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자 안나 제거스의 삶

2019-10-31     소니아 콩브 l 역사학자

 

1945년 종전 후 망명 예술가와 지식인이 후일 동독(독일민주공화국)이 될 소련 점령지를 귀향지로 선택한 것은, 사회주의 건설에 이바지하겠다는 일념에서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념에 너무나도 충실한 나머지 때로는 정권의 불의에도 침묵을 지켰다. 그들 중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인물이 문제작 『통과비자(Transit)』(1944)의 저자 안나 제거스다.

 

소설가 안나 제거스(1900~1983)는, 1990년 10월 3일 독일민주공화국(GDR·동독)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모습을 끝내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몇 년만 더 살았더라면, 그녀 역시 1989년 11월 28일 작가 크리스타 볼프가 주도한 사회주의 가치에 충실한 동독의 존속을 요구하는 탄원서에 나란히 이름을 올렸으리라. 당시 서명 동참자들은 헬무트 콜 총리가 추진 중인 독일 통일(재통일) 계획에 맞서, “과거 존재했던 모습이 아닌, 존재해야만 했던 모습”(스탈린식 사회주의가 아닌 올바른 사회주의를 의미-역주)의 독일민주공화국을 내세우며 맞불을 놓았다. 그들이 상상한 세계는 유토피아에 불과했던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사실상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을 눈앞에 둔 오늘날, 통일독일의 정당성에 감히 반기를 드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으니 말이다. 심지어 과거 동독의 존속을 주장했던 이들마저 이제는 동독의 종말 역시 타당한 일이었노라고 말하곤 한다. 기득권은 언제나 합리성의 외피를 둘러쓰는 법일까. 그럼에도 지난 6월 작가 크리스토프 하인이 베를린의 쇼세스트라세 묘지에서 여름 축제를 기념하며 했던 말 역시 진실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는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묻힌 안나 제거스의 무덤 앞에서 말했다. “이곳에는 더 이상 아무도 원치 않는 미래를 위해 생을 희생한 한 세대가 잠들어 있다.” 사실상 그들은 이중으로 패배한 세대임이 분명했다. 심지어 이제는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가는 존재가 됐으니 말이다(비난의 대상이 될 때만 제외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고국으로 돌아온 망명 세대 중에는 극작가 브레히트, 작가 슈테판 헤름린과 아르놀트 츠바이크, 경제사학자 위르겐 쿠친스키 등이 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인물은 아마도 안나 제거스가 아닐까. 망명객이었던 그녀는 종전 뒤 귀향할 장소로 소련의 점령지인 독일의 동부를 선택했다. 제거스의 이 선택만 봐도, 얼마나 그녀가 공산주의 체제에 충실한 인물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한 후 제거스가 ‘침묵의 윤리를 고수했다’는 손가락질을 받은 것까지도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그녀의 충성심이 작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독일공산당이나 혹은 그녀가 오랜 세월 의장을 맡았던 작가동맹의 고문서(물론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의 문서도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은 동독에서 가장 유명하고, 또한 동독에 가장 충성스러웠던 소설가인 그녀를 끊임없이 감시했다)들을 그녀가 남긴 편지들과 비교해보면, 1983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녀가 공적인 자리에서 보여준 모습과 사적인 자리에서 보여준 모습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이 여실히 드러난다.

안나 제거스는, 나치 집권 뒤 베를린을 떠나 망명길에 오를 때 이미 권위 있는 문학상인 클라이스트상을 받은 명실상부한 소설가였다. 철학자 게오르그 루카치의 친구이자 공산주의자인 헝가리인과 결혼한 그녀는 당시 독일공산당(DKP)에서 활동 중이었던 데다가, 유대인 출신이었다. 제거스 부부와 그들의 자녀는 일단 파리로 망명했고, 독일군이 프랑스에 진입한 후에는 다시 마르세유로 향했다. 그리고 1941년 미국의 저널리스트 바리안 프라이와 긴급구조위원회(Emergency Rescue Committee)의 도움을 받아 유럽대륙을 떠난다. 

이때의 경험은 제거스가 소설 『통과비자(Transit)』를 쓰는 단초가 되기도 했다. 2018년 크리스티안 펫졸드 감독의 손에 영화화되기도 한 이 소설은 마르세유에서 자신들을 실어다 줄 배를 기다리는 독일 반파시스트주의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제거스는 공산주의자로 분류된 탓에 미국으로부터 망명 요청을 거부당했고, 결국 멕시코에 정착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1942년 나치 포로수용소를 소재로 쓴 첫 소설 『제7의 십자가』를 출간했다. 이 소설로 그녀는 훗날 유명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1933년 이후 독일어 사용자의 이민통계 수치는 구체적으로 집계된 적이 없다. 다만 전체적으로 나치 정권을 피해 탈출한 망명객 수가 약 50만 명에 달하고, 그 가운데 미국 땅을 밟은 사람이 13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한편 그 중 종전 후 다시 고국으로 돌아온 사람은 전체 망명자의 절반이 채 되지 않을 것으로 추산한다(그 가운데 유대인이 4%). 물론 이 역시 공식적인 통계 수치는 아니다. 서독에서도, 동독에서도, 공식통계를 집계한 기관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고국으로의 귀향은 대대적인 행렬을 이루던 망명 때와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였다는 점이다. 먼저 유대인 여부와 상관없이, 망명객들은 나치 범죄의 심각성을 인식한 뒤로 도무지 고국으로 돌아올 마음이 나지 않았다. 고국 땅을 밟으려면 점령국의 허가가 필요하다는 사실 역시 귀향자의 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사실상 소련과 함께 패전 독일을 분할점령하던 서방연합국은 귀향 희망자들 중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입국을 금지했다. 이 일은 독일 관료들이 곁에서 도왔다. 반나치주의자에 대한 원한과 증오 때문이었는지, 혹은 그들의 존재가 불러일으키는 양심의 가책 때문이었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독일인들은 ‘망명지에서 돌아오는 귀향자들’을 고운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서방연합국 점령지에서는 망명 귀환자를 수용하기 위한 프로그램이 사실상 전무했다.

 

귀환자들, 소련 점령지에서 미래를 찾다

반면, 소련 점령지는 귀환자들의 발길을 잡아끌기 위해 온갖 공을 들였다. 1949년 10월 3일 독일민주공화국이 수립될 때까지 소련의 장교들은 독일 동부 지역에서 문화정책을 추진했고, 이런 노력은 소중한 결실로 이어졌다. 가령 독일이 항복한 이후 최초로 베를린에서 공연된 연극이,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의 『현자 나탄』이었다. 가장 최초로 출간된 책은 문헌학자 빅토르 클렘페러의 나치 언어에 대한 연구서였다. 또한 영화감독 볼프강 슈타우테도 <우리 중에 살인자가 있다>라는 전후 최고의 걸작을 만들어냈다. 

이런 상황은 귀향을 희망하는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더욱이 소련 점령지는 귀환자들에게 나치 정권에 빼앗긴 미래를 되돌려주기까지 했다. 가령 브레히트는 극장을 제공받았고,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는 라이프치히 대학으로부터, 알프레트 칸토로비치는 베를린 대학으로부터 각각 교수직을 제안받았다. 위르겐 쿠친스키도 자신만의 경제사학연구소를 설립했다.

1947년 4월 베를린에 당도한 안나 제거스는 그곳에서 그녀의 표현에 의하면 “돌처럼 무정한 사람들”과 마주하게 된다. 그녀는 “모든 것을 폭격으로 빼앗긴 채 과거로부터 어떤 교훈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이야기했다. 그럼에도 동독으로의 귀향을 택한 자들은 어떻게든 망명의 시련을 딛고 동포들의 곁에 있기를, 그들과 같은 사회의 일원이 되기를 염원했다. 일종의 반(反)독일에 해당하는 독일민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그들은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들을 박해한 자들을 상대로 설욕의 기회도 얻게 된다. 

한 마디로 그들은 “독일 최초의 노동자·농민 국가”를 건설하는 일에 매진했다. 그리고 건설과정에서 내키지 않거나, 혹은 고통스러운 일들도 묵묵히 감내했다. 누구보다 가장 큰 노력을 보여준 것이 안나 제거스였다. 이 시대의 목격자인 미국의 저널리스트 에디트 앤더슨은 그녀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사람들은 제거스를 대중 앞에 내놓고, 그녀의 이름을 딴 공장이나 학교 등 사방으로 끌고 다녔다. 그녀를 언제든 집필실에서 끌어내 독일이나 외국의 강연회에 참석하게 했다. 그녀는 감히 조국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다.”

제거스, 브레히트, 블로흐, 쿠친스키, 팔레스타인에서 귀향한 아르놀트 츠바이크 등의 지식인들은 독일민주공화국의 기둥 역할은 물론, 청년들의 멘토 역할도 했다. 청년들은 자신들이 성장한 나라의 극악무도함을 낱낱이 목격한 후 정신적 혼돈에 휩싸였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멘토를 찾아 헤맸다. 극작가 하이너 뮐러는 이렇게 기술했다. “제거스가 독일민주공화국을 위해 그토록 헌신한 것은 브레히트 때문이었다. 브레히트는 독일민주공화국을 위한 삶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 그들 체제가 우월한 이유로 자국 문학의 우수성을 손꼽았다. 가령 브레히트, 제거스, 숄로호프, 마야콥스키 같은 우수한 문학가가 존재한다고 말이다.” 일례로 크리스타 볼프에게 도덕적 스승이 된 사람이 바로 안나 제거스였다.

 

비난을 사기도 한 ‘침묵의 저항’

그러나 정권 말기 안나 제거스는 발터 얀카의 증언으로 이미지에 타격을 입는다. 얀카는 동독 정권이 꾸민 최후의 재판쇼에 제물이 된 희생자였다. 1956년 제20차 소련 공산당 대회에서 스탈린의 범죄가 낱낱이 드러난 뒤, 이에 고무된 일단의 마르크스주의 비평가들은 아우프바우 출판사를 중심으로 집결했다. 안나 제거스, 그리고 문화부 장관이자 시인인 요하네스 베허도 그곳에 모였다. 그들은 부다페스트에서 일어난 저항운동의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향후 이 헝가리 혁명에 동참 중인 같은 출판사 소속 작가, 철학자 루카치에게 변고가 생기지 않을까 우려했다. 사실상 루카치는 임레 너지 정부에서 문화부 장관직을 수락한 인물이기도 했다. 제거스와 베허는 자신들 출판사의 발행인 얀카를 부다페스트로 급파해 루카치를 동베를린으로 데려올 계획을 꾸몄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공산당 서기장 발터 울브리히트가 그들의 계획에 반대했다. 얀카는 이후 반역죄로 체포돼 징역 10년 형을 언도받았다. 재판에 제거스와 베허가 증인으로 출석했지만, 얀카를 변호하지 않고 끝내 침묵했다. 얀카는 1989년 출간한 회고록에서, 자신을 외면한 동료들을 고발했다. 그러나 이미 제거스와 베허가 세상을 떠난 후였다. 그러나 그동안 서랍 속에 잠들어 있던 미공개 문서를 통해, 제거스가 여러 차례 울브리히트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얀카 구명을 위해 노력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물론 이런 사실은 외부로 새어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얀카가 형을 채우기 전에 석방된 것만은 사실이었다. 한편 베허도 크리스마스 전날 체포당한 얀카의 아이들을 위해 선물을 사 보냈다. 재판일 저녁 베허는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술을 마셨다. 그는 오래지 않아 몸져누웠고, 1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침묵의 대가는 혹독했다. 

작가동맹 내에서 안나 제거스는 수많은 ‘하위정치적인(Infrapolitical; 공공연하고 분명하게 전달되는 정치 행위를 통한 저항이 아닌 약자들의 은밀한 저항 형태를 의미-역주)’ 제스처를 취하는 것으로 불만을 표시하곤 했다. 그녀는 종종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가에 띄운 채 회의장을 빠져나가곤 했다. 사실 말 한마디만으로도 충분히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었지만, 그녀는 직접적인 발언을 하는 법이 없었다. 하이너 뮐러는 자신이 정보국에 끌려가 기관원에게 심문을 받고 돌아왔을 때의 상황을 회상했다. 제거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뮐러와 그의 부인 잉게에게 다가와, 둘의 손을 꼭 붙잡고는 자리를 떠났다는 것이다.

한편 제거스는 1963년 5월 리블리체에서 열린 카프카 학회 때 카프카(한동안 카프카는 절망과 불안을 조장하는 부르주아 반동작가, 퇴폐작가로 간주됐다-역주)를 복권시키려는 체코 작가들의 시도에 반대하는 교조적인 자국 동료들을 노골적으로 멀리하기도 했다. 몇 년 후 정권의 고삐를 틀어쥐게 될 에리히 호네커가 동독 문학을 ‘포르노’라고 비판한 것으로 유명한 독일사회주의통일당 중앙위원회 제11차 총회가 끝난 1966년 2월의 어느 날, 제거스는 “이제 일을 하며 마음을 다잡자”고 작가들을 독려했다. ‘일하다’라는 말은 그녀가 애용하던 표현으로, 그녀 자신도 일에 몰두했다. 일, 즉 글쓰기는 그녀에게 치유책이었던 셈이다.

안나 제거스는 공적인 자리에서 대중의 존경과 칭송을 받았지만, 슈타지(동독의 비밀경찰-역주)는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 감시의 끈을 놓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공적인 연설을 벗어나는 듯한 의견 표명이 있을 때면 모조리 녹음했다. 1963년 10월 2일, 한 정보원은 그녀가 소설 『제7의 십자가』의 시나리오 각색 작업에 참여해달라는 요청을 거부한 사실을 보고했다. 그러면서 그녀가 해당 시나리오의 작가 이름이 칼토펜인 걸 알면서도 일부러 ‘칼텐부르너(뉘렌베르크 재판 이후 처형된 나치 고관의 이름)’라고 불렀다고 지적했다. 그녀에 관한 보고서는 첫 대목부터, “그녀가 망명지에서 돌아왔을 때 공산당 내 독일인 지도층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이것은 유대인 출신인 그녀가 ‘독일인에 대해 일종의 거부감’을 지닌 탓”이라고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한편, 제거스는 사석에서나 회의석에서 일부 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비평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녀가 소련 대사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목격됐다고 전해진다. “대체 솔제니친에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그가 상을 받도록 좀 내버려 두라고요!”(사실상 『수용소군도』의 저자 솔제니친은 1970년 노벨상 수상을 위해 스톡홀름 시상식에 가는 것이 금지됐다) 또한 얼마 뒤에는 1976년 반체제 가수 볼프 비어만의 시민권 박탈이 매우 부당하다고 비판하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녀가 정권의 결정에 반기를 들고 탄원서 작성에 동참하는 일은 없었다.

안나 제거스처럼, 대부분의 ‘재(再)이민자들’은 언제나 조국에 대한 충심을 잃지 않았다. 그들은 공동의 과거를 간직하고, 독일민주공화국을 선택하고, 반대편 독일을 거부한 역사적 과정을 통해 단단히 결속돼 있었다. 그들은 앞으로 열릴 새로운 세계를 위해 경찰의 감시가 필요악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고, 잠시 영혼을 내려놓은 채 교조적인 당 지도부나 간부들에게 순종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들은 지나가는 존재일 뿐이지만, 당과 자신들의 역사적 사명은 영원할 것이라고 다독이면서 말이다. 그러니 때가 오기만을 조용히 기다리자고 말이다. 물론 그들은 크리스타 볼프, 폴커 브라운, 하이너 뮐러를 비롯한 다음 세대에게 비평 정신을 심어주는 일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후대에 침묵하는 법도 가르쳤다. 1989년 11월 저 유명한 역사적 사건(베를린 장벽 붕괴)이 펼쳐지는 동안, 생존한 ‘재이민자들’과 그들의 후예들(여전히 공산당 일원으로 남은 마르크스주의 비평가들이나 그들의 가족·지인들)은 거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목소리를 냈다. 그들이 참여한 11월 4일 베를린 알렉산더광장 시위는 사실상 베를린 장벽이 붕괴하기 불과 5일 전에 일어났다. 당시 그들은 이미 사회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뒤였으며, 독일민주공화국의 조건 없는 병합 외에 다른 대안을 놓고 협상을 벌일 수 있는, 정치적 힘이 없는 상태였다. 

 

 

글·소니아 콩브 Sonia Combe
역사학자. 『절대적 충성. ‘현실 사회주의’에 기만당한 자들 La Loyauté à tout prix. Les floués du socialisme réel』(Le Bord de l'eau·Lormont·2019).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번역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