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글을 쓰는 프레더릭 와이즈먼

2019-08-30     필리프 페르송 l 작가

다큐멘터리 영화는 현실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객관적 진실을 담고 있는 듯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시각은 영화가 현실적 요소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해도, 그 요소들이 감독에 의해 선별되고 연출됐으며 설계됐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이는, 미국의 위대한 관찰자로 알려진 프레더릭 와이즈먼의 견해다.

 

영화는 시골 풍경으로 시작해, 묘비를 비추며 마무리된다. 89세의 프레더릭 와이즈먼은 43번째 영화에서 약 2시간 동안, 관객들을 미국 중심부인 미들 웨스트의 소도시 주민들 곁에 데리고 간다. 와이즈먼은 2019년 4월 프랑스에서 개봉한 <몬로비아, 인디애나주> 제작을 위해 주민 1,400명의 소도시 몬로비아를 최대한 다양한 각도에서 담았다. 시의회에서 미용실까지, 수의사에서 타투이스트까지, 무기고에서 학교까지, 마을 축제에서 결혼식과 장례식까지 화면에 담았다. 보이스오버도, 자막도, 인터뷰도 없다. 관객은 눈 앞에 펼쳐지는 화면과 소리만으로 충분히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더도 덜도 말고, 딱 감독만큼 알게 되는 것이다. 이는 와이즈먼이 1967년 데뷔작 <티티컷 풍자극>에서부터 유지해온 촬영방식이다.

 

미국의 영광과 회한을 담아낸 사관(史官)

인디애나주에서 최초로 학교 농구팀을 만들어 이목을 끌었던 몬로비아는 지난 대선에서 76%가 넘는 주민들이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했다. 트럼프의 이름은 한 번도 언급되지 않지만, 관객은 자연스럽게 귀 기울이다가 백인 주민이 96%에 달하는 이곳 공동체에서 그 선택이 어떤 의미였는지 파악하게 된다. 와이즈먼은 여타 다큐멘터리 감독과 달리 공화당에 우파 성향이 강한 이곳 유권자들을 비난하지 않았다. 오히려 매우 호의적인 시선으로 그들의 일상을 보여주려 했다. 그의 영상에 담긴 모습은 클래식 자동차 감상과 화기류 구매를 즐기는 ‘선량한 이들’의 평범한 삶이다. 

영화가 완성된 후, 와이즈먼은 몬로비아 주민들의 독실한 신앙심과 외부세계에 대한 무관심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그들은 심지어 바로 옆에 있는 대도시 인디애나폴리스에 대해서도 전혀 호기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백인 서민층을 포착한 이 영화는 훗날 역사가들에게 2018년 미국의 단면을 엿보는 단초가 될 것이다. 자신이 촬영하는 것에 대한 선입견과 섣부른 판단을 거부한 시대의 기록자인 와이즈먼은 그런 의미에서 위대한 사관(史官)이다.

지적이며, 프랑스에 애정이 많은 그는 영국에서 1편(<내셔널 갤러리>, 2014), 프랑스에서 4편(1)의 영화를 촬영했다. 또한 파리 퐁피두센터 공공정보도서관이 주관하는 ‘현실의 영화’ 다큐멘터리 영화제에 정기적으로 참가했다. 대부분 미국 공영방송 PBS(Public Broadcasting Service)의 지원으로 제작된 그의 다큐멘터리는 미국 전역으로 방송이 나갔고, 수십 년이 지나서야 좀 더 폭넓은 관객을 만나고 영화관에 배급될 수 있었다. 

그의 작품은 주로 미국 체제와 기관을 다양한 방식으로 살펴보고 있다. 그는 뉴욕을 수십 차례 찾았고, 미합중국 내 적어도 18개 주, 파나마 운하(<파나마 운하 지대>, 1977), 중동(<시나이 필드 미션>, 1978), 미군의 군사훈련 취재를 위해 독일(<군사 훈련>, 1980)을 방문했다. 35편 이상의 영화가 세계 제1의 강대국 미국이 린든 존슨 36대 대통령부터 도널드 트럼프 현 대통령까지 겪어온 반세기의 역사를 아우르는 증거로 남았다. 영광과 회한, 모든 순간과 시절이 담겨있다.(2)

 

‘무비를 돌리는’ 다큐멘터리 감독

와이즈먼은 브리지워터(매사추세츠주)의 정신이상 범죄자수감소에서 벌어지는 전근대적 교화방식(식사를 거부하는 수감자의 코에 고무튜브를 쑤셔 넣어 음식을 먹이는 등)을 고발하며 경력을 시작했다. 장시간 상영이 금지됐던 <티티컷 풍자극>으로 자신만의 영화기법을 다진 그는, 세월이 지나도 일절 교차편집을 하지 않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그리고 독보적인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자리매김했다. 

그 자신은 다큐멘터리 감독이라는 용어를 거의 쓰지 않고 언제나 “무비를 돌린다”라고 하지만 말이다. 그가 ‘돌린’ 무비는 픽션으로도 선보일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티티컷 풍자극>은 밀로시 포르만 감독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1975)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장에 동화돼 촬영하는 것이 언뜻 보면 1960년대 가벼워진 카메라를 메고 등장인물을 뒤좇는 ‘다이렉트 시네마’처럼 보인다. 병원 관리인들과 수감자들이 함께 제작한 연간 잡지의 제호가 영화 제목이 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와이즈먼은 세상의 진실을 밋밋하게 재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장소나 인물을 통해 놀라운 현실을 재현하고자 했다.

그는 데뷔 초부터 선입견과 편견에 휩쓸리지 않도록 경계했다. 그는 말했다. “저는 항상 두 눈을 크게 뜨려고 합니다. 영화는 제가 촬영하면서 깨달은 사실들의 집합체입니다. 저는 어떤 곳이든 단 몇 주도 겪어보지 않고, 생각의 집합체만 가지고 만들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이클 무어 감독 방식의 영화지요.”(3) 그는 이렇게 한 영화인의 작업방식을 넌지시 비난하며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기도 했다. 학생들이 교사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던 시절 한 고등학교의 모습을 담은 <하이 스쿨>은, 한 학생이 선생님에게 보내는 편지를 공개 낭독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그 학생은 베트남 전쟁에서 사망한다. 이런 결말은 시민에게 의무를 강요하는 체제에 대한 비판이자, 그 체제가 시민에게 씌운 굴레라고 해석할 수 있다.

캔자스시티의 현지 경찰 이야기를 담은 <법과 질서>(1969)가 발표됐을 무렵, 시위자들을 과격하게 진압하는 경찰에 대한 비난이 거셌다. 그런 가운데, 와이즈먼이 ‘반경찰’ 영화를 제작하지 않았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에 대해 그는, “경찰차 조수석에 15분 동안 앉아, 사람들이 하는 짓을 보니 경찰의 존재가 절실하다고 느꼈다. 경찰은 인류애의 표상이고 우리의 일부이며, 그들의 폭력성은 우리의 폭력성이다”(4)라고 간명하게 응수했다. 영화에서는 폭력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찰들도 있지만, 경찰들의 호의적인 모습도 함께 등장한다.

1960~1970년대에 그는 국가의 본질적인 기능, 학교(<하이 스쿨>), 경찰(<법과 질서>), 보건(<호스피털>, 1970), 군대(<군사 훈련>, 1971), 정의(<소년법원>, 1973), 사회복지(<복지>, 1975) 등에 천착했다. 1980년대부터는 활동반경을 넓혀 의외의 분야로 들어갔다. 모델 에이전시(<모델>, 1980), 경마장(<레이스트랙>, 1985), 댈러스의 니만 마커스 백화점(<백화점>, 1983) 등을 화면에 담은 것이다. 이들 영화는 각각의 세계를 구축했다. 그리고 와이즈먼은 시간을 충분히 들여, ‘세상’이라는 거대한 책을 구성하는 각각의 장을 써 내려갔다.

보스턴의 한 병원에서 이뤄지는 완화치료를 다루면서 그는 단 1초도 버릴 게 없는 349분 분량의 초장편 영화(<죽음 앞에서>, 1989)를 제작했다. 또한 248분에 달하는 <벨파스트, 메인 주>(1999)에서는 어촌 마을을 다뤘다. 정어리 통조림을 가공하는 모습이 탁월한 편집으로 11분에 걸쳐 펼쳐진다.

 

영화는 ‘촬영’하는 게 아니라 ‘집필’하는 것

하지만 데뷔 초부터 그가 단연 두각을 나타낸 것은, 화면 속 인물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탁월하게 포착하는 점일 것이다. 와이즈먼의 영화를 보면 마치 직접 참여한 듯 수업이나 강연을 들을 수도 있고, 아이다호 주의 주도 보이시에서 상원의원들이 치열하게 논박하는 것을 들을 수도 있다(<주 의회>, 2007). <하이 스쿨 II>(1994)처럼 뉴욕 시의 빈민가 이스트할렘의 한 진보적 학교에 잠입해 교사와 임신한 학생, 그리고 그 학생의 부모가 아이의 미래에 관해 나누는 긴 대화도 들을 수도 있다. <뉴욕 라이브러리에서>(2017)에서는 뉴욕의 대형 도서관인 뉴욕공립도서관에 할당된 예산의 축소 현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활동을 유지하려는 도서관 담당자들의 토론 내용에 대해 상세하게 알 수 있다.

대변인으로서 꾸준히 성장하고 있는 그가 토론, 고민, 현안 등에 구체적인 목소리를 던질 수 있게 된 비결은 그의 촬영방식에 있다. (기술 발전으로 점점 더 가벼워지는) 카메라를 든 촬영감독과 음향보조기사와 일하면서 영상보다 음향에 집중하는 편을 선택했다. 이는 발화를 집어내고 대화를 포착하는 그만의 기법으로 자리 잡았다.

미국 수정헌법 제1조에 힘입어 (그의 출입을 거부한 백악관을 제외하고) 공공기관에서 촬영이 가능해지면서 그는 법원, 사회복지사무실, 병영, 교실 등에 머무를 수 있었다. 그는 바로 카메라를 켜지 않고 오랜 시간 머물면서 장소와 그 장소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스며들었다. 그리고 매일 한두 시간씩 촬영했다. 수백 시간에 달하는 필름 러시(편집용 필름)가 나오지만 초장편 영화를 제작한다고 해도 실제로 사용되는 것은 미미한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는 자신의 촬영이 리서치(사전 탐색)라면서 “영화는 진정한 주제를 발견하는 편집과정에서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그의 편집 작업은 모자이크식이다. 하나의 장면이 다른 장면과 조응하며 시간의 흐름에 따른 선형적 진행과는 무관한 논리로 구성된다. 그는 영화를 ‘집필’하는 데 6~8개월을 보내곤 한다.

그래서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진실을 말하는 것처럼, 기존의 ‘시네마 베리테’를 뛰어넘는 신념과 명료함과 표현력이 돋보인다. 더군다나 카메라의 이동이 거의 없기에 카메라를 의식하기 어려우며, 의식한다고 해도 금세 카메라의 존재는 잊힌다. 그렇기에 인물들의 발언은 더욱 진실처럼 느껴진다. 물론 거짓을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와이즈먼 감독은 “자신과 완전히 다른 모습을 몇 분 이상 연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다큐멘터리는 연극이나 소설, 시와 마찬가지로 허구다. 따라서 여기에 사회적 효용은 없다”(5)라고 단언한다.

사뮈엘 베케트의 열렬한 팬으로 연극 <오 행복한 날들>을 연출하기도 했던 와이즈먼은, 픽션은 단 한 편 제작했다. 바실리 그로스만의 <삶과 운명> 중 한 장(章)의 구조를 흑백으로 아름답게 풀어낸 <마지막 편지>(2002)가 그것이다. 이 영화의 화자가 나치에게 살해되기 전 아들에게 쓴 편지를 보자. 

“인간에 대해 뭐라고 설명할까? 그들은 좋은 면으로도 나쁜 면으로도 나를 놀라게 하는구나. 모두가 같은 운명에 처해 있으면서도 놀라울 정도로 다양하지.”

이 말은, 와이즈먼의 모든 영화를 관류하는 화두다. 

 

 

글·필리프 페르송 Philippe Person
작가

번역·서희정 mysthj@gmail.com
번역위원

 

(1) <코메디 프랑세즈 혹은 공연된 사랑 La Comédie-Française ou L’amour joué>(1996), <마지막 편지 La Dernière Lettre>(2002), <라 당스 La Danse, le ballet de l’Opéra de Paris>(2009), <크레이지 호스 Crazy Horse>(2011).

(2) 프레더릭 와이즈먼의 작품들은 블락아웃(Blaq Out)에서 구할 수 있다. 2016년까지 제작된 영화는 모두 DVD 52개로 제작돼 개별 또는 박스세트 3개로 구입이 가능하다. <뉴욕 라이브러리에서>는 2018년에 DVD로 출시됐으며, <몬로비아, 인디애나 주>는 2019년 9월 출시될 예정이다.

(3) ‘Wiseman par Wiseman 와이즈먼에 의한 와이즈먼’, <Images documentaires>, n° 85-86, Paris, 2016년 6월호.

(4) 클레르 클루조와의 인터뷰, <Écran>, n° 50, Paris, 1976년 9월. Maurice Darmon, 『Frederick Wiseman. Chroniques américaines 프레더릭 와이즈먼, 미국 연대기』(렌대학출판부, 2013년)에 인용됨.

(5) Frederick Wiseman, ‘Le montage, une conversation à quatre voix 편집, 4부 대화’, <Images documentaires>, n° 17, 1994년 2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