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이 아홉 개, 스위스 은행

2011-02-11     세바스티앵 귀엑스

2009년 스위스가 은행 비밀주의의 빗장을 푸는 데 전격 합의했다. 하지만 실제 양보 수준은 미미한데다, 이미 금융계가 여파를 최소화하기 위해 총력전에 나서고 있다.

2009년 초, 오랫동안 미온적인 자세를 유지해온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유럽연합(EU) 주요 회원국과 미국의 성화에 못 이겨 마침내 대응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OECD는 ‘이중과세방지협약’(DTA·원천지국과 거주지국에서 세금을 이중적으로 내는 것을 막고 탈세를 방지하기 위한 협정으로, 관할 국가 간 납세자의 정보를 교환할 수 있게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가운데 최소 12개 조항을 조속히 개정하지 않을 경우 스위스를 ‘조세천국’ 명단에 포함(조세천국 명단에 오를 경우 중대한 처벌을 받게 된다)(1)시키겠다고 위협했다. 주요 개정 내용에는 조세포탈(Tax Fraud)뿐 아니라 조세회피(Tax Avoidance)에 대해 국제 공조 원칙을 적용하는 등의 사항이 포함돼 있다.

스위스는 법으로 조세포탈과 조세회피를 구분하고 있다. 조세포탈이란 문서위조 등의 방법으로 탈세를 하는 행위로 형사죄에 해당하지만, 조세회피는 고작해야 행정처분의 대상일 뿐 고객 정보 제공의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2009년까지는 대체로 스위스 당국에 국제 공조를 요청해도 ‘비밀주의’라는 장벽에 부딪혀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한편 OECD에 이어 미국도 자체 대응에 나섰다. 미 정부는 스위스 최대 은행 UBS에서 일하는 한 자산관리인의 자백 덕에 여러 해 전부터 이 은행이 미국 고객의 탈세를 적극적으로 도와왔다는 결정적 증거를 확보했다. 2008년 가을 미 법무부와 국세청은 UBS 쪽에 미국에 거주지를 둔 자국 고객 5만2천 명에 대한 신상정보를 넘겨달라고 요청했다.

스위스와 미국 사이에 오랜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미 행정부는 UBS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하는 한편, 형사소추 카드까지 흔들며 목을 죄어왔다. 형사처벌은 UBS에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암울한 스위스 금융계에 또다시 검은 먹구름이 드리워진다. 2008년과 2009년, 독일과 프랑스 정부가 스위스와 리히텐슈타인 은행에서 유출된 탈세 혐의 고객 수천 명의 명단과 계좌 내역을 확보한 것이다.

   
거센 전방위 공세에 스위스 당국은 결국 무릎을 꿇는다. 스위스 정부는 UBS에 대한 소송 취하를 대가로 미국 국세청에 2009년 2월과 2010년 여름, 두 단계에 걸쳐 UBS 고객 4500만 명에 관한 신상정보를 넘겨주기로 약속했다. 2009년 3월에는 스위스를 조세천국 블랙리스트에 포함시키겠다는 뜻을 철회하는 조건으로 OECD가 요청한 DTA 개정에도 응하기로 결정한다. 이후 스위스는 조세포탈뿐 아니라 조세회피에 대해서도 국제 공조를 명시한 새 조세협약 체결을 위해 30여 개국과 협상했다. 이로써 오랫동안 스위스 금융계의 대명사로 통하던 철통같은 은행 비밀주의의 명성에도 금이 간다.

스위스 금융 비밀주의에 대한 공격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세기 초 정부와 금융계가 느슨한 조세제도와 엄격한 은행 고객 비밀보장 원칙을 내세워 스위스를 조세천국화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면서 비밀주의를 둘러싼 잡음은 끊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2009년까지 스위스는 비교적 효과적으로 반대 세력을 저지해왔다. 2010년 1월 OECD 사무총장이 “우리는 지난 10개월여 만에 수십 년간 얻어낸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어냈다”(2)고 자평한 것도 한편으로는 스위스가 그동안 얼마나 성공적으로 비밀주의를 고수해왔는지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스위스가 이처럼 저자세로 나오는 배경은 무엇일까? 스위스가 무릎을 꿇기까지는 크게 네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먼저 선진국 전체에 금융위기가 발생하면서 스위스가 주요 강대국의 공동 표적이 된 점을 꼽을 수 있다.  그 결과 스위스는 예전처럼 선진국 간 분열을 조장하는 전략을 펼치기 어려워졌다.

다음으로 미국 국세청이 결정적인 탈세 혐의를 포착한 대상이 UBS라는 점이다. UBS는 스위스 최대 은행으로, 금융권 전체 실적의 40%를 차지한다. 여기에 2008∼2009년 UBS가 파산 위기에 직면하면서 공공기관, 특히 미국 기관으로부터 대대적인 구제금융을 받은 것도 스위스가 한발 물러나는 데 단초를 제공했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미국 은행에 투입한 것과 맞먹는 규모의 (최소 750억 달러(약 580억 유로)에 달하는) 막대한 자금을 지원받은 UBS로서는 미국의 고객 정보 제공 요청을 무조건 무시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난 승리의 기쁨에 도취된 나머지, 대응한 것도 문제였다. 2008년 3월 여전히 한스루돌프 메르츠 재무장관은 “은행 비밀주의를 공격하는 자들은 분명 큰코다칠 것”(3)이라고 호언장담했다. 결국 스위스 당국은 준비에 만전을 기하지 않았고, 각국의 압박 공세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만다.

그렇다면 스위스의 양보가 많은 논평가들이 지적하듯 ‘은행 비밀주의의 종언’을 의미하는 것일까? 적어도 세 가지 이유를 들어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먼저 스위스 영토 내에서 조세회피는 여전히 조세포탈과 구분된다는 점이다. 이는 곧 앞으로 스위스 내에서는 자국보다 다른 나라가 더 폭넓은 조사권을 갖게 됨을 뜻한다. 하지만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법적 상황이 앞으로도 가능할 것이라고는 장담하기 힘들다. 현재로서는 좌파 진영 내에서조차 그다지 비판의 목소리는 높지 않다. 사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민주주의 국가’인 스위스에서 국민은 그동안 법에 명시된 평등 원칙이 공공연히 위배되는 것을 묵인하거나 심지어 용인해왔다. 대표적인 예가 추계과세제도(Presumptive Taxation·스위스에서 근로소득이 발생하지 않는 외국인 거주자를 대상으로 과세표준을 추계해 계산하는 것을 허용하는 제도로, 본래 개인의 국외 소득 및 자산을 확인하는 과세행정 업무를 줄이고 은퇴한 개인이 황혼기를 스위스에서 보내도록 유인하기 위해 도입됐지만 조세회피에 남용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다. 스위스에 거주하는 외국인 자산가 가운데는 이 제도 덕에 세금을 거의 내지 않다시피 하는 이가 5천 명이 넘는다.

다음으로 스위스는 EU의 핵심 요구 사안인 무조건적인 과세정보 교류에서는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다. 원칙상 DTA 개정안에 따르면, 조세회피를 포함해 해당 국가가 과세정보를 요청해오면 상대국은 반드시 응해야 한다. 하지만 앞으로 원칙과 현실은 다르게 적용될 공산이 크다. 스위스 정부가 조세협약 이행 법안에 여러 예외 규정을 마련해두었기 때문이다. 만일 스위스가 자국과 요청국 사이의 향후 힘겨루기에 따라 예외 규정을 모두 적용할 수 있게 된다면, 각국은 사전에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있어야만 스위스 은행에 국제 공조를 요청할 수 있을 것이다.(4)

마지막으로 스위스의 금융 비밀주의를 둘러싼 전쟁이 아직 끝난 게 아니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물론 앞으로 국제 역학관계의 변화에 따라 스위스의 정치 지도층이 더 많은 양보를 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과거처럼 비밀주의의 빗장을 걸어 잠그는 쪽으로 다시 문제를 봉합할 수도 있다. 실제로 스위스는 이를 위해 총력전에 나서고 있으며, 어느 정도 성과를 일궈냈다. 스위스는 최근 독일 및 영국 정부와 스위스은행연합(ASB)이 마련한 안을 두고 협상에 나서기로 합의하면서, 그동안 비교적 일치단결하던 유럽 주요 상대국 간의 동맹 전선에 균열이 일어나고 있다. 스위스 정부가 외국인이 자국에 예치한 자금에 세금을 매겨 추징한 뒤 해당 출신국에 그 돈을 지급하는 대신, 계속 은행 비밀주의를 유지하고 자본 소유자의 익명성을 보장받는 것이 이번 협상의 주요 골자다. 반대급부로 스위스는 상대국인 독일과 영국이 무조건적인 과세정보 교류안을 포기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 상황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든지, 스위스 금융계를 뒤흔든 일련의 사태로 지난 수십 년간 주기적으로 등장하던 은행 비밀주의에 관한 여론몰이용 신화 한 가지는 깨진 것이 분명하다. 은행 비밀주의의 빗장을 푸는 순간 스위스에 재앙이 발생할 것이라는 신화 말이다. 2000년 주요 경제 일간지 중 한 곳은 “은행의 고객 비밀보장 원칙이 약화되면 스위스 금융산업의 존속이 위태로울 수 있다”고 경고의 목소리를 높였다.(5) 이듬해 스위스의 저명한 경제학자 장크리스티앙 랑블레도 한 연구 조사를 통해 “은행 비밀주의의 약화가 파국적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수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국가를 대폭 손질’해야 할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심지어 “제네바를 폐쇄해야 할지도 모른다”(6)는 지적까지 나왔다. 2009년 2월 한 은행권 인사는 “조세회피와 조세포탈의 경계가 사라진다면 스위스 금융 허브의 규모는 ‘반토막’이 나고 말 것”이라고도 경고했다.(7)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스위스 은행 비밀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이래 가장 심각한 위기 국면을 맞고 있지만, 금융 및 자산관리라는 핵심 분야는 여전히 호조세를 누리고 있다. 2009년 유로화 대비 스위스프랑화의 강세에 힘입어 스위스 은행 내 외국인 예치금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증가했고, 순유입액은 무려 1200억 스위스프랑에 육박했다.(8) 그뿐만이 아니다. 여러 지표를 감안할 때 2010년도 스위스 은행권으로서는 만족할 만한 해로 기록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글•세바스티앵 귀엑스 Sébastien Guex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각주>
(1) 조세천국 명단에 포함된 국가는 자본 유통이 제한되거나 금지된다. <노이에 취르허 차이퉁>(취리히, 2009년 3월 7~8일자 기사) 참조.
(2) <노이에 취르허 차이퉁>, 2010년 1월 29일.
(3) 스위스 하원, 2008년 3월 19일, www.parlament.ch/F.
(4) 브루노 거트너, ‘Bank secrecy: Switzerland circles the wagons’, <The Justice Focus>, 제6권, 2010년 10월, 4~5쪽 참조, www.taxjustice.net.
(5) 장크리스티앙 랑블레, 알렉산더 미하일로프, ‘스위스 제네바 레만 금융계의 비중’, 크레아연구소, 로잔, 2001년, 50쪽 및 52쪽 참조.
(6) <르탕>, 2009년 2월 24일.
(7) <노이에 취르허 차이퉁>, 2010년 1월 15일, <레브도>(로잔), 2010년 4월 22일.
(8) <노이에 취르허 차이퉁>, 2010년 11월 18일.


[박스기사] 1907년에 이미…

20세기 초부터 스위스의 은행 비밀주의를 둘러싸고 프랑스를 비롯한 각국의 비난과 공격이 끊이지 않았다. 다음의 세 가지 예가 대표적이다.

1907년 7월 1일 조제프 카요 프랑스 재무부 장관은 하원에서 다음과 같은 협박성 발언을 한다. “내가 맡은 협상이나 계획에 대해 그리 크게 떠벌리고 다니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증권을 한 아름 안고 가벼운 걸음으로 스위스로 향하는 프랑스 국민이 있다면, 얼마 못 가 당황스러운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절대 놀라지 말라고 경고해두고 싶다. 단언컨대 세무정보 교류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이기 때문이다. 며칠 안에 협정이 마무리될 가능성이 크다.”(1) 하지만 카요 장관의 계획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은행의 고객 비밀 보장은 국제적 교리가 아니다.”(2) 1923년 10월 국제연맹에서 프랑스 과세기관 대표자의 지지를 등에 업은 벨기에 국세청 청장이 스위스로부터 세무 정보 교류에 관한 합의를 얻어내기 위해 맹공에 나섰다. 하지만 곧이어 공격은 교착상태에 빠지고 만다.

1932년 에두아르 에리오 정부가 스위스 비밀주의를 향한 일격에 나선다. 스위스 주요 은행의 파리 지점을 수색해, 이들 은행의 도움으로 탈세를 한 프랑스 자국민(모두 고위층 인사였다) 1천 명 이상의 명단을 압수한 것이다. 물론 스캔들 규모는 컸다. 그렇다고 작전 결과가 기대 수준에 못 미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사건은 스위스 당국이 1934년 법안 채택을 통해 은행 비밀주의를 더욱 강화하는 역효과만 낳았다. 더욱이 이 사건으로 1932년 12월 에리오 정부가 실각한다.(3)

<각주>
(1) 로제르 게랭, <탈세 단속을 위한 국제 협약>, 지아르 에 브리에르 출판사, 파리, 1910년, 26쪽 인용.
(2) 크리스토프 파르케, ‘조세회피 방지 대책: 양차 세계대전 사이 국제연맹의 실패’, <에코노미 폴리티크>, 제44호, 2009년, 93쪽 인용.
(3) <경제와 인간>(플로랑스 부리용 외 공저·비에르 출판사·보르도·2006)에 게재된 논문 ‘탈세 및 바젤상업은행 스캔들: 1932년 12월 에리오 정부 실각 원인에 대해’, 45~55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