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같음'을 향한 '다른 갈망'들

2008-12-01     소니아 다양-에르즈브렝 | 파리7대학 명예교수

 1960년대 말부터 서구 여러 나라에서 여성운동이 발전하면서, 1975년부터는 국제적으로 이를 인정받기 위한 노력이 시작됐다. 국제연합UN은 멕시코에서 첫 여성 국제회의를 개최하고 1975년을 ‘여성의 해’로 선포했다. 이를 계기로 여성운동이 확장되고, 조직화되며, 세계화된다. 1980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제2회 대회가 열렸고, 냉전 종식에 대한 전망과 함께 제3회 대회가 1985년 나이로비에서 개최돼 전 지구적인 페미니즘이 탄생된다. 그로부터 10년 뒤, 1995년 베이징 국제회의는 그 새로운 전환점이 된다. 각국 대표들은 최종 선언에서 “전 세계 모든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고 그들의 다양성과 그들의 역할과 삶의 여건을 고려해 세계의 모든 여성들을 위한 평등, 발전, 평화의 목표를 진일보시키려는 결심을 확고히 한다”고 밝혔다. 여성들은 각 영역에서 자신들의 존재감을 천명할 권리에 대한 공식 담론을 이끌어냈다. 이에 따라 빈곤, 교육, 훈련, 무력 분쟁, 경제, 권력 및 의사결정, 제도적 장치, 인권, 미디어, 환경, 여아 등 12개 주요 관심부분의 전략 목표와 행동 계획으로 구성된 베이징행동강령이 채택됐고, 성이 더 이상 섹스가 아닌 젠더임을 천명하였다. 성별 간의 관계가 생물학적인 면에서 파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구조에서 비롯한 결과인 만큼 남녀 관계를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을 편 것이다.

이어 세계은행은 1994년 여성들을 경제 및 사회 발전, 보건, 교육, 가족계획, 연수, 특히 농업 부분에 참여시켜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에 따라 국제기구들은 여성들이 요구해온 것들을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우선적으로, 여성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소속 집단에 구성원으로 인정받는 일이었다. 이 시기에 여성과 ‘젠더’ 문제를 다룬 연구결과 및 홍보물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고, 점차 제도적인 인정을 받게 됐다. 마침내 아주 다양한 목적을 지닌 여성 단체들이 도처에 생겨났고, 그 목표는 주로 특정 사안의 해결책 연구에 집중돼 있었다. 1998년 3월 31일, 세계 여성들을 대륙과 국경을 초월해 그들의 이해관계를 한데 묶어 여성들의 요구와 주장을 범지구적으로 펼치자는 세계여성행진Marche mondiale des femmes이 프랑스에서 발족돼, 지금까지 다채롭게 활동 중이다.

세계여성행진측은 여성 운동단체들과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가난과 폭력의 퇴치를 꼽는다. 1970년대 페미니스트 운동의 슬로건 중 하나는 ‘사생활이 곧 정치다’였다. 가사, 가족관계, 몸과 성性의 관계들을 거론하며, 사생활을 무대 전면에 내세웠고, 사생활에 정치적 의미를 부여했다. 또 시민권을 비롯해, 공동체와 관련된 결정권 및 참정권도 요구했다.

여성 계층 분화와 상호 이질적 목표

이런 전 방위적 변화의 과정에 금세 문제가 나타났다. 이론적인 토론 주제들도 어느새 정치적인 문제로 둔갑한 것이다. 국제 조직의 담론도 초기 서구 페미니스트 운동의 그것처럼 “모든 여성이 지배당하고 있으니, 결국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 같이 갈 수밖에 없다”고 봤다. 그렇지만 블랙 페미니즘1이나 혹은 포스트 식민주의2 사조에 속했다가 다양한 사조로 거듭난 미국, 아프리카, 인도에서는 그러한 관점에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여성들 간에 존재하는 차이와 경계, 그리고 사회 계층, 인종, 식민지 과거사 등과 같은 차이를 당연히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실제로 지난 수십 년 동안 여성들 간에도 다양한 분화가 형성돼왔다. 한편에서는 경제적인 세계화가 상황을 유례없이 약화시켰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단체, 기업, 미디어 분야에서 권좌에 오른 엘리트 여성들이 출현했다. 후자의 경우 모든 여성의 운명을 개선할 준비를 하는 선도적 지도자들로 간주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정작 그들이 말을 걸고 싶어 하는 여성들로부터 동떨어져 있을 수도 있다.일부 여성 단체와 국제적 페미니즘의 확장에 힘입어, 최근 각 국가의 정부차원에서 여성문제에 관심을 갖는 ‘국가 페미니즘’이 강화됐다. 일부 국가들은 여성들을 위한 차별 투쟁에 우려를 표명했다. 특히 몇몇 국가들은 여성운동가들이 차별 투쟁을 빌미로 간혹 정부 부처의 신설을 이끌어 내는 데 우려를 내비친다. 왜냐하면 부서 신설의 주된 목적중 하나는 현대적 투쟁 방식을 제공하는 동시에 미디어에서 통용되는 표준을 따르고, 다른 하나는 특권 그룹에 속한 여성들의 요구와 이권에 부응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 페미니즘의 한 예로, 2003년 10월 모로코의 모하메드 6세는 무다와나Moudawana(여성의 권리를 가로막았던 모로코의 가족법)의 개혁을 10여 개 여성 단체의 도움을 받아 가족법3으로 바꿨다. 그러나 이 법은 모로코 여성들의 지위를 개선하긴 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엘리트 여성들의 삶의 여건을 소외 계층 여성들의 그것보다 훨씬 더 개선했다. ‘국가 페미니즘’은 모로코나 이집트 등지에서 무슬림 페미니스트들의 열망에 부응하듯 ‘뉴 페이스’들을 규합하고 있다. 그 결과, 청원을 책임진 여성들, 즉 무르시다트Murshidat 단체가 형성됐다. 이 단체의 역할에는 한계가 있다. 모로코의 무르시다트들은 빈민가 여성들이나 최하위 빈곤 지역에 가서 코란을 가르치고, 이교도에 맞서 투쟁할 것을 설파하는 책무만 띠고 있을 뿐, 빈곤 퇴치 투쟁을 외치지는 않는다.


‘여성’을 배척하는 여성운동

‘국가 페미니즘’의 모호한 사례는 또 있다. 인도에서 벌어진, 여성 태아의 낙태 반대투쟁이 그것이다. 소니아 간디 부인이 인도에서 이끈 공식 캠페인은 낙태를 ‘태아 살인’으로 규정하고 있다. 여아를 태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결정짓는 것은 여성들을 탄생과 동시에 차별의 대상으로 삼는 방증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일부 신문 기사4에서는 ‘계획범죄’라고 일컫는 낙태에 대해 ‘살인’과 유사한 용어로 써서, 모든 낙태를 규탄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인도 여성 운동은 이 문제에 공통된 견해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패러독스’는 프랑스에서 ‘회교도적’이라고 치부되는 히잡 사건과 유사하다. 주변 남학생들에 대한 압박으로부터 여학생들을 보호하겠다는 구실로, 공립학교에서 종교적인 복장 착용을 금지한 정부 결정5은 여성들을 자율적인 존재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며, 그녀들이 공교육에 접근하는 것을 차단할 위험을 안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진행되고 있는 ‘반 테러리즘’ 전쟁을 사람들은 여전히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을 구명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말한다. 이 전쟁을 두고 서구를 비롯한 세계 각지의 여성 단체들 간에 다양한 견해차가 있다. 2002년 9월 미국의 팔레스타인계 여류 인류학자 릴라 아부‒루그호드6는 “무슬림 여성들은 정말 구원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라고 자문했다. 그녀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의 승리가 여성을 해방시키고, “그들에게 음악을 들을 수 있게 하고, 딸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게 했다”고 주장한 로라 부시의 공식 선언에 응수한 것이었다. 반대로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한 후, 아프가니스탄 사회가 병영화되면서 여성들이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7 흔히 이 여성 운동들은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시민의 서구적 옷차림을 금지한 것에만 초점을 맞추려들 뿐, 굴부딘 헤그마티아르의 수하들과 다른 부족장들이 자행하는 강간에 대해선 지나치다 싶게 침묵하기 일쑤다.

남북 및 동서간 이질감 극복할 공통의 패러다임 필요

한편 여성운동이 내세우는 ‘보편성’이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대체로 ‘북반구Nord’, 즉 북미와 북유럽 및 그 밖의 나라에서 쓰이는 표준과 가치를 보편성으로 치부한다. 그러나 ‘북반구’에서 통용되는 개념에 이의를 제기한 것부터 한층 실용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다각도의 개념들이 충돌하고 있다. 이를테면 아프리카 여성을 연구하는 잡지 〈젠다Jenda〉는 유럽과 미국의 경험에만 토대한 개념과 분석 방식의 보편화를 문제 삼았다.

의견 일치와 관련해서도 또한 분쟁의 소지가 있다. 전 지구적인 여성 행진을 전개할 당시, 참가자들은 빚 탕감에는 전원 동의했지만, 낙태 권리와 레즈비언들의 권리 요구에는 의견차를 보였다.8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여성 문제에 치중하는) ‘북반구’쪽 여성과 (기본적인 경제문제를 최우선시 하는) ‘남반구’쪽 여성 사이에서 정치적 편향이 드러난다는 점이다. ‘남반구’쪽 여성들은 대부분 낙태가 허락되지 않은 나라 출신들이었다. 설령 좌파 정권이 들어섰다 해도 그러했다. 국제 엠네스티에 따르면, 니카라과에서는 여성단체들이 2006년 제정된 낙태(강간에 의한 낙태를 포함) 금지법에 소송을 제기했다. 낙태 권리 주장은 단순한 정치적 요구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에, 분명한 정치적 입장이 필요한 셈이다.인도의 ‘소수자들을 위한 국가위원회’ 위원인 정치학자 조야 한산은 남녀 간의 관계에서 ‘젠더’의 정당성과 다양성이 서로 화해해야 한다는 주장에 이견을 보였다. 모든 여성들이 표출하는 더 많은 권리와 자율에 대한 갈망은 똑같은 길을 가지는 않는다는 게 그녀의 주장이다. 하지만 그 길에는 서로 스치는 교차로가 분명히 있다.


글·소니아 다양‒에르즈브렝┃파리7대학 명예교수
사회학자 겸 철학자. 1992년 창간한 여성잡지 〈Tumultes(소요)〉를 이끌고 있다. 주요 저서로 『중동 여성과 정치』(라 르마탕, 2005). 『포스트 식민 정치에 대한 소고. 프랑츠 파농부터』(키메, 2006) 등이 있다.

1 엘자 도르랭이 선별적으로 소개한 〈블랙 페미니즘, 아프리카 미국인의 페미니즘의 선집〉의 텍스트, 1975~2000, 아르마탕, 파리, 2008년.
2 레이나 레비스와 사라 마일스가 지도한 논문 〈포스트식민주의 페미니스트 이론〉, 루트리지, 런던, 2003년.
3 이 법은 가정에서 부부의 책임과 결혼 연령을 최소 18세로 명시하고, 성인여성에 대한 혼인간섭을 폐지하고, 일부다처제에 대한 가능성 등을 제한하고 있다. 알랭 루시이옹, ‘라 무다와나 개혁: 모로코 여성들의 지위와 여건’, 잡지 〈마그레브 마크렉〉, 파리, 179호, 2004년 봄호.
4 〈The Hindu〉가 그 예다.
5 2004년 3월 15일 법 조항 2004‒228.
6 릴라 아부‒루그호드 ‘무슬림 여성들은 정말 구원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문화 상대주의 그 밖의 것들에 대한 인류학적인 성찰’, 잡지 〈미국의 인류학자〉, 104권, 3호, 2002년 9월.
7 찰스 허쉬카인드와 사라 마무드 ‘페미니즘, 탈레반, 게릴라전투’, 계간 〈인류학〉, p.345, 2002년.
8 엘자 갈레랑 ‘여성들의 전 지구적인 행진의 시발점을 되돌아보며(1995~2001). 성별 사회적 관계와 여성들 간의 모순’, 잡지 〈카이에 뒤 장르〉, 40호, 200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