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의 착각, 중국판 문명충돌론

2019-10-31     장 루이 로카 l 시앙스포 교수

 

2017년 1월, 시진핑 주석이 자유무역을 예찬하며 중국이 올린 성과를 과시할 때만 해도 정치 지도자와 중국 전문가, 언론인 모두가 보호주의를 표방하는 도널드 트럼프와 비교하며 그에게 우렁찬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그로부터 약 3년이 흘러 신(新)냉전이 절정에 달한 오늘에는, 같은 이들이 ‘서구적 가치’라는 명목으로 중국 정책 비판에 열을 올리고 있다. 참으로 기이한 반전이 아닐 수 없다.

 

미디어가 홍콩 시위를 다루는 방식은 ‘문명의 충돌’이란 주제가 이제는 중국으로까지 확장됐음을 확인시켜준다. 이미 몇 개월 전부터 이른바 ‘서구적 가치’와 ‘중국적 가치’를 대립시키는 다큐멘터리, 책, 기사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극도로 이질적인 두 이데올로기의 형성은 얼핏 냉전 시대를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당시에도 각 진영은 서로 자신의 가치가 옳다며 주장하기 바빴다. 최근 서구 진영에서는 일종의 민족주의가 부활하는가 하면, 특수한 가치들에 기초한 정체성이 형성되고 있다. 이런 현상을 여실히 증명하는 예가 최근 저널리스트 프랑수아 부공(1)과 저명한 학자 장피에르 카브스탕(2)이 각각 펴낸 두 권의 책이다.

이 책들은 흔히 중국의 정치적 행로를 이해하려는 시도로 소개된다. 하지만 결국 의도는 뻔하다. 먼저 아테네 여행 중에 아고라를 방문하게 된 부공의 이야기부터 들어보자. 부공은 아고라를 방문하던 중 문득 “훗날 우리 유럽인들에게 민주주의의 모태가 돼준, 상업과 정치를 한 데 결합한 이 도시국가의 심장부가 25세기 전에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물론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민주주의의 모습과는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이 아고라에서 바로 우리의 신앙이 기원했다. 그 신앙은 지금도 여전히 사상의 대결 속에, 토론의 힘이나 혹은 말하기와 설득하기라는 아름다운 기술 속에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나는 이곳을 여행하면서 문득 내가 귀중한 유산을 물려받은 유럽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계기가 2005~2010년, 중국에 살던 5년의 세월이었다는 것이 떠올라 가슴이 뭉클해졌다.”

 

중국적 가치는 서구적 가치의 대립항인가

과장되고 편파적이기는 카브스탕의 책도 마찬가지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이른바 우리가 ‘서구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것에 대항해, 한 마디로 ‘우리’에 대항해 전쟁을 지속할 것이다.” 이어 조금 후에는 이렇게 자문한다. “우리 유럽인과 프랑스인은 우리의 이익을 지키고, 권위주의 정치가 회귀하고 강화되는 것을 막아내고, 더 높은 민주주의와 자유를 실현하기 위한 방향으로 세계의 물줄기를 바꾸려면, 과연 어떤 공동의 전술을 펼쳐야만 하는 것일까?” 그리고는 다시 그는 처음의 이야기로 되돌아온다. “중국 공산당은 우리, 그리고 우리의 가치와 이상에 대항해 전쟁을 벌이고 있다.”

독자들은 필자가 말하는 ‘서구적’ 가치와 이상이 대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궁금해서 애타게 설명을 기다린다. 하지만 결국 아무런 언급도 찾아볼 수 없다. 그 가치란 것은 시시때때로 민주주의, 표현의 자유, 인권, 자유 등과 같은 몇몇 단어로만 띄엄띄엄 설명될 뿐, 명쾌하게 정의되지 않는다. 사실 극좌파에서 극우파에 이르기까지, 서민계급에서 부르주아 계급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저마다 이런 개념들을 흔히 각자의 의미대로 자유롭게 해석하곤 한다.

한편 두 필자는 중국이 전파하려는 ‘중국적 가치’를 단순히 ‘서구적 가치’의 대립항으로 소개한다. 가령 권위주의, 자유의 부재, 인권의 무시 등이 대표적인 중국적 가치다. 그들은 개념에 대한 정의를 내리려 시도하기도 하지만, 언제나 그 시도는 모호하게 끝나버린다. 가령 부공은 중국이 ‘인류를 위한 공동운명체’, ‘문명의 다양성’, ‘윈윈을 위한 협력’, ‘상호적 관용’ 등의 개념을 강요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 이런 개념은 서구도 과거 식민주의, 오늘날에는 세계화를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한 개념들이 아닌가?

두 필자는 현재 통용되는 중국적 가치의 예를 제시하지만, 모호함만 짙어질 뿐이다. 가령 부공에 의하면, “미국 유수 기업의 경영자들은 자신들의 신념과 극도로 이질적인 이데올로기를 설파하는 시진핑 주석의 마스터 클래스에 주기적으로 초대”를 받는다. 하지만 “중상주의에 경도된 실리콘밸리의 경영진들은 냉소적 태도를 견지하며, 미 서부 해안 지대의 최첨단 엔지니어들이 중국의 역동적이고, 젊은 도시사회, 특히 IT가 발달된 사회가 주는 매력에 빠져들 가능성을 과소평가”한다. 하지만 도대체 왜, ‘서구적 가치’는 미국의 몇몇 용맹한 경영자들이 끝내 중국의 유혹에 빠지는 것을 막지 못할까?

한 가지 가설을 세워보자면, 여기서의 ‘서구적 가치’가 실상 자본주의 가치를 의미하기 때문은 아닐까? 한편 카브스탕은 “중국이 그리스와 유럽연합을 포함한 채권단 사이에 불거진 갈등을 틈타 교통 인프라, 에너지 등 중요한 분야에 투자를 제안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우리’ 공동의 가치는 실상 유럽인들이 연대하게끔 하고, 저금리를 앞세운 중국이 경쟁에서 승리하지 못하도록 막는 방파제 역할을 했어야 온당하지 않은가? 그리스의 한 선주는 부공에게 “중국인들이 일을 굉장히 잘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부공은 이렇게 설명을 덧붙였다. “그 선주는 분명 중국인들이 파업도 하지 않고 저임금에 만족하며 일하는 게 달가운 것이리라.” 

그렇다면 다시 말해 중국인들은 훌륭한 자본주의자이자 유능한 사업가, 더 나아가 서구인보다 훨씬 성실한 사람들이라는 의미는 아닐까? 카브스탕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민주주의가 널리 공격받는 것은, 국제무대에서 서구의 상대적인 힘이 점차 약화되고 있는 현실과 연관이 깊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그는 “중국과 서구는 서로 생각하는 가치와 이익이 매우 다르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혹 서구는 ‘가치’라는 명분을 내세워 실상 (약화된) 자신들의 이익을 수호하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사실 중국인들이 하는 일들 대부분은 다른 이들이 했던 것, 하는 것, 하려는 것일 뿐이니 말이다. 

 

역설적 결론을 낳은 이원론적 세계관

두 필자는 시종일관 이 ‘가치’라는 것을 모호하게 정의하고 있다. 그 가치란 과연 ‘서구적’인 것인가, ‘보편적’인 것인가, ‘유럽적’인 것인가, 아니면 ‘프랑스적’인 것인가? 끝내 독자는 알 길이 없다. 두 필자가 이 문제에 답하지 않는 까닭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해 말하기를 꺼리는 탓이다. 사실상 그동안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는 각각 ‘우리’의 가치를 보편화하는 시도로 간주돼 왔다. 

만일 두 필자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거론한다면, 민주주의의 이상이 탄생한 곳은 유럽이지만, 그 이상은 다른 곳에서도 수많은 개인, 사회집단, 사상가에 의해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것도 그들이 ‘우리’의 정치적 관행에 대적하는 무기로 사용하기 위해 말이다. 때로는 ‘저들’이 ‘우리’의 일부와 대적하기 위해 ‘우리’의 가치를 수호하는 일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자신들을 지지하지 않는다며 서구 정부를 비판하는 저 수많은 중국의 반체제 인사들을 보라. 

이런 사유를 통해 얼핏 드는 생각이 있다. 설령 중국인이 서구인보다 덕성이 부족하다 할지라도 ‘가치’의 분석을 통해 그런 사실을 증명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왜 두 필자는 중국의 공격적인 아프리카 진출을 프랑사프리카(Françafrique: 프랑스와 아프리카의 합성어로, 제국주의 시대 아프리카 대륙을 지배한 프랑스의 영향력을 의미하는 단어-역주)의 행태와는 서로 비교하지 않는 것일까? 두 필자는 민주주의를 마치 종교처럼 대한다. ‘민주화’가 마치 ‘개종’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아마도 독자들은 부공이 ‘신앙’을 운운하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한편, 카브스탕은 부공보다 한술 더 뜬다. “장기적으로 현 중국 정권은 경제적 이유가 아닌 정치적인 이유나 인도적인 이유로 결국 단죄를 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중국에서 개인이 감옥에 가는 일은 용납될 수 없고, 비밀사회의 통치를 받는 것이 진절머리나며, 오로지 ‘민주주의 중국’만이 국제사회의 일원이자 존경받는 강대국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날, 결국 중국 체제는 붕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민주화란 결국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상황이나 각종 분쟁, 결국 역사와는 무관한 것이라는 뜻일까.

결국 두 필자는 서구적 가치를 모호한 원칙들로 두루뭉술하게 설명하고, 서구인에게 비역사적이고도 비사회적인 정체성을 덧씌우고 만다. 그런 식으로 그들은 ‘우리’의 뒤에는, 현격히 다른 ‘가치’나 ‘이익’을 지닌 다양한 사회계층과 기업, 지리적 공간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두 필자는 종종 ‘서구적 가치’가 일부 서구인들에 의해 무기로 이용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있다. 과거 노동운동에서부터 시작해 오늘날 수많은 사회투쟁, 이를테면 자유를 침해하는 조처나 지구를 약탈하는 행위, 경찰의 폭력 등에 맞서거나 이주민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각종 투쟁에 이르기까지, 많은 개인은 이 ‘우리’란 것과 자신을 동일시하기를 거부한다. 사실상 인권이나 민주주의의 가치를 수호하는 이들은 오히려 이 ‘우리’를 대표하는 자들이 그 가치들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역사를 부인하는 행위는 또 다른 허깨비 같은 이데올로기, 다시 말해 ‘중국적 가치’란 개념도 탄생시켰다. 부공과 카브스탕은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주장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결론적으로 중국 지도자들의 손을 들어주고 말았다. 중국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그들에게는 서구 강대국을 괴롭힐 수밖에 없는 윤리적 바탕이 존재한다고 주장하게 만든 것이다.

 

자본주의, 중국과 서구를 연결하다

두 필자는 소크라테스와 공자를 대립시킴으로써, 진정한 비교 작업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하지만 사실 유럽의 일부 엘리트들이 중국의 권위주의를 자꾸 곁눈질하는 이유는, 분명 중국이 유교 사회보다는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사실상 중국공산당이 표방하는 중국식 사회모델은 서구의 모든 유토피아를 모아놓은 집합에 해당한다. 중국 정부는 빈곤을 뿌리 뽑아 ‘샤오캉(小康: 모든 국민이 풍족하고 편안한 생활을 누리는 것. 2002년 장쩌민 국가주석이 “2020년까지 전면적인 샤오캉 사회를 달성하겠다”고 한 이후 중국발전의 상징어로 자리 잡았다-역주) 사회 만들기를 염원한다. 샤오캉 사회는 토마스 홉스가 말한 것처럼, 시민들이 자신이 누리는 자유의 일부를 내어주고 안전한 삶을 보장받는 사회다. 말하자면 질서를 중시하는 사회를 이루기를 바라는 오랜 꿈과 일맥상통한다. 

그런 맥락에서 중국은 작은 마을이나 촌락을 전부 현대적인 르코르뷔지에식 사회 및 건축 양식을 담은 소규모 신도시들로 바꿔놓기 위해, 어려운 농촌 지역에 막대한 투자금을 할당하고 있다. 이처럼 현대성과 질서를 척도로 삼는 순간, 당은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국민을 감시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말하자면 미셸 푸코가 40여 년 전 아주 훌륭하게 묘사한 ‘파놉티콘(Panopticon)’(3)을 향한 벤담의 야망과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4) 서구가 파놉티콘 세상을 꿈꾸는 데 그쳤다면, 중국은 그 꿈을 실현하고자 한다. 물론 그 성공 여부는 미지수지만 말이다.

물론 세상에는 분명 현대적 삶의 양식에 대한 중국식 변종이 존재한다. 어쩌면 그 변종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일지도 모른다. 사회나 지리 등의 차이가 각각의 변종형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니 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나라, 지역, 사회계급별로 다양한 차이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중국에서 찾아볼 수 있는 좋은 삶, 좋은 취향, 좋은 태도, 좋은 가족 관계, 심지어 사회저항의 방식까지도 이제 유럽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들과 거의 다르지 않다.(5) 사실 중국 중산층이 추구하는 목표가 대체 무엇이겠는가? 좋은 직장을 구하고, 아이들을 잘 키우고, 부모를 잘 모시고, 돈을 많은 벌고, 집을 사고, 재산을 모으고, 여행의 여유를 즐기는 것이 아니던가?

중국의 사회학은 그 어느 나라보다도 더 서구적이다. 중국의 대학은 점점 더 영미권 저널에 논문을 펴내는 미국식 교육을 받은 교수들이 점령하고 있다. 물론 누군가는 유럽이 중국에 비해 비평 정신이 뛰어나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 비평 정신이 유럽의 각 국가와 사회계층별로 차이가 거의 없는 보편적인 현상일까? 정말로 모든 서구 정부들은 비평 정신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심지어 정치 분야에서도 서구의 영향력은 지배적이다. 중국의 민족주의는 이제 미국의 민족주의에 견줘 전혀 부족함이 없다. 기술관료주의 이데올로기도 중국의 행정부를 널리 점령했다. 또한, ‘검열’이 중국인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며, ‘인권’은 중국 정부도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다. 비록 그들이 아주 순진한 얼굴을 하고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권리는 빈곤으로부터의 자유”라고 말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오로지 강력하고 효율적이고 집중적인 형태의 권력만이 우리의 행복을 보장할 수 있다는 이른바 ‘권위주의 원리’는 과연 중국의 발명품일까? 

파시즘에서 스탈린주의, 나치즘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시 거의 모든 종류의 권위주의적 모델을 이론화하지 않았던가? 식민주의,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창시자가 정녕 중국인가? 게다가 권위주의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중국 정부의 논리는, 시시때때로 민주주의를 제한하고자 유럽의 지도자들이 사용했던(혹은 지금도 사용하는) 논리를 빼닮았다. 민중은 충분히 현명하지 못하기에, 그들에게 무엇이 좋은지 알려줘야만 한다는 논리 말이다.(6)

부공과 카브스탕이 민주주의 체제와 공산주의 체제를 대립시킬 때, 그들이 주장하려는 바는 다음의 두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서구사회가 비록 결점이 있지만, 우리는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중국 사회는 서구사회보다 나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이런 주장은, 현실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날 중국과 서구 모두가, 자본주의를 중심으로 동일한 가치에 의존하고 있다는 현실 말이다. 

 

 

글·장 루이 로카 Jean-Louis Rocca
시앙스포 교수이자 국제연구센터(CERI) 연구원. 주요 저서로 『중국 중산층 만들기. 작은 안락과 큰 기대 The Making of the Chinese Middle Class. Small Comfort and Great Expectations』(Palgrave Macmillan, 뉴욕, 2017년)가 있다.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번역위원 

 

(1) François Bougon, 『통제 받는 중국. 천안문 1989~2019년 La Chine sous contrôle. Tiananmen 1989~2019』, Seuil, 파리, 2019년. 당시 <르몽드> 기자였던 저자는 2019년 9월 <Mediapart>로 옮겼다. 

(2) Jean-Piere Cabestan, 『Demain la Chine: démocratie ou dictature? 내일의 중국: 민주주의냐 독재냐?』, Gallimard, Le Débat 총서, 파리, 2019년.

(3) 그리스어로 ‘모두’를 뜻하는 ‘pan’과 ‘본다’는 뜻의 ‘opticon의 합성어로,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1748~1932)이 고안해낸 감시에 효율적인 교도소의 형태.

(4) Michel Foucault, 『Surveiller et punir 감시와 처벌』, Gallimard, 파리, 1975년.

(5) 『The Making of the Chinese Middle Classe. Small Comfort, Great Expectations』, Palgrave Macmillan, 뉴욕, 2017년.

(6) Jean-Louis Rocca, ‘En Chine, la démocratie… quand le peuple sera mûr’(한국어판 제목: ‘중국의 엘리트 민주주의엔 ‘이유’가 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7년 3월호·한국어판 2017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