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단과 알제리, ‘아랍의 봄’ 불씨를 다시 지필까?
알제리와 수단의 권력에 맞선 민중시위는, 2011~2012년 이후 아랍이 겪었던 반혁명적 퇴보와 대조를 이룬다. 이 두 개의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군부의 지원에 힘입어 출범한 권력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스스로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몇 달 전, 시민들의 시위 장면과 함께 아랍의 항쟁 소식이 들려왔는데, 이는 2011년 아랍을 뒤흔들었던 혁명을 연상시켰다. 2018년 12월 19일 수단에서 시위가 발발했고, 2019년 2월 22일 알제리에서는 대행진이 일어났다. 마치 도미노 이론을 보여주듯, 이 운동들은 튀니지, 이집트, 바레인, 예멘, 리비아, 시리아에서 일어난 8년 전 대규모 평화시위의 추억을 떠오르게 했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이번에 발생한 시위에 대한 평가를 유보하고 있다. 본 기사의 제목이 의문문으로 끝나듯 말이다. 그것은, 2011년 ‘아랍의 봄’이 짧은 행복을 남기고 쓰디쓴 실망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당시 바레인은 걸프협력회의(GCC)의 지원 아래 민중봉기를 진압했다. 이는 중동 평화와 안전을 목적으로 하는 GCC의 성격을 감안했을 때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그로부터 2년 뒤 아랍지역은 혁명 대신 반혁명의 국면에 접어들었다.
2013년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은 이란과 다른 국가들의 지원을 받고 자국의 혁명을 진압했다. 또 이집트에서는 군부의 비호하에 권위주의 정권이 등장했고, 튀니지에서는 과거 정권 출신자들이 활동을 재개했다. 앞서 이 두 국가에서는 ‘무슬림형제단’ 세력이 혁명 발발 초기 시위대 진압에 나섰다. 반면, 리비아와 예멘의 과거 정권 출신자들은 권력을 잡기 위해 무슬림형제단을 적대시하고 혁명을 일으킨 단체들과 동맹을 맺었다. 결국, 두 국가는 내전을 겪게 된다. ‘이슬람국가조직(IS)’으로 불리는 극단적인 테러단체가 아랍 지역에서 널리 세력을 떨치게 된 ‘아랍의 겨울’이 도래했다.
한편 이라크와 시리아에서는 IS를 마침내 소탕했다고 하지만, IS와 같은 극단적 이념을 지닌 단체들이 리비아, 이집트 시나이반도를 넘어 아랍지역 밖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또한, 반혁명 세력들은 여전히 공격태세를 갖춘 상황이며, 바샤르 알아사드 세력은 러시아와 이란의 전폭적인 지지 하에 시리아 테러단체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다. 압델 파타 엘시시 이집트 대통령은 수단과 알제리의 민중시위를 무시한 채, 2030년까지 정권을 유지할 명목으로 헌법 개정에 나섰다.(1)
이집트와 아랍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 러시아, 프랑스, 미국의 지지까지 받아낸 칼리파 하프타르 리비아 국민군 최고사령관은 4월 중순부터 지속적으로 테러세력에 대한 공격을 암시했다. 하프타르는 UN과 무슬림형제단, 카타르, 터키의 인정을 받는 리비아 통합정부를 목표로 삼고, UN의 중재를 무력화해 새로운 합의책을 도출해낼 요량이었다. 결국 예멘 내전에 아랍에미리트가 개입하고, 사우디아라비아 주도 연합군이 참전하면서 참극이 발생했다. 이제 당분간은 지속적인 평화와 아랍 국가들의 통합도 기대할 수 없게 됐다.
아랍 청년 실업률, 세계 최고 수준
오늘날 수단과 알제리에서 발생한 항쟁은, 새로운 ‘아랍의 봄’이라기보다는 불안정하고 모순적인 정세 속에서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는 형국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의 항쟁은 확대돼 점점 크게 번지거나, 갑작스럽게 중단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아랍의 운명은 수단과 알제리에서 일어나는 국민들의 시위 양상에 좌우될 것으로 보인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2011년 아랍의 봄은 장기간 이어질 혁명의 첫 페이지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이에 비추어 봤을 때, ‘아랍의 봄’이라는 명칭은 2011년 평화로운 민주화의 짧은 순간이 아니라 몇 십 년에 걸쳐 봄이 지속되길 바라는 많은 사람들의 희망을 의미할 테다.
한편, 아랍의 정치 체제는 경제적 발전의 정도에 맞춰 변화되지 않았다. 즉, 라틴아메리카나 동아시아의 국가들처럼 사회경제적 근대화를 통해 정치적 근대화가 실현되지 못한 것이다. 오히려 1980년대부터 경제·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던 정치 체제가 붕괴된 격이다. 가장 주목할 사항은, 오래전부터 아랍 내 청년 실업률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점이다.(2)
이런 관점에서 보면 2011년의 혁명은 경제 안정을 이룩하는 새 시대의 도래가 아닌, 경제발전의 급진적인 방향 전환만을 가져왔다. 물론 이 같은 현상도 경제발전을 저해하는 기존 체제를 끊어내지 못했다면 상상도 할 수 없었을 일이다. 사실 ‘아랍의 봄’ 때문에 발생한 정치·경제 불안정성 탓에 경기 침체가 가속화되면서 이 지역의 분쟁이 해소되기는커녕 더욱 격렬해졌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반혁명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2011년 이후 아랍 내에서는 새롭고 강력한 사회적 움직임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튀니지가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한다. 튀니지는 투쟁을 통해 얻어낸 민주주의를 지켜냄으로써 ‘아랍의 봄’의 성공사례로 손꼽히게 됐다. 튀니지가 3세기 동안 유지해온 자신들만의 ‘문화적’ 차이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사실 튀니지의 성공에는 튀니지노동총연맹(UGTT)이 큰 역할을 했다. UGTT는 아랍에서 가장 강력하고 자생적인, 유일한 노조단체다.(3) 튀니지에서는 아직도 끊임없이 폭동이 발생하고 있는데, 카세린 주와 2016년 1월 중부지역에서 발생한 시위를 포함해, 2018년 1월에도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2011년 이후부터 대규모 사회 운동이 자주 발발하는 다른 국가로는 모로코를 꼽을 수 있다. 2015년부터 이라크에서, 2016년 10월부터 리프(Rif) 지역에서, 2018년 봄부터는 요르단에서 간헐적으로 시위가 발생하고 있다. 특히 수단의 경우, 2011년 이래로 여러 차례 저항운동이 벌어졌는데 2013년에 있었던 항쟁은 무력으로 진압됐다.
IMF의 개입, 그 이후
어디서든 고용과 물가 문제는 시위대의 주요 요구 사항에 속했고, 이 문제는 신자유주의의 첨병인 국제통화기금(IMF)의 개입으로 더욱 심화됐다. IMF는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정책을 지시함으로써, 그들이 주창하는 ‘실용적 합리성’에 오류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줬다. 결국 IMF는 구제금융의 일환으로 처방한 자신들의 정책이 아랍 국가들에 충분히 적용되지 않았기에 불만이 제기된 것이라고 진단했지만, 사실은 아랍지역 정세에 부합하지 않는 기존 방식의 정책을 고집한 탓에 불만의 목소리가 나온 것이다.
IMF는 정부의 개입을 줄이고, 경제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증명된 바가 없는 민간 부문에 대한 지원을 늘림으로써 아랍지역의 경기 침체 현상에 크게 일조했다. 2011년 이후부터 IMF는 긴축정책을 시행하며 압박 강도를 높였으나,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위에서 언급한 사례와 마찬가지로, 이란에서도 2017년 12월부터 비슷한 원인으로 유사한 결과가 초래됐다. 결국 2018년 1월, IMF의 혹독한 요구 사항을 견디지 못해 이란, 수단, 튀니지 세 국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편, IMF가 요구한 긴축정책을 모두 수행할 수 있었던 유일한 정부는 압델 파타 엘시시 정부였다. 2016년 11월에 시행된 IMF의 ‘충격요법’에도, 이집트에서는 다른 아랍 국가들과 달리 거센 반대가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이집트 국민들이 이렇게 잠잠한 이유는, 정부가 강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한 것 외에도 또 있다. 국민들은 2011년부터 2013년까지 반대 시위를 일으켜 새로운 정권을 세웠지만, 그 결과 무바라크 독재정권 시절이 그리워질 만큼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 된 것이다. 이런 절망적인 결과에, 이집트 국민들은 체념하기 시작했다.(4) 믿을 만한 해결방안이 더 이상 없다는 사실이 이집트 국민들을 더욱 낙담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이집트의 경험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아랍 국가들에 타산지석이 됐기 때문이다. 2011년 2월 11일 무바라크 정부가 축출되고 모하메드 모르시 대통령이 군부에 의해 퇴진하자 이집트 국민들은 민주화를 향한 희망을 가졌으나 결국 그 희망은 헛된 꿈이 되었다. 이집트의 사례로 다른 아랍 국가들은 명확히 알게 됐다. 군부가 정권을 잡으면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은 단지 빙산의 일각인 미미한 권력에 불과하며, 물속에 잠긴 빙산의 거대한 권력은 ‘군사-안보 복합체(Military-security complex)’라는 사실을 말이다.
아랍의 정치제도는 국가와 국가의 재원을 뜯어내는 특권 계급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 여기에는 두 종류의 계층이 있다. 하나는 군주제 국가에서 왕조이거나 스스로를 공화주의자라고 자칭하면서도 국가를 개인적으로 소유하다시피한 계층, 또 하나는 세습 자본주의 국가의 군부 및 관료 계층이다. 이 두 계층은 2011년 혁명으로 인해 완전히 상반된 운명을 걷게 된다.
군부대에 의해 축출된 대통령들
2011년, 신세습주의 국가인 튀니지와 이집트에서는 이제는 성가신 존재가 된 지도자층을 주저 없이 청산해버렸다. 반면, 리비아와 시리아에서는 왕가가 내전에 개입해 시위대를 유혈 진압했다. 한편 바레인에서는 걸프협력회의 회원국들이 나서서 시민들의 시위를 만류했다. 예멘은 아직 방향을 알 수 없는데, 2011년 혁명 당시의 옛 정권이 아직 해체되지 않아 시위대와 무력충돌 발생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수단과 알제리는 군부정권이 통치하는 국가로서 이집트처럼 반란을 일으키는 국민들을 달래고자 대통령을 축출했다. 4월 2일, 압델라지즈 부테플리카 알제리 대통령은 거센 퇴진 요구에 결국 사임했고, 오마르 알 바시르 수단 대통령 역시 4월 11일에 수단 군부에 의해 쫓겨났다.
이 두 쿠데타는 2011년 2월에 발생한 이집트 무바라크 축출사건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군부에 의해 발생한 쿠데타의 목적은 물속에 잠겨있는 빙산의 본체를 취하기 위해 일각을 제거한다는 데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알제리와 수단의 군부는 비리와 공금횡령을 저지른 대통령 측근, 유명 인사, 기관들을 시위대가 직접 공격하게끔 했다. 하지만 이집트의 사례를 경험한 국민들은 이에 속지 않고, 권위주의 정권의 통제를 끝내고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되기를 간절하게 원했다.
이들의 새로운 항쟁은 과거 68혁명 주도세력의 ‘상상력을 권력에’라고 외치던 해방운동과는 조금 다른 방식을 택해 이목을 끌고 있다.(5) 이들은 군부가 국가를 구성하는 현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알제리와 수단의 군부정권은 집권 당시, 1952년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가 이끈 자유군인운동이나 1974년 포르투갈의 군대운동(이 두 운동은 기존 계급제도에 대항해 발생한 운동으로써, 대중을 기만하지 않은 운동이었다)과 같은 방식으로 국민들의 숨통을 트이게 해줄 혁명의 선두주자가 되겠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2013~2014년 이집트 정부는 압델 파타 엘시시를 새로운 나세르로 소개하며, 국민들의 항쟁이 성공적이었다고 선전했다.
한편, 2019년 수단과 알제리에서 발생한 운동은 공통점도 있지만, 방향성 측면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2011년에 일어난 시위들은 대부분 실패로 돌아갔는데, 실패의 원인이 모두 동일하다. ‘아랍의 봄’은 포스트모더니즘적이라고 평가받곤 하는데, 이는 시위를 할 때 나아갈 방향을 정하지 않아 잘못된 방향으로 진행했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는 어떤 민중운동도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자연적으로 시위가 발생했더라도, 지향점은 명확히 설정해야 한다.
잘못된 형태의 단합
튀니지의 경우를 보면, 2011년 1월 시위를 국가 차원으로 확대하고 독재정권을 타도하는 데 UGTT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집트에서는 야권 조직이 시위를 일으키고, 무바라크가 축출되기 직전까지 선두에서 지휘했다. 바레인에서는 야당 세력과 노조가 시위 일선에서 움직였다. 예멘의 경우, 정권의 일부가 야권과 손잡고 혁명을 통해 이득을 얻고자 젊은 혁명가들(시위 발단의 주역들)을 밟고 올라갔다.
리비아에서는 시위가 무력충돌로 이어지자 과거의 반체제 인사들과 현재 인사들이 함께 움직였다. 시리아는 가장 오랫동안 시위 방향이 수평선을 그리고 있는데, 소셜 네트워크의 도움으로 ‘조정위원회’가 결성되고 터키와 카타르의 후원 아래 터키에서 시리아 국가위원회가 탄생했다. 터키와 카타르의 연합은 바레인에서 발생한 반정부 봉기를 제외한 2011년의 모든 시위를 통제할 수 있는 우위를 확보했다. 이는 단 한 번도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던 무슬림형제단의 신속한 협력으로 가능했다. 무슬림형제단은 이미 이집트와 예멘에 대규모 주요 조직을 형성했다. 그들은 비록 지하조직이라는 한계를 지녔지만, 리비아, 튀니지, 시리아 내에서도 세 지역의 주요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이웃 국가들과의 합법적 또는 준합법적인 분파를 형성했으며, 물질적 지원 및 카타르 수장의 TV방송 지원(알자지라 카타르 민영방송국 채널)도 받았다.
무슬림형제단은 아랍 내 (그 당시 정치적인 의미의) 반 자유당 및 좌파세력의 협력이나 외부 정부의 개입 없이 2011~2012년 대규모 지역적 단합에 성공했고, 튀니지와 이집트의 선거조직을 단기간에 형성해 양국의 권력을 장악했다. 모로코 군주제는 2011년 2월 20일 발발한 민중봉기 확산을 막기 위해 무슬림형제단의 모로코 지부를 앞장서서 출범시켰다.
한편 2012년 7월 리비아 국회선거에서 무슬림형제단이 고배를 마시는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이는 리비아의 정부 조직과 자유주의 성향의 비정부조직 간의 단합으로 이뤄진 결과였으며, 투표율의 절반 (61.6%의 참여율)을 차지해 무슬림형제단보다 약 5배가 넘는 표를 획득했다. 이 결과는 2012년 5월 이집트 1차 총선 다음으로 높은 수치였다. 이집트 총선 당시 지역적으로 분산된 자유당과 좌익 정당의 단합은 두 세력의 주요 후보(무슬림형제단과 구 정권)의 총투표율보다 높은 투표율을 기록했으며, 전 이집트의 대통령 모르시 투표율의 2배로 나타났다. 이 결과는 문화적 관점에서 지역 주민들이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적 상상력(서구의 반이슬람적 오리엔탈리즘을 이슬람 단합의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는 의미-역주)’과는 반대로, 무슬림 형제단의 ‘이슬람 정치사상’에는 영향을 받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6)
그러나 문화적인 요소보다 더 큰 근본적인 문제는 정치 조직에 있었다. 우선, 자유주의 (무교 및 이슬람교도) 세력이 급진 좌익 세력의 자리에서 대중의 움직임과 단합을 이끌어냈고, 결국 민주주의 세력이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런 식의 단합은, 극단파인 구체제 세력과 극단 이슬람 세력의 양극화를 대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안타깝게도 2011년 ‘아랍의 봄’을 먼저 맞이한 국가들의 경우, 반자유주의 세력과 좌익 세력이 구체제 세력과 극단 이슬람 세력 중 한 세력과 손을 잡은 후, 또 다른 세력과 다시 손을 잡는 등의 실수를 저질렀다. 결과적으로 이런 세력들은 정계에서 소외됐다.
알제리의 수평적 조직, 수단의 급진적 리더십
반대로 수단과 알제리, 두 국가는 계속되는 시위 사태 속에서 극단 이슬람세력에 저항할 힘을 기를 수 있게 됐다. 2011년 상반기 무슬림형제단은 이집트와 동맹을 맺음으로써 시위 진압에 나섰으나, 수단과 알제리의 경우 이런 군사 권력에 대항했다. 알제리는 ‘암흑의 10년(알제리 내전 기간)’을 거치며 1992년 1월 쿠데타 발발로 군사-안보 복합체와 극단 세력 간의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자, 대중은 이 두 세력에 대해 강한 불신감을 가지게 됐다. 지난 2월부터 발생한 알제리 길거리 시위도 대부분 극단 이슬람 세력을 강력히 반대하고 정부의 군사명령을 거부하는 성격의 항쟁이었다.
수단의 경우, 1989년 알 바시르의 쿠데타 이후 극단 이슬람 세력과 군부의 통치로 두 반동 세력에 대한 민족의 반발이 더욱 급진적으로 확산됐다. 알바시르는 무슬림형제단과 동맹을 맺은 군부 독재자이며 (동맹이라고 하지만 이들 간에도 서열은 존재한다) 모르시와 엘시시를 혼합해 놓은 듯한 특징을 지녔다.(7) 2011년 이래 아랍권 국가에서 일어난 모든 시위 중 최고는 수단의 시위였다. 이 시위대는 군사력과 모든 이슬람 종교 세력에 반발하며, 정부를 향한 시민의 권리, 종교의 자유 권리, 민주주의와 심지어 페미니즘까지 주장했다.
수단의 급진적인 시위는 탁월한 정치적 리더십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하지만 알제리의 경우, 구성원들의 다양성과 수평적 관계 때문에 이런 리더십 발현에 제약이 있다. 남녀 학생들은 학교에서 모임을 가지고, 반자유당과 자유세력, 노동자와 자영업자들은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협력하면서 그 누구도 서로 억압하지 않는 구조다. 반면에 수단은 ‘자유와 변화를 위한 선언 세력(FDFC)’이 세운 계획에 어느 누구도 반감을 가지지 않는다.
2019년 1월 1일에 채택된 선언문인 수단 직장인 협회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협회는 2016년 10월에 의사, 기자, 변호사 및 다른 직업 공동체(교사, 엔지니어, 약사, 예술가 및 최근에는 노동자, 철도산업 종사자 등)의 합류로 비밀리에 창설됐다. FDFC는 사디크 알 마흐디(Sadiq Al-Mahdi, 1960대와 1980년대 두 차례 총리를 역임한 자유주의이자 수피교 무슬림 지도자)가 이끌고, (1960년대 이래 약화됐으나) 현재까지 존재하는 아랍 내 가장 중요한 수단 공산당인 움마당에서부터 알 바시르 종교 및 군사체제 반대 세력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야당 정치세력 등이 참여한다.
여기에 ‘여성 탄압을 반대한다’는 이니셔티브를 가진 페미니스트 단체와 시민정치 페미니즘 단체도 포함된다. 이들은 서로 연합해 영향력을 확산시키고 있으며, 입법부 내 여성의원 비율 40%로 하는 여성할당제를 요구하고 있다. 민주적 여성 협회(Association of Democratic Women) 또한 튀니지 사회의 반란 및 변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나, 여성인권에 대한 주장은 큰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파이낸셜 타임스> 기자 데이비드 필링이 다음과 같은 논평을 게재했는데, 이는 극좌파 잡지에나 어울릴만한 내용이었다.
“기술의 발전으로 반란의 목소리가 스마트폰과 해시태그를 통해 널리 퍼지고 있다. 이런 움직임이 한편으로는 시류를 반영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위의 과격성이 과거로 회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917년 차르(Tsar)가 무너졌을 때 러시아가 어땠는지, 1871년 파리코뮌(Commune de Paris)의 기이하고 이상적인 모습이 어땠는지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2019년 4월 발발한 수단 항쟁의 분위기와 비슷한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8)
FDFC는 정치사회적 전환기에 누가, 얼마나 오래 권력을 잡을 것인가 하는 중요한 문제를 놓고 군부세력과 대립하게 됐다. FDFC는 군부의 정치참여를 최소화할 것을 주장하는 반면, 군부세력은 지속적인 정치 참여와 권력 유지를 원하고 있다.
수단 혁명의 운명은 어디로?
그러나 튀니지와 이집트의 헌법, 입법 및 대통령 단기 선거 당시 진보주의 세력이 힘을 발휘하지 못한 채 반동적인 양극화 체제가 이끌었던 사례를 떠올려보면, 다양한 사회·경제적 변화(시민사회, 민주사회, 세속사회, 진보사회 및 여성의 지위 등)를 위한 헌법 개정 등의 제도를 마련하려면,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FDFC의 의견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정당을 창설하고 진보주의적인 힘을 키워나가려면, 리더십을 공고히 할 시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왜 수단의 주요 세력들이 알제리의 세력들보다 봉기 발발에 불안해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 카타르가 속한 걸프협력회의의 반대세력인 무슬림형제단은 알 바시르 체제가 폭락하기 전까지 알 바시르를 후원했고, 아랍에미리트-사우디아라비아는 예멘에서 함께 참전한 현 장교들이 주도하는 군대를 지원했다. 특히 움마 국민당과 같은 ‘보수파’ 세력을 통해 진보주의 세력을 억제하고, 군부대의 경우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법을 폐지하려는 FDFC를 비난하며 종교 선동주의자 진압을 살라피스트(Salafiste: 극도로 엄격하고 급진적인 이슬람 종파)와 함께 이끌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상황은 (<파이낸셜 타임스> 기자가 쓴 비유를 다시 차용해서 설명하자면) 1917년 러시아혁명처럼 급진적인 혁명으로 치달을 것인가? 아니면, 파리코뮌이 진압된 ‘피의 일주일(Semaine sanglante)’을 맞이하게 될 것인가?
수단 시위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군인들과 하급장교들의 움직임이다. 알 바시르가 그랬듯, 이들의 움직임을 의식해 군부정권이 시위대 진압부대 투입을 철회했다. 러시아혁명과 프랑스혁명의 결과가 판이했던 것처럼 수단 혁명의 결과는 어떻게 운명 지어질까?
글·질베르 아슈카르 Gilbert Achcar
런던대학 중동-아프리카 국제관계학과 교수, 『병리적 증상: 재발한 아랍의 반란』, Actes Sud, Arles, 2017년
번역·장혜진 hyejin871216@gmail.com
번역위원
(1) Bahey Eldin Hassan, ‘Egypte. Le coup d’État permanent(이집트, 계속되는 쿠데타’, <Orient XXI>, 2019년 4월 15일, www.orientxxi.info
(2) 경제 정체에 관한 수치와 분석을 확인하려면, 글쓴이 Gilbert Achcar의 저서 『Le peuple veut. Une exploration radicale du soulèvement arabe 민중은 원한다. 아랍 봉기에 대한 철저한 진단』(Sindbad, Paris, 2013) 참조.
(3) ‘À propos de l’UGTT, Colauréate du prix Nobel de la paix 2015 2015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튀니지노동총연맹’, Héla Yousfi, ‘Un syndicat face à Ennahda, dans Le Défi tunisien 튀니지의 도전과제 내 엔나흐다(튀니지 이슬람 정당)에 맞서는 조합’, <Manière de voir>, n° 160, 2018년 8~9월호.
(4) Pierre Daum, ‘Place Tahrir, sept ans après la révolution 타흐리르 광장, 혁명 발생 7년 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8년 3월호.
(5) ‘L’imagination au pouvoir, une interview de Daniel Cohn-Bendit par Jean-Paul Sartre 상상력을 권력에, 장 폴 사르트르의 다니엘 콘벤디트 인터뷰’, <Le Nouvel Observateur>, Paris, 1968년 5월 20일.
(6) Edward W. Saïd, 『L’Orientalisme. L’Orient créé par l’Occident 오리엔탈리즘. 서양에 의해 창조된 동양』, Seuil, Paris, 1980년.
(7) ‘The fall of Sudan’s Morsisi’, <Jacobin>, 2019년 5월 12일, www.jacobinmag.com
(8) David Pilling, ‘Sudan’s protests feel like a trip back to revolutionary Russia’, <파이낸셜 타임스>, 런던, 2019년 4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