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엘륄의 집착하지 않는 ‘이탈적 앙가주망’

인류세의 생태학적 위기 생태계의 위기 속에서, 자연과 인간의 상생은 어떻게 이뤄져야 할 것인가? 인류의 새로운 화두인 ‘인류세’를 집중 조명하고, 생태학계의 거두인 고(故) 자크 엘륄의 ‘절제적’ 그리스도 앙가주망 사상을 리뷰한 학술세미나가 최근 세습 문제 및 극우적 일탈 등을 보여온 한국기독교와 신선하게 교차돼 눈길을 끈다. 사상 ‘생태, 환경, 그리고 교육’을 주제로 기독교학문연구회, 한국로고스경영학회, 성균관대 사법대의 공동 주최로 지난달 26일, 성균관대에서 열린 세미나가 그것이다. -편집자 주

2019-10-31     프레데릭 로뇽 l 신학자

 

우리는 깊은 나락의 가장자리에 놓여 있다. 믿고 싶지 않다고 해도, 또 철학자 장-피에르 뒤퓌가 말했듯 우리가 아는 것을 믿지 않는다고 해도 부인할 수 없는 확고한 사실들이 존재한다. 기후변화, 양극지대와 산악지대 빙하의 해빙, 해수면의 상승, 미세입자에 의한 공기오염, 토지오염, 폭염, 대량 벌목, 빈번한 화재, 반복되는 태풍과 사이클론, 생물 다양성의 엄청난 손실 등이 끊이질 않는 현실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의 현재 상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우리가 경험하는 생태학적 위기는 이제 ‘인류세(人類世, Anthropocène)’로 요약된다. ‘인류세’는 기후변화 문제에 정통한 지질학자들 사이에 아주 짧은 기간에 사용된 어휘였는데, 금세 급속하게 대중에 확산됐다. ‘인류세’라는 용어의 어원은 인간존재를 뜻하는 ‘áνθρωπος(anthropos)’라는 그리스어와 ‘새로운’ 혹은 ‘최근의’라는 뜻을 지닌 ‘καινóς(kainos)’라는 그리스어에 있다. 19세기에 근대 지질학을 창설한 라이엘에 의하면, ‘새로운’이라는 뜻의 영어 ‘-cene’나 프랑스어 ‘-cène’은 제3기와 제4기로 나뉘는 신생대를 가리킨다. 

제4기의 마지막 시기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부’나 ‘완전히’라는 뜻을 지닌 그리스어 ‘óλος(olos)’에서 나온 충적세(holocène)였다. 따라서 ‘인류세’는 ‘인류의 시대’로 번역될 수도 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인류세’는 우리가 벗어나게 될 충적세 이후의 새로운 지질학적 시대로서 인간의 활동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인류세는 인구와 기술과 소비가 합쳐진 효과들이 주요한 지질학적 동인이 되는 시대다. 인류가 지구계의 한 과정에 변화를 가할 수 있는 지질학적 요소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좋은 인류세’란 가능한 것인가

‘인류세’라는 용어는 21세기 초에 두 차례에 걸쳐 등장했다. 먼저 미국의 지질학자이자 생물학자인 유진 스토머와, 1995년 네덜란드의 지구화학자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폴 크뤼첸이, 2002년 국제지구생물권연구(IGBP) 소식지에 내놓은 논문 안에서 이 용어를 제시했다. 이 두 학자는 전대미문의 지구 상황을 새로운 지질학적 시대로 거론하면서 ‘인류세’라는 명칭을 제안했다. 뒤를 이어 2002년 1월, 크뤼첸은 ‘인류의 지질학’이라는 제목의 새로운 논문을 <네이처>에 게재하면서 이 용어를 공식화했다. 이 논문은 1면 분량에 불과했지만, ‘인류세’라는 의미와 정의를 제시한 학문적 가치는 높이 평가됐다. 

크뤼첸은 인류세의 시작을 1784년의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대표되는 열기관 산업혁명이 발생한 18세기 말로 잡고 있다. 이 시대에 지구 전체적으로 메탄과 이산화탄소의 함량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 생화학과 지구화학의 주기에 미친 인간 활동의 영향은, 홍적세의 빙하 주기들에 이어서 1만 2,000년 전부터 최근 10년 전까지 상대적인 생물기상학적 안정성을 지켜온 충적세를 마감시켰다. 인류세의 개념이 채택된 후, 생태계의 결정적인 변화와 생물 다양성의 상실을 근거로 삼아 인류세가 시작된 시점을 1950년대로 잡으려는 학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 이론은 최초의 이론에 대한 대안이라기보다는 보조적인 역할에 그치는 듯하다. 왜냐하면, 하나의 지질학적 시대는 특정 연도에서 시작된다기보다는, 여러 단계를 거쳐 점진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사실, 인류세의 개념은 그 등장부터 역설적이다. 인류세의 개념을 내놓는 일은 지질학자들, 더 정확히는 지층학자들이 관할하는 영역에 속하지만 처음 이 개념을 제시한 사람들은 지층학자들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6년 케이프타운에서 개최됐던 제3차 세계지질학대회의 결론은 “인류세를 지질학적 시대들에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권고사항이 인류세를 공식적인 지질학적 시대로 인준한 것은 아직 아니다. 이 결론의 문제는 인류세라는 용어 자체가 과학에서 벗어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이 이면에는 생물 종 중 최상위 포식자인 ‘인간’이라는 종을 규탄하는 뜻이 담겨 있다. 알랭 레이는 서슴없이 “인류세는 특히 인류의 자멸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두 번째 역설은 인류세는 살아있는 ‘특별한 종’의 행동방식으로 새롭게 규정된 지질학적 시대이며, 동시에 지구의 역사에서 이 변화의 당사자인 인간이 스스로 주요한 지질학적 동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유일한 시대라는 점이다. 세 번째 역설은 인류세에 관한 서사들의 다양성에 있다. 특히 중단기적으로 경제적, 생태학적 붕괴를 예견하는 대재앙의 이야기를 내포한다. 그러나 극단적인 전망에서 나오는 낙관적인 대서사는 인류세가 제기하는 도전들에 대응하는 기술적인 혁신에 대한 신앙고백과도 같은 믿음을 공언한다.

즉, ‘좋은 인류세’란 모순어법인 셈이다. 그럼에도, ‘좋은 인류세’를 옹호하고 장려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기후변화의 위험성을 결코 불신하지는 않지만, 인간의 운명을 조정 및 통제해 인간 조건을 개선하는 기회가 이 ‘인류세’라고 생각한다. 이 낙관적인 기술애호가와, 절망적인 경고자 두 갈래가 있고, 그 둘 사이에는 서로 연관성을 지니거나, 경쟁적으로 맞서는 다양한 서사들이 퍼져 있다. 그 서사들의 공통점은 우리 자신과 세상이 맺게 될 새로운 관계에 대한 의문이다.

우리가 너무나 자주 망각하는 사실이지만, 설사 인간사회가 지구에 끼친 생흔(生痕)을 대폭 축소할 수 있다고 해도, 지구가 충적세의 수준에 유사한 기후적, 지구생물학적 환경을 회복하기까지는 수천 년이 걸릴 것이다. 크리스토프 본뇌이와 장-밥티스트 프레소즈의 말을 빌려 요약하면, “우리에게 발생한 것은 환경의 위기가 아니라 인간에서 비롯된 지질학적 혁명이다.”

그런데 지구의 미래가 우리 손에 달려있다는 것은 인간인 우리에게 무슨 의미인가? 이는 우리가 우리 세대와 우리의 후손, 그리고 우리와 타인, 즉 실재하는 모든 사람에 대한 우리의 책임이 지금처럼 막중한 시기가 없다는 뜻이다. 클로드 로리우스와 로랑 카르팡키에가 지적하듯이, “인류세를 규정짓는 것은 인간의 군림보다는 인간의 권력욕이다.” 권력욕은 극단적인 역설로서 우리의 깊은 무력함이 가시적으로 드러난 형상이다.

 

모든 것을 배제하는 ‘효율성’

지구상의 위기에서 인류의 기술력으로 벗어날 수 있을까? 자크 엘륄은 ‘기술들’과 ‘기술’을 분명하게 구분한다. 인간은 언제나 ‘기술들’과 함께 살아왔다. ‘기술들’이란 인간과 자연환경을 매개하는 도구들로서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환경에서 점차 벗어날 수 있게 했다. 반면 ‘기술’은 효율성의 추구가 지배하는 수단 일체를 말한다. 기술은 그것이 내포하는 기술들의 물질적 요소들만이 아니라 가치와 정신이라는 비물질적 요소들도 포함한다. 기술은 효율성을 절대시하는 것이다. 효율성 그 자체는 중대한 결함이 아니고 삶에 필요한 가치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술사회에서 다른 가치와 동기는 최고의 가치로 인정된 ‘효율성’의 제단에서 파기되고 배제된다. 또한, 기술은 하나의 환경이 돼 인간의 새로운 환경으로 자리 잡는다. 기술은 오늘날 인간이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자율적인 세력이 됐다. 기술의 이런 다양한 특성들은, 해방의 수단이었던 과거의 기술들과 훨씬 더 구속적인 필연성을 창출한 오늘의 기술 사이의 공통 척도를 없애버렸다.

IT 혁명은 그 체계적 특성 때문에 기술 진보를 가속화했다. 하나의 체계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돼있는 부분들 일체를 말한다. 그래서 그 부분들 중의 하나에 변화가 일어나면 다른 부분들 전체에 즉각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그렇게 기술사회는 하나의 체계가 된다. 모든 기술들은 네트워크로 연결된다. 한 분야의 혁신은 다른 분야의 혁신을 유도하지만, 부분에서 발생한 하나의 사고나 테러 행위도 연쇄적인 반응을 초래한다. 이는 기술의 진보가 가속화될수록, 우리는 점점 더 강력해지는 동시에 점점 더 취약해지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그렇다면 자크 엘륄은 기술을 혐오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그가 기술을 혐오하지 않는 이유로, 그 자신이 밝혀낸 기술의 특성들 중 하나인 불구분성(不區分性)을 들 수 있다. 기술은 그 자체로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그리고 중립적인 것도 아니다. 기술은 근본적으로 양가적이다. 모든 기술의 진보는 긍정적인 효과와 부정적인 악영향이 있다. 부정적인 악영향을 겪지 않고는 긍정적인 효과를 누릴 수 없다. 따라서 지구상의 위기를 벗어나 인류세를 ‘좋은 인류세’로 만들려고 구상하는 모든 기술적 해결책들은 헛된 환상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술적 혁신은 동시에 다른 새로운 문제들을 낳는다. 또 그 새로운 문제들은 새로운 기술적 해결책들로 막아낸다. 이는 문제를 미루는 것에 불과하다. 에어컨, 전기차, IT 기기 등의 개발은 기술적 해결책들이 결코 궁극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효율성으로부터의 자유, ‘이탈적 앙가주망’

우리는 어떤 형태의 결정론에도 종속되지 않는다. 인간의 존엄성을 규정짓는 것 중 하나는 스스로를 제한할 수 있는 능력이다. 실행 가능한 것을 실행하지 않는 하나의 상징적인 예로서 살인의 금지를 들 수 있다. 그런 이유에서 자크 엘륄은 ‘비(非)능력’의 윤리를 펼친다. 이는 능력, 무능력, 비(非)능력 등의 세 가지 개념들로 이뤄지는 변증법을 내포한다. 능력은 실행할 수 있는 역량이다. 무능력은 실행할 수 있는 역량이 없는 것이다.

무능력과는 달리, 비능력은 실행할 능력이 있는데도 실행하지 않는 의식적인 이성적 선택을 말한다. 자크 엘륄에 의하면 기독교 윤리는 자유의 윤리만이 아니라 비능력의 윤리이기도 하다. 비능력의 윤리는, 사탄에게 시험받았을 때나 잡혀가면서 열두 천사들을 부르지 않았던 예수 그리스도, 전능한 하나님(정통적인 삼위일체론을 따르는 자크 엘륄은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으로서의 하나님이라고 인정한다)으로서 권능을 행사하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를 충실히 따르는 것이다. 

자크 엘륄은 이미 1983년에 탈성장과 불경기(혹은 긴축)의 결정적인 구분에 관한 충격적인 비유를 제시했다. “보행자가 너무 빨리 달려서 브레이크를 밟고 멈춰야 할 것 같은 자동차를 가정해보자. 그런데 그 자동차의 운전자는 속도에 심취해 경고를 거부하고 달리다가 결국 벽에 부딪히고 만다. 그래서 자동차도 멈추게 되지만, 이미 그 상황은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유한한 세상에서 무한한 발전을 생각할 수 없다면, 우리의 필수적 욕구들을 수정하는 지혜를 발휘함으로써 우리는 기술혁신에 의한 구원을 기대하는 대신, 절제의 사회로의 이행을 시작할 수 있다. 기술혁신은 사실상 해결책보다는 문제들을 더 많이 산출한다.

기술은 언제나 스스로 더 많은 것을 요구하며, 자체적으로 끊임없이 일으키는 문제들에 대응하기 위해 영속적인 가속화를 필요로 한다. 이런 개념적이고 경험적인 틀 안에, 우리는 ‘지속가능한 발전’에 대한 모든 담론들과, 특히 기후변화에 대처하고자 채택한 모든 조치들을 담아야 한다. 그 조치들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원자력발전의 이용, 이른바 ‘청정한’ 전기자동차의 장려, 중앙 에어컨 시설, ‘녹색 성장’을 촉진하는 모든 계획을 포함한다. 

신학적 윤리의 틀 안에서 때로는 성공, 때로는 실패로 이어지는 행동의 불확실한 일들은 위에서 살펴본 희망과 소망의 팽팽한 긴장이라는 시각에서 재해석돼야 한다. 자크 엘륄은 지구의 미래에 대해 어떤 희망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결코 낙관주의자가 아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고”, 그리스도가 “세상 끝날 때까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한다”라는 언약에 근거한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그로 하여금 앙가주망을 택하게 했다. 

그의 앙가주망은 효율성에 대한 우려로 불안하지 않고, 또 행동의 결과들에 집착하지 않는 ‘이탈적 앙가주망(Engagement dégagé)’이었다. 그것이 자크 엘륄이 우리에게 제안한 그리스도인의 생태학적 앙가주망이다. 이는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환상을 전혀 품지 않고 세상 한가운데서 온전히 살아가는 것이다.  

 

 

글·프레데릭 로뇽 Frédéric Rognon
프랑스 스트라스부르그 대학교 개신교 신학대학 교수. 주요 저서로 『Jacques Ellul. Une pensée en dialogue 자크 엘륄, 대화의 사상』, 『Dire la guerre, Penser la paix 전쟁을 말하다, 평화를 생각하다』 등이 있다.

번역·김치수
번역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