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다차의 역사

바깥에서 본 러시아

2019-10-01     크리스토프 트롱탕 l 기자

 

아직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다차(구 소련의 개인 별장-역주)는 공산주의 체제의 울타리 바깥에서 사유재산의 역할을 했고, 집단농장 시기에는 식량 생산의 마지막 기지가 됐으며, 레오니트 브레주네프(1964~1982 소련 서기장) 통치 시기에는 창의적 건축에 대한 고민과 지적 도피가 동시에 이루어진 곳이었다. 러시아는 2019년 1월 1일 발효된 새로운 법을 통해 아직 관습법의 영역에 남아 있는 다차를 손보려고 한다. 이제 사람들은 끝도 없이 펼쳐진 교외 지역에 덩그러니 놓인 다차 대신 홍해 해변을 더 선호한다. 다차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에 착륙하기 전, 비행기는 푸틸코보라는 작은 마을 위를 날고 있었다. 창밖의 풍경은 무성한 삼림 지대에서 고층 아파트 단지로, 다시 사부로보 공원의 고급 주택 단지에서 띄엄띄엄 보이는 경작지로 바뀌었다. 여기저기 널려 있는 공동정원용 땅에는 작은 집들이 마구잡이로 지어져 있었다.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자 교외 지역에 방치된 수많은 사유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정원은 황폐했고, 지붕은 나무로 뒤덮였으며, 어떤 건물은 채 지어지지도 못했다. 도심지 멀리 떨어진 변두리 경작지나 숲속 공터에 600㎡ 표준 규격으로 배치된 이 기묘한 건축물들을, 러시아 사람들은 그 건축물들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모두 ‘다차’라고 부르고 있다.

현재 다차는 위기에 처해 있다. 부동산 회사 인콤(INKOM)의 분석팀 팀장인 드미트리 타가노프는 모스크바 일대 개인용 필지 중 약 35%가 방치돼 있다고 설명했다. 러시아 국영 여론조사 기관의 2013년 연구에 따르면, 러시아인 중 38%가 별장을 소유하고 있고 그 중 약 2/3만이 주말 및 공휴일, 여름휴가 때 ‘정기적으로’ 별장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상대적인 무관심은 어디서 왔을까? 우선 다차와 경쟁할 만한 새로운 여가활동이 나타났다. 저소득층은 SNS나 TV 드라마, 온라인 게임을 통해 무료함을 달래고 있고, 중산층은 터키, 태국, 홍해 등지로 가는 패키지여행이나 유럽 문화유산 관광을 통해 견문을 넓히고 있다. 한편 다차의 주요 장점 중 하나인 텃밭 가꾸기 같은 원예 활동은, 자본주의적 생활 리듬이나 짧은 휴가 기간과 잘 맞지 않는 데다 슈퍼마켓에 넘쳐나는 사계절 과일과 채소 때문에 필요하지도 않게 됐다.

 

“다차를 포기하는 것은 가슴 아픈 일”

2008년 이후 러시아인들의 평균 수입은 정체된 반면 가계 예산은 더욱 다양한 곳에 쓰이게 됐으며, 필수 지출 비용(임대료, 에너지, 공공서비스)은 급격히 상승했다. 과거 공짜나 다름없었던 이 교외 별장은, 재산세, 교통비, 통신·수도·에너지 비용 때문에 사치품이 되고 말았다. 작은 별장만 해도 그 유지비가 연간 최소 3만 루블(약 420유로, 약 56만 원)에 달하며, 필수적인 유지보수 비용까지 고려하면 러시아 저소득층 가정은 이만한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 탓에 많은 집주인들은 최근 몇 년간 다차를 팔고 있다. 사람들은 “다차는 손잡이 없는 캐리어나 마찬가지”이며, “다차를 포기하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더 이상 유지할 여력이 없다”고 말한다.

부동산 중개업소에는 매물이 넘쳐난다. 부동산 중개업자인 이리나 도브로코토바는 “부동산 공급이 수요를 크게 웃돌고 있으며 일부 부문에서는 수요가 거의 없다”고 말했다. 고급 전원주택 부문의 거래 건수는 최근 10년간 급감(-60%)했고, 최저가 매물 역시 거래 건수가 25%나 감소했다. 부동산 중개사인 시안(Cian)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모스크바 인근 교외의 3만 3천 개 매물 중 15%에는 심각한 결함이 있고, 80%는 폐허에 가깝거나 가격이 너무 높습니다. 결국, 5%의 매물만이 구매자를 찾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에 휴양용 다차가 얼마나 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추정치와도 두 배 가까이 차이 날 수 있다. 러시아 원예가 연합 대표인 루드밀라 부리아코바는 러시아에 약 1,600만 개의 개인 다차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경제 연구소 연구원인 이반 스타리코프는, 구식 다차와 1990년대 무허가로 지어진 교외 별장을 포함하면 3,200만 개에서 3,500만 개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다른 전문가들은 토지 대장에 미등록된 건축물들이 1,500만 개에 육박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그중 상당수는 방치됐거나 심지어 건축이 완료되지도 않은 것으로 보인다.

 

2019년 1월 1일, 이러한 혼란을 정리하기 위해 새로운 법안이 발효됐다. 이 법안은 토지 대장 등록을 통해 방치된 필지를 파악하고 이를 시장에 공급하며, 해당 토지에 대한 수요를 파악해 인접한 곳에 토지를 소유한 사람에게 우선권을 주도록 한다. 또한, 이 법안은 은행 계좌 개설과 검증 가능한 회계 장부 제출을 의무화함으로써 비공식 계약과 개인 간 현금 거래를 근절하고자 한다.

가까스로 공포된 이 법안은 모든 면에서 비판을 받았다. 가장 먼저 비판받은 것은 이 법안이 ‘다차’라는 관용어를 삭제하고 이를 개인용 정원(또는 밭)으로 대체했다는 것이었다. 러시아 정서와 문화를 담고 있는 이 용어는 유럽 언어 사전, 그중에서도 특히 프랑스어 사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어원상 이 용어는 ‘선물’을 의미하는 ‘dat’에서 유래했다. 다차의 기원은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차르였던 표트르 1세는 주요 도시 인근 토지와 신규 점령 지역의 토지를 공신들에게 ‘수여’했다. 능력주의에 기반을 둔 이러한 러시아 제국의 토지 관리 원칙은, 아들들에게 유산을 균등하게 분배하는 평등주의 전통과 결합해 러시아 귀족들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 프랑스 문필가 아나톨 르루아-보리우(1842~1912)도 이를 자세히 묘사한 바 있다.

다차가 도시 주민의 휴양지가 되기 시작한 때는 1860년대 도시화 단계 직후이다. 농노제 폐지는 지주 계급의 쇠퇴로 이어졌고, 지주들은 토지를 분할하거나 매각하게 됐다. 20세기 초, 다차에서의 삶은 러시아 소설가들과 극작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다. 막심 고리키는 여러 차례 영화화된 희곡 『피서객』(1904)을 썼고, 안톤 체호프의 작품 중 반 이상이 다차를 배경으로 하며, 도스토옙스키의 『백치』(1869)에서도 다차는 미쉬킨 공작이 겪는 마지막 사건의 배경이 된다.

10월 혁명(소비에트 연방 정권을 수립한 공산주의 혁명-역주)은 구체제, 교회, 사유지, 농노제의 잔재를 타도했지만, 다차 만큼은 남겨 두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차르주의적 전통이 부활했고 고위 공무원, 당 친화적 예술가, 연구자, 아카데미 회원은 ‘직원용’ 다차를 제공받았는데, 보통 소유자가 외국으로 도망친 뒤 남은 자산이었다. 주요 극장, 작가 연합, 연구소들은 각 구성원의 휴식을 위해 원예협동조합을 조직했다. 다차는 공무원들에 대한 보상의 기능이 컸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을 통제하고 처벌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다차 박탈이야말로 불명예의 가장 큰 징표였기 때문이다. 스탈린 통치 시기 이 ‘보상’은 군 장성, 핵 프로그램 개발자, 산업 지도자 등 ‘조국의 구원자’에게 주어졌으며, 사유재산과는 다른 관사(官舍) 개념이었던 만큼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상의 문제도 제기되지 않았다.

스탈린 사후(1953) 다차의 유사 귀족적 성격은 후임 지도자들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평등이라는 사회주의적 이념을 해치는 이 관행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소련은 산업화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이촌향도 현상은 절정에 달했다. 지방 인구가 산업 중심지로 유입됨에 따라 도시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주택난은 가속화됐다. 거주자 1인당 6㎡이 확보돼야 한다는 규칙은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게다가 개척지에도 점차 집단농장 제도가 강제됨에 따라 과일, 채소, 고기, 우유 등의 물자는 점점 부족해지고 있었다. 정부는 다차 개념을 폐기하는 대신, 다차를 통해 위기 상황을 타개할 방책을 마련하고자 했다.  대기업들은 노동자에게 원예 및 여름 휴가 용도로 마련된 토지를 제공할 수 있게 허가해 달라고 요구했고, 당국은 베란다가 있는 25㎡(7.5평)짜리 여름용 별장의 표준 계획을 입안했다. 그러나 난방기 설치는 금지됐는데, 1년 내내 거주할 수 있게 할 경우, 이 유사-사유재산이 프롤레타리아의 습속에 ‘지주의 심성’을 심을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반면 원예활동은 장려됐는데, 이를 통해 식료품 부족을 완화하는 한편 휴양객들의 건전한 신체 활동을 장려하려는 목표에서였다. 법안은 가구당 기준 면적을 600㎡(181평)로 규정했다. 곧이어 2층 증축, 창고 부설, 다락방 설치가 허가됐다. 연이은 시행착오 끝에,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1953~1964)은 사회주의 원칙의 범위 안에서 다차를 민주화했다.

 

“작은 영주가 된 노동자들”

소비에트 시대의 모든 사회적 진보와 현대화는 어떤 방식으로든 이 다차 민주화 현상의 발전에 기여했다. 1950년대와 60년대에 이루어진 철도망과 버스의 확장은 도시 주민이 교외 지역을 관리할 수 있도록 접근성을 높였다. 1967년 공포된 주 5일 근무제에 따라 노동자들은 각자의 교외 별장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1970년대 이후 점진적으로 자동차가 보급됨에 따라 장비 수송과 별장 정비가 용이해졌다.

통계 연구원인 미하일 라리오노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련의 공휴일은 그 자체로 다차의 리듬을 따라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추운 겨울을 보내고 4월 22일(레닌의 생일)이 되면, 사람들은 다차로 가서 그곳을 정돈하고 청소하며 환기하고 원예 장비를 준비해 놓지요. 노동절(5월 1일) 연휴는 고랑을 파고 가래질을 할 시기에 딱 맞춰서 오고, 승전기념일(5월 9일)은 감자, 무, 토마토, 오이, 그 밖의 채소류를 심는 데 안성맞춤입니다. 짧은 여름이 다가오고, 몇 주간의 여름휴가 동안 사람들은 수확 전까지 과일과 채소가 자라나는 것을 즐깁니다. 마침내 10월 혁명(11월 7일) 연휴가 되면 원예기는 공식적으로 끝나고, 사람들은 다차에서 기른 식료품을 도시로 가져오는 것이지요.”

일상의 ‘소유욕’은 점차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약화시켰다. 레오니트 브레주네프(1964~1982 소련 서기장)의 통치 시기 위대한 사회주의 실험은 끝나버렸고, 사회주의 체제는 구성원들에게 제시할 청사진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았다. 러시아는, 현대의 러시아인들이 가끔씩 향수를 담아 ‘침체기’라 부르는 시기에 진입했다. 사유재산은 여전히 이론적으로는 금지돼 있었지만, ‘동지’들이 여가시간에 땀 흘려 만든 이 별장은 이제 공공의 것이 아니었다. 형식적으로 다차는 분명 국가 소유였지만 그 용익권(남의 소유물을 일정 기간 사용할 권리-역주)은 유산 형식으로 양도될 수 있었으며, 그 안에서 사람들은 마치 영주처럼 행동했고 자율적으로 과일과 채소를 길렀다. 또한, 사람들은 다차 주변에서 열매와 버섯을 채취했고, 러시아의 급격한 도시화의 영향으로 사라진 숲과의 연결 고리가 됐다.

많은 러시아인은 이러한 다차의 황금기를 아직도 그리워하고 있다(박스 기사 참조). 사회주의는 쇠락했고, 개인 정원이 공동체의 기획을 대체했다. 다차 개조를 위한 프롤레타리아의 창의성에는 이제 한계가 없다. 

고스플란(Gosplan, 러시아 국가계획위원회)에 따라 획일화된 모델은 깡그리 무시됐다. 어떤 이는 판자로, 어떤 이는 벽돌로, 어떤 이는 지하철 차량을 이동주택 형태로 개조하기까지 했다. (운반은 대체 어떻게 했을까?) 징집된 군인들에 의해 건축된 ‘장성용 다차’는 온 사방에 돋아났고, 공무원 간의 흥정에서 교환 조건으로 활용됐다. 밀매와 속임수가 절정에 달했을 당시, 보드카의 화폐화부터 재화 및 서비스의 물물교환에 이르기까지 부패와 암시장은 창의적이라고 할 만한 형태를 이루었다.  어떤 사람은 건축 지식을 활용해 다차를 3층으로 증축했고, 어떤 사람은 온실을 설치한 뒤 채소를 재배했으며, 또 어떤 사람은 비둘기를 기르기까지 했다. 글을 쓴 사람도 있었고 알코올 의존증에 빠진 사람도 있었으며, 둘 다 한 사람도 있었다.

 

러시아 남성들은 두 세대에 걸쳐 가족이 사용할 다차를 건축하고 개조하는 데 헌신했는데, 역사학자 스티븐 로벨은 이 다차 제도가 그들의 자아실현의 주요 원천이 됐다고 설명했다.(1) 소비에트 사회주의의 역사적 성공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다차 제도는 보편적 무상교육 및 우주 개발과 동등한 지위를 누릴 자격이 있다.

사회주의의 몇 안 되는 성공적인 유산인 다차는, 러시아의 포스트 페레스트로이카(고르바초프가 1985년 이후 실시한 개혁개방 정책-역주) 시대의 대재앙을 견뎌냈다. 모든 물질적·도덕적 가치가 소련이라는 폐허 아래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지만, 다차는 다시 한번 피난처로서의 가치를 증명했다. 원시적인 형태로나마 신·구 방식의 혼합 경제는 성장했고 사람들은 이를 받아들였으며, 식량 생산 경제는 자신의 당위성을 되찾았다. 목공 애호가들은 석공이나 지붕 시공업자가 됐고, 나이 든 여성들은 직접 기른 채소를 병에 담아 몰래 팔기 시작했다. 그리고 경제력을 갖춘 소위 ‘신흥 러시아인’들은 우후죽순 생겨나는 호화 별장 관리에 이 ‘하층민’들을 고용했다.

그 뒤로 여러 TV 프로그램이 이 주제를 다루며 인기를 끌었다. TV 시리즈 ‘피서객’(2017)은 다차에서 여름을 보내며 이웃들과 재회하는 전형적인 도시인 가족들을 러시아 여러 지역을 배경으로 출연시켰다. 세대 갈등, 서로 다른 사회 계층의 공동생활, 생활 및 여가 방식의 차이 등 오늘날 러시아 사회의 모든 클리셰가 다큐멘터리 형식을 모방한 이 멋진 쇼에서 상영됐다.

주간 리얼리티 쇼 ‘다차의 대답’(2008~)은 사람들에게 다차 리모델링을 선보이고 있다. 사회자는 우선 기존의 집이 갖고 있던, ‘어둡고’ ‘구식이며’ ‘잘못 배치된’ 단점들을 강조한다. 그 뒤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화면에 등장해 채광창, 명상 공간, 노출 스타일의 대들보 따위를 제안하고, 스타일리스트는 옛스러운 오두막을 개조해 현대식 다차로 재탄생시킨다. 그러고 나서 가족들은 다시 돌아와 그 변화에 탄성을 자아내는 것이다.

다차는 사회주의 소련의 숱한 변화를 경험해 왔다. 이제 다차는 자본주의적 사회변화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다차의 식량 공급에 대한 연구자인 인류학자 미하일 알렉세예프는 이렇게 말한다. “다차는 지역별로 경제적 차이를 보여줍니다. 모스크바 주변의 다차는 대부분 잔디와 화단으로 돼 있는 반면, 인접 지역인 블라디미르스카야 오블래스트의 다차엔, 감자, 채소, 다년생 작물이 고루 심겨있다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우나와 실내 수영장을 갖춘 호화 저택과 과일나무 몇 그루가 그늘을 드리운 판잣집. ‘다차’라는 한 단어는 이 양극단의 현실을 모두 가리킨다. 부유층에게는 사회적 성공을 증명하는 필수품이 되고 다른 이들에게는 최후의 생존 수단이 돼, 다차의 파란만장하고도 긴 역사에 새로운 한 페이지가 추가됐다. 

 

 

글·크리스토프 트롱탕 Christophe Trontin
기자

번역·오규진 mrcrazyani@gmail.com
번역위원

 

(1) Stephen Lovell, ‘Summerfolk. A History of the Dacha, 1710~2000’, Cornell University Press, Ithaca-Londres, 2003.

 

 

에어비앤비와 염소 치즈

 

다차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열광은 퇴색됐지만, 누군가는 여전히 자기만의 정원을 가질 수 있다는 꿈을 최대 관심사로 삼고 있다. 자본주의적 도시 생활에서의 탈피로서든 과거에 대한 향수로서든, 사람들은 다차라는 공간을 통해 오래된 물건들도 새롭게 활용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1960년대의 생활방식을 완벽하게 재현하려고 한다. 세르게이 톨스티크와 오레시아 톨스티크 부부는 모스크바 북쪽으로 100km 떨어진 드미트로프 지역의 다차를 상속받았다. 30대 부부인 이들은 아이가 없고 해외여행에도 큰 관심이 없었기에, 마침내 2018년 봄 주말과 여름 휴가를 투자해 12㎡ 크기의 다차를 개조하기로 했다. 가족들과 함께 사용했던 이 다차는, 적어도 20년 이상 방치돼 있었다. 

다른 모스크바 시민들처럼, 이 부부 역시 자동차 대신 공공서비스와 택시 앱을 이용해 체계적으로 물건을 옮겼다. 부부는 교통체증이 극심한 금요일 밤이었음에도 두 시간도 안 걸려 다차에 도착했다. 택시를 타고 기차역에 도착한 뒤 광역철도를 탄 부부는, 94KM역(역 이름 같지 않은 역 이름이지만, 사실이 그러하다-역주)에서 드루즈바 6번 지구까지 남은 5Km를 가기 위해 얀덱스(Yandex) 앱을 통해 택시를 호출했다. 공휴일과 주말에 초대받은 친구들과 가족들은 언제든지 부부를 돕는다. 친구들과 가족들은 열정 넘치는 젊은 부부에게 기술적 도움, 격려, 공구를 준다. 이 자발적이고도 열정적인 노동자들이 받는 보상은 야외 정원에서 즐기는 신선한 바람과 바비큐다. 다차는 이미 3중 도배와 단열재로 새롭게 수리됐고, 이웃집의 트랙터로 정원의 지저분한 쓰레기들을 치웠다. 소비에트 시대와 마찬가지로, 도시의 고물은 다차로 흘러간다. 사람들은 낡은 물건을 새로 바꿀 때 죄책감을 덜기 위해 ‘다차에서 쓰면 돼’라며 주문을 외운다. 오래된 냉장고, 색이 바랜 소파, 짝이 맞지 않는 접시, 유행이 지난 옷이 도시 밖 한 켠에서 새 생명을 얻게 된다. 다차에서의 전형적 활동은 공작과 원예 활동이다. 부부는 올해 베란다 개조를 마무리하고 처음 길러본 채소를 수확할 계획이다.

사람들은 격변하는 러시아의 현실에서 자기만의 주거지를 확보하고자 한다. 다차는 개인적 만족을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생계수단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실업자, 과도한 노동에 시달린 노동자, 일생의 노동을 충분히 보상받지 못한 퇴직자, 이상을 꿈꾸는 학생, 회복기에 들어선 환자가 모두 자신의 생계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고 있다.

‘다운시프터스(downshifters)’ 운동(소비 및 소유 거부 운동-역주)은 2000년대 러시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고, 미국에서 온 단어임에도 이제는 러시아의 일상 용어에 녹아들었다. 부동산 가격 상승률이 임금 인상률을 훨씬 상회함에 따라 많은 사람이 추가 소득을 얻기 위해 다차를 활용하려고 한다. 모스크바의 아파트를 안정적인 소득원으로 활용하는 데 필요한 것은, 방치돼 있던 다차를 서둘러 복구하고 인터넷을 설치한 다음 옷장을 옮기는 것뿐이다. 고정 수입을 가지고 검소하게 사는 이러한 삶의 형태는 특히 퇴직자에게 매력적이며, 이러한 가욋일을 통해 연금을 보충할 수 있다.(1) 특히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무상 분배를 통한 주택 사유화 권리를 행사함으로써 대다수 사람이 주택 소유자가 됐기 때문이다(1992년, 서류에 등록된 16세 이상의 모든 시민에게 적용됨). 올가 잘루체노바씨가 이 경우에 해당한다. 그녀는 포돌스크(Podolsk) 인근의 리모델링된 다차에서 조용하게 세월을 보내고 있는 젊은 퇴직자다. 그녀는 차를 타고 일주일에 몇 차례 시내에 가서 딸을 만나거나 전시회를 보고 친구들과 함께 예술 공연을 관람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일시적인 상황 때문에 다차를 활용한다. 마차 쿨라긴과 니콜라이 쿨라긴 부부는 모스크바 중심가에 아파트를 구매한 뒤 리모델링 공사를 서둘러 계획했다. 공사 기간 동안 그들은 다차를 집으로 삼았다. 두 아이를 돌보기 위한 잦은 이동과 공사 현장 관리라는 두 가지 까다로운 일을 동시에 해내야 하는 스트레스를 감안할 때, 부부는 이 기간이 6개월이 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부부가 구매한 아파트에 비해 지금 부부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목조 주택은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전기는 방 두 개에만 들어오고 온수는 나오지 않으며 인터넷은 모바일용 4G 통신에 의존해야 한다. 난방에는 구식 벽난로를 써야 한다. 그러나 동유럽 배낭여행으로 단련된 이 부부가 극복하지 못할 것은 없다. 게다가 부부는 이번 기회를 활용해 100㎡짜리 별장의 구식 채광창과 나무 내장재를 손질하려고 한다. 도시로 돌아온 뒤에는 1년 내내 지낼 수 있는 다차를 에어비앤비에 등록해 부가 수익을 낼 생각을 하고 있다. 단기 숙소로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는 다차’가 크게 인기를 끌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꿋꿋이 전원생활로 돌아가려고 하는 진취적인 사람들도 있다. 토지 가격 폭락을 계기로 몇몇 청년들은 시골에 정착했고, 현지인의 빈정거림을 무릅쓰고라도 자신들의 운명을 시험해보려 하는 것이다. 모스크바 북서쪽 트베리 출신의 발레리아 바잔과 미하일 바잔의 일상은 염소 사육, 유기농 농업, 야외 활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둘은 좁아터진 아파트와 사무실 근무에 염증을 느꼈고, 몇 번의 실패(둘은 이를 익살스럽게 표현했다)를 겪은 뒤 두 사람은 지속 가능한 농업을 실천해 보기로 했다. 전력망 가설 비용이 터무니없이 높았기 때문에, 미하일 바잔은 풍력 발전기와 태양열 패널을 활용한 자가발전을 선택했다. 뒤이어 세 커플이 그들의 활동에 동참했다. 그들의 활동은 이제 교외 정원이라기보다는 콜호스(구소련의 집단 농장)에 가까워 보였다. 총합 50헥타르에 이르는 농장에서는 염소 치즈, 꿀, 차, 아마인유(아마씨를 압착해 만든 기름-역주)에까지 이르는 천연 화장품, 사과, 유기농 채소 등의 상품이 생산되고 있다. 인근 지역의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은 이 상품의 열렬한 고객이다.

바잔 커플이 유튜브에 자신들의 전원생활을 올리기는 하지만, 그들도 구독자 197명이 자기들을 따라 시금치에 버터를 넣을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인터넷에서 자신들의 열정을 통해 돈을 버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채소 경작, 별장 건축 및 수리, 양봉, 그도 아니면 야외에서의 단순한 기쁨을 보여주는 영상을 만들어 사람들을 자극한다. 유튜버 ‘게으른 정원사의 조언’, ‘일하는 다차’, ‘작은 농부’는, 약 백만 명의 구독자를 가진 ‘생산적 채소밭’ 채널의 운영자인 타티야나만큼 성공하기만을 바라고 있다. 겸손하고 친근한 영상과 과하지 않은 목소리로 그녀는 자신만의 노하우를 설명하며, 신중하게 조언하고 삶에 도움이 되는 요령을 말해준다.

안톤 체호프의 희곡 『벚꽃 동산』의 결말에서, 라네프스카야 부인은 향수에 젖어 노래했다. “아! 나의 벚꽃 동산이여, 나의 사랑, 나의 아름다운 벚꽃 동산이여! 나의 삶, 나의 젊음, 나의 행복, 이제 안녕… 안녕!” 스위스에서 돌아온 뒤 그녀는 도시 주민들을 위한 휴양 별장을 지으려는 로파힌에게 오랫동안 방치됐던 땅을 넘겨줘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장면은 이후 다차가 맞이할 위기를 예감하는 듯하다. 해외에서의 휴가를 선호하는 러시아인이 버려둔 다차는, 또 다른 진취적 러시아인에 의해 생계수단으로 돌아왔다.  

 

 

글·크리스토프 트롱탕 Christophe Trontin
기자

번역·오규진 mrcrazyani@gmail.com
번역위원

 

(1) Karine Clément, ‘Le visage antisocial de Vladimir Poutine 블라디미르 푸틴의 반사회적 모습’,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8년 11월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