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의 반정부단체, 귈렌 지지자들의 은신처가 된 유럽

2019-10-31     아리안 봉종 l 기자

 

시미트(참깨가 들어 있는 전통 빵)와 오이, 블랙 올리브와 메네멘(토마토 달걀 볶음). 이렇게 터키식 아침 식사를 하고 있지만, 우리는 지금 런던 북부의 교외에 있는 한 맨션의 발코니에 앉아 있다. 집주인은 50대의 무스타파 예실로, 현재 터키 측의 인도요청 대상자이자 국외로 피신 중인 4인에 속한다. 터키 총리 비날리 이을드름은 2017년 영국을 방문했을 때 테리사 메이 총리에게 무스타파 예실의 송환을 요청했다. 앙카라(터키의 수도)의 이슬람 민족주의 정권은 그가 ‘펫훌라흐 귈렌의 테러조직’ 즉 페토(FETÖ)와 연루돼 있다고 본다. 

‘페토’는 터키의 이슬람 사상가 펫훌라흐 귈렌의 추종자들이 이 운동을 조직했다는 뜻에서 터키 정권이 붙인 명칭이다. 펫훌라흐 귈렌은 현재 미국 펜실베이니아로 망명해 은거 중이다. 이슬람 민족주의 정권은 실패로 돌아간 2016년 7월 15일 군사 쿠데타의 배후로 귈렌을 지목했다.(1) 무스타파 예실은 펫훌라흐 귈렌을 일컫는 ‘호카 에펜디’와 직접 연락하는 소수의 측근에 속한다. ‘호카 에펜디’란 스승을 뜻하는 존칭이며, 귈렌은 그런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충분하다. 

무스타파 예실은 히즈멧(터키어로 ‘봉사’라는 뜻) 운동을 이끌고 있는 귈렌 지지자들 중 핵심 인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조직력과 리더십을 지녔다. 귈렌 지지자들은 자신들이 행하는 이 풀뿌리 시민사회운동을 ‘히즈멧’이라 부른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소피아 팬디야에 의하면, 히즈멧에 참여하는 추종자들은 전 세계적으로 1천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예실은 1970년대 말에 이스탄불의 마르마라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학교에서 종교학을 가르쳤다. 그러다가 1983년 펫훌라흐 귈렌의 설교에서 “이제껏 체험해보지 못한 감동”에 눈을 뜬다.

귈렌은 20세기 초에 활동한 쿠르드족 이슬람 성직자 사이드 누르시(1878~1960)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사이드 누르시의 사상은 수피즘(이슬람교의 신비주의 분파)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현재 귈렌은 아비(Abi, ‘위대한 형제’)이자 헤이옛(Heyet, ‘위원회’)의 의장이다. 그는 이 단체의 유럽 지부를 지휘하고 있으며, 구대륙에 배속된 여러 이맘(조직의 지령을 전달하는 간부들)을 통솔하고 있다. 현재 귈렌의 지지자들은 이곳 구대륙에서 은신처를 물색하고 있다. 

 

현 터키 정권의 주적이 된 귈렌 지지자들

이처럼 귈렌 지지자들이 터키 밖으로 몸을 피하게 된 것은, 상황이 예전과는 달라졌기 때문이다. 처음에 히즈멧은 2002년 총선에서 승리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의 정치적 동맹이었다. 사법부와 경찰 내에서 귈렌 지지자들은 증거조작, 불법체포, 스탈린 시대에 버금가는 소송 등을 통해 공화주의, 엘리트주의, 민족주의, 세속주의, 케말주의(터키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내세운 건국이념으로, 정교일치 체제를 폐지하고 서구형 근대국가를 목표로 했다-역주)에 기반한 체제의 영향력을 축소했을 뿐 아니라, 정계에서 군부를 몰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귈렌 운동은 현 터키 정권의 주적이다.(2) 무스타파 예실은 2010~2015년 국가기구 내에서 귈렌 지지자들과 에르도안 지지자들이 대립했을 때 핵심적 역할을 했다. 이들 사이의 갈등은 처음에는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곧 폭발했다. 예실은 2016년 쿠데타 시도가 일어나기 1년 전에 터키를 떠났다. 이 사건은 국가 비상상태 선포, 정부 및 군부 내 귈렌 조직의 척결, 여러 협회들의 폐쇄, 언론기관 몰수, 귈렌운동과 연계된 학교, 대학 및 여러 기업들에 대한 감독으로 이어진 실패한 쿠데타였다.(3) 정부 소식통에 의하면 2019년 봄 페토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된 인원은 약 7만 7,000명에 달했으며(1만 7,000명의 여성과 750명의 아동 포함), 24만 명은 재판에 회부될 예정이다. 3만 400명은 이미 유죄판결을 받았고, 공무원 15만 명은 정직 혹은 파면됐다. 

터키에서 범죄혐의로 기소됐든, ‘위대한 형제들’에 속하든, 단순 추종자든, 귈렌 지지자들은 대거 유럽연합(EU) 회원국들에 정치적 망명을 요청했다. 예실에 의하면 그 수는 2016~2019년 초에만 총 5만 5,000명에 이른다. 이들은 1980년대부터 유럽에 머물러왔고, 유럽에 체류하던 펫훌라흐 귈렌의 사상에 동조한 많은 터키 기업인들의 기부 덕분에 재정적 자립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들의 규모가 비약적으로 커질 수 있었던 것은 특히 2002년 정의개발당(AKP)이 선거에서의 승리 이후부터였다. 

익명을 요구한 한 내부자는 귈렌운동의 운영방식에 대해 설명했다. “유럽 및 다른 국가에서 귈렌운동은 항상 같은 방식으로 전개된다. 한 명의 이맘이 한 국가에 지명돼 귈렌운동을 ‘지휘한다’. 또한, 큰 지역별로 한 명씩, 예를 들어 프랑스에는 리옹 이맘이 있으며, 이런 식으로 총 93명의 이맘이 있다. 이맘들은 종교 간 혹은 시민사회와의 대화를 담당하는 그룹, 기숙사를 담당하는 그룹, 학교를 담당하는 그룹과 사업가를 담당하는 그룹으로 나뉜다.” 

 

‘만남’과 ‘화합’의 기회를 제공하다

귈렌운동의 성공 요인은 ‘만남’에서 찾을 수 있다. 서구사회는 이슬람교도들에게 호의적이었던 적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지역사회 속 만남은 유럽에 거주하는 이슬람교도들에게, 그들의 신앙과 출신(터키)이 걸림돌이 되지 않고 시민사회와 어우러질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런던에 거주하는 한 지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귈렌의 메시지는 우리의 이슬람 신앙과 현대사회를 연결해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 그의 메시지는 ‘정치적 이슬람’을 대체할 접근법을 제시한다. 정치적 이슬람은 다른 사회와의 통합과 대화,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의지를 지닌 시민적 이슬람을 배척한다.”

귈렌운동은 독일(가장 비중이 큼), 벨기에, 네덜란드 및 프랑스 등 유럽 각지에서, 50여 개의 학교, 100여 개의 야간수업, 문화·직업·여성과 관련한 각종 단체의 활동을 통해 펼쳐진다. 또한, 각 나라에서 이 운동의 트레이드마크인 ‘종교 간 대화를 장려하는 플랫폼’의 기능도 한다. 그뿐 아니라 장학금도 지원한다. 

귈렌운동을 지지했던 터키의 유력 일간지 <자만(Zaman)>은 2016년 쿠데타 시도 이후 자진 폐간했다. 이전까지 유럽 각국에서 10개 지방신문을 발간했으며(독일, 오스트리아, 불가리아, 벨기에, 덴마크, 에스파냐, 프랑스, 마케도니아, 네덜란드, 루마니아, 영국, 스위스), 총 발행 부수는 최대 5만 부에 달했다(프랑스에서는 1만 2,000부).  

귈렌운동은 이런 활동들과 나란히 지식인, 종교계, 정계를 겨냥한 대대적인 홍보 활동도 병행했다. 귈렌운동을 지지하는 기업인 연합인 ‘터키기업인 및 사업가 협회(Thskon)’는 브뤼셀에 본부를 둔 유럽 측 싱크탱크와 협력해 회의개최 비용을 지원했다. 벨기에의 루뱅대학교는 펫훌라흐 귈렌 이종문화연구 석좌교수직을 마련했다. 프랑스에서는 귈렌운동 조직이 국회의사당 내에서 매년 만찬을 개최했다. 선출직 공무원들이 자신들을 초청한 프랑스-터키 연합의 성격을 알고도 전혀 염려하지 않았으므로, 내무부 산하 예배부 책임자 역시 이들 단체를 전혀 무시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귈렌 지지자들이 국가 안보기관들과 좋은 관계를 맺어왔기 때문이다. 

유럽의회에서 귈렌운동을 가장 환영하는 단체는 유럽녹색당 자유연맹(Greens-European Free Alliance)이다. 터키 정계에서 암암리에 벌어지는 일들에 정통한 유럽연합의 한 고위 공직자는, 2012년 <자만>의 25주년 창간 기념행사로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사진전 환영 행사 때 “생태주의를 지지하는 의원들이 귈렌의 서명이 들어간 일련의 발의를 지지했다”고 밝혔다. 그는 놀라움과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여하튼 <자만>을 언론 자유의 상징으로 만든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그런데 내가 알아본 결과, 이 행사를 후원한 것은 다름 아닌 다니엘 콘-벤디트(프랑스 68혁명의 주역)였다!” 현재 터키가 미국에 범인인도 요청을 한 <자만>의 주필 에크렘 두만리도 함께였다.

 

귈렌 지지자들과 에르도안

유럽인권재판소(ECtHR)도 터키가 파견한 몇몇 법조인들을 받아들였다. 유럽연합 소송 절차에 정통한 한 터키 고위 공직자는 “그들은 젊은 검사들이었다. 우리 터키인들은 그들이 귈렌 지지자들임을 알고 있었다. 유럽평의회에서 그런 이야기가 공공연히 나돌았다. 에르도안과 귈렌의 전쟁이 시작된 2013년부터 그들은 전부 터키로 소환됐다”고 말했다.

아시아, 아프리카는 물론 코소보나 몰도바 같은 유럽의 변방에서까지 앙카라가 파견한 특공대원들은 귈렌운동 지도부원들을 납치했다.(4) 이 책임자들은 유럽연합 내에서도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있다. 거리에서, 그들의 거처에서, 자동차에서 찍힌 그들의 사진이 친정부 성향의 터키 언론에 공개됐다. “당신들은 우리 손안에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2016년 쿠데타가 실패한 뒤 제기된 수천 건의 소송을 유럽인권위원회가 기각한 것은 실망스러웠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이 유럽기관들은 오랜 경험이 있으니, 귈렌 지지자들에게 그나마 안전한 곳은 유럽연합 내라고 믿었다. 이런 상황을 견디기 위해 귈렌 지지자들은 ‘시련’보다 ‘인내’라는 단어에 매달린다.

현재 국외로 피신 중인 대다수 귈렌 지지자들에게 그리스는 미지의 땅이다. 유럽에 계속 머물 수 있는 사람들은 운이 좋은 편이다. 하지만 그들은 다음에 올 사람들을 돕기 위해 1천 유로를 지불해야 한다. 현재 그리스에 살고 있는 에므레(5)는 귈렌 지지자들이 국가기관들을 장악했을 당시 앙카라 대법원 검사였다. 그는 밀입국 브로커가 자신과 시리아 출신의 두 가족만 달랑 고무보트에 버린 뒤 난파되기 전까지는, 브로커에게 1만 유로를 지불해야 할 날이 올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에게해의 파도는 몹시 사나웠고, 우리는 배 안에 차오른 물을 퍼내야 했다. 그때는 밤이었고, 대형 선박이 우리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기도합시다!’ 나는 터키 신문에 우리가 익사한 사실이 대문짝만하게 실릴 것을 상상하며 시리아인들에게 외쳤다. 한 법조인이 민주주의를 피해 달아났으며, 그는 벌을 받았다고….”

귈렌운동은 터키 내에서 재정적으로 힘을 잃고 지지자들의 존재 자체도 위협받았으나, 그렇다고 애초의 정치적 목표를 포기한 건 아니었다. 바로 에르도안을 끌어내리는 것이다. 에르도안의 무기는 제도와 선거의 원칙을 충실히 지키는 정당이 아니라,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극히 공격적이고 혼란을 야기하는 홍보 캠페인이다. 역시 그리스로 망명한 기자 라지프 두란은 이렇게 설명한다. “귈렌 지지자들은 에르도안과 정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그들은 극히 국가사회주의적이고, 쿠르드 문제에 대해서는 극히 반민주주의적이다. 단 하나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면, 그들이 더 이상 좌파의 적도 아니란 사실이다.”

그 어느 곳보다 언론의 자유가 법으로 보장되는 스웨덴에서 기자들은 귈렌 지지자인 압둘라 보즈쿠르트의 ‘붓심’을 중심으로 다시 뭉쳤다. 트위터를 위시해 SNS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이 기자들은 터키 대통령에 대한 감시의 끈을 놓지 않은 채, 자신들을 대상으로 한 정부의 탄압을 고발하고, 정권을 곤혹스럽게 할 내부 문건들을 기사화하고 있다. 터키 출신의 스웨덴 정치학자 할릴 카라벨리는 비난의 목소리를 감추지 않는다. “쿠데타 시도와 더불어, (그전에는 터키라는 국가를 장악하려는 악랄한 음모를 꾸몄고, 기자이자 작가인 흐란트 딘크 암살에 가담했을 가능성이 매우 큰) 귈렌 지지자들은 자기들이 민주주의 대척점에 있음을 여실히 보여줬다. 터키가 권위주의적으로 변질한 데에는 이들의 책임도 에르도안 못지않다.”

 

유럽에서 품은 재건에의 희망

귈렌운동에 참여하는 젊은 기자 아흐메트 돈메즈는 스웨덴의 수도에서, 군사 쿠데타 시도 당시 귈렌 지지자들이 한 역할을 밝히기로 했다. 이 운동에 성실하게 참여하는 다른 많은 지지자와 마찬가지로 아흐메트 돈메즈는 자기들이 속았다는 생각에 씁쓸함을 느꼈다. 비록 그들이 외부인들 앞에서는 그 사실을 늘 인정하지 않지만 말이다. 유럽 각지에서 몇 건의 내부회의가 열렸고, 예실을 비롯한 ‘구세대’와 신세대 등 다양한 계층의 구성원들이 회의에 참석했다. 

두 참가자의 증언에 의하면, 한 유력인사가 유럽 내 국가기관에 침투하자는 안건을 내놓자 비난이 폭주했다. 내부에서 터져 나온 반대의 목소리에 대해 예실에게 묻자,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귈렌운동은 유럽에서 아무런 문제 없이 투명하게 활동하고 있다. 터키에 막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최근 유럽대륙으로 넘어온 히즈멧 회원들이 확실히 의견의 일치를 보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

그러나 한 가지 사안에 대해서는 모두 동의한다. 귈렌운동 조직이 재건되리라는 희망을 바로 유럽에서 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이들 단체는 유럽에서 공식적 지위를 완전히 내려놨다. 귈렌운동의 젊은 세대들에게는 자기비판과 재건의 때가 온 것이다. 어느 회원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시민운동을 따르겠다고 말했으나 국가에 집착했다. 우리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말했으나 특정 정당을 지지했다. 우리 자신의 허물부터 먼저 돌아봐야 할 때다.” 반대자들은 이렇게 예견한다. “펫훌라흐 귈렌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나면? 귈렌운동은 안에서부터 폭발할 것이다.”  

 

 

 

글·아리안 봉종 Ariane Bonzon
기자, 저서로 『터키, 진실의 시간 Turquie. L’heure de vérité』(Empreinte temps présent, Tharaux, 2019)이 있다.

번역·조민영 sandbird@hanmail.net
번역위원

 

(1) Sümbul Kaya, ‘Comment M.Erdoğan a maté l’armée turqu e에르도안 대통령은 어떻게 터키 군부를 평정했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6년 10월호.

(2) Ali Kazancigil, ‘Le mouvement Gülen, une énigme turque 귈렌운동, 터키의 골칫덩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4년 3월호.

(3) Jean Marcou, ‘Erdoğan, la quête obsessionnelle d’un pouvoir fort 에르도안, 강력한 권력에 대한 강박적 추구’,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7년 4월호(한국어판 제목은 ‘대통령중심제에 대한 터키의 집착’, 2017년 5월호).

(4) ‘Mongolie: Un avion turc retenu après une tentative d’enlèvement présumée 몽골: 납치 미수 이후 억류된 터키 항공기)’, AFP, 2018년 7월 28일.

(5) 가명으로 처리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