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프랑스의 스페인 난민캠프 실태

기자들, 스페인 내전에서 패한 공화파 망명자들의 수용소 실태를 목격하다

2019-10-31     안 마티외 l 로렌대학 문학·저널리즘학과 부교수

 

프랑코 장군이 일으킨 스페인 내전에서 대패한 공화파 수십만은 1939년 초 국내의 끔찍한 탄압을 피하고자 프랑스로 건너갔다. 주로 좌파 성향 매체의 기자들은 현장에서 목격한 이들의 참상을 보도했다.

 

“고통의 현장을 돌아보는 것도 오늘로 끝이다. 라투르-드-카롤, 아르줄레스, 생-시프리앵, 부르그-마담, 아멜리-레-뱅, 아를-쉬르-테크, 르 불로 등지에서, 우리는 상상 이상의 참극을 목격했다.” 리베쿠르 기자는 스페인에서 돌아오는 길에 열흘 동안 피레네조리앙탈 주 지역의 난민캠프를 둘러봤다. 스페인 공화파 난민들의 거처였다. 리베쿠르는 현장에 파견된 프랑스 좌파 기자들 중 현장 상황을 가장 잘 아는 인물이다. 그가 소속된 <스 수아르>지는 기자 겸 작가인 루이 아라공과 장-리샤, 르 블로흐가 이끌고 폴 니잔이 국장을 지낸 일간지로, 기업인 장 프루보스트의 경쟁지 <파리-수아르>에 대적하기 위해 1937년 공산당이 창간한 신문이다. <스 수아르>의 조판 대부분은 <파리-수아르>에서 차용했으며, 지면의 상당 부분은 사진에 할애했다. 사진은 주로 로베르 카파의 작품이었고, 작가명은 게재될 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리베쿠르의 기사는 ‘수용소 내 부상자 및 환자 3만 명’이라는 제목으로 1939년 2월 20일 자 신문 1면에 게재됐다. ‘수용소’라는 단어가 의아하게 들릴 수 있으나, 당시 정부에서는 ‘수용소’란 말을 사용했고, 1939년 2월 초 알베르 사로 내무부 장관도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린다. “아르줄레스-쉬르-메르 캠프는 감호소가 아닌 수용소이며, 둘은 엄연히 서로 다르다.”(1)

1939년 1월 26일, 프랑코군과 그 동맹군은 바르셀로나로 진격했다. 2월 4일에는 지로나가 함락됐고, 2월 10일에는 카탈루냐가 프랑코 손에 들어갔다. 전쟁에서 패한 공화파 지지자들은 프랑스 국경 지역으로 대거 망명했는데, “접경지대에 이토록 많은 인원이 망명을 온 건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2) 그렇게 스페인 국민 수십만 명이 프랑스 국경을 넘어왔고, 이들은 1938년 달라디에 법령의 표현처럼 ‘외국인 불청객’으로 낙인찍혔다.(3) 

 

처참한 몰골을 한 사람들의 행렬

이에 따라 스페인 공화파에 호의적이었던 언론에서는 1939년 1월 말부터 라 훈케라-르 페르튀스 지역, 포르부-세르베르 지역과 같은 접경지대로 기자들을 파견했다. 그중 일부는 스페인 난민들의 망명 과정을 처음부터 함께하기도 했다. 그런데 기자들은 이들 지역으로 망명객이 몰려온 것보다도 그 수가 매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에 당혹을 금치 못했다. 공산주의 일간지 <뤼마니테>의 2월 7일 자 신문에서 조르주 보부아 주필이 적고 있는 바에 의하면 “불어나는 난민들에 둔감해질 정도로 난민집결지가 돼버린 마을, 르 불루에는 아침부터 끊임없이 산에서 사람들이 밀려왔다. 먼지를 풍기며 차를 타고 사람, 다양한 세간과 봇짐을 이거나 지고 내려오는 이들로 점점 행렬은 불어났다.” 

르 페르튀스나 프라-드-몰로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스수아르>지의 기자 겸 번역가 루이 파로 눈앞에서도 “처참한 몰골을 한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졌는데, 당시 이 일을 보도한 모든 기사에서 이 ‘행렬’이란 단어가 빠지지 않았다. 1937년 6월 스페인에서 설립된 자유주의 구호 조직 ‘반파쇼 연대’의 기관지 SIA 특파원들이 쓴 글에도 ‘무리 지어 이동하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눈에 띄었으며, 쥘 샤자노프(일명 샤조프)와 뤼시앵 오사르 역시 2월 9일 자 신문에서 “무리 지어 이동하는 이민자, 망명자들은 다리를 절거나 병을 앓는 등 심신이 상해 있었다”고 묘사했다. 

역사학자 주느비에브 드레퓌스-아르망의 기술에 의하면 “신체 건장한 남성들은 호위를 받으며 보호수용소로 이송됐고, 여성과 아동, 환자, 노인 등은 꽤 오랜 시간 집단수용소에 머물다가 다른 지역으로 대거 이탈했다. 해당 지역의 임시 보호처에서는 이들을 받아줄 수밖에 없었다.” 또한 “프라-드-몰로, 라투르-드-카롤, 르 불루, 부르그-마담, 아를-쉬르-테크 등의 국경지대에서 난민캠프 배정 인원을 선별하는 임시 대기소에서 이 같은 분류작업이 이뤄질 때도 있었다.”(4)

기자들이 1939년 초 프랑스 국경을 넘어온 스페인 사람들을 지칭하는 표현은 대부분 ‘난민’이었다. 간혹 ‘피난민’이란 표현도 눈에 띄었으나 ‘이민자’나 ‘이주민’, ‘탈주자’ 등으로 이들을 지칭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고향을 잃은 이 사람들은 이제 성별, 연령 등과 무관하게 하나의 ‘무리’로 인식될 뿐이었다. 1월 말에서 2월 말 사이 난민캠프로 들어간 사람들의 수용실태는 기자들의 보도로 세상에 알려진다. 기자들은 직접 눈으로 본 벌어진 스페인 사람들의 ‘참상’을 상세하게 묘사해 보도했다. 그럼 이 기사들과 함께 당시 난민캠프의 실태를 살펴보자. 

 

칼바람 속 굶주림, 악취와 병균 속에서

보도에서 주를 이뤘던 내용은, 일단 난민캠프 사람들이 겪었던 고충에 관한 것이었다. 부르그-마담 인근 캠프를 돌아본 리베쿠르의 2월 18일 자 기사에 의하면 스페인 난민들을 괴롭힌 가장 큰 두 가지는 다름 아닌 추위와 배고픔이었다. “지붕 하나 없이 그저 널찍한 공간 위에 마련된 캠프에서는 수천 명의 난민들이 수용됐다. 이 수천 명의 사람들이 며칠 밤낮으로 계속해서 죽을 고생을 하며 추위에 떨고 배를 곯았다.” 때는 아직 겨울이라 날도 추웠고, 국경을 넘으려는 사람들의 행렬 위에는 눈이 하얗게 쌓였다. 차디찬 겨울비 또한 체감 온도를 더 낮췄는데, 당시 현장에 파견된 기자들의 기사에서는 수시로 내리던 이 악천후에 대한 언급이 거의 빠지지 않았다. 

비가 워낙 줄기차게 내린 탓에 사회주의 일간지 <르 포퓔레르>의 기자 장-모리스 에르망은 마침내 비가 그치자, 하늘에 감사하기에 이르렀다. “비가 그친 것에 대해 하늘에 감사한다. 계속 비가 왔다면 이 수많은 사람들이 더욱 처참한 꼴을 당했을 것이고, 물자 배급도 원활하지 못했을 것이다.” 에르망은 스페인 내전이 시작된 1936년 7월부터 이베리아반도에 들어간 초창기 프랑스 기자 중 하나였다. 이곳에서 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 (…) 자유롭고 즐거운 분위기에서 시위하는 모습”에 고무되기도 했다. 

이후 에르망은 공화파가 완전히 내전에 패한 1939년 초 이곳 접경지대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난민캠프들을 돌아보던 에르망은 파견 오고 이틀 후인 2월 14일, 야속한 하늘에 절규했다. “오늘 저녁 결국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촘촘한 빗줄기의 찬비가 내리면서 아르줄레스와 생-시프리앵의 축축하게 젖은 모래사막 위에 있던 14만 명의 난민들은 스페인에서 가져온 낡은 모포를 가녀린 어깨 위에 두르고 바들바들 떨면서 바짝 몸을 웅크렸다(그 와중에도 사람들의 수는 시시각각 계속 늘어났다).” 

사람들은 서로의 온기와 모포의 힘으로 간신히 비를 이겨냈다. 무정부주의 연합의 주간지 <르 리베르테르>에서는 소속 기자인 모리스 두트로를 현장에 파견했다. 생-시프리앵에서 ‘모포 쪼가리’에 의지하던 난민들은 버려진 트럭에서 여기저기 뜯어낸 패널을 이용해 나름대로 은신처를 마련했다. <뤼마니테>의 취재 차 한 달 동안 이 지역을 돌아본 보부아는 ‘하늘을 지붕 삼아’ 지내던 사람들의 참혹한 상황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아르줄레스에서는 “차가운 칼바람이 연안을 따라 세차게 불면서 낡은 옷가지와 잔가지들이 흙모래와 뒤엉키며 아수라장이 되기도 했다.”(리베쿠르) 생-시프리앵에서도 “황량한 평야에 거센 바람이 불었다.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흙먼지 바람이 불었고, 모래알이 따갑게 얼굴을 때렸다.”(에밀 드크루아, <뤼마니테>)

난민들의 고통은 추위에서 그치지 않았다. 아르줄레스에서 에르망이 쓴 기사에 의하면 “빵 한 조각을 받아들고 울먹이는 사람도 있었고”, 생 시프리앵에 간 리베쿠르에 의하면 “도착 후 최소 24시간에서 때로는 3일에 이르기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배를 곯은 사람들이 수만 명인데, (…) 심지어 갈대를 씹으며 허기를 채우는 사람들도 있었다.” 

국경에서는 “프랑코 품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는데, 캠프 내에서 헌병들은 “앙다예(프랑스에 속하지만 스페인 국경과 아주 가깝다)로 가고 싶은 사람이 누구냐”고 소리친다. 사람들이 겪는 추위와 배고픔을 목격한 에르망은 “철면피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런 식의 난민몰이를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이는 결국 “난민들에게 이 지옥에서 벗어날 길은 오직 파시즘이 장악한 스페인으로 돌아가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려는 수작”이었기 때문이다.

공산당 계열의 화보 주간지 <르가르> 기자 스테판 마니에도 2월 23일, 경찰의 ‘진의’에 관한 기사를 내보낸다. 난민캠프의 ‘무질서’와 ‘참극’ 이면에 은폐된 모종의 계획이 무엇인지 파헤친 것이다. 그는 또한 “사람들을 프랑코 정권으로 이끄는 이면의 공작이 무엇인지” 되물었다. “피레네조리앙탈-앙다예-부르고스 노선으로만 몸을 돌리면 모든 게 해결된다. 수많은 트럭과 기차가 사람들을 스페인으로 실어 나를 준비가 돼 있었고, 프랑코 정권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따뜻한 수프까지 마련돼 있었다.” <르 리베르테르>의 두트로도 같은 생각이었다. “심약하고 지친 사람들의 마음이 흔들린 순간, 이들에게 제공되는 음식의 종류가 달라진다. 이들은 별도로 관리되며, 더 나은 식량 등 특별대우를 받는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자유롭게 지내도록 경계도 풀어준다.”

시민교육 및 공화파 활동에 관한 극단적 사회주의 주간지인 <라 뤼미에르>의 마르크 베르나르는 2월 24일 자 기사에서 “난민캠프의 보건위생 문제에 관해서는 아예 말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일축한다. 유명한 동료 기자였던 마들렌 자콥도 아르줄레스 캠프의 실태를 보고했는데, “사방에 오물이 널려있었고, 캠프 내에는 욕실, 화장실은 고사하고 씻을 물조차 없었다. 한 줌의 쌀로 밥을 짓기도 하고, 바로 그 옆에서 일을 보는 사람도 있었다.” 마들렌 자콥은 난민캠프가 세균의 온상이라고 경고했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역겨운 냄새가 올라왔으며, 비가 많이 와서 상황은 더 심각했다. “비가 오면 대기에서 온갖 악취가 몰려왔다. 해변 한가운데였지만 땅에서 올라오는 냄새는 그 어떤 냄새보다 더 강렬했다. 비가 온다는 것은, 이 사람들을 계속 여기에 둘 경우 곧 최악의 전염병이 돌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했다.” 

실제로 난민캠프는 온갖 질병으로 몸살을 앓았다. 라투르-드-카롤에선 전염병이 기승을 부렸고, 리베쿠르는 결핵과 장티푸스 환자까지 있었다고 했다. 부르그-마담에는 “담낭염에 걸린 군인들”까지 나왔으며, “다른 난민캠프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옴이 극성을 부렸다.” 아르줄레스에는 늑막염 환자도 있었고, 생-시프리앵에는 이질 환자도 발견됐다. 

 

죽음으로 고통을 끝내는 사람들

1월 말 르 페르튀스 지역을 찾은 에르망은 프랑스 땅 위에서 사람들이 속속들이 죽어 나가는 현장을 보고했다. “갑자기 사람들이 뒤로 물러서며 길을 터줬다. 즈크화를 신은 헌병 세 명이 들것에 한 부상자를 싣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이런 광경이 처음은 아니었으나 이번에는 담요로 부상자의 얼굴을 덮지 않아 앙상하게 마르고 경직된 참혹한 몰골이 그대로 드러났다.” 1936년 여름 파시즘에 반대하는 혁명의 열기로 들끓던 스페인에 간 기자들에게 이 즈크화는 투쟁하는 스페인 국민들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1939년 르 페르튀스 헌병들이 신고 있던 이 신발은 옛 투쟁의 잔재로, 과거 즈크화를 신었던 스페인 혁명 전사들은 이제 신발 대신 담요를 덮고 있었다. 에르망에 의하면, 이곳에서 담요는 죽음의 상징이었다.

“추위와 배고픔으로 뒤덮인 난민캠프로 향하던 중에, 우리는 여섯 명의 장정이 가죽조끼를 입은 젊은 병사를 담요에 담아 들고 가는 것을 봤는데, 창백한 얼굴로 싸늘한 주검이 돼 담요 위에 눕혀진 후에야, 그 군인은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다.” 2월 18일 라투르-드-카롤에 있던 리베쿠르는 이 절망적인 상황을 수치로 집계했다.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추위로 죽어가는 사람들의 수가 나날이 늘어간다. 오늘 밤에는 일곱 명이 세상을 떠났다. 한 난민이 일러줘서 가봤더니, 역 근처의 널찍한 공터에 일곱 개의 하얀 목관이 늘어서 있었다.”

2월 초 마들렌 자콥은 르 불루에서 있었던 자살 기도 사건을 기술한다. “우리가 그곳에 들르기 직전에 비극적인 사건이 하나 일어났다. 민병대원 한 명이 캠프 생활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칼로 자살을 기도한 것이다. 다행히 자살은 미수에 그쳤다.” 그로부터 2주 후 아르줄레스에서는 캠프의 난민들이 단체로 자살을 기도하려는 양상도 나타났다. “비가 지독하게 내리던 날, 사람들은 군데군데 허름한 판잣집을 만들어 비를 피하거나, 나뭇가지로 불을 피우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캠프 생활을 견디다 못한 사람들은 바닥에 구멍을 파고 들어가, 최대한 밀착해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서로의 온기로 추위를 이겨내려 한다기보다는, 그저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람들 같았다.” 

기자들은 난민들이 처한 비인간적이고 야만적인 환경에 격분했다. 아르줄레스나 아멜리-레-뱅에서 “짐승처럼 가둬진 사람들”(에르망과 리베쿠르의 표현)은 생-시프리앵 인근 “원형 경기장에 몰아넣은 양 떼보다 나을 게 없는 대우를 받고 있었다.”(베르나르) 현장을 관리하던 당국은 이들을 거의 사람 취급하지 않았으며, “해변에는 6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위험한 야수나 죄수처럼 철조망에 갇혀 있었다.”(마들렌 자콥)

정부에서는 무엇 하나 갖춰진 게 없는 캠프 주위로 울타리를 쳐서 난민들을 에워싸고 감시했다. 이런 상황은 1939년 1월 말에 파로가 쓴 <스 수아르> 기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세네갈 군인들에게 동원령이 내려졌다고는 하는데, 르 페르튀스, 부르그-마담, 프라-드-몰로에서는 물론 (굶주리며 애원하는 사람들이 터널 아래로 뛰어가던) 세르베르 어디에서도 보초병이나 간이 배급소는 보이지 않았다. 최소한의 생필품 지급도 없었다.” 하지만 2월 15일 자 인권보고서에서 에밀 칸은 “프랑스 국민들이, 그들의 손길에 닿는 난민들이라도 살리고자 우애를 발휘해 고혈을 짜내며 국고를 지원하고 있다”고 기술했다. 

 

연대의 기적, 보수 언론의 냉랭한 시선

<뤼마니테> 및 노동총연맹 주간지 <메시도르>에서는 의사 피에르 루케스가 창설한 국제 보건센터의 지원 활동을 환영했고, 스페인 공화파 난민구제를 위한 사회주의 위원회의 총서기 로제 뒤푸르는 <르 포퓔레르> 지면을 통해 “스페인 난민들의 구조”를 호소했다. 국제반유대주의기구에서도 난민들을 위한 구호 차량을 지원하며 “고통받는 스페인 사람들에게 생필품과 옷가지를 보내자”고 호소했다. <르 리베르테르>에서도 “그 어느 때보다 생필품과 의복, 스웨터, 의약품 지원이 절실한 상태”라며 도움의 손길을 호소했다. 언론에서는 모금 운동도 장려했는데, 특히 가스통 베르주리가 이끄는 인민전선 기관지 <라 플레슈 드 파리>에서는 2월 10일 “스페인 아동들의 생필품 지원을 위한 인도적 도움”을 호소했다. 급진 사회주의 일간지 <뢰브르>의 유명 칼럼니스트 주느비에브 타부이는 1월 초에 이미 스페인 아동을 구하기 위한 모금 운동을 진행한 바 있다. 2월 2일 자 <르가르>지의 1면에 실린 전설적인 난민 사진에서는 “우리나라 인근에서 (파시즘의) 침략으로 노인과 여성, 아동들마저 삶의 터전을 잃고 밀려났으니 이들에게 지원의 손길을 건네자”는 내용의 문구가 함께 기재됐다. 

기자들은 프랑스인 다수의 연대 활동도 강조했다. 르 불루의 에르망은 <르 포퓔레르>지를 통해 “자원해서 나온 국민들의 아낌없는 헌신 덕에 따뜻한 수프와 맛있는 라타투이, 우유 같은 음식들이 난민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고 있다”고 기술했다. 소설가 엘사 트리올레도 <르가르>지에 “페르피냥의 인근 마을에서는 시민들이 난민들을 재워주고, 인간으로서의 존엄함을 확인시켜주는 인도적인 헌신적 지원으로 이들을 보살핀다”고 적었다. <파리 수아르>의 기자 앙리 당주 역시 “페르피냥의 자비로운 시민들이 (…) 고생하는 난민들에게 오렌지와 생필품을 나눠주고 따뜻한 음료와 우유를 따라줬다”고 강조했다. 

<스수아르>의 일일 칼럼에서 아라공은 프랑스 국민들이 보내준 응원의 편지를 소개하며 난민 아동들을 각 가정에서 위탁해줄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제르맨 드카리스 역시 이런 프랑스 국민들의 연대활동이 전국적인 차원에서 이뤄지고 있다고 기술했다. “칼바도스를 비롯한 프랑스 각지에서는 현재 난민들에게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2월 11일 자 <뢰브르>)

그러나 보수 언론에서는 이 ‘기적’을 달갑지 않게 바라봤다. 이에 <랭트랑시장>의 한 기자도 “난민들이 캠프를 벗어나 국내 이곳저곳으로 흘러 들어가는 상황을 거의 막을 수 없는 상태”라고 경고했다. “페르피냥도 이미 포화상태에 이르렀고, 야간 단속반이나 역내 치안 담당국 측 이야기나 가택수사 결과들로 미뤄볼 때, 스페인 난민 수백만 명이 불법 거주 상태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구타는 일상, 범죄자 취급을 받는 난민들

그런데 난민캠프의 치안을 담당한 건 식민지 지역의 군대였다. <스수아르>의 리베쿠르는 아프리카 원주민 출신 부대의 보병이 있었다고 지적했고, 에르망은 아프리카 ‘팡타생’ 보병과 ‘스파히’(5) 기병이 있다는 사실을 <르포퓔레르> 기사에 기재했다. 두트로 역시 <르 리베르테르> 보도에서 모로코 토착민 병사가 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하지만 가장 많이 언급된 것은 세네갈 출신의 병사였다. 베르나르는 이들이 생-시프리앵 캠프 근처에 주둔하는 내용의 <라 뤼미에르> 기사를 내보냈다. “바닥에 먼지를 일으키며 오가는 차량이 늘어났으며, 이동 막사도 늘어났다. 평야의 저 끝으로는 피레네의 눈 덮인 높은 산맥이 르 카니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군데군데 검은색과 붉은색 천이 눈에 띄는 군인들의 진지가 펼쳐졌는데, 다름 아닌 세네갈 군대의 막사였다.”

정부에서 대놓고 인정하진 않았지만, 난민캠프는 실상 감옥과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에 치안 조치가 필요했다. 심지어 “감옥이라도 아르줄레스의 상황보다는 나을 것”이라며 분개하는 목소리도 있었다(리베쿠르). 라투르-드-카롤의 아르망도 같은 생각이었다. “난민캠프를 돌아본 나는 지금까지 가 본 그 어떤 감옥보다도 더 끔찍한 광경, 지옥이 이곳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던 그는 캠프 난민들이 “전쟁포로보다도 못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전했다. 

<메시도르>의 자콥 기자도 2월 초에 나간 기사 내용과 당시의 상황을 비교하며 유감을 표했다. 그는 “2주 전 르 페르튀스와 세르베르에서 기동대가 난민들을 수용하는 모습을 보며 인류의 위대함을 느꼈지만, 안타깝게도 수용소나 합숙소의 치안 유지를 담당하는 일부 기동대는 과격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고 전했다. 같은 날 <라 뤼미에르>에 게재된 기사에서 베르나르 역시 스페인 공화파 난민들의 실태를 묘사했다. “과격한 행동을 보이는 한 헌병에게 정중히 충고하던 노인이 따귀를 맞고 바닥에 쓰러졌고, 이를 말리려던 민병대원도 반쯤 죽을 만큼 맞았다.”

그런데 라로크 제독이 이끄는 극우파 프랑스사회당(PSF) 기관지 <르 프티 주르날>의 생각은 달랐다. 스페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패배한 만큼 국경단속을 더욱 철저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유대주의 주간지 <그랭구아르>에서는 “죄를 지은 군인들이 프랑스 땅에 와 있다.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고, 문학 전문지 <캉디드>에서는 2월 8일 자 기사에서 “바르셀로나의 온갖 도적 떼와 잔당들, 살인범, 볼셰비키 정치 경찰, 망나니, 협잡꾼, 악질 강도들이 모두 우리 땅으로 쳐들어왔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그랭구아르> 기사가 나간 다음 날, 르 페르튀스에 있던 유명 기자 앙리 베로는 좀 더 자세한 내부 상황을 전했다. “사람이 많은 만큼 좋은 사람들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지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도굴꾼이나 (임신부에게까지 손을 뻗는) 무자비한 강간범, 잔인한 살인범도 있다. 반짝반짝한 두 눈의 아동들 곁에도 거친 흉악범이나 잔인한 망나니들, 게으른 정치인들이 있다.” 통합 민족주의 기관지를 표방하는 <락시옹 프랑세즈>도 “프랑스는 범죄자와 살인범 같은 쓰레기 처리장이 아니”라며 격렬히 비난했다. 

아마도 이런 분노의 분위기에 휩쓸린 듯 굶주린 난민들에 대한 “극심한 반발”이 일어난다.(리베쿠르) “한 기동대장이 식량 배급 차량으로 몰려드는 군인들을 곤봉으로 쫓아냈다. 싸움이나 소란을 피우지 않고 말없이 그저 본능적으로 빵을 받기 위해 몰려든 군인들을 매질로 쫓아낸 것이다.”(에르망, 아르줄레스) 그런데 리베쿠르의 기사에 의하면 “모두가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리던 상황”이었다. “빵이 군인 25명당 1개밖에 지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만이나 항의가 불거질 때는 채찍을 든 세네갈 군인들이 이를 진압했다.” 2월 14일 자 기사에서 그가 적고 있는 바에 의하면 “어제저녁과 오늘 아침, 한 세네갈 군인이 갈대숲을 막 빠져나온 난민들 중 한 사람에게 달려들어 곤봉으로 구타하는 모습을 내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다. 막사 지을 나무를 기다리다 지친 그 사람이 밤 동안 불을 피울 갈대를 직접 찾으러 갔다가 당한 봉변이었다.”

<르 리베르테르>의 두트로는 스페인 사람들이 마그레브 지역 병사들에게 느낀 감정에 역점을 두어 기술했다. “미숙한 프랑스 정부는 민병대에 관리업무를 맡기는 우를 범했다. 거칠고 난폭한 이 아랍 용병들은 테르시오(6)의 과격함을 쏙 빼닮았다. 이보다 더 상스럽고 거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두트로는 아프리카에서 온 “‘우리의’ 제국 출신 경비견” ‘스파히’ 기병과 세네갈 군인들이 보여준 폭력 상을 상세히 분석한다. 역사학자들도 인정하는 바이지만 이 세네갈 병사들과 모로코 병사들은 “지극히 단순 무식한 경비대”로서, “경우에 따라서는 그 어떤 프랑스 군대보다 더 확실하게 임무를 수행한다.”(7)

 

“도와주겠다”며 여성들을 유곽으로 데려가

기자들은 난민 여성들의 생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샤조프와 오사르는 <SIA> 2월 9일 자 기사에 ‘백인 여성 노예 거래’라는 제목으로 페르피냥에서 있었던 일을 보도했다. “야비한 남자들은 백 프랑으로 캠프 밖 외출을 제안했다. 같이 영화 보고 2차까지 가는 값이었다.” 다음날 베티 다르텔은 <라 플레슈 드 파리> 기사에서 “난민들의 어려운 상황을 이용해 주변을 기웃거리는 (세르베르 지역의) 양반들”에 대해 언급했다. 

“이틀 전에는 여성들에게 ‘기이한 호의’를 제공하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여성들을 도와주겠다며 다가온 이들의 방식이 꽤 독특했는데, 어딘가의 보호시설로 여성들을 데리고 갔으나 그 시설이란 대부분 유곽이었다.” 하지만 여성 폭력 관련 기사가 드문 것처럼 이런 이야기가 기사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매우 적었다. 그래도 <르가르>의 마니에 같은 경우는 제3자로부터 들은 한 사건을 기사화하기도 했다. “내가 가기 전날 밤 생-시프리앵에서는 세네갈 병사 대여섯 명이 여성들의 막사로 들어갔단다. (…) 여성들의 비명 때문에 기동대가 출동했다.”

스페인 내전 난민캠프의 이야기를 기사화하는 게 늘 쉬운 일은 아니었다. 1936년 내전이 시작되고 스페인 지역 마을에 폭격이 쏟아진 뒤부터는 기자들도 자신의 목격담을 기사화하거나 발 빠르게 정보제공을 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다. 토막 난 시신들이 즐비한 폭격 지역에서는 두 눈을 제대로 뜨고 현장을 보는 자체가 힘들었다고 한다. <메시도르>의 유명한 공산주의 기자 시몬 테리는 “독자들을 위해 현장에 갔다”고 운을 뗀 뒤 1938년 4월 바르셀로나에서의 영안실 상황에 대해 세세하게 기록했다.

1939년 초에는 이런 상황이 프랑스 땅 위에서 재현됐다. 따라서 프랑스인 입장에서 난민들의 상황을 상상하기란 이제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전달하기도 더 수월했다. 1월 말 르 페르튀스를 찾은 파로는 <스 수아르>지에 다음과 같은 기사를 내보낸다. “사람들이 온갖 고초를 겪는 참혹한 현장은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난민들의 고충이나 당국의 어이없는 태도에 대해 아무리 잘 묘사한다 해도, 실제 현장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고통의 24시간

아멜리-레-뱅에 있던 리베쿠르의 2월 중순 <스 수아르>지 기사 역시 내용은 비슷했다. “이 비참한 상황이 도대체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우리가 지켜본 이 모든 상황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것인가? 우리 곁에서 벌어진 이 비극의 현장을 어떻게 모두 다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전쟁 중 민간인 옆에서 총성이 울리고 피가 난무하던 상황을 현장에서 지켜본 기자들은 비행기가 날아다니며 모든 게 무너져 내린 현장과 무고하게 죽은 수많은 사람들의 시신 등 자신들이 본 전쟁의 기억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2월 7일 자 <르 포퓔레르> 기사에서 에르망도 “르 페르튀스 현장에 있던 그 누구도 이 끔찍한 광경을 잊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썼다.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망명자의 길을 택한 이 국민들 모두가 아침 일찍부터 말없이 침착하게 끝없는 행렬을 이어갔기 때문”이다. 

2월 17일 자 <스 수아르>지에서 리베쿠르도 “결코 잊지 못할 24시간을 보내고 왔다”면서 “아르줄레스 캠프의 24시간은 춥고 배고프고 더럽고 피 묻은 고통의 24시간이었다”고 기록했다. 1939년 2월 발렌시아에 있었던 테리(8)는 1947년 스페인 내전에 관한 소설 『태양의 문』을 펴냈는데, 본인이 취재한 내용 중 다수가 작품 곳곳에서 소재로 사용됐다. “스페인 사람들은 잊을 수 있을까? 기동대가 보여준 모습이 프랑스의 전부는 아니라는 건 이들도 알겠지만, 우리 프랑스인의 입장에서는 결코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9) 

1936년만 해도 기자들은 동족의 신명 나는 투쟁에 환호를 보냈었다. 하지만 기자들이 가졌던 1936년 여름의 행복한 기억은, 1939년 무시무시한 참극으로 바뀌어버렸다. 스페인 난민들이 왜 그토록 비참한 대우를 받았는지, 테리의 소설 속 화자는 이런 답을 내놓는다. “이때 프랑스의 인민전선 정부에는, 스페인이란 나라가 치명적인 위험을 안고 있는 존재였을지 모른다. 내전으로 치달은 이 나라가 (당시 프랑스 권력층에겐) 자유의 씨앗을 내포한 위험인자로 보였던 건 아닐까?”(10) 다행히도 일부 기자와 난민들은 레지스탕스 활동에서 성공을 거뒀다. 

 

 

 

글·안 마티외 Anne Mathieu
로렌대학 문학·저널리즘학과 부교수, 잡지 <아덴. 폴 니장과 30년대>의 발행인. 스페인 내전 관련 보도전문 웹사이트 www.reporters-et-cie.guerredespagne.fr을 개설해 운영 중이다. 

번역·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번역위원

 

(1),(2),(4) Geneviève Dreyfus-Armand, 『L’'Exil des républicains espagnols en France. De la guerre civile à la mort de Franco 스페인 공화파의 프랑스 망명: 스페인 내전에서 프랑코의 사망에 이르기까지』, Albin Michel, Paris, 1999.

(3) Anne Mathieu, ‘Quand le droit d’asile mobilisait au nom de la République’(한국어판 제목: ‘프랑스 지식인들, 비호권을 외치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8년 1월호·한국어판 2019년 2월호

(5) Spahi: 식민지 시절 프랑스 기병대의 마그레브 출신 병사들

(6) Tercio: 스페인 외국인 용병대

(7) Geneviève Dreyfus-Armand, Émile Temime, 『Les Camps sur la plage, un exil espagnol 해변의 수용소: 스페인 내전 망명자들』, coll. <Français d’'ailleurs, peuple d’ici>, Paris, 1995

(8) 3월 27일 공화파 군대의 항복 이후 28일 마드리드에 입성한 프랑코파는 30일에 발렌시아와 알리칸테까지 진격한다. 31일에는 알메리아, 카르타헤나, 무르시아가 차례로 함락된다. 4월 1일 프랑코는 라디오 방송에서 “전쟁은 끝났다”고 종전을 선언했다.

(9),(10) Simone Téry, 『La Porte du soleil 태양의 문』, L’'Harmattan, coll. <Les introuvables>, Paris,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