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말하는 ‘다극성’이란?
미국과 유럽은 러시아가 국제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다며 러시아를 압박하고 있다. 다극화 세계를 지향하는 러시아는 미국이 권력을 공유해야 하며, 모든 국가의 주권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화적 동질감을 느끼는 유럽과 외교 동맹인 중국 사이에서, 러시아는 자국의 노선을 모색하고 있다.
러시아는 무엇을 원하는가? 서구 측의 분석에 의하면, 러시아는 동유럽을 장악했던 냉전 시대를 그리워하며 한물간 얄타 체제의 국제 질서를 복원하려 한다. 러시아가 2014년 우크라이나 영토였던 크림반도를 합병한 사례로 볼 때, 러시아는 동유럽 국가인 우크라이나가 자신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는 것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은 2017년 12월 18일 발표한 ‘국가안보전략보고서(National Security Strategy)’에서 러시아는 기존의 국제 질서를 붕괴하려는 ‘수정주의 강국’이라고 비난했다.(1)
이 전제주의 국가가 충동적이고 우발적인 모험주의 외교정치를 펼치며, 내부 문제에 쏠린 눈을 외부로 돌리려는 듯하다. 더욱 심각한 것은 러시아가 중국과 손잡고 전제주의 국가 동맹을 결성해, 러시아의 정치 모델을 다른 나라에 전파하려 한다는 것이다. 러시아는 서구에 도전장을 내밀면서 국내 정치적 결속력을 강화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단편적으로 러시아의 태도를 설명할 수는 없다. 러시아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이며, 중국과의 동맹이 러시아의 목적 달성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러시아는 국제사회의 주요국으로 당당히 인정받기를 염원했으나, 이 야망은 여지없이 좌절됐다. 냉전 종결 시점에 소비에트 연방은 ‘유구한 역사가 있는 서유럽’이 러시아를 품은 ‘대 서유럽’으로 변신하기를 기대했다.(2) 러시아가 기대했던 이런 지형이 실현됐다면, 서유럽과 러시아 사이에 정치적 대화와 상호협력이 가능해지므로 서유럽은 냉전 시대부터 이어진 범대서양주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다(범대서양주의는 미국과 서유럽의 긴밀한 협조를 강조한다-역주). 그러나 서구는 러시아에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냉전 후 소비에트 연방의 이데올로기적, 군사적 위협이 줄어들자, 자유주의가 확산하면서 미국이 내세운 보편적 먼로주의가 자리를 잡았고,(3) 이로 인해 미국 영향력이 전 세계로 확대됐으며, 비(非)패권 국가의 입지는 좁아졌다.
미국을 노골적으로 비난하다
러시아는 이런 보편주의가 미국이 패권을 차지하는 도구가 될 뿐이라며 이에 반대했다. 러시아 외무부 장관(1996~1998) 및 총리(1998~1999)직을 역임한 예브게니 프리마코프는 러시아가 미국에 저항할 만한 지위를 얻기 위해 러시아의 국익을 중시한 외교를 펼쳤으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계속 신임 회원국을 받아들이고, 러시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코소보 사태에 군사개입을 하려 하자 다극화(Multipolarité)를 주창했다. 그는 1998년 인도에 방문했을 때, 미국의 일방주의에 대해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한 이후, 미국과 유럽을 제외한 강국 간의 동맹, 즉 러시아, 인도, 중국의 ‘전략삼각체제’를 제안했다. 이후 이 전략삼각체제가 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공)의 중심이 됐다. 그의 다극주의 정책은 경쟁 관계에 있는 사회·경제 체제가 분쟁 없이 공존할 수 있다는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의 ‘평화적 공존주의’의 영향을 받았다.(4)
2000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집권 이후, 범대서양주의와 프리마코프의 ‘다극주의’를 조합하려 애썼다. 2001년 러시아, 중국,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은 경제·안보 협력기구인 상하이협력기구(SCO)를 창설했다. 이후 2017년에는 인도와 파키스탄도 회원국으로 맞아들였다. 이 기구의 출범은 비(非)서구권 연맹체제 형성에 기여했다. 동시에 푸틴 대통령은 유럽연합과도 더욱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러시아가 NATO에 가입하는 것이 아니냐는 전망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미국은 이라크전에 참전하면서, 미사일 배치를 제한할 목적으로 소련과 1972년 체결한 ABM(탄도요격미사일)협정을 일방적으로 탈퇴했다. 또한, 미국의 자금을 지원받아 구소련과 발칸반도 곳곳에서 정권교체를 요구하는 ‘색깔혁명’이 일어나자, 푸틴 대통령은 서방국가와 친해질 수 있다는 헛된 기대를 접었다. 그는 2007년 2월 뮌헨 안보회의에서 “미국이 지배하고, 미국의 주권만 있는 단극체제는 위험하다”라며 미국을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그리고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러시아에 국제문제를 처리하는 방법에 대해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단호히 말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소련은, 테러 퇴치 등 국제적 차원에서 함께 해결해야 하는 사안은 서구 강국들과 협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NATO가 2011년 리비아 내전에 개입하자, 소련은 이런 군사개입을 비난하면서, 범대서양 국가와 공조할 수 있다는 생각을 접었다. 그리고 2014년 유럽연합이 아무런 협의도 없이 우크라이나를 유럽 영향권 안으로 들이려 하자(2014년 EU는 러시아와 갈등을 겪고 있던 우크라이나와 FTA를 포함한 포괄적인 협력 협정을 맺어, 우크라이나의 유럽화를 시도했다–역주), 러시아는 강력히 반발했고 냉전 이후 위기감이 최대로 고조됐다.
다소 모호한 개념, ‘다극성’
그런데 러시아가 미국 주도의 패권체제를 반대하며 주장하는 다극화는 다소 모호한 개념이다. 다극 구조란 러시아와 같은 비(非)패권국에 더욱 힘을 실어주기에 반드시 달성해야 하는 목표인가? 혹은 국가들 사이의 세력 균형을 통해 이미 누리고 있는 성과인가? 2013년 9월 19일 발다이 클럽(2004년에 창설된 러시아, 서구 지식인들의 협의체) 포럼에서 푸틴 대통령은 단극체제는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고 단정 지었다. 또한, “단극체제는 국가들 사이의 종속관계를 심화할 뿐이며, 역사적으로 볼 때 단극체제에서는 신이 우리에게 부여한 국가별 정체성과 세계의 다양성을 잃게 된다”라고 말했다. 2016년 10월 27일 회견에서 푸틴 대통령은 다극 체제를 지향점으로 봤다. 그는 이 자리에서 다극 체제가 자리 잡은 세계를 희망했으며, 바로 이런 세계에서 UN의 주도하에 ‘범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공통규칙을 준수함으로써, 주권과 국익을 보장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러시아의 야망은 ‘신(新)수정주의(Néo-révisionnisme)’에 가깝다.(5) 중국도 받아들인 신수정주의는 국제 정세가 일극 체제로 좌지우지되는 것에 불만을 표출한다. 러시아와 중국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장하려 하는 게 아니라 모든 국가는 주권 국가로서 주변국들과 개별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어야 하며, 세계를 지역 블록으로 나눌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 개념은 평등한 주권을 가진 국가들이 상호 동맹관계를 체결하면서 국가들 사이의 세력 균형을 맞추려 했던 19세기의 베스트팔렌 체제로 돌아가자는 것인가? 러시아와 중국이 주장하는 다극화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 두 나라는 주권을 핵심 가치로 인정하되, 다자간 협의체 구성에 찬성한다. 그래서 지역 협의기관을 창설하거나, 공동 이익을 추구하는 기구에 가입한다. 일례로 중국과 러시아는 1944년 국제 통화와 금융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체결한 브레튼우즈 협정을 계기로 창설된 WTO의 회원국이 됐다. 이로써 러시아와 중국은 다극 체제를 확립하고, 비패권국들이 미국이 주도하는 범대서양 체제와의 종속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러시아와 중국은 미국의 패권주의에 강하게 맞서고 있다.(6) 미국이 러시아에는 경제제재를, 태평양 진출을 노리는 중국에는 군사적 위협을 가하는 가운데 두 국가의 정상은 2017년 5번, 2018년 4번의 회동을 가졌다. 모든 러시아 지도자들이 유라시아 경제 통합을 추구했지만 구체적인 행동은 없었던 반면, 푸틴 대통령은 이를 지정학적 차원에서 구체화했다. 우선 서유럽 중심의 EU에 대응하기 위해 2015년 1월 1일 유라시아경제연합(EEU)을 공식 창설하면서 러시아 중심 통합 네트워크 건설에의 의지를 표명했다.
곧이어 푸틴은 2015년 5월 시진핑 주석을 만나, 중국이 추진 중인 ‘일대일로’(육상과 해상을 아우르는 신실크로드를 따라 인프라를 건설하려는 계획) 프로젝트 및 EEU 협력에 대한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지역 네트워크 건설 계획을 이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러시아는 마지막 소비에트 연방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로 돌아갔던 리스본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아우르는 경제 공동체 건설을 위한 ‘대 유럽’ 프로젝트 대신에 ‘대 유라시아’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대 유라시아는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같이 기존에 있던 기구뿐만 아니라 다양한 상호 협력 네트워크를 통합하게 될 것이다.
이런 행보를 볼 때, 러시아는 유라시아를 강대국들이 탐낼만한 지정학적 중심축으로 만들겠다는 ‘심장부(Heartland)’ 전략을 펼치고 있다. 심장부 개념은 “유라시아 대륙의 심장부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고 주장했던 지정학자 해퍼드 매킨더(1861~1947)가 이론화했고, 미국 정치학자 즈비그뉴 브레진스키가 발전시켰다. 2015년 7월 9일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 우파(Ufa)에서 EEU, BRICS, SCO간 회담을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유라시아 대륙이 지정학적 대결 무대가 아니라, 모두가 평화롭게 번영할 협력의 장이 되기를 기대하며 극단주의가 침범하거나, 자국의 이익을 위해 타국의 이권을 침해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7)
성장하는 중국, 러시아를 향한 시선
러시아는 거대해진 범대서양 체제와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신흥 강국 간 접전에서 유라시아 내 균열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다. 중국은 24년째 연속 군비를 증액하고 있다. 물론 아직 미국 군비(6,490억 달러)의 약 40%에 불과하지만 위협적이다. 러시아는 2016년부터 군비 예산을 줄이기 시작했지만, 군비 지출이 세계 6위로 상위권에 머물러 있다.(8) 여전히 막강한 서구와 떠오르는 아시아 강국 사이에 끼어 있는 유라시아의 위치는 러시아에 위험이 될 수도,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러시아와 중국의 입장은 분명히 다르다. 러시아는 군사와 경제 분야에서 미국이 우위를 선점했음을 인정한다. 2016년 6월 17일생 페테르부르크 국제 경제포럼에서 푸틴 대통령은, 미국이 현재 유일한 초강국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러시아와는 달리, 경제 성장력에 대한 자신감에 찬 중국은 세계 정치 프로젝트를 계획하기 시작했고, 국가들 사이에 ‘윈-윈’을 실현할 ‘운명 공동체’를 비롯한 다양한 구상을 내놓고 있다. 물론 회의론자들은 실현 불가능하다고 빈정거리지만, 중국이 ‘일대일로’ 건설을 위한 대형 투자와 다자개발은행 창설 등 구체적인 계획을 함께 내세우고 있으므로,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할 것이다.
한편 문화적 정체성에 관한 문제에서는, 러-중 연대가 위태롭다. 1999년 NATO가 세르비아를 78일 동안이나 폭격하면서 세르비아 주재 중국 대사관도 폭격당했다. 이 시점부터 중국과 범대서양 국가 간 관계가 점차 틀어졌다. 하지만 러시아는 서구국가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심지어 푸틴 대통령은 2013년 9월 발다이 클럽 포럼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범대서양 국가들이, 기독교적 가치를 비롯해 서구 문명의 근간을 무너뜨리고 있는지 보고 있다”라며 서구의 퇴락을 비난하면서 은연중에 러시아도 이 ‘서구’에 포함돼있다는 메시지를 넌지시 전달했다.
이를 지켜보는 중국은 어떻게 생각할까? 러시아가 서구를 재편성해 우두머리가 될 기회를 노리고 있다고 의심할 법하다. 과연 대(對)유라시아 프로젝트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두고 볼 일이다.
글·리차드 사크와 Richard Sakwa
영국 켄트 대학교수. 주요저서로 『Russia’s Futures』(Polity Press, Cambridge, 2019) 등이 있다.
번역·정수임
번역위원
(1) ‘National Security Strategy of the United States’, 백악관, 워싱턴 DC, 2017년 12월, www.whitehouse.gouv.
(2) Hélène Richard, ‘Quant la Russie rêvait d’Europe 유럽이 되기를 꿈꾸는 러시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8년 9월호.
(3) 1823년 제임스 먼로 미 대통령은 먼로주의 외교정책을 발표하면서, 라틴 아메리카를 미국에 귀속된 ‘뒷마당’으로 규정했다.
(4) Evgueni Primakov, ‘The world on the eve of the 21st century: problems and prospects’, International Affaires, vol.42, n°5-6, 모스크바, 1996년.
(5) Richard Sakwa,『Russia Against the Rest: The Post-Cold War Crisis of World Order』,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7년
(6) Isabell Facon, ‘Pékin et Moscou, complices mais pas alliés 중국과 러시아, 동맹도 적도 아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8년 8월.
(7) ‘Interfax: Putin says Eurasia’s not a chessboard, it’s our home’, Johnson’s Russia List, 2015년 7월 9일, http://rissialist.org.
(8) ‘World military expenditure grows to $1.8 trillion in 2018’,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 솔나(스웨덴), 2019년 4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