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체제, 젊은 시위대
[Spécial 혁명, 연쇄와 징후]
튀니지 정권의 오랜 정치색 지우기 작업이 막을 내린 시점에서 각 정당, 노조, 시민단체들의 자리 싸움이 시작됐다. 여기서 문제는 각 조직의 규모다. 그러나 시민혁명을 주도한 젊은 세대에게는 어떤 자리가 주어질 것인가?
옛 집권당, 민주헌정연합(RCD)이 요술처럼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RCD의 권력은 전국적 조직망을 통한 시민 감시를 통해 확보됐다. 지방행정, 경제, 문화, 스포츠 등 모든 분야에 깊숙이 뿌리내린 RCD 조직은 다양한 임무를 수행해왔다. 이들은 반대 세력을 제거하는 동시에 빈민에게 부를 재분배하는 일까지 도맡았다. 덕분에 효과적인 정치적 통제와 사회적 기반 확보가 동시에 가능했다.
혁명 과정에 장애물로 도사리고 있는 건 RCD뿐만이 아니다. 한쪽에는 군대가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올리비에 피오 기사 참조) 다른 한쪽에는 권력이양을 맡은 세력들이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튀니지의 단일노총인 노동총연맹(UGTT)은 엄청난 동원력을 가진 조직으로 알려져 있다. 일부에서는 전국적 조직을 갖춘 UGTT가 혁명을 주도해 RCD를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런 이미지와 달리 UGTT는 여러 개 얼굴을 가진 조직이다. UGTT의 50만 조합원의 정치 성향은 제각각이다. 그중 상당수는 RCD 당원이기도 하다. UGTT는 2008년 가프사 파업 때 노조원의 투쟁에 제동을 걸기도 했다. 지도부와 노조원 사이에 팬 골이 깊다. 1989년 총회 이후부터 지도부의 권한이 노총위원장 중심으로 강화되기 시작했다. 반대 목소리를 내는 간부들은 제명되거나 입막음을 당했다.
인권단체와 재야단체 역시 상황이 어려운 건 마찬가지다. 이들은 대중적 인지도가 적은 상황에서 조직 탄압에 대응하는 데 활동력을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지하 활동을 펴온 조직 중에서 튀니지 노동자공산당은 현 신정부 구성안에 반대하고 있다. 2008년 가프사 파업으로 두각을 나타내긴 했지만 이 극좌정당의 세력은 미미한 편이다. 한편 이슬람주의 정당 엔나흐다(Ennahda)는 가혹한 탄압을 받아왔으며, 간부 상당수가 긴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벤 알리 정권 당시 반정부 투쟁의 상징이었던 야권 지도자 몬세프 마르주키 역시 지지 세력을 규합하는 데 실패했다. 그는 젊은이들에게 기회를 넘겨주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1월 18일 귀국해 대통령 후보 출마를 선언했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해야 하나? 벤 알리는 2011년을 ‘젊은이의 해’로 선포했었다. “우리는 벤 알리의 선언을 말 그대로 받아들인다.” 한 여성 시위자가 한 이 말은 정치 엘리트, 단체, 노조들과 소속도 없고 조직되지도 않은 젊은 세대들 간의 간극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정치적으로 무관심하다고 알려진 젊은이들을 다시 보게 되는 계기가 됐다.
경찰의 발포에도 불구하고 시위대 행렬을 지킨 건 청년들이었다. 10대와 20대가 시위대를 이끌었다. 이들은 1월 13일 저녁 크람에서 출발해 카르타주 대통령궁을 향해 행진했다. 바로 다음날 벤 알리가 해외로 도피하자 그에 대한 비난이 들끓었다. 젊은이들은 지금까지 접근이 금지됐던 장소들을 점거함으로써 권위주의에 대한 콤플렉스를 끝장내고 싶어했다. 경찰들도 그들에게 지지를 보냈다. 그들의 투쟁에 인터넷이 상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면, 치안위원회 활동 역시 소중한 경험이었다. 이 과정 속에서 젊은이들은 서로 토론하고 정보를 교환하고 결정을 내렸다. 공권력을 대신해 스스로 치안유지 활동을 편 것이다. 몇 가지 행동지침이 발표됐다. 지역별로 RCD 조직원 명단이 만들어지고 학교 방화는 금지됐다. 다음날 아침에는 젊은이들이 시청 청소부들과 함께 직접 쓰레기 수거에 나서기도 했다.
이 수십만의 젊은이들은 튀니지 정치 개혁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인가? 이들은 구체제 정치인들과 관행을 쇄신할 수 있을까? 튀니지 혁명의 미래는 이들 손에 달려 있다.
글•아민 알랄 Amin Allal
액상프로방스 정치학연구소 연구원, 아랍세계와 무슬림 연구소(IREMAM) 객원 연구원.
번역•정기헌 guyheony@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