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 선거권을 짓밟은 피털루대학살

2019-10-31     마리옹 르클레르 l 역사학자

 

1819년 영국 맨체스터에서는 노동자 수천 명이 운집해 (남성의) 선거권 확대를 주장했다. 시위대는 무참히 짓밟혔고, 당시 언론은 이를 ‘피털루대학살’이라 칭했다. 영국 좌파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인 피털루대학살에 대한 해석은 다양한데, 이는 과연 민주주의 역사의 결정적 순간이었을까, 아니면 계급의식을 발전시킨 원동력이었을까?

 

1819년 8월 16일 영국 맨체스터에서는 약 6만 명의 시위대가 남성의 선거권 확대를 위해 모였다. 사전에 허가된 집회였다. 맨체스터 사상 최대 규모로 이뤄진 이 집회의 시위대 중에는 수천 명의 여성과 아이들도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치안판사의 명에 따라 의용기병대(Yeomanry, 鄕士)가 정규군과 연대해 시위대를 진압했다. 성 베드로(St. Peter) 광장의 세모꼴 공터에 갇힌 시위대는 사방이 가로막히고 진입로도 군대에 의해 차단된 가운데 총칼에 찢기고 말발굽에 짓밟혔다.

이 집회를 위해 특별히 초빙돼 시위대를 이끈 급진주의 대중 연설가 헨리 헌트가 비폭력 평화시위를 강권한 만큼 시위대는 기병대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헨리 헌트는 대중봉기를 우려하는 당국의 판단이 틀렸음을 입증하고자 했고, 법을 준수하는 평화시위를 통해서만 자신들의 요구사항이 관철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이에 시위대는 (얼마 후 징역 1년 형을 받은) 새뮤얼 뱀퍼드를 필두로 방어용 막대라도 소지하자던 급진파 지도자들의 말을 따르지 않은 채 몽둥이와 지팡이를 다 내려놓고 집회에 참여했다. 성 베드로 광장에 모여든 군중의 손에 들린 것은 평화의 상징인 올리브 나뭇가지와 깃발, 자유의 상징인 프리지아 모자, 그리고 약간의 식량이 전부였다. 

두 대의 수레를 연결해 만든 임시 연단에 선 헨리 헌트가 겨우 몇 마디를 꺼냈을 때, 치안판사들은 경찰들을 출동시켜 헨리 헌트를 체포하고 ‘폭도들’의 해산을 촉구했다. 곧이어 의용기병대가 투입된 뒤 여기에 기병연대까지 힘을 보탰다. 진압대가 총포를 휘두르자 시위현장은 이내 아수라장이 됐고, 16~18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65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 피해자들 중 약 1/4이 여성이었는데, 의용대가 여성들을 우선적으로 겨냥한 것은 아마도 여성 시위대가 참정권을 주장하던 프랑스 여성 혁명가들을 연상시켰기 때문이 아닐까. 집회와 표현의 자유를 심히 훼손한 이 사건에 격분한 영국 언론은 이를 (워털루전쟁에 빗대어) ‘피털루대학살’이라 명명했다.

그러나 정부는 이에 굴하지 않은 채 6개의 법을 채택하여 집회와 표현의 자유를 더욱 제한했고, 언론사에는 과중한 세금을 부과했다. 노동자 가정에서 급진주의 성향의 신문을 보기 어렵게 하려는 조치였다. 그러던 중 급진적인 성향의 발행인 리 헌트가 퍼시 셸리의 시 <혼돈의 가면극>을 발간했다. 피털루대학살 당시 이탈리아에 체제 중이던 시인 퍼시 셸리가 피털루 시위대를 위해 쓴 시였다. 이 시는 단체행동을 촉발하는 메시지가 담고 있는데 특히 마지막 시구가 강렬하다. “일어서라, 천만 군중의 힘으로!/ 긴 잠에서 깨어난 사자처럼 일어나서 포효하라/ 자는 동안 갈기 위에 내려앉은 이슬을 털어내듯 묵직한 족쇄들을 떨어내자/ 그대들은 다수요, 저들은 소수이니”(1)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 후인 1832년에 발표된 이 시는 (피털루사건에 대한 뱀퍼드 회고록뿐 아니라 판화 작품이나 펜던트, 다기, 손수건 등을 통해서도 기억되고 있는) 피털루대학살을 영국 좌파 역사에서 중대한 사건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2) 피털루대학살의 역사적 가치는 이미 1830년대부터 인정받고 있었는데, (남성의 보통 선거권을 주장하던) 초기 차티스트 운동의 집회 때나 해당 기관지 <노던 스타> 지면상에서 피털루대학살의 의미를 기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은 20세기 노동운동의 현장에서도 종종 퍼시 셸리의 시구와 함께 깃발 위에 표현됐으며, 코빈의 노동당 슬로건 “For the many, not the few(소수가 아닌 다수를 위해)” 역시 <혼돈의 가면극>의 마지막 부분을 연상시킨다.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인가, 노동운동인가?

그런데 이 사건의 의의는 크게 두 가지 관점으로 해석된다. 우선 리 헌트, 퍼시 셸리와 같이 민주주의 발전사의 맥락에서 피털루사건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관점이다. 이에 따르면 피털루대학살은 부패한 전제정권에 맞서 집회와 표현의 자유를 수호하고 의회제를 개혁하기 위한 민중의 투쟁으로서, 영국 민주주의 발전사에 있어 중요한 사건으로 자리 잡는다. 그 당시 영국에선 전체 국민의 4%만이 투표권을 가졌고, 도시의 발전이 이뤄진 지 얼마 안 된 맨체스터에는 단 하나의 의석도 할당되지 않았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피털루사건은 비록 실패한 투쟁이었으되 보통선거권 운동의 역사에서는 최종적으로 성공한 싸움이었다. 토머스 페인이 쓴 『인간의 권리』가 출간된 1791년과 선거법 개정이 이뤄진 1832년 사이에 일시적으로 민주주의의 발전이 주춤했을 뿐이다. 이후 영국의 투표권은 1832년의 선거법 개정으로 자본가 계층에게 먼저 부여됐고, 이어 1867년과 1884년, 1918년의 개정을 통해 차츰 노동자와 여성에게로 확대됐다.

한편 피털루사건을 영국노동계의 근본적인 역사적 사건으로 인식하며 노조운동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관점도 있다. 사실 그 당시 시위 참가자들은 주로 방직공장 노동자들이었고, 산업혁명의 중심지였던 맨체스터에서는 18세기 이후 방직공장의 기계화가 진행되는 중이었다. 따라서 시위대 중에는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물론 뱀퍼드 같은 수공업자들도 있었다. 직물공업의 부흥으로 생계에 위협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노동조건이나 생활여건도 열악했는데, 워털루전쟁이 끝나고 물가와 세금이 오른 데다 동원 해제된 군인들까지 실업자 상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 베드로 광장(St. Peter)’과 ‘워털루(Waterloo)’의 합성어 ‘피털루(Peterloo)’에는 이런 노동자들의 불만도 섞여 있다. 

굶주린 군중이 일으키는 소요사태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보다 평화적인 형태로 나타나되 차츰 장기화하는 양상을 보였고, 1810년대 초부터 시작된 러다이트 운동도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의용기병대(Yeomanry, 鄕士)는 시위대를 때려잡는 데 있어 실제 군병력인 경기병들보다 더 열심이었다. 이들 의용대는 2년 전 워털루전쟁 시기 지역 유지들의 제안으로 결성된 조직으로, 기업가와 변호사, 상인 등의 자본가 계급으로 이뤄져 있었다.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시위대에 대한 탄압 이면에는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의 대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노동자 계층의 계급의식이 발전한다. 

피털루사건은 애초에 투표권 쟁취를 위한 투쟁인 동시에 계급투쟁일 수밖에 없었다. 노조가 지하조직으로 취급돼 노조의 활동조차 금지되고, 급진파가 의회에서 배제된 계층을 규합하며 의회 개혁을 위해 노력하던 시기에, 노동자들의 사회적 반발은 참정권의 확대와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한 정치적 요구의 형태로 나타났다. 따라서 이후에 전개되는 차티스트 운동과 마찬가지로 피털루사건도 ‘노동자 개인의 요구사항이 전혀 나타나지 않은 노동자 집회’라는 특이성을 보인다. 

 

영화, 전시, 언론, 음악 등을 통해 기억되다

피털루사건의 이런 두 가지 성격은 2019년 여름 피털루대학살 200주년 행사에서의 엇갈린 해석에서도 잘 드러난다. 물론 맨체스터는 피털루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크게 판을 벌였다. 그전까지만 해도 민중사 박물관의 일부 진열대나 파란색(지금은 빨간색) 패널을 통해 피털루사건을 기리는 정도였지만, 이제는 설치미술가 제레미 델러에게 의뢰해 기념물까지 세웠다. 그런데 시내의 모든 박물관과 도서관들은 하나같이 학살에 초점을 맞춘 전시를 기획했다. 관련 행사를 알리는 벽보 위에 새겨진 ‘피털루(Peterloo)’라는 글자는 검은색 바탕에 흰색 글씨로 처리된 뒤, 첫 번째 ‘o’를 해골 모양으로 바꿔 전체적으로 해적 깃발 같은 느낌을 줬다. 이 사건을 다룬 마이크 리(맨체스터 출신) 감독의 영화 <피털루> 상영 일정도 잡혀있었는데, 행사가 시작되기 몇 달 전 개봉한 이 영화는 맨체스터에 사는 한 가족을 가상으로 설정한 뒤 이들의 눈을 통해 당시의 사건을 시대극으로 그려냈다.

그런데 영국인들에게 피털루사건을 알리는 이 일련의 과정에서 두 가지 논조가 극명하게 나뉜다. 가령 마이크 리 감독 같은 경우, 노동자의 고된 삶이 곧 정치적 반발의 원동력이 됐던 것으로 극을 구성해 노동자의 힘든 삶을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췄다. 또한, 비폭력 시위에 대해서도 헌트보다는 무기를 지참해야 한다던 뱀퍼드 주장 쪽에 손을 들어줬다. 영화는 굉장히 비극적으로 마무리되는 가운데 관객의 분노를 부추겼다. 맨체스터 민중사박물관 역시 ‘대처 시대’와 1984~1985년 광부노조 파업 시기까지를 아우르며 다양한 노조 깃발을 선보인 가운데 피털루사건을 기나긴 노동자 저항의 역사 속으로 편입시켰다.

한편 맨체스터 대학이 운영하는 존 라이랜즈 도서관과 포르티코 라이브러리에서는 이와 다른 관점에서의 전시를 기획한다. 여기에서의 주제는 ‘언론’이었다. (참고로 포르티코 라이브러리는 보호주의 성향의 곡물법에 반대한 자유무역의 기수들이 출입하던 민간 도서관으로, 의용대 대위로서 성 베드로 광장의 진압을 지휘한 인물도 이곳 도서관을 자주 찾았다.) 이에 각 도서관에서는 당시의 신문과 잡지 등 언론매체들을 전시하고, 이 사건에 대해 다룬 언론의 상반된 칼럼들도 선보였다. 아울러 오늘날 <가디언>의 전신이 된 <맨체스터 가디언>의 창간에 피털루사건이 미친 영향도 보여준다. 이 매체의 발행인은 사업가 존 에드워드 테일러로, 피털루사건과 보수 언론의 보도 행태에 놀란 그는 믿을 만한 대안 언론을 제시하고자 <맨체스터 가디언>을 창간했다. 따라서 이들 전시를 통해 본 피털루사건은 진보 언론과 보수 언론의 각축장으로 그려졌다. 그리고 오늘날의 ‘페이크 뉴스’와 ‘입소문 시대’를 예고한 이 싸움은 결국 언론과 자유, 그리고 민주주의의 승리로 귀결됐다.

지난 8월 맨체스터 대학에서 공동주관한 국제 낭만주의 학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의견이 엇갈렸다. 피털루사건을 메인 테마 중 하나로 잡은 이 학회에서 사학자 캐서린 홀, 로버트 풀 같은 일부 학자들은 노동운동과 민중봉기의 관점에서 피털루사건을 다루고자 했던 반면,(3) 일각에서는 계급투쟁의 시각에서 당시의 주요 인물들에게 초점을 맞췄다. 1810년대의 대중연설가들이 어떤 식으로 언론과 대중을 이끄는지 살펴보고, 8월 16일의 진압부대가 그 같은 잔혹한 행위를 했던 복합적인 심리적 동기를 짚어본 것이다. 이로써 돈에 매수되고 과격한 행위를 일삼던 그 당시 경찰청장의 명예도 어느 정도 복권됐다. 마치 (장발장에 준하는) 뱀퍼드와 애증의 관계를 유지하는 영국판 자베르 경감이 된 것이다. 피털루를 소재로 한 관현악 합창곡 <The Anvil(모루)>도 만들어졌는데, 영국의 작곡가 에밀리 하워드가 만든 이 곡은 매년 여름 런던에서 열리는 클래식 축제 ‘프롬스’ 기간 중 지난 8월 16일 로열 앨버트홀에서 처음으로 선보였다. 

영국 노동계의 역사적 사건이 이렇게 대중의 기억 속에 다시금 각인된다는 것은 분명 긍정적인 일이다. 다만 자본가 계급이 노동자 계급을 무참히 탄압했던 한 사건이 홍보용 캔버스백 정도로 상업화된 데는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글‧마리옹 르클레르 Marion Leclair
아르투아 대학 영국 문명사학과 조교수

번역‧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번역위원 

 

(1) ‘Rise like lions after slumber/ In unvanquishable number!/ Shake your chains to earth like dew/ Which in sleep had fallen on you/ Ye are many–they are few.’ Percy Bysshe Shelley, <The Masque of Anarchy>, 1832. 

(2) Samuel Bamford, 『La Vie d’un radical anglais au temps de Peterloo 19세기 초 급진주의 개혁가의 삶』, Les Éditions sociales, Paris, 2019. 

(3) Robert Poole, 『Peterloo. The English Uprising』, Oxford University Press, 2019. 동 저자는 Polyp 및 Eva Schlunke와 함께 그래픽 노블 『Peterloo. Witnesses to a Massacre』(New Internationalist, Northampton, 2019)도 펴낸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