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구역 운동이 세상을 구원하리니…
현실주의와 유토피아의 결합
자본주의 질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부에서는 (자본주의로부터의) 개인과 지역의 분리나 자치 공동체, 또는 ‘보호구역(ZAD, Zone à défendre)’의 대중화를 제안한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이를 옹호하는 이들을 소수로 전락시켜 고립시킬 공산이 크다. 그러나 다수 개인의 이탈은 민중에 의한 전복을 꾀할 또 다른 수단이 될지 모른다.
자본주의적 물질관의 영향에서 과연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울까? 올곧은 지성의 전형으로 꼽히는 조지 오웰마저도 최소한의 안락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시인했다. “나는 매일 아침 차 한 잔을 즐기고, 금요일마다 <뉴 스테이츠먼(New Statesman)>을 읽을 수 없다면 죽느니만 못하다고 여기는, 현대의 데카당스적인 반쪽 지식인이다. 나는 더 소박하고, 더 고되며, 더 거친 농경 생활로 돌아가기를 결코 원치 않는다.”(1) 이 문장은 『위건 부두로 가는 길』(1937) 에서 발췌한 것으로, 부랑자 생활을 체험한 작가의 자전적 소설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1933) 이 출간된 지 4년 후에 쓰였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과연 조지 오웰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보호구역운동에 반대했을까?(2) 아니, 그는 그 운동에 동참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위의 구절에 이어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의미에서 나는, 더 소박하고 고되며 거친 삶을 원한다. 동시에 나는 피둥피둥 살찐 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이 말랑말랑한 세계가 감히 ‘진보’를 규정하지 않는 날이 도래하기를 원한다.”(3) 이렇듯 작가는 자가당착의 모순에 빠지고 만다. 그렇다면 그 모순이란 과연 어떤 성격을 지니는 것일까?
자본주의는 우리를 구속한다. 우리를 구속하는 자본주의의 물질관에서 정신은 몸(물질)에 속한 것이며, 몸을 위해 존재하는, 몸의 한 부분이다. 따라서 더 소박하고 고되며 거친 삶을 원하지 않거나, 그런 삶을 살지 않으려는 정신 또한 우리 몸에 속한다. 자본주의는 이렇게 자기 보호본능(또는 자기애)이라는 가장 강력한 기제로 우리를 사로잡았다. 결국 자본주의가 사로잡은 것은 우리들의 육신이다. 따라서 우리 앞에 놓인,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이 보호구역(ZAD) 운동의 대중화라면, 그것은 결코 쉬운 길은 아닐 것이다.
‘이탈’은 역병처럼 전염된다
자본주의에 비교했을 때, ‘종신급여(Salaire à vie)’(4)나 여타 (이윤을 추구하는 사적 소유의 철폐를 근간으로 하는) 모든 형태의 공산주의 운동의 이점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 번째 이점으로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단숨에 접근 가능하다는 점을 꼽는다. 일반적인 믿음과는 달리 미시적 해법의 합은 거시적인 해법으로 직결되지 않는다. 보호구역(ZAD) 또는 ‘자치 공동체(Commune)’의 회복만으로 온전한 사회를 구성할 수는 없다. 따라서 모든 것을 하나로 통합한 결정체로 변화시킬 공동체의 회복 그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 온전한 사회의 구성을 위해선 내부 통합이나 빈약한 논리 등을 모두 새로 정의해야 한다. 어찌 됐든, 내가 주장하는 바는 상대적인 형태의 경계가 필요하며, 경계 없는 보호구역(ZAD)이란 성립될 수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공존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며 관련성도 없는 운동과 보호구역(ZAD)을 연계하려는 시도는 양쪽의 고유한 가치를 모두 변질시키는 결과만 초래할 것이다. 분석적인 접근에서 (지배계급의) 아량이나 관용이라는 가치는 보호구역(ZAD)의 개념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을 부연하고자 한다. 관용이나 아량이 포함될 경우, 인종차별주의나 동성애 혐오주의, 또는 다른 각종 고약한 원리·원칙으로 이뤄진 보호구역(ZAD) 역시 충분히 성립 가능해진다. 이 경우, 우리는 그저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것 외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베르나르 프리오가 주장하는 공산주의적인 해법 또는 그와 연관된 해법은 대체로 노동 분업을 고수하는 경향을 보인다. 노동 분업이란 소소한 즐거움과 더불어 많은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누구를 어디에 배치할 것인가? 또 어떤 원칙에 따라 개개인을 분류하고 서로 다른 부문에 노동을 분화할 것인가?
분업을 정할 때 개인의 ‘자격’이라는 기준은 충분한 답이 되지 않는다. 공산주의적 접근법은 허드렛일과 보람을 느끼고 성취감을 주는 일을 구분하거나 고려하지 못하기에 재분배를 통해 해법을 마련해야 한다. 또한, 모든 면에서 만족스러운 결정이란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아울러, 개개인이 어떤 일을 허드렛일이라고 여기며 어떤 일에서 보람과 성취감을 느끼는지, 누군가는 바람직하다고 여기지만 다른 누군가는 꺼리는(하지만 마지못해 수용하게 되는) 일이 무엇인지, 매사를 조율할 메커니즘을 면밀하게 파악해야 한다.
덧붙여 새로운 생산방식을 가져올 정치적 사건의 성격도 고려돼야 할 것이다. 이윤을 추구하는 사적 소유가 종식될 정치적 사건이 혁명적인 성격을 지니리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혁명적인 사건이란 정치화된 민중의 강력한 힘을 전제로 한다. 그 결과 민중의 정신과 육신에서 정치적 위력이 발휘돼 사람들에게 극단적으로 제한된 물질적 생활 조건을 수용하도록 한다. 물론 관건은 이렇게 제한된 예외기간을 정서적으로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는지, 그리고 예외기간이 지난 후 물질적 생활이 어느 수준으로 조정될 것인지다. 당연히 이런 질문에는 미리 정해진 답이 없다.
이런 민중의 혁명은 물론 암암리에 시작된 개개인의 이탈에서 비롯되리라. 이런 변화는 가장 먼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소리도 없이 일어나고, 그 주변에 같은 뜻을 가진 이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탈의 역병은 더욱 빠르게 번져나가기 마련이다. 아울러, 같은 조건에서, 기후 현상에 따른 자연재해가 발생한다면 이탈의 변위는 가속화 할 것이고, 결국 이탈의 필요성은 점차 만연해지리라. 그렇게 해서 자본주의 질서를 종식하고자 하는 샘솟는 욕구는 점점 더 일관성을 띠게 되는 것이다.
다음은 다소 신랄한 비판에 해당하기에 그저 지나가는 말로 넌지시 언급만 하겠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지나칠 수는 없는 주제기도 하다. 이른바 도회적이고 교양 있는 부르주아지는 조용한 노동계급의 반격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고, 전 지구적 차원에서 대응해야 할 문제로 대두되기 전까지 이들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해 추호도 의심을 품지 않으리라. 누군가 이유를 묻거든 이렇게 답하면 그만이다. 근교 지역에서 있었던 해고 사태는 그들의 문제가 아니었지만, 플라스틱 오염으로 몸살을 앓는 바다나 파리의 불볕더위 그리고 자녀들 사이의 급성기관지염 확산 사태는 그들 자신이 직면한 문제였다고 말이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17세기 암스테르담에서 공기 중의 장독()이 계급의 구분 없이 퍼져나갔고, 부르주아지가 장독에 의한 전염병에 걸릴까 염려한 덕에 보건 인프라의 발전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상기한 바 있다. 이처럼 세상에는 놀랄 만큼 일관된 격정의 힘이 좌우하는 사회 법칙이 존재한다. 비교적 최근까지 자유무역을 제한하자는, 소위 보호주의로 치부되는 제안을 하는 이들은 어김없이 파시스트로 여겨졌을 뿐, 이들의 주장이 자유무역을 제한할 합당한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똑같은 명제에 ‘지구’라는 (논거를 갖춘) 문법을 덧칠하는 순간, 이런 주장은 떠벌리기 좋아하는 엘리트와 부르주아 계급에 그저 받아들여질 뿐 아니라 자명한 이치로 거듭나기에 이른다. 실로 모든 사람이 지구 온난화를 체감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계급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정치의 현실은 오늘날 집단적인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으며, 이런 집단적 공감대가 현상을 타파하는 수단일 뿐 아니라 파렴치한 사회학적 언사로 이를 무시하려는 결정은 심각한 오판이 되리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동안 민중의 반발은 미처 여론의 공감을 사지 못했다. 하지만 ‘전 지구적’ 반발이라면 여론의 시선을 끌지도 모른다.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 우리 다 함께 대처합시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말이다.
비록 현재로서는 기후변화가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수단일지라도, 기후변화라는 공감대가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더군다나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집단의 공감대라는 요소는 앞서 제시한 두 가지 해결책인 윤리적 해법이나 민중혁명을 이끌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런 해법이 개개인의 실존적 반성과 ‘이대로는 안 된다’라는 집합적 심리에 자양분을 공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두 번째 해법을 고수하자고 주장한다.
종국에 기존의 사회적 질서는 격정의 힘이 충분히 응축됐을 때, 즉 정서적 의지가 거시적인 규모로 작용했을 때만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기 마련이다. 나는 이런 ‘격정적인 힘’의 도래를 용맹한 영웅적 계기에 한정하는 것은 과도한 요구이며, 너무 많은 기회를 박탈하는 처사라고 본다. 게다가 나는 점진적 이탈을 통한 해법을 믿지 않는다. 우리는 앞에서(5) LIP(6)에서부터 보호구역(ZAD)에 이르는 사례를 통해 민중운동이 설득력을 얻게 돼 위력을 발휘한 경위와 그 결과를 짚어보기도 했다.
이 두 가지 운동의 사례를 대조하는 시도는 매우 흥미로운 측면이 있다. 당대 공권력이 두 가지 운동을 모두 ‘위협’으로 인식했고 타도 대상으로 여겼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성격이 서로 다른 이 두 운동의 이질성은 우리의 두 가지 해법을 상징하는 일종의 환유이기도 한 까닭이다. 나는 더 적은 요구조건을 내걸었던 LIP 운동의 사례가 보호구역(ZAD) 운동에 비해 선례로서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보호구역(ZAD) 운동이 지향하는 삶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대중이 접근하기 어려울 만큼 엄격한 요구조건을 담고 있지만, LIP 운동은 달랐다.
그러나 보호구역(ZAD)의 대항의식만큼은 결코 과대평가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보호구역(ZAD) 운동의 사례를 들여다보면 실로 놀라울 정도다. 장담컨대 그들의 주장은 우리의 삶의 방식이 앞으로 오래가기 어렵다고 여기며 그런 방식을 근본적으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생각과 깊이 결부돼 있다. 보호구역(ZAD) 운동에 가담하고자 모든 것을 포기한다? 나는 그런 방식에 의문을 품지만, 그런 점은 별로 중요치 않다. 중요한 점은 이들이 효과를 널리 선전하고, 규모가 어떻든 변화를 촉진하며, 어디선가 다시 길을 찾아 격정의 힘을 형성해 자본주의는 이제 그만 됐다고 선언한다는 것이다.
만약 현시점에서 대안의 미래상을 반드시 제시해야 한다면, 보호구역(ZAD)보다는 LIP이 미래상에 가깝다고 본다. 그런데도 보호구역(ZAD) 운동가들이 맡은 바 책무를 충실히 해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LIP 운동의 미래상에서 나는 노동 분업을 ‘전 세계적 수준’으로 유지하되, 합리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감축 조건을 제시하며, 무엇보다 이윤의 논리에서 비롯된 해악을 치유하고, 공유재산 사용이라는 수단을 통해 노동자들의 집단 자립권을 확립하고, 공들여 노동의 가치를 새로 확립하려는 의지, 다시 말해 위대한 격정의 힘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일련의 지엽적인 경험만 가지고 상상의 범위를 한정한다면, ‘LIP 운동의 미래상’이라는 개념은 오해를 부르기에 십상이다. 현실적으로, 재산 사용권은 법적으로 노동자들이 경영주 없이 자립하도록 하는 권한이다. 따라서 인류의 존립과 환경을 훼손하는, 과도한 소비에 따른 참사를 막기 위해 생산방식을 결정하고 기업경영을 통제하려면, 그에 앞서 어느 정도의 변화와 전복이 필요한지 잘 따져봐야 한다.
우리는 결국 매번 규모의 경제와 거시적 문제, 그리고 제도화의 문제로 회귀하게 된다. 그렇기에, 과거 법적 제도가 뒷받침되지 않는 거시적·사회적 차원에서 정부 당국이 LIP 운동의 맥을 끊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던 것이다.
서정시는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요약하자면, 나는 자본주의가 실체를 도려내 홀로 가라앉기 쉬운 텅 빈 종이배 신세가 되진 않으리라 생각한다. 또한, 잇따른 ‘공동체’의 회복이 완전한 정치적 형태로 이어지리라 믿지도 않는다. 나는 노동 분업이 거시적 현상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이런 노동 분업의 방향과 그에 따른 사회관계 구조의 변화가 거시적 문제라는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재산권의 변화를 가져오는 제도도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결국 다수를 위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다수에 의한 열정적인 역학관계, 동태(動態)학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이 유용하게 느껴진다. 제한적이고 지엽적이며 일반화하기 어려운 경험까지도 말이다. 머릿속에서는 이탈과 수정, 새로운 욕망의 변형이 끝없이 일어나고, 이는 우리를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게 한다. 오두막, 숲, 지역에 대한 서정시는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지만, 다수를 위한 정치적 전망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글· 프레데리크 로르동 Frédéric Lordon
철학자, 『Vivre sans? Institutions, police, travail, argent… Conversation avec Félix Boggio Éwanjé-Épée 제도, 경찰, 노동, 돈이 없는 삶이란? 펠릭스 보지오 에방제-에페와의 대담』(La Fabrique, 2019년 10월 4일, 이 책에서 발췌한 일부 내용을 본 기사에 게재함)의 저자.
번역·이푸로라
번역위원
(1),(3) George Orwell, 『Le Quai de Wigan 위건 부두로 가는 길』, Éditions Ivrea, 파리, 2010, p. 236.
(2) 노트르담데랑드 지역 신공항 건설 반대론자들이 개발예정지구(ZAD: Zone d’Aménagement Différé)를 ‘보호구역(Zone à défendre)’으로 바꿔 부르면서 대중화된 용어.
(4) Bernard Friot, 『L’Enjeu du salaire 임금의 쟁점 과제』, La Dispute, 파리, 2012.
(5) 이 기사를 발췌한 저서의 일부분.
(6) 1974년 LIP 시계공장 노동자들은 공장을 점거하고 자주적인 경영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