안 개신교 우파의 정치 활동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노무현 정부의 최대 정적은 개신교였다’는 평가가 나올 만큼 개신교 우파세력은 노무현 정부의 주요 개혁정책들을 대부분 좌절시켰다. 그들은 열정적인 선거운동을 통해 서울 초대형교회 장로였던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킴으로써 보수 정부로의 정권교체도 이뤄냈다. 이명박 정부는 개신교와의 정교유착을 함축하는 여러 별칭들로 불렸을 정도로 ‘개신교 정권’의 색채가 강했는데, 이로 인해 2008년 이후 개신교 우파의 정치적 영향력은 최대한 확장됐다. 

2010년대에는 ‘인터넷 전사’ 양성을 표방하면서 주로 청년들로 구성된 극우적 개신교NGO들이 다수 등장했다. 이를 계기로 전체로서의 개신교 우파는 훨씬 더 전투적이고 공격적으로 변했다. 이 극우개신교NGO들 중 일부는 주요 선거를 전후해 은밀하게 국가 정보기관의 지원을 받거나 우익 정당 후보 선거캠프에 참여하기도 하는 등 공작정치에도 종종 관여하며, ‘가짜뉴스’를 수시로 대량 생산·유포하기도 한다.  

 개신교 우파의 정치화가 본격화되던 2003년 1월이라는 시기는 대한민국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의 결실이었던 김대중 정부의 임기 막바지이자, 민주적-개혁적 집권세력이 정권 연장에 성공한 결과였던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기 직전이었다. 이 시기는 두 여중생이 미군 장갑차에 깔려 죽은 사건을 계기로 적나라하게 드러난 불평등한 한-미 관계에 항의하는 전국적인 촛불시위가 연이어 개최되던 때이기도 했다. 개신교 우파세력은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모두를 북한에 우호적인 ‘친북-좌파’ 정부로 간주했고, 2002∼2003년 촛불시위를 ‘반미운동’으로 해석했다. 따라서 개신교 우파가 주도하는 정치집회는 처음부터 반공, 반(反)북한, 친(親)미국의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됐다. ‘반공-반북-친미’라는 기조는 지금까지 20년 가까이 굳건하게 유지되고 있다. 

2003년부터 최근까지 개신교 우파는 다양한 영역들에서 정치적 활동을 펼쳐왔는데, 이를 다음의 몇 가지 범주들로 구분할 수 있다. (1)반공-반북-친미라는 3대 가치를 지키거나 강화하기 위한 활동, (2)퀴어, 무슬림, 양심적 병역거부자, 이주민, 난민 등 사회적 소수자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법률·조례나 정책·제도의 도입을 저지하는 활동, (3)주로 선거운동으로 나타나지만,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권을 창출 혹은 재창출하기 위한 활동, (4)자신들이 지지하는 정권을 수호하기 위한 친위대적 사회운동, (5)개신교 계통 학교와 복지기관의 지배구조, 성직자 납세, 교회 재정운용 투명성 등과 관련된 개신교회의 ‘제도적 이익(Institutional interests)’을 방어하거나 증진하기 위한 활동. 

 

‘반공’이라는 만능키와 ‘대한민국의 이슬람화’

 이처럼 다양한 쟁점들을 두루 연결 짓는 만능키 역할을 하는 마법적 레토릭이 바로 반공주의였다(이미 1930년대부터 ‘사회교리(Social doctrine)’라는 형태로 교리의 일부로 편입돼 있었을 정도로, 반공주의는 대한민국 개신교 신념체계의 중요한 부분을 구성한다). 개신교 우파가 만들어낸 ‘종북 게이’라는 신조어에는 성소수자들 상당수가 좌파 성향이라거나, 좌파세력이 자유주의적 성윤리를 매개로 성소수자들과 연대하고 있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2008년경부터 개신교 우파는 무슬림과 좌파의 연대에 의한 ‘대한민국의 이슬람화’ 음모론을 퍼뜨리고 있다. 2001년에 대한민국에서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가 처음 공론화된 이후, 개신교 우파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게 대체 복무의 기회를 주면 북한과의 대치상황에서 국가안보가 위태로워진다고 주장해왔다. 개신교 우파는 2000년부터 등장한 다양한 ‘반(反)개신교운동들’도 좌파의 배후조종에 의한 것이라고 본다. 자신과 정치적 견해가 다른 이들을 좌파로 낙인찍어 공격하는 것은 대한민국 개신교 우파의 오랜 습관이다. 이들은 정책 측면에서 명백히 중도 혹은 중도우파인 정부들조차 타도돼 마땅할 좌파 정부로 간주하곤 했다. 

나아가 국가기구를 장악한 좌파들이 법률이나 과세권 등 다양한 정책수단들을 동원해 학교·복지시설 등의 교회기관들과 성직자들을 탄압하고 있으며, 공영방송사들을 앞세워 대형교회 목사들을 인신공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개신교 우파 인사들은 남한의 좌파 정부들이 경제교류와 인도적 지원을 통해 사악한 북한 무신론 정권의 수명을 연장시키면서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 자금을 공급했다고 비판해왔다. 개신교 우파는 최대 압박에 의한 북한정권 붕괴와 흡수통일 시나리오를 선호하며, 2004년 미국에서 북한인권법이 제정될 때 미국 보수 개신교 인사들과 협력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개신교 우파는 북한정권이 붕괴될 경우 10년 이내에 1만 개 이상의 교회를 신설하는 등 ‘복음에 의한 북한 정복’을 위해 1990년대 중반부터 20년 이상 준비해왔고, 이미 수천 명의 선교사들을 중국-북한 국경지대에 파견해놓고 있다. 개신교 우파의 지원을 받는 탈북자 단체들이 휴전선 인근에서 북한체제 비난선전물을 대형풍선에 실어 보내는 일도 빈번히 벌어진다.

 정치화된 개신교 우파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공격성, 그것도 군사주의에 가까운 과도한 공격성이다. 많은 이들이 개신교 우파의 활동을 ‘혐오정치’로 규정한다. 개신교 우파의 유난한 공격성에는 비타협적인 근본주의적 신앙, 선악 이원론적 세계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Dispensational premillennialism)’로 기울어진 종말론 신앙, 영적 전쟁(spiritual warfare) 관념 등이 두루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근본주의,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영적 전쟁…. 이는 모두 미국 보수 개신교로부터 전수받은 것들이다. 

이미 익숙한 선악 이원론과 전천년주의 종말론이라는 토양 덕분에, 1990∼2000년대에 소개된 미국식 영적 전쟁 이론들이 대한민국 개신교인들에게 빠르게 수용될 수 있었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경우, 적그리스도의 출현과 세계 지배, 적그리스도 세력과의 최후 결전과 같은 관념들이 신자들에게 전사(warrior)라는 정체성을 제공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겟돈 전쟁의 전조(前兆)로서, 유대인에 의한 이스라엘의 온전한 회복이라는 종말론적 주제는 개신교 우파의 전투적인 반(反)이슬람 태도와 친화적이다. 2017년부터 우파 집회에 등장한 이스라엘 국기는 대한민국 개신교인들의 선민의식, 무슬림 혐오,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역할에 대한 다중적인 상징이다. 삶의 모든 차원들에서 선-악 세력 간의 치열한 투쟁이 진행 중이라는 영적 전쟁 개념도 전사 정체성의 내면화를 촉진한다.

대한민국 개신교 우파 집회의 친미주의적 경관 역시 대단히 이채롭다. 개신교인들의 극성스러운 친미주의 행태는 그로테스크하기 조차하다. 이 집회의 공간은 태극기와 성조기의 거대한 물결로 가득 채워진다. 집회에서는 대한민국과 미국 국기는 물론이고 때때로 유엔기도 등장하며, 참가자들이 미국 국가를 합창하기도 하며, 단상의 목사가 영어로 기도를 하기도 하고, 북한정권 붕괴를 위해 노력하는 미국 대통령에게 바치는 감사의 메시지가 낭독되기도 한다.

이에 화답해 (개신교 우파가 정치적 행동주의에 처음 나선 직후인) 2003년 4월 주한미군사령관이 세계 최대 개신교회이자 대한민국 개신교 우파의 강력한 지도자인 조용기 목사를 방문해 한·미 협력을 위한 교회의 역할을 강조했으며, 같은 해 8월에는 부시 대통령이 개신교 우파의 시국기도회를 치하하는 편지를 CCK에 보내기도 했다. 개신교의 친미주의는 대한민국 우익의 전통적인 한-미 ‘동맹’ 담론을 넘어선다. 미국은 개신교를 전해주고 양육해준 ‘신앙의 아버지 나라’일 뿐 아니라,이중적 의미에서의 ‘구원자’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의 구원자’로서의 미국은 감사와 보은의 대상이며, ‘세계의 구원자’로서의 미국은 추종과 협력의 대상이다. 미국이 세계를 구원할 ‘섭리적 사명(Providential mission)’을 지닌 기독교국가이므로, 대한민국 개신교는 미국의 충직한 파트너이자 조력자가 돼야만 한다는 것이다. 전천년설적 종말론과 결합된 미국식 선민사상과 종교민족주의를 대한민국 개신교 우파가 수용한다는 바로 이 사실, 미국과 대한민국을 위계적인 관계로 인식하는 이런 종교 식민주의적 멘털리티야말로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미국개신교우파에게 ‘친(親)대한민국’은 주변적 가치인 반면, 대한민국 개신교 우파에게 ‘친미국’은 핵심적 가치다.

대한민국 보수 개신교의 정치참여로의 전환이 미국 개신교 우파를 모델로 한 것임은 의문의 여지가 적다. 대한민국 개신교 우파는 미국 쪽 카운터파트의 동향에 해박하며, 필요하다면 기꺼이 그들을 모방한다. 한-미 개신교 우파는 북한인권법 제정 같은 특정 목표를 위해 공동 행동을 조직하기도 한다. 양자는 하나의 조직으로 연결돼 있기도 하다. 대한민국 개신교 우파의 주축인 보수 교단들은 1950년대 말, 신속하게 진보로 선회해가던 미국의 주류 개신교 교단들, 교단 연합 단체들, 선교사들과의 관계를 단절했거나 크게 약화시켰고, 그 대신 오늘날 미국 개신교 우파의 주축을 이루는 보수 교단들 및 교단 연합 단체들과의 협력관계를 새로 구축했다. 

이후 동병상련의 ‘비주류 의식’으로 더욱 끈끈해진 한-미 보수 개신교 간 유대가 60여 년 동안이나 지속됐다. 한-미 교단에 이중적으로 연루된 4천여 개의 미국 내 한인(韓人) 개신교회들은 한-미 개신교를 화학적으로 결합시키는 구실을 하고 있다. 한-미 개신교 우파 인사들 간의 상호 방문과 만남도 빈번하다. 개신교 우파에 우호적인 대형교회들의 담임목사(Senior pastor)직과 신학대 교수직은 대부분 미국 보수 신학대를 졸업한 이들로 채워진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근본주의, 전천년설적 종말론, 영적 전쟁 이론 같은 미국 신학들이 대한민국 개신교 안에서 확산된다. 

이런 상황이니, 대한민국과 미국의 개신교 우파가 쌍둥이처럼 닮아가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높은 투표율과 표의 결집력, 세속적 우파 정치세력과의 연대와 같은 행위 패턴도 유사하다. 반공주의, 동성애 반대, 난민·이주민에 대한 불관용, 친(親)이스라엘, 반(反)무슬림, 호전적인 전쟁교리 등도 양자의 공통점들이다. 특히 사형제도에 대한 지지는 한-미 개신교 우파를 독특한 존재로 만드는, 두 교회를 다른 대부분의 서구 개신교회들과 선명하게 구분 짓는 요소다. 

다만 미국 개신교 우파와 유사한 입장이면서도 대한민국 개신교 우파가 정치적으로 공론화하는 빈도나 강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쟁점들도 있는데, 배아줄기세포연구, 마약, 낙태, 페미니즘, 포르노그래피 등이 그런 사례들이다. 대한민국 개신교 우파는 학교에서의 창조론 교육이나 공립학교에서의 기도 문제에 대해서도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미국 개신교 우파와 비교할 때, 대한민국 개신교 우파는 (‘문화전쟁’으로 이어지는 윤리적 쟁점들보다는) ‘이데올로기전쟁’이나 ‘역사전쟁’으로 발전하기 쉬운 정치적 쟁점들에 더욱 집중하는 편이다. 

 

개신교 우파의 정치에 환멸을 느낀 청년들

미국 개신교 우파가 9·11 이후 이슬람과의 대결에 중점을 둔다면, 대한민국 개신교 우파는 북한과의 대결에 몰입한다. ‘일상화된 행동주의’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대한민국 개신교 우파는 미국 개신교 우파에 비해 한층 더 행동 지향적이기도 하다. 이전에는 매년 3∼5회의 대규모 정치집회를 개최했던 대한민국 개신교우파는 2016년 가을 이후 거의 매주 정치집회를 갖고 있으며, 인터넷 공간에서는 매일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있다. 유별난 종교적 배타성 때문에, 대한민국의 개신교 우파는 유사한 정치적 입장을 가진 타종교들과 연대하는 능력이 미국의 동지들에 비해 부족한 편이다. 

개신교의 극우적 정치참여에 대한 역풍도 만만치 않다. 2000년대 이후 대한민국에서 시행된 여론조사들은 다른 주요 종교들과 비교할 때 개신교에 대한 신뢰도와 호감도가 두드러지게 낮은 수준임을 일관되게 보여준다. 대한민국의 3대 종교인 개신교·불교·가톨릭 중 유독 개신교만이 조직적인 반종교운동에 시달리고 있기도 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2000년부터 조직적인 반개신교운동이 확산됐다. 종교인 납세운동이나 종교법인법 제정운동 역시 주로 개신교를 겨냥한 사회운동이었다. 이런 상황을 토양 삼아, 1990년대 이후의 미국에서처럼, 2000년대 이후의 대한민국에서도 개신교 우파 정치에 환멸을 느낀 청년층을 중심으로 한 광범위한 교회 이탈과 종교 이탈이 일어나고 있으며, 그로 인해 무종교인구가 신속하게 증가하고 있다.

일견 성공적인 듯 보이는 개신교 우파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 과정은 미국과 대한민국 모두에서 예기치 못한, 장기적으로는 스스로에게 치명적일 수도 있는 결과들을 불러오고 있다. 2012년 CCK에서 내분이 발생해 대한민국교회연합(The Communion of Churches in Korea, CCIK)이 떨어져 나갔다. 2019년 5월 현재 CCK에는 79개 교단, CCIK에는 39개 교단이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지만, NCCK의 회원 교단은 9개에 불과하다. 1893년부터 1983년까지 대한민국에서 활동했던 개신교 선교사의 87% 이상이 미국인이었다.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of Christin the USA(NCCCUSA)와 World Council of Churches(WCC)로 대표된다.

 대한민국통계청조사에 의하면, 1995년부터 2015년 사이 20년 동안 개신교인 수는 91만 5천 명 증가했지만 개신교 청년(15∼29세)은 81만 3천 명이나 감소했다. 이 때문에 1995년에는 개신교인 중 15∼29세 연령층의 비율이 대한민국인 평균치보다 높았지만, 2015년에는 평균치보다 낮아졌다. 1995∼2005년 사이에 대한민국인 중 무종교인의 비율은 49.3%에서 46.9%로 2.4%p 감소했지만, 2005∼2015년의 불과 10년 동안 무종교인 비율은 46.9%에서 56.1%로 무려 9.2%p나 급증했다. 2014년 실시된 대한민국갤럽(Gallup Korea)의 조사에 의하면, 2004∼2014년 사이에 대한민국인 중 무종교인 비율은 19∼29세 연령층의 경우 55%에서 69%로, 30∼39세 연령층의 경우 51%에서 62%로 수직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글·강인철
한신대학교 종교문화학과 교수. ‘종교에 대한 역사사회학’과 ‘사회·정치·문화에 대한 종교사회학’을 지향하면서, 대한민국의 종교정치, 종교사회운동, 종교권력, 개신교 보수주의, 북한 종교, 종교와 전쟁, 양심적 병역거부, 군종제도 등을 주로 탐구해왔다. 최근 몇 년 동안에는 대한민국 시민종교 연구에 주력했다. 주요 저서로, 『시민종교의 탄생: 식민성과 전쟁의 상흔』(2019)과 『경합하는 시민종교들: 대한민국의 종교학』(2019), 『종교와 군대』(2017)등이 있다. 

이 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7월호에 동시에 실린 것으로 역자 이푸로씨가 한불번역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