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의료 시스템, 경쟁의 처방은 경쟁
공공의료보험 제도가 존재하지 않는 스위스의 국민은 민영보험사를 통해 의료보험을 해결한다. 기업 고용주의 의료보험 부담 의무도 없어 보험료 부담은 고스란히 시민의 몫이다. 그렇다고 보험료 인상을 억제할 만한 수단이 있는 것도 아니다. 전문가들의 조언을 토대로 의료기관 재정 지원 개혁안이 마련됐지만, 이들 전문가의 중립성마저 문제되고 있다.
스위스 의료 시스템이 새로운 시장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2012년이면 의료기관 재정 지원 개혁안이 본격 발효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의료기관 사이에 치열한 경쟁체제가 형성되는 한편, 국가 인증을 받은 민영병원에도 새로운 판로가 열리게 된다. 연방정부는 이번 개혁안으로 의료비 증가가 억제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벌써 수년째 ‘의료비 폭등’이라는 레퍼토리는 피보험자의 의료비 부담과 의료 서비스 축소를 정당화하는 빌미만 돼왔다. 더욱이 피보험자에게 부담을 가중하는 것만이 민영보험사가 운용하는 스위스 사회의료보장제도의 문제점에 대한 유일한 공식 해법인 양 통용됐다.
사회연대 메커니즘 전무한 나라
1996년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의무적 성격의 기초보험제도가 시행되면서 수많은 사회적 진보가 이뤄졌다. 먼저 고령층이 기초보험 가입을 거부당했던 것과는 달리, 이제는 국민 누구나 기초적인 의료보장 혜택을 누릴 수 있다. 가입시 피보험자의 나이나 성별에 따라 보험료를 차등 적용하는 일도 사라졌다. 치과치료나 장기치료 등 기초보장 서비스 범주도 폭넓게 확대됐다.
그럼에도 스위스의 의료보장체계는 크게 세 가지 문제점을 야기한다. 첫째, 의료비 재정 문제다. 스위스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피보험자의 의료보험 부담률이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다.(1) 대부분의 유럽 국가와 달리, 스위스의 의료보장제도에는 사회연대 메커니즘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기업 고용주에 대한 의료보험 분담 의무도 없어, 병가는 무급 처리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더욱이 스위스의 의료보험은 피보험자의 재정적 형편과 관계없이 무조건 ‘머릿수’에 따라 책정된다. 그 결과 저소득 노동자나 부양가족이 딸린 기혼자에게 보험료는 큰 부담이 된다. 기껏해야 극빈자만이 국가로부터 보험료 인하 정도의 혜택을 누리고 있을 뿐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스위스 정부는 그동안 꾸준히 의료보험 분담률을 축소해왔다. 한 예로 1970년대 초 전체 의료비용의 40%(2)를 차지하던 국가 부담률은 2008년 26.9%로 뚝 떨어졌다.(3) 현재 가계의 의료비 분담률이 전체 비용의 3분의 2에 육박하고 있지만, 정책 결정자들은 국가와 개인 사이의 불공정한 부담률 격차를 해소하는 문제보다 총의료비 지출액을 표적으로 삼기에만 바쁘다. 지난 10년간 스위스에서는 부의 생산이 의료비 지출보다 빠른 속도로 증가해왔다. 한 예로 2008년 스위스의 의료비 지출은 국내총생산(GDP)의 10.7%를 차지했다. 이는 11.2%인 프랑스에는 맞먹고, 16%를 기록한 미국에는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다.(4)
지나치게 많은 의료보험 운영기관이 난립하는 것도 문제다. 하지만 스위스 정부는 질병기금 수를 줄이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히려 사회보험의 핵심 가치로 경쟁 원칙을 도입하는 데만 혈안이 돼 있다. 경쟁이라는 명목 아래 스위스에서는 보험자가 수많은 민영보험회사 중 한 곳을 마음대로 선택하거나, 매년 보험료 공개를 통해 소비자가 가입기관을 자유롭게 옮길 수 있게 허용한다.
보험료 인하 경쟁, 정작 인상 빌미
하지만 이런 보험사 이동은 상당한 행정비용을 유발할뿐더러, 보험료가 들쭉날쭉 요동치는 원인을 제공한다. 자유로운 거래를 할 수 있는 일반 기업과 달리, 보험료가 낮은 보험운용기관은 가입자가 쇄도해도 수요가 공급을 초과한다는 이유로 새로운 보험 계약을 거부할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이듬해 재정 확충을 위해 보험료를 뻥튀기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다 보면, 결국 의료체계는 파멸의 길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보험운용기관은 달갑지 않은 가입 희망자가 가입을 포기하게 만들 갖가지 술수를 개발해냈다. 예를 들어 보험회사는 누군가 보험 가입에 대해 문의하면 나이나 건강상태 등을 질문한다. 그리고 ‘불량 위험’군으로 판별되면 해당 희망자의 가입 요구를 거절한다.(5) 그다지 돈벌이가 될 것 같지 않은 가입자를 솎아낼 수 있게 이들에게 불리한 보험상품을 개발함으로써 위험선별에 나서기도 한다. 요컨대 보험료 지출이 높을 것 같은 개인에게는 보험료는 낮지만 대신 여러 가지 불리한 조건이 부과된 상품을 제시한다. 보험 가입자 수가 상대적으로 많은 보험회사는 보험료를 높게 책정하는 방식으로 지출 비용을 상쇄하기도 한다.
보험사에도 고비용 구조일 뿐
이렇듯 스위스의 보편 의료보험을 지배하는 것은 사회연대가 아닌 보험사의 상업적 전략이다. 그리고 보험사의 상업적 전략은 수많은 지역적 전략으로 분화된다. 왜냐하면 스위스에서 보험료는 자치주(Canton)마다 서로 다르게 책정되기 때문이다. 때로는 동일한 자치주 안에서조차 지역에 따라 보험료가 차등 적용된다.
이런 상황은 보험사에 많은 비용을 발생시킨다. 2009년 의료보험기금이 고위험군 피보험자 증가에 대비해 비축한 자금은 총 37억5천만 스위스프랑(CHF)에 달했다.(6) 여기에 준비금까지 더하면, 보험사가 군자금으로 보유한 금액은 무려 90억 스위스프랑(약 72억 유로)에 육박한다.
스위스 의료보장 체계의 세 번째 문제점은 사회보험과 상업적 성격의 ‘보충보험’ 사이에 존재하는 허점이다. 스위스에서는 하나의 동일한 보험사가 기초보험과 보충보험을 동시에 운용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두 부류의 보험이 서로 양립하기 힘든 각기 다른 논리에 기초한다는 점이다. 우선 기초의료 보장을 위한 사회보험의 경우 보편보험이라는 성격상 이윤을 내거나, 위험선택을 하는 것이 금지돼 있다. 반면 기초보험으로 보장받을 수 없는 그 밖의 다른 의료 서비스를 대상으로 하는 보충보험은 위험선택과 이윤창출이 모두 가능하다.
정신분열에 버금가는 이 이원적 의료보험 체계에서는 자칫 기초보험이 미끼상품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질병기금이 기초보험 가입자 가운데서 보충보험에 적합한 이상적인 고객층을 선별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런 식의 자원이전(Resource Transfer)은 적발해내기도 쉽지 않다. 대개 상업적 이윤 창출 영역과 ‘사회적’ 영역을 동일한 지역의 동일한 직원이 동시에 다루기 때문이다.
자원의 이동은 투자 형식을 띠기도 한다. 회계상 기초보험 부문의 주가를 최저가로 기록하고, 기초보험 부문의 주식을 동일한 보험사가 운용하는 보충보험 부문이 실제가에 매입한다면, 기초보험의 회계상 가시화되지 않은 이익이 생겨나게 된다. 더욱이 “연방정부는 보험사 내부의 이런 주식 거래를 통제하지 못한다”.(7)
동일한 보험사가 서로 다른 성격의 두 가지 보험을 운용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한다. 보험사가 굳이 기초보험을 효율적으로 운용하려 들지 않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오히려 방만한 경영을 부추긴다. 보험료가 인상될수록, 정부 당국은 보험료 인상을 억제하기 위해 기초보장 목록을 축소하려 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수혜는 고스란히 보충보험 시장에 돌아간다.
어쨌든 경쟁 체제는 보험료 인상을 억제하는 데 이르지 못했다. 1996∼2010년 성인의 평균 보험료 인상률은 연간 5%를 웃돌았다.(8) 각종 형태로 피보험자의 의료비 지출 부담도 크게 증가했다.
경쟁을 신봉하는 이들은 경쟁이라는 도그마가 실패로 돌아가더라도, 실패의 원인을 오히려 경쟁 결핍에서 찾으려 든다. 시장 논리에 따라 새로운 영역을 추가로 개방하라고 주장한다. 단순히 위험선택에만 국한하지 말고 의료 서비스 영역에까지 경쟁 논리를 도입하자는 것이다. 이번 의료기관 재정 지원 개혁안도 이런 논리와 맥을 같이한다.
스위스에서는 2012년을 기점으로 정부와 보험운용기관이 의료기관에 대한 직접적인 재정 지원을 중단하게 된다. 대신 ‘진단명 기준 환자군’(DRG)에 따른 포괄수가제를 적용한다. 이 제도는 무엇보다 질병의 경중을 잘 고려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문제는 수가가 비교조사를 근거로 정해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모든 의료기관에 최저가 원칙이 적용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에 따라 환자에 대한 관심도나 의료진의 근로조건 등 수익을 내는 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가치가 등한시될 염려가 있다.
“병원을 기업처럼 운영하라”
스위스 연방의회는 아예 노골적으로 “병원은 앞으로 기업과 같은 방식으로 운영돼야 할 것”(9)이라고 말한다. 이제 환자는 병원이 최대한 쉬는 시간을 줄여 효율적으로 유입을 관리해야 할 고객 개념으로 변화한다. 연방의회는 “의료정책에서 핵심 공공 주체인 자치주가 시장 내 다른 병원, 특히 이웃 자치주의 병원이 사라지기를 바라며, 해당 자치주에 속한 병원이 변화하는 새로운 경쟁 체제에 잘 적응할 수 있게 지원”하도록 부추긴다.(10)
시장이라는 시뮬라크르가 더 완벽하게 구현되려면, 이론적으로 소비자인 환자가 공공병원, 비영리 민영병원, 혹은 완전한 민영병원 등 종류에 상관없이 자신이 원하는 병원에서 치료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는 그야말로 많은 민영 개인병원이 군침을 흘리게 만드는 요소가 아닐 수 없다. 한 예로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본사를 둔 메디 클리닉 병원도 현재 스위스 투자를 위해 자본 모집에 나서고 있다.(11) 2007년 이 그룹은 이미 13개 민영병원을 소유한 스위스의 히스란덴 그룹을 28억4600만 스위스프랑(약 22억8천만 유로)을 주고 인수한 바 있다.
하지만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26개 스위스 자치주가 각기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앞으로도 주 당국은 재정 지원을 받을 병원과 재정 지원 대상이 될 의료 서비스 목록 등을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법적으로 민영병원이 주정부 지원을 받기 위한 조건도 계속 주 당국이 결정한다. 스위스 프랑스어권 지역 가운데 주민 수가 가장 많은 보(Vaud)주를 비롯해 몇몇 자치주는 납득하기 힘든 조건(24시간 응급서비스 조직, 국가의 병원장 임금 결정권, 배당금 제한 등)을 내세우는 바람에 치열한 법적 공방에 휘말리기도 했다.
정치권과 업계의 뿌리 깊은 결탁
새 개혁안을 지지하는 이들은 의료 서비스를 대상으로 한 재정 지원이 의료제도 민영화로 나아가는 길을 활짝 터줄 것이라고 말한다. 로베르 뢰 교수는 연방의회가 근거 자료로 사용한 한 보고서에서,(12) 병원 재정 지원에 관한 전권은 의료보험 운용기관이 갖고, 자치주는 연구 및 교육, 응급서비스 등에 관한 재정 지원만 맡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또한 각 보험운용기관들이 자사에 적합한 병원이나 의사를 자유롭게 선택해 수가를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논리를 계속 따르다 보면, 마침내 환자는 의사를 선택할 권리를 박탈당하고, 의료진은 업무 통제력을 잃게 되며, 정부 또한 의료정책을 관리하는 것이 불가능해질 수 있다. 반면 민간 주체는 다양한 상품 포지션을 통해 세분화된 시장을 점령해나갈 것이다. 그러면 경쟁력은 ‘고객’ 종류에 따라 의료 서비스를 적절히 분배하거나, 혹은 반대로 독점화된 의료 서비스를 많이 만들어내는 능력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그렇다면 ‘계급 의료’ 시대가 열리는 것일까?
정부는 “아직 필요한 정책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이유를 내세워 이런 가능성은 배제하고 있다.(13) 하지만 늦어도 2015년까지 정부는 병원 재정 지원에 관한 일원화된 청사진을 새로 제시해야 한다. 국가냐 보험운용기관이냐를 선택해야 한다.
뢰 교수가 진정한 의료시장 창설에 그토록 열을 올리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연방의회는 그저 ‘전문가’라고만 완곡히 표현했지만 사실 뢰 교수는 베른대 경제학과를 이끄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메디 클리닉 이사회에도 몸을 담고 있다.(14) 그런데 메디 클리닉은 비사나 보험회사의 스위스 현지 자회사다. 더욱이 스위스 메디 클리닉은 정계에 넓은 인맥을 보유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급진자유주의 (우파) 정당 소속 당원이자 연방 상원 사회복지의료위원회에 소속된 펠릭스 구츠빌더 의원은 사니타스 질병기금에서, 보험업계의 거물 악사 빈터투어, 미국 소재 의학연구소인 오시리스 테라퓨틱스에 이르기까지 각종 이사회에 참여하고 있다.
연방 상원 사회복지의료위원회에 참여 중인 13명의 의원 가운데 질병기금 및 보험업계와 관련된 인사는 6명에 달한다. 일단 연방 상원의원이 의료 관련 위원회에 소속되면, 보험업계의 로비가 쇄도한다. 보험업계는 상원의원들에게 이사직을 의뢰한다. 10여 회기 기준으로 무려 5만~6만 스위스프랑(약 4만~4만8천 유로)에 이르는 연봉을 주겠다며 꼬드긴다. 스위스에서는 이런 관행을 일컬어 ‘부정부패’라든가 ‘이해관계 충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능력 활용’이라고 부를 뿐이다.
‘계급 의료’ 시대는 열리는가
로비 세력과 정책 결정자 사이의 유착관계는 스위스 의료제도의 대안 마련에 걸림돌로 작용한다. 2007년 일원화된 공공보험기관을 창설하고, 소득에 따라 보험료를 차등 적용하자는 시민발의가 제기됐다. 하지만 700만 스위스프랑 상당의 자금이 투입된 보험업계의 대대적인 로비 활동으로 인해, 이 안건은 71%에 이르는 압도적인 반대표로 무산됐다. 지난해 10월 또다시 국민투표가 진행됐다. 보험료 차등 적용은 제외하고 일원화된 의료보험 운용기관만 창설하자는 발의가 제기됐다.
상황이 어찌됐든 무엇보다 절실한 것은 스위스 의료보장제도를 조속히 개혁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빠른 시일 안에 지금의 경쟁 원칙에 입각한 모델은 버리고, 새로운 재정 지원 방식의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글•미카엘 로드리게즈 Michaël Rodriguez
<쿠리에> 기자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각주>
(1) ‘스위스 의료시스템에 관한 OECD의 연구’, OECD, 파리, 2006.
(2) ‘Schweizer Krankenversicherung als Exportartikel?’, <Zeitschrift Soziale Mdeizin>, 바젤, 2009년 10월(www.sozialemedizin.ch).
(3) ‘의료 시스템의 비용 및 재정 지원’, 연방통계청, 뇌샤텔, 2010.
(4) ‘2010년 OECD 환경-건강’, 2010년 6월.
(5) ‘의료보험: 해결해야 할 문제들’, 방송 프로그램 <현대>, 스위스 프랑스어권 TV, 2010년 4월 15일.
(6) 스위스 연방보건청(OFSP), 베른.
(7) 피에르 이브 마이야르, <의료보험을 치료하라! 허울뿐인 경쟁에서 실효성을 지닌 협력에 이르기까지>, 파브르 출판사, 로잔, 2010.
(8) 표준 피보험자 부담 의료비 상한액 제도 및 상해 보장을 포함한 의료보험 모델을 근거로 추산, ‘2008년 의무 의료보험 통계’, 스위스연방보건청(OFSP), 2010년 5월.
(9) ‘의료보험(병원 재정 지원) 연방법 부분 개정에 관한 메시지’, 2004년 9월 15일.
(10) ‘포괄수가제 도입: 자치주 및 해외 사례 연방의회 보고서’, 스위스연방보건청(OFSP), 2010년 1월 27일.
(11) 피에르 이브 마이야르, op. cit.
(12) ‘의료보험 연방법 부분 개정에 관한 메시지’, op. cit.
(13) ibid.
(14) 피에르 이브 마이야르, <의료보험을 치료하라!>, op. c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