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본은 없었지만 플롯이 있었다
[Spécial 혁명, 연쇄와 징후]
튀니지 민중은 억압, 저항, 진압의 전통적인 악순환을 넘어서는 데 성공했다. 이들의 승리를 가능하게 한 조건은 무엇이었을까?
지난해 12월 17일, 튀니지 내륙 지역 시디부지드에서 자신의 몸을 불사른 스물여섯 살 청년의 비극적인 죽음이 시민혁명의 불씨가 된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처음은 아니다. 2010년에만 분신으로 삶을 마감한 젊은이가 그 말고 두 명 더 있었다. 3월 3일 해변 도시 모나스티르에서, 11월 20일 남서 지역 메틀라우이에서였다. 지난해 12월 말, 튀니스 병원 중화상 치료센터 홈페이지에 실린 연구 결과(1)를 보면 전체 환자 중 ‘분신 자살 기도’를 한 경우가 15.1%나 된다고 한다. 연구자들은 분신을 “비범한 폭력”으로 묘사하면서, “젊은이들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에 대응하는 성격이 있다”고 분석했다. “이 젊은이들은 대부분 그랑 튀니스(수도권 지역), 특히 사회적·경제적으로 열악한 대도시 근교(에타다멘, 이븐 할둔 지역)나 북서 농촌 지역 출신이다.” 이 연구는 1998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원문 보기>>
불씨는 계속 타고 있었다
부아지지는 지금까지 절망적인 길을 택한 수많은 젊은이 중 한 명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그 청년은 오래전부터 시디부지드 남쪽 비탈에서 살아온 부족 출신이다. 부아지지라는 이름은 ‘자랑스럽다’는 뜻의 ‘아지즈’(Aziz)에서 따왔다.” 퇴직교사이며 국제앰네스티 회원으로 반체제 활동에 참여해온 무하마드 케밀리가 말했다. 프랑스인들이 튀니지에 발을 들여놓기 훨씬 이전부터(1881~1956년 프랑스 보호령) 형성돼온 부족들은 여전히 튀니지 각 지역에서 큰 사회적 영향력이 있다. 시디부지드, 카세린, 탈라에서 벌어진 일 역시 이 부족 중심의 사회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북부 지역(비제르트)이나 사엘(스팍스와 수스)처럼 상업 전통이 강한 지역 주민의 성(姓)이나 부족에 대한 강한 소속감에서 전통적인 직업조합의 영향력을 실감할 수 있다.
케밀리는 “부아지지는 시 공무원인 여성에게 뺨을 맞고 노동 수단(행상 손수레)을 빼앗겼다. 이곳 전통으로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한 젊은이가 당한 모욕은 부족 전체의 공분을 샀다. 12월 19일 시디부지드에서 청년들이 경찰과 충돌했다. 그 여파는 곧 멘젤, 부자이엔, 멕나시, 르구엡, 마주나, 자베스 등 인근 도시로 확대됐다.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됐다. 시위가 벌어지고 경찰의 폭력적 진압과 대규모 연행이 이어졌다. 다시 항의 시위가 벌어지고 경찰과 충돌이 반복됐다. 결국 진 엘아비딘 벤 알리 대통령이 텔레비전 화면에 모습을 드러냈다. 12월 28일 수백만 명의 튀니지인이 그의 담화를 지켜봤지만 외신은 침묵했다. 오직 <알자지라> 방송만이 12월 24일부터 튀니지 사태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메틀라우이는 인구 5만 명의 광산 도시다. 가프사 인광석 광산에 불어닥친 구조조정의 여파로 실업률이 급등했다(튀니지 노동총연맹(UGTT) 지역지부에 따르면 총실업률이 40%에 이른다). 25년 사이 광산 전체 인력의 4분의 3이 줄어, 남은 인원이 5천 명에 불과하다.(2) 지역경제가 파괴되자 지난 15년 전부터 이탈리아로 향하는 불법 이민자 수가 급격히 늘었다.(3) 메틀라우이의 뒤를 이어 카세린과 탈라에서도 소요사태가 발생했다. 작은 도시에서 폭발한 분노가 사회적 저항으로 전화하며 내륙 지역에서 서부 지역까지 모든 소외된 지역으로 번져갔다. 인터넷 사이트는 정부 검열로 ‘Error 404’가 첫 화면을 장식했다. 정권은 아직 정보통신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벤 알리의 오만, 또 한 번의 분신
튀니지 남서부, 관광지로 유명한 토죄르까지는 아직 소요사태의 여파가 미치지 못한 상황이었다. <프랑스24> 채널이 뒤늦게 보도에 나섰다. 파리 스튜디오에서 아나운서가 아랍어로 ‘폭력 상황’을 보도했다. 40대쯤 되어 보이는 작은 식당 주인 유세프가 텔레비전 화면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고학력 젊은이들의 실업이 문제다. 전산학 학사를 딴 딸아이는 지금 수스의 한 호텔에서 서빙을 보고 있고, 경영한 석사를 딴 딸아이는 일이 없어서 집에 있다. 계속 이런 식으로 가다간 큰일이다!”
고학력 청년실업 문제야말로 시디부지드의 작은 불씨를 전국적 폭발로 전화시킨 첫 번째 요인이었다. 물론 부아지지의 최종 학력은 고졸(집안 사정으로 대학 중퇴)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문맹률 50%가 넘는 지역이 존재하는 튀니지에서 고등학교 졸업장은 신성한 것이다. 1990년대부터 튀니지 정부는 젊은이들에게 고등학교 졸업 자격 취득과 대학 진학을 권장했다. 튀니지 국립통계청(INTS) 자료에 따르면, 2010년 19~24살의 3분의 l이 학생이었다. 튀니스대학 경제학 교수 마무드 벤 롬단(4)은 “초등·중등 과정 선발시험이 폐지되고 바칼로레아(고등학교 졸업 자격시험) 합격률을 높이기 위해 평균 25% 가중치가 주어졌다. 그 결과, 2010년 전체 응시자의 반 이상이 중간 이하의 점수를 받았음에도 바칼로레아 합격자가 70%를 웃돌았다”고 했다. 1980년 합격률은 35%였다.
고학력 실업자의 깊은 분노
신분 상승을 하려면 학위를 따야 하며, 출세를 하려면 성실함과 재능을 갖춰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이미 하비브 부르기바 정권(1956~87) 시절부터 유행했다. 그 결과 대량의 고학력자들이 배출됐다. 벤 롬단 교수가 계속 설명한다. “2008~2010년 매년 약 7만5천 명의 고등교육 학위 취득자들이 노동시장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1980년대에는 8천 명에 불과했다.” 공식 보고서에서는 이런 진학 열풍을 튀니지 사회의 역동적 측면으로 소개하지만 실제로는 실업 상태를 잠시 연기하는 방편이 될 뿐이다.
2000~2008년, 튀니지는 연평균 4~5%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전체 국내총생산(GDP)의 8%를 차지하는 관광산업 덕분에 튀니지 경제는 번영을 구가하는 듯한 인상을 줬다(농업 10%, 서비스업 54%, 제조업 35%). 그러나 튀니지 경제의 건강한 외관 뒤에는 심각한 불평등이 도사리고 있다. 최근 한 연구(5)에 따르면 2008년 15~29살 실업률은 31.2%에 달했으며, 고학력 청년 실업률은 22%에 달했다(튀니지 전체 실업률 14%). 또한 전체 실업자의 4분의 3(72%)이 30살 이하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고학력자 모두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려면 경제성장률이 최소한 8%는 돼야 한다고 했다.
튀니지 노동총연맹이 시디부지드주에 대해 내놓은 보고서(6)에 따르면, 문맹률이 여전히 60%에 달하는 이 지역의 바칼로레아 합격률은 95%에 가깝다. 토죄르 지역노조 지부장 무함마드 알리 간담은 “정부는 젊은이들과 그 부모들에게 희망을 주입했다. 학위를 취득한 새로운 세대들은 장사를 하거나 농사를 짓는 것 말고 다른 일을 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들의 꿈은 쉽게 좌절되고 만다”고 했다.
가장 먼저 시위의 물결에 휩싸인 탈라, 스베이틀라, 시디부지드, 르구엡, 두즈, 카이루안 같은 도시들은 모두 실업(실업수당 없음)과 환멸이 지배하던 곳이다. 부아지지의 분신 이후, 지난 1월 7일 처음으로 카세린에 군대가 출동했다. 공식발표에 따르면 총사망자 수는 14명이지만 국제인권연맹(FIDH)은 20명으로 보고 있다. 경찰의 폭력적 진압 장면과 증언이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확산됐다. ‘저격수’들이 인근 고층빌딩에 숨어 쌍안경을 든 장교들의 명령에 따라 시위대 속의 젊은이들을 조준사격한다는 루머가 떠돌았다.
경찰의 난폭한 진압 방식은 시위를 격화시킨 두 번째 원인이었다. 1월 7일과 8일 분노가 폭발했다. 튀니지인들은 빈민가의 젊은 시위대 앞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지난 수십 년 전부터 고압적인 태도로 시민을 깔보던 부패한 경찰에 대한 오래된 적개심이 폭발했다. 케밀리는 “이번 사태는 정치적 성격을 띠어가고 있다. 튀니지 전체가 들고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주체는 누구인가?
우선 청년들이 있다. 튀니지 인구의 40%가 25살 미만이다. 고학력 실업자뿐 아니라 바칼로레아조차 취득하지 못한 젊은이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25살 미만 전체 400만 명 중 50만 명만이 학생이다. 이 세대가 경험한 정치체제는 벤 알리의 독재정권뿐이다. 정보기술(IT)에 익숙한 이들은- 튀니지인 3명 중 1명이 인터넷을 사용한다-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등을 통해 자유의 공간을 구축해왔다. 스팍스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토픽 타뫼르 드리스의 설명이다.
부모와 조부모 세대도 시위대 물결에 합류했다. 이들 역시 높은 실업률에 시달리며 자식들 학비 대느라 오랜 기간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처음에는 서민 중심으로 시작된 시위가 점점 다른 사회계층으로 확산되었다. 특히 1990년대 초부터 경제 발전의 혜택을 받은 중산층이 시위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교수, 변호사, 상인, 금융인, 의사들이 거리로 나섰다. 새로운 계층의 합류는 곧 새로운 지역으로의 시위 확산을 뜻했다.
튀니스, 수스, 스팍스, 가프사, 가베스 등 대규모 도시들도 시위 물결에 합류했다. 1월 12일 스팍스의 총파업 승리가 결정적 계기가 됐다.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 상인, 금융인들 역시 아쉬울 게 없었다. 이들은 부르기바 정권과 초기의 벤 알리 정권에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벤 알리와 그의 부인 레일라 트라벨시(벤 알리의 두 번째 부인. 1992년 결혼)의 가족 마피아 조직에서 배제된 것에 불만을 품어온 터였다. “1월 8일 수스의 사업가 대표가 카르타주 대통령궁을 찾아가 벤 알리에게 권력 이양을 요구했다. 수스는 부르기바 정권 때와 마찬가지로 벤 알리의 정치적 근거지나 다름없다.” 케밀리의 설명이다.
지식인, 민중의 현실에 눈뜨다
이 운동에 정치적 방향을 제시해줄 주체는 누구일까? 1987년 11월 7일, 수백만 명의 튀니지인이 지켜보는 앞에서 벤 알리의 취임식이 열렸다. 그는 “튀니지는 복수정당과 다양한 대중조직에 기초한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성숙한 국가가 되었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취임 초기 몇 달간의 ‘봄’은 오래가지 못했다. 시민의 사회적·정치적 참여 가능성은 차단됐다.
벤 알리는 부르기바 전 대통령이 1934년 창당한 네오데스투르당(1964년 데스투르사회당(PSD)으로 바뀜)을 전신으로 한 민주헌정연합(RCD)을 창당한 뒤 ‘합법적인 야당’만을 허용하는 복수정당제도를 도입한다. 튀니지인들은 이를 두고 ‘무늬’만 복수정당이라고 말한다. 그 결과 사회민주주의운동(MDS)이나 에타지드운동(‘부흥’) 소속 후보들이 국회에 진출했다. 그러나 진보민주당(PDP) 같은 몇몇 정당들은 “위선적인 선거놀음”이라고 비판하며 보이콧을 선언했다.
이들 외에 이른바 ‘불법 조직’으로 낙인찍힌 다양한 정치 조직이 존재했다. 노동조합운동은 UGTT에 의해 독점된 반면, 1970~80년대 튀니지 총학생연맹(UGET)을 중심으로 조직적이고 활발한 활동을 펼치던 학생운동 조직은 몇 년 전부터 지하에서 활동을 지속해왔다.
군의 중립, 그리고 총파업
그 밖에 중요한 정치적 주체로 시민사회와 저항 네트워크(라디오, 음악밴드, 각종 동아리), 인권단체들이 존재한다. 국제앰네스티처럼 스스로를 ‘비정치적’이라고 규정하는 단체도 있지만 대부분의 단체는 과거 부르기바 정권과 그 뒤를 이은 벤 알리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들에 의해 결성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튀니지인권연맹(LTDH)이다. 1976년 결성된 이 단체는 아프리카와 아랍에서 가장 긴 역사를 자랑한다.
그리고 군대가 있다. 1956년 부르기바가 창설한 튀니지 군대는 ‘정치 문제’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철칙을 지켜왔다. 튀니지군의 병력은 3만 명(그중 육군 병력 2만7천 명) 정도에 불과하다. 반면 경찰 병력은 벤 알리 정권하에서 3배 증가했다. 경찰과 대조적으로 튀니지 ‘공화국군’은 상대적으로 국민 사이에 좋은 평판을 유지해왔다. 1957년 공표된 법은 군인의 정치 조직 가입을 엄격히 금지했다. 튀니지 역사 속에서 심각한 소요사태가 발생했을 때- 학생운동(1972), 빵 폭동(1984), 광산노동자 파업(2008)- 군은 진압작전에 투입되지 않았다. 군의 중립성은 ‘시민에 대한 발포’를 공식적으로 거부함으로써 1월 12일 군복을 벗어야 했던 라시드 암마르 군 최고사령관 덕분에 더욱 빛을 보게 되었다.
1월 10일 오전 가프사. UGTT 지역지부 사무소에서는 30명 정도의 조합원들이 설전을 벌였다. 1월 6일부터 이들은 지역지부가 시위대를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UGTT 중앙지부는 그들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가프사 지역지부장 아바시 아마라는 부정을 일삼고 벤 알리 정권에 협력하는 인물로 알려졌다. 스팍스, 토죄르, 수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같은 날, 벤 알리가 두 번째로 담화를 발표했다. 그는 “사회적 분노를 악용하는 테러리스트들”을 비난했다. 그러나 시위는 더욱 거세질 뿐이었다. 벤 알리는 국민에게 몇 가지 약속을 함으로써 사태를 무마하려고 했다. 그는 2012년까지 “30만 개 일자리를 새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케밀리가 화가 나서 쏘아붙였다. “1990년부터 줄곧 들어오던 얘기다. 이젠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지금 일자리가 문제가 아니다.”
학생운동이 격화될 것을 우려한 벤 알리는 모든 학교를 폐쇄해버렸다. 몇 시간 뒤, 결국 UGTT도 행동에 나섰다. 중앙지부는 다음날로 예정된 스팍스, 카이루안, 토죄르 지역지부의 총파업과 l월 14일로 예정된 튀니스의 총파업을 허가했다. 에타지드의 한 운동원은 “그 지역들은 원래 반골이다. 중앙지부의 허락이 없었더라도 알아서 파업을 강행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날 저녁, 튀니스의 서민 지역(에타다벤과 므닐라)에서 처음으로 시위가 벌어졌다.
스팍스의 총파업이 성공하면서 사태는 결정적 국면에 접어들었다. 금융 자본가가 지배하는 오래된 상업항 스팍스는 중산층 비율이 높은 도시다. 튀니지의 중요한 관광도시 수스에서도 파라트 하셰드 병원 직원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2008~2009년 경제위기로 고용불안에 시달리던 숙박업 종사자들도 시위에 합류했다. 그 전날 경찰은 시위 부상자들의 병원 출입을 통제했다.
벤 알리, 때는 이미 늦었다
다시 한번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벤 알리는 1월 13일 세 번째 담화를 발표한다. 그사이 기가 한풀 꺾인 모습이었다. 그는 “언론의 자유와 야당에 대한 권리 부여”를 약속하고 내무부 장관을 경질했다. 2014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했다. 그러나 때는 너무 늦었다. 정치적 저항이 혁명으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세 번째 화약에 불이 붙었다. 지금까지 참아왔던 트라벨시 가족 마피아에 대한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초반에는 몇몇 지식인과 정치 활동가들에게만 알려졌던 트라벨시 일당의 비리는 갈수록 일반 시민 사이에서도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민영화를 이용한 기업 독점(1995, 2005), 언론사를 포함한 각종 국부(궁전 등) 강탈도 모자라 자동차 판매 대리점, 슈퍼마켓, 은행, 항공사, 통신회사까지 차지했다. 15년 전부터 트라벨시의 측근들이 튀니지 경제의 모든 부문을 약탈해온 것이다.
1월 14일, 생각지도 못한 일이 발생했다. 벤 알리가 피신한 것이다. 혁명이 국가지도자를 몰아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첫 며칠은 혼돈 그 자체였다. 탄압과 검열에서 해방된 정치 조직들이 갑자기 정치무대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지금까지 지하에서 활동하며 당파 싸움에 골몰해 있던 이 조직들은 이제 서로 협조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위대가 쉽게 진정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1월 18일 진보민주당의 한 운동원이 말했다. “나무 꼭대기를 자른다고 뿌리까지 뽑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여기서 무하마드 케밀리가 한 말(7)을 다시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튀니지 민중은 한 번도 자신의 운명을 손아귀에 쥐어본 적이 없다. 프랑스 식민통치(1881~1956) 때에도, 독립 당시(1956)에도 부르기바가 벤 알리에 의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을 때(1987)에도 그랬다. 만약 이번 기회에 튀니지인들이 자신의 손으로 벤 알리를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면 엄청난 자긍심을 갖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찾은 존엄성은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
글•올리비에 피오 Olivier Piot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번역•정기헌 guyheony@gmail.com
<각주>
(1) 아지자 오트마나 병원(튀니스) 성형외과 화상 치료센터 연구 결과(1998년), www.tunivisions.net.
(2) Karine Gantin & Omeyya Seddik, ‘튀니지 광산 노동자들의 반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8년 7월, ‘튀니지: 가프사의 불공정한 판결’, www.mondediplomatique.fr, 2009년 1월 12일.
(3) 2009년 4월, 리비아 근처 해변에서 메틀라우이 출신 젊은이 15명이 사망했다.
(4) 마무드 벤 롬단, <튀니지: 국가, 경제, 사회. 정치적 자원, 입법, 사회규제>, Publishd, 파리, 2011.
(5) Lahcen Hacy, ‘높은 실업률 대책으로서의 불안정 고용. 마그레브 지역의 고용 문제’, <Cahier Carneigie>, Carnegie Middle East Center, 베이루트, 2010년 11월 15일.
(6) <시디부지드의 지역 발전: 신화와 현실 사이>, UGTT 보고서(아랍어), 튀니스, 2010년 8월.
(7) ‘벤 알리를 무너뜨린 일주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홈페이지, 2011년 1월 19일. 무하마드 케밀리의 발언은 ‘Karim’이라는 가명으로 인용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