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전쟁 촉발한 일본의 음모, ‘만주사변’

2019-10-31     알랭 루 l 프랑스 동양언어문명연구소(Inalco) 명예교수

 

‘개미구멍이 제방 둑을 무너뜨린다’는 말이 있다. 1931년, 중국 만주 동북부의 일본 철도회사를 겨냥한 테러 시도가 무위로 끝났다. 테러를 주도한 일본인들은 중국인들에게 혐의를 씌우고 이를 구실로 만주를 침략했다. 중일전쟁의 도화선이 된 이 사건은 중국에 혐의를 뒤집어씌운 음모에서 비롯된 전형적인 ‘자작극’이었다.

 

1931년 9월 18일, 중국인 인부로 위장한 10여 명의 일본군 장교가 만주 펑톈(현재 선양)역에서 연결된 일본 소유의 남부만주철도회사 철로에 사제폭탄을 설치했다. 이 테러 작전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폭탄의 파괴력이 매우 미미해 20분 후에 철로 위를 달리던 급행열차가 아무 문제 없이 사고지점을 통과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도발을 감행한 일본은 철도 테러가 중국군의 소행인 것처럼 정황을 꾸며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이후,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한다는 구실로 만주 일대에 계엄령이 내려졌다. 만리장성 동쪽에 주둔하던 일본 관동군 1만 1,000명은 불과 몇 시간 만에 반격도 받지 않은 채, 철도가 통과하는 만주의 12개 도시를 손쉽게 점령했다.

만주 봉천군벌의 수장 장쉐량의 지휘 하에 있던 동북군은 일본군의 기습에 그저 산발적으로만 대응했다. 만주 북부 치치하얼시에서는 소수의 부대가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결국 11월 19일에 함락되고 말았다. 1931년 12월 말에 이르러 일본은 만주 전역을 장악했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군 사망자 수는 총 378명에 불과했다.

 

‘자작극’ 만주사변으로 만주를 장악한 일본군 

1912년 1월 중화민국 수립 후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로 퇴위한 선통제(아이신기오로 푸이)가 관동군 밀사의 회유로 만주에 귀환했다. 펑톈에는 드넓은 황궁도 마련됐다. 관동군은 일본이 정치적 실권을 쥐는 만주국의 통치자로서, 선통제를 옹립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일본의 이 계획은 1932년 3월 1일 선통제가 만주국의 최고 통치자로 즉위하면서 실현됐다.

일본이 책동한 위장 테러 공격은, 일본 역사학자들이 ‘15년 전쟁’이라고 부르는 중일전쟁(1931~1945)의 도화선이 됐다. 점차 양국의 충돌은 확대일로로 치달았고, 1937년 7월 일본의 중국 침략으로 전쟁이 전면전으로 확대됐다. 그리고 미국이 전쟁에 돌입하면서 중일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선에 포함돼 격화됐다. 결국, 이른바 ‘가짜뉴스’가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것이다. 일본의 서툰 도발은 그저 불씨에 불과했지만, 결국 화약통에 불을 붙이는 빌미가 됐다. 이렇게 위기일발의 순간에서 상황을 악화시킨 원인은 네 가지로 간추릴 수 있다. 

우선, 당시의 지역적 맥락을 살펴보자.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만주에서 멀리 떨어진 요동 반도를 장악했다. 조차지에는 다롄 항과 아르투르 항(오늘날의 뤼순항)의 해군기지 등이 포함돼 있었다. 관동군의 통제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봉천 군벌의 수장 장쭤린이 1928년 관동군의 계략으로 암살되자, 그의 아들 장쉐량이 부친의 자리를 승계했다. 장쉐량은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에 입당했다. 이어 같은 해 12월 29일, 장쉐량은 만주 군벌의 상징인 오색기를 내리고 중국 국민당의 청천백일기를 게양하면서, 만주 군벌을 공식적으로 종식하고 난징 국민당 정부에 귀속했다. 1931년 여름 일본 관동군 대위 나카무라 신타가 농업기사로 위장해 헤로인을 소지한 채 몽골 국경에서 정찰 활동을 벌이다 장쉐량의 동북군에 체포돼 간첩 혐의로 처형됐다. 이로 인해 일본과 일제강점하에 있던 조선에서 반중 운동이 크게 확산됐다.

지역 긴장을 고조시킨 또 다른 요인은 일본 당국의 태도 변화였다. 일왕 히로히토가 즉위한 직후 수백만 명의 소작농을 파산으로 내몰았던 경제 위기가 불어 닥치자, 일본 정부는 극단적인 국가주의를 내세웠다. 더불어 미쓰이, 미쓰비시처럼 막강한 합자회사는 조선과 철강 생산에 유리한 경제 군국화를 일본 정부에 부추겼다. 일본군은 1930년 봄 런던에서 강대국(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미국)이 모여 체결한 런던 해군군축 조약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터였다. 해당 조약은 일본 해군 함대의 적재량을 제한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관동군 장교들이 획책한 몇몇 테러 음모는 좌절됐다. 이에 따라 일본은 사쿠라회 등 비밀결사 조직의 수를 늘려 만주 침략을 성공시킬 기반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중일전쟁을 촉발한 3가지 가짜뉴스

 당시 중국에서는 국민당 장제스의 권위주의에 대한 반발로 광저우 국민정부가 난징 국민정부와 대치하고 있었다. 장제스는 장쉐량의 군사지원 요청에 후퇴를 권고하면서, 증원군을 파견하지 않았다. 이미 국민당의 최정예 사단이 중국 남부 장시성에서 공산군 토벌 작전에 투입돼 있던 터라, 중국군이 만주에서 일본군에 대항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평화통일 없이 일본의 침략에 맞설 수 없다고 여긴 장제스의 정책은 중국 주요 도시에서 강력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중국인들은 1895년 청일전쟁 패전 이후, 자신들을 억누르는 일본에 대한 패배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권력에 집착했던 장제스는 민중의 항의에 침묵하는 한편, 국난 타개를 위해 강력한 군사력을 결집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편, 미국의 부재로 힘이 약화돼 영국이 지배하던 국제연맹은 강제력 없는 조사단을 만주에 보내는 데 그쳤다. 피해갈 수 없었던 이 전쟁의 소용돌이는 또 다른 두 가지 가짜뉴스로 급물살을 탔다.

첫 번째 가짜뉴스는 1927년 7월, 다나카 기이치 일본 총리가 만주를 합병한 뒤 동아시아 전역을 장악할 영토확장 계획을 세운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계획은 극단적 국가주의 성향의 간행물에 중국어로 실렸다. 해당 기사의 내용은 곧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지만, 중국 국민당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장제스의 대일 부저항 정책의 무지를 비난하는 목적으로 이 뉴스를 널리 활용했다. 여론을 들끓게 한 또 하나의 가짜뉴스는 만주동부 길림성 장춘현 부근 완바오산(만보산)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완바오산에는 일제강점하 조선에서 온 이주민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다. 당시 수로개발과 수중보 건설에 투입된 만주의 조선인들은 현지 중국 농민들과 갈등을 빚었다. 중국 당국과 일본 영사가 절충을 시도하자, 400여 명의 중국 농민들이 무력을 행사해 조선인들을 공사장에서 끌어내기 시작했다.

일본 영사관 경찰은 사상자를 내지 않고 폭도들을 해산시키려는 목적으로 공포탄을 발사했다. 질서는 회복됐지만, 조선과 일본에서 격렬한 언론 운동이 벌어졌다. 7월 3일 인천에서 화교 배척폭동이 일어났고, 2일 후 평양에서도 폭동이 발생해 화교 146명이 집단폭행을 당했다. 이 폭동은 중국에서 반한(反韓) 폭동을 야기했다. 장춘성에서 조선인 1만여 명, 펑톈 북쪽의 사이핑에서 조선인 300명이 사망했다. 1931년 9월에 이르도록 소요사태의 불씨는 완전히 꺼지지 않았다. 

이렇게, 총 3건의 가짜뉴스로 중일전쟁의 불길이 거세게 타올랐다. 

 

 

글·알랭 루 Alain Roux
프랑스 동양언어문명연구소 명예교수. 주요 저서로 『Chiang Kaï-shek. Le grand rival de Mao(마오쩌둥의 막강한 적수 장제스)』(2016)가 있다.

번역·이푸로라
번역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