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시의 또 다른 전쟁, 도시화

[Spécial 혁명, 연쇄와 징후]

2011-02-14     알랑 포플라르·폴 바니에

어떤 도시를 거닐 때 그 도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버려진 카스바(Casbah·북아프리카에서 볼 수 있는 중세 및 근세에 만들어진 권력자의 성채)와 교외의 베드타운 사이에서, 생략과 타협으로 점철된 수도 알제의 지리학적 배치 속에 알제리의 역사는 그대로 드러난다. 백색 도시 알제의 운명에는 알제리 독립으로 맺어진 국가와 국민 간 ‘계약’의 단절이 반영되어 있다.

밤 8시가 지나면 알제리의 수도 알제는 죽음의 도시가 된다. 카페 점원들은 테라스를 걷어내고, 상인들은 가게 차양을 내린다. 사막이 된 도심에는 운전자를 단속하기 위해 경찰이 쳐놓은 바리케이드만 남는다. 도로 위에서 폭파되는 차량들과 영화관 입구의 폭탄 테러 같은 암흑기의 테러에 대한 기억이 여전히 지배하고 있다.(1) 국가 비상계엄령에 의해 집회는 금지된다. 이슬람주의를 반영하려는 의지에 따라 국가는 이슬람교의 일부 계율을 지킨다. 알제리에서는 2006~2008년 1200여 개의 술집이 행정 명령에 의해 문을 닫았다.(2) 매년 공공장소 수가 줄고 있다. 여가 공간은 차츰 가정 안으로 혼재해 들어가고 있다. 집집마다 발코니에 매달려 있는 파라볼라 안테나가 단적인 증거다.

암흑 속 부유층 유흥 공간은 불야성

물론 바브 엘 우에드나 벨쿠르와 같은 도심 지역 대중식당(가르고트)은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그러나 밤이 되면 모두 문을 닫고 고급 지역의 큰 호텔이나 선택된 클럽만 문을 연다. 결국 부르주아 계층만 그들의 유흥공간을 관리할 수 있다. 부촌 지역인 하이드라 아래쪽에 위치한 시디 야히아에는 대형 간판이 걸린 고급 상점과 카페들이 길을 따라 줄지어 있다. 다른 도심 지역의 카페 테라스나 일반 대중 장소가 거의 남자들로 채워지는 데 반해 이곳은 젊은 남녀가 함께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개인의 사적 욕구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택 몇 채뿐이던 지역을 완전히 탈바꿈시킨 것이다. 이처럼 시디 야히아는 부유층 젊은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만남의 장소 중 하나가 되었다. 이들에게 대중 장소는 아예 고려 밖이다. 카스바는 이같은 무관심의 징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1992년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한 알제의 역사적 중심지 카스바는 폐허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건물은 사라지고 잔해만 쌓여간다. 갖가지 쓰레기 더미와 철근 들보, 목재 골조들이 금이 간 건물 벽을 지탱한다. 이는 이웃과 행인들이 집 안의 내밀한 생활을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쌓아둔 것이지만, 어떤 집은 내부가 열려 있어 지저분한 집 안이 포착된다. 깨져 나뒹구는 도기며 뜯어낸 내장재 등 현관 안뜰의 황폐한 풍경이 폐허 정도를 엿보게 한다.

아무도 카스바의 미로와 같은 계단과 좁은 골목길에 들어올 엄두를 내지 않는다. 많은 알제리인에게 카스바는 ‘테라 인코그니타’(미지의 땅)이다. 알제리 독립 때 이곳에 살던 대부분의 세대가 더 현대적이고 안락한 유럽식 주거 형태를 찾아 떠났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이 지역을 차지했다. 고향에서 쫓겨난 농민들이 문을 부수고 빈집을 점거했다. 카스바는 다른 곳의 집을 찾기 전에 잠시 머무는 임시거처가 돼버렸다.

이에 따라 수도의 역사 중심지는 쇠락했다. 새로운 거주민 중 일부는 집 시설을 파손하면서 새로이 거처를 제공받는 절차를 악용한다. 가장 흔히 사용되는 방법이 상수도 시설 파괴다. 지역 문화유산 복원 단체인 카스바재단의 직원 라센에 따르면, 300여 채의 집이 그런 식으로 파손되었다고 한다. 무스타파 파샤 궁전 같은 몇몇 건물을 재건하는 것 말고, 당국은 이런 행태를 방관한다.

그러나 거주민이나 나그네 모두에게 수도 알제 하면 떠오르는 곳은 바로 카스바 아랫녘의 마르티르 광장이다. 식민지 지배자에 의해 구상돼 땅거미가 질 무렵이면 잿빛으로 물드는 건물의 모습이 흡사 파리와 비슷한 이 도시에서 카스바는 그나마 아랍과 오토만 제국 도시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국가가 이런 곳에 아무런 가치도 부여하지 않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폐허가 된 세계문화유산 ‘카스바’

카스바가 늘 타락의 온상으로 여겨지는 것도 분명 한몫한다. 암거래와 성매매가 극성을 부리는 이곳은 도시 미풍양속의 저해를 비판하고 본연의 전통을 독려하는 이슬람주의자 및 정부의 도덕적 훈계에도 아랑곳 않는다. 더 확실한 이유는 알제리전쟁 이후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 지도자들이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의 틀을 만든 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은 민주주의나 다당제 선거와는 거리가 멀다. 이 조직은 역사적인 단체이고, 독립전쟁에 근간한다. 물론 카스바의 반군도 조직 출범에는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1957년 알제의 전투에서 알제시 내부 반군은 프랑스 마수 장군의 대원들에 의해 해체된다. 해체된 알제의 반군 세력은 2년의 노력 끝에 다시 조직될 수 있었다. 이처럼 카스바는 군사적 패배의 장소인 것이다.

알제리전쟁은 정치적으로 알제리인들의 승리였지만, 군사적으로는 그렇다고 보기 어렵다. 1965년 우아리 부메디엔 대령의 쿠데타 이후 군부 정권은 이런 현실을 은폐했다.(3) 1960년 12월 알제시에서 일어난 시위는 기념하면서도 전투에 대한 공식 기념식은 전혀 없는 것이 그 예다. 국가 역사의 장에서 카스바를 위한 자리는 찾을 수 없다. 정치적 정당화 과정에서 이런 억압과 망각이 일어난 것이다.

역사학자 벤자민 스토라는 “알제를 정복하면 알제리를 정복하는 것이었다. 경쟁 관계에 있던 모든 조직은 수도를 지배하기 위해 다퉜다”고  강조한다. 알제 시민들은 1965년 쿠데타 당시 부메디엔의 전차가 도시로 진입해오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여느 때와 같이 영화 <알제 전쟁>의 감독 질로 폰텐코르보가 영화를 찍는가보다 생각했다. 그들은 당시 상황을 재현하기 위해 촬영장에 프랑스 전차를 끌고 온 것으로 짐작했다. 그러나 곧이어 그들은 그 전차들이 모두 알제리 전차이며 진짜 군인들을 태우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또 다른 알제 전투가 준비되고 있었다. 이전보다는 덜 폭력적이지만 역시 국가의 미래를 결정하게 될 전투였다. 이처럼 알제리의 독립 이후 몇 달간 알제시 외부 조직은 내부 조직을 굴복시킨다. 그리고 내부 조직을 권력에서 축출한 뒤 역사 기록에서 지워버린다.

“왜 카스바가 파괴되도록 내버려두냐고요?” 과거 반군으로 활동했던 한 시민이 되묻는다. “독립 이후 권력을 잡은 조직 대부분은 혁명을 하지 않았지요. 그런 자들이 카스바를 통해 진정으로 혁명을 이끌어낸 조직을 영예롭게 기려서 좋을 이유가 뭐 있겠습니까?” 역사의 한 이야기를 공간적으로 생략해버린 것과 같이, 카스바는 1965년의 쿠데타와 현 알제리 국가의 부당한 기원을 선명히 상기시키는 불명예의 상징인 것이다.

도시 변두리로 기억에서 밀려나고 파괴된 카스바는 1950~60년대 제3세계 민중에게 해방의 성지로 여기던 알제시와 현재 권력 올리가키에 저당잡힌 수도 알제시 간의 간극을 보여준다.

수도의 풍경과 형태는 이런 관료주의 정치를 공간적으로 그대로 형상화한다. 도시가 외곽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도시 외곽으로 대규모 베드타운이 형성됨과 동시에 미티자의 풍요로운 땅에서는 토지 분양이 이어지고 있다. 대대적인 분산 정책의 일환으로 도심 인구는 교외로 대거 이주했다. 상류층은 그랑드 포스트와 디두슈 무라드(이전에는 ‘미슐레 거리’라고 불리던 곳) 거리 일대를 떠나 도시의 언덕 쪽에 있는 고급 주택가로 옮겼다. 서민층은 변두리 빈민가나 그 주변에 거주한다.

민중 해방 성지에서 독재 치하로

독립 직후 국가는 원유 수출 이익과 함께 도시의 부를 재분배하는 데서 정당성을 획득했다. 알제대학의 사회학자인 마다니 사파르 지툰은 기억한다. 1962년 ‘피에누아르’(Pied-noir·알제리 출신의 프랑스인)들이 알제리를 떠나며 남긴 빈집들은 ‘식민지 전쟁의 전리품’이 되어 권력에 의해 알제리인에게 배분되었다. 이런 배분을 둘러싸고 권력과 민중 간에 일종의 ‘암묵적 계약’이 맺어졌다.

“우리는 분명 독재정권하에 있다. 그러나 튀니지나 모로코와는 다른 모델로 운영된다. 알제리에서는 모든 것이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한 포퓰리즘에 기반한다. 국가는 국민 지원 시스템을 통해 국가 재산의 일부를 양보하면서 사회의 안녕을 산다. 국가 지원은 아파트 한 채 가치의 50%에 달하는 수준이다. 임대료도 요구하지 않는데, 실제 사회계약을 맺은 임차인의 70%가 임대료를 지불하지 않는다. 정권이 지속될 수 있는 비결은 다름 아닌 이처럼 주거에 관한 포퓰리즘적 정책을 펴는 데 있다. 또 이 정책이 모든 이를 만족시킨다.”

50살의 모하메드는 우리를 ‘두 개의 간이 부엌 겸 방’을 갖춘 자신의 집으로 맞아들였다. 아내와 5명의 아이들이 함께 사는 그 집은 본인이 손수 지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시멘트와 흙으로 짓고, 양철 지붕을 올리고, 벽돌로 벽을 쌓았다. 전기와 에어컨 시설까지 ‘현대적 시설을 완비’했음을 강조한다. 그의 말 속에는 만족감에 반하는 말이 한마디도 없다. 단, 그의 집 주변으로 다이달로스 미로와 같은 골목길이 빈민가로 확장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모하메드가 사는 곳은 알제시 동쪽 외곽인 밥 에주아르 중심부에 1990년대에 형성된 불법 주거지로, 350여 명이 살고 있다. 거대 하수구가 수로 근처에 있어 오물 더미가 쌓이는 곳이다. 그 뒤편으로 쓰러져가는 판잣집들이 시간이 흐르며 나름 견고한 가건물들로 변모했다. 그중 일부는 이층집으로, 흡사 작은 집처럼 보인다. 집집마다 가족이 협소한 방 안에 바글바글 모여 산다. 이곳에는 비참한 농촌 생활로부터 도망친 농민뿐 아니라 상인·교육자·경찰관같이 알제시 중간층에 속하는 사람들도 산다. 모하메드도 중간층이다. 공무원들의 ‘빈민가’인 이곳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가난해서 이곳에 살러 오는 게 아니다. 주차장을 보라, 깔끔한 차들로 가득하지 않은가!”

내전 유민들, 도시로 도시로

모하메드는 몇 년 전만 해도 부모와 함께 살았다. 7명의 형제와 그들의 아내, 아이들이 모두 한곳에서 같이 살기 불가능할 정도였다. 아파트를 사거나 세를 들기에는 돈이 없기에(서민 교외 지역에서 방 두 칸을 갖춘 아파트 임대료는 최저임금과 맞먹는 수준이다) 많은 가난한 이들, 특히 젊은 부부들이 체념하고 빈민가로 들어와 ‘확실한 방법’을 택하는 것이다. 사회보장 주택 입주권을 얻으려면 평균 20년을 기다려야 하는 데 비해, 불법 주거지 거주민들은 5년이면 충분히 재입주 제도의 혜택을 받는다. 도시화가 진행됨에 따라 그 주변으로 불법 주거지가 형성된다. 그러나 알제시민이 모두 알고 있는 이런 우회적 방법은 토지 수용 확대를 가져왔다.

알제리는 식민지가 물려준 주택난을 해결하지 못했다. 독립전쟁 이전부터 15만5천여 명의 ‘무슬림 프랑스인’들이 이미 빈민가에 살 정도였다.(4) 독립 이후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도시화로 인해 주택시장의 위기가 가중되었다. 4년 만에 알제시 인구는 3배가 증가되었다. 대규모 농촌 이탈과 자연적 인구 증가에 ‘안전을 위한 대거 이탈’ 현상까지 더해졌다. 10년간의 폭력사태(1991~2001)로 수많은 알제리인이 수도로 피해 들어왔다.

암흑기- 내전으로 인한 도시화- 를 거치며 토지 및 주거 문제와 관련한 포퓰리즘이 일반화되었다. 이슬람 구국전선(FIS)과 민족해방전선(FLN)은 도시와 도시민을 두고 격렬한 싸움을 벌였다. 이들은 주택 수요 급증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이득을 얻으려 했다.

말로만 “주거 문제 근절”

1990년 6월 지방선거에서 압승한 이슬람 구국전선 대표자들은 소유 행위나 건축 허가 없이 택지 및 건축 분양이 절로 이뤄지게 내버려두었다. 밥 에주아르 지역의 분양은 서부 개척시대 때와 비슷하다. 골목길 사이로 모래바람이 불어온다. 아무것도, 아무도 없이 황량하다. 때로는 건축 중인 빵집이나 사원이 눈에 띈다. 라틴풍의 색감과 그리스풍의 기둥을 조합한 포스트모던한 느낌의 작은 건물들도 있다.

1992년 선거 중단 사태 이후 국가 공무원인 지역 행정가들은 이 제도를 연장한다. 폭력이 팽배한 이 시기에 이들은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거주민들에게 새로운 택지를 계속 배분한다. 이는 정치적으로 살아남기 위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짧은 생존이었다.

내전 종식 이후 대중은 더 이상 도시의 부를 나눠받는 주요 수혜자가 아니었다. 이번에는 압델라지즈 부테플리카가 전임자들처럼 정치적인 상투문구를 선창하기 시작했다. 5년 안에 100만 가구를 짓겠다고 약속하면서 그는 2009년 대선 주요 공약 중 하나로 ‘불안정한 주거 문제 근절’을 약속했다.(5) 그리고 지난해 7월 밥 에주아르 빈민가는 철거되었고, 주민들은 도시 외곽 지역에 새로운 거주지를 얻었다. 그러나 수도 서쪽 볼로기네 언덕 부근에는 브라질의 판자촌 파벨라와 비슷한 빈민가가 비탈을 따라 형성됐고, 이곳에 수천 명이 살고 있다.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예정된 것이 없다. 파도처럼 끊임없이 새로운 이주민들이 유입되기 때문이다.

빈민촌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폭동은 정치집단과 알제리인 간의 연결고리였던 국가 ‘계약’이 끝났음을 가리킨다. <엘 와탄>지 기자인 노르딘 그림은 주거난은 수요와 공급 간의 왜곡보다는 권력집단의 일관적이지 못한 행태에 기인한다고 본다. 그는 “알제리에는 인구 3400만 명에 주택 720만 채가 있다. 주택 공간은 평균 5명이 거주할 수 있는 규모로, 알제리인 모두 충분히 거주할 수 있다. 주거난 문제는 단지 주택 확보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분배 문제다. 여기서 진짜 문제는 포퓰리즘과 부패다”라고 했다.

부처 내에서는 권력 중심과 가까운 세력들 간에 도시의 부를 지배하기 위한 대결이 벌어진다. 모하메드 라르비 메르훔은 이를 경험한 바 있다. 건축 국전 대상 수상자인 그는 2007년 알제시내 한  대학 단지 건설 공모전에 응모했다. 1차 기술 심사를 통과한 뒤 그의 설계안은 2차 심사인 견적 조건에서 밀려났다. 그런데 메르훔이 제시한 견적가는 선정된 튀니지 한 설계사무소 것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그들이 나와 다른 점은 대금의 90%를 외화로 국외에서 지급받길 원한 것이었다. 나는 그와 달리 알제리에서 디나르(알제리 화폐 단위)로 요구했다.” 국외에서 돈의 행방은 관리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따라서 지불한 돈의 일부는 다시 리베이트로 둔갑해 돌려받을 가능성이 있다. 튀니지의 설계사무소가 본국 내 법적 인가가 없는 점을 지목하면서 메르훔은 국가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소했다. 공모전은 다시 열렸다. 그러나 사실상 메르훔을 배제한 채 진행됐다. 이 프로젝트는 2009년 한국의 한 회사에 돌아갔다. 알제리 건축가가 제시한 금액보다 2배가 비싼 공사 규모였다.

개발 이익 둘러싸고 권력 암투

도시에 편중된 부는 탐욕을 부추긴다. 이는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내부적 지정학을 야기하고, 개발 관련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진다. 메르훔은 우리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관련 사안에 국토개발부와 도시계획부, 윌라야 지방행정부 등 3중의 감독 부처가 있다. 이들 부처 간의 경로나 각자의 야망, 또 자신들이 속하는 파벌을 집합하는 능력 등 모든 것이 알제시에서 이뤄지는 모든 프로젝트의 운영에 큰 영향을 행사하고 있다.” 권력과 이익을 보장하는 토지를 지배하기 위한 경쟁이 지나치다 보니, 한창 진행하다 중단되는 공사도 있다. 지방 의원들은 이런 은밀한 내부 논리에 동참하든 제외되든, 전혀 견제 세력이 되지 못한다.

라르비 벤 므히디(과거 이슬람 거리) 거리의 영화관과 국립극장 사이에는 알제시립근대미술관(MAMA) 건물이 시공 도중 방치되어 있다. 이 건물은 지도층들이 사적 이익을 위해 도시정책을 수단화하는 게 어느 정도 심각한지 잘 보여준다.

2006년 초기 알제리 정부는 20세기 초반 신무어 양식의 건물인 프랑스 식민지 때의 구갤러리에 근대미술관을 개관하기로 결정했다(알제리에서는 첫 번째이자 아프리카에서는 두 번째). 이를 위해 국가 공모전을 실시하고 건축 책임자를 지정했다. 알제시의 건축가이자 건축 분야에서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인 할린 파이디가 선정되었다. 2007년 알제시를 아랍 문화의 중심 도시로 만들기 위해 문화부 장관은 긴급히 파이디에게 임시건물부터 지어달라고 요구했다. 나머지 작업은 차후에 진행하기로 약속했다. 건축가는 일에 착수했고 아직도 그의 설계도면에는 미술관 전체 계획이 남아 있다.

그러나 개관식이 끝난 후 공사는 다시 시작되지 않고 있다. “현재 공사장에는 공사 감독자를 위한 사무실이나 소장품을 보관할 공간조차 없습니다. 안전수칙들도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화재라도 나면 어찌 될까요?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외국 미술관에서 가져온 컬렉션 전시를 할 수 있나요? 장관부터 시작해 알제리인들에게 MAMA는 미술관이라고 믿게 만들고 있지요. 잘 봐줘야 고작 작은 갤러리 수준밖에 되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이 과시용 눈속임이지요!”

백색의 도시 알제는 어두운 부패의 온상이 되었다. 혁명이라는 순결무구한 방패막 뒤로 정권을 잡은 올리가키는 도시의 부를 갉아먹었다. 이제 남은 것은 여기저기 뜯겨 너덜너덜해진 조각뿐이다.

글•알랑 포플라르 Allan Popelard
폴 바니에 Paul Vannier
지리학자

번역•박지현 sophile@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국제단체 남극보호연합 한국지부 담당관. 주요 역서로 <녹색희망> 등이 있다.

<각주>
(1) 2007년 12월 11일 알제시 외곽의 벤 아크눈에서 HCR 본부와 대법원에 대한 두 차례 차량 폭탄 테러로 수십 명이 사망했다.
(2) <El Watan> 2008년 12월 1일자.
(3) 벤자민 스토라, ‘타락과 망각’(La Gangrene et l’oubli), <라 데쿠베르트>(La Decouverte) 228쪽, 1998.
(4) 알제시 시장이던 자크 슈발리에의 평가. 벤자민 스토라, <1954년 이전의 알제리 국가주의>(Le nationalisme algerien avant 1954), CNRS, Edtions Paris, 192쪽, 2010.
(5) www.mhu.gov.dz/pdf/pq.pdf.


[박스기사] 도서관과 사원 사이에서

알제리 정권은 과거 제3세계권 알제리의 부활과, 이슬람과 민중주의 알제리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것 같다. 현재 알제리 수도에서 진행 중인 2개의 대규모 도시계획이 이를 방증하는데, 바로 아랍·남미 도서관 프로젝트와 알제시의 대형 회교사원 사업이다.

아랍·남미 도서관 프로젝트는 2005년 5월 브라질리아에서 열린 제1차 남미권·아랍권 국가 정상회의를 계기로 시작됐다. 몇몇 국가는 다극화되는 세계 정세를 보여주는 ‘신흥강국’이기도 하며, 일부는 이미 여러 국제기구에 함께 가입되어 있다. 알제리, 브라질, 이집트,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는 주요 8개국(G8) 정상회담에 대항하는 비동맹운동회의의 회원국이자 옵서버로 결성된 G15 회원국이기도 하다. 아랍·남미 도서관 프로젝트는 상호 간 ‘문화 협력과 교류’를 진흥하기 위한 것이다.(1) 알제리는 건물을 짓고, 브라질은 건물 설계 책임자로 브라질 최고 건축가인 오스카르 니에메예르를 제안했다.

현재 103살로 이 프로젝트가 마지막 작품 중 하나가 될지도 모를 니에메예르를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알제리 대통령 압델라지즈 부테플리카(현재 알제시에 올림픽 복합시설과 부메디엔대학 건설) 및 수도 알제와 개인적인 인연을 맺고 있다. 그러나 알제리의 ‘혁명을 혁명하길’ 원했던 니에메예르를 선택한 것은 알제시가 국제적 해방운동의 일선에 서 있던 1960~70년대를 다시 이어줄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다. 제3세계의 조직 및 전투의 성지였던 알제시는 당시 지식인 프란츠 파농, 체 게바라,(2) 엘드리지 클리버, 앙골라와 기니, 모잠비크의 독립운동 지도자 등과 같은 혁명운동의 주요 인물들을 맞이하던 곳이다. 1969년 윌리엄 클라인(3)의 카메라에 담겨 불멸로 남은 알제시의 범아프리카 축제는 제3세계의 사상이 진보하던 가장 위대한 순간 중 하나이자 최종점이 되었다.

대형 회교사원 건립은 알제의 또 다른 대규모 공사다. 10억~30억 달러 규모로 2008년 기초공사에 들어가 2013년 완공될 예정이다. 12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기도실 외에 6천 대 규모의 주차장과 이슬람 예술 및 역사 박물관, 쿠란 학교, 회의실, 호텔, 도서관, 레스토랑과 상업시설 등을 갖춘 복합시설이다. 대통령 관저, 대형 회교사원 공사는 2009년 세 번째 임기를 맞은 부테플리카 대통령이 전임 대통령인 샤들리 벤제디드가 마르티르 성소를 건립한 것처럼 수도에 자신의 자취를 남기기 위한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민족해방전선(FLN)은 모로코와 1993년 완공된 카사블랑카 하산 2세 사원을 제치고 알제시를 북아프리카의 종교 중심지이자 전세계 중요 이슬람 성지 중 하나(4)로 만들어, 국교를 놓고 이슬람교도들과 벌이던 경쟁에서 이기길 원한다.

이 두 개의 프로젝트 중 알제리는 어느 쪽을 우선시하게 될까? 아랍·남미 도서관이 들어설 곳은 도시 외곽인 제랄다이다. 반면 세계에서 가장 높은 270m 높이의 첨탑을 자랑하는 대형 회교사원은 알제시의 만 중심부에 우뚝 자리할 것이다.

<각주>
(1) 알제리 문화부, ‘아랍·남미 도서관 공사에 관한 연구’, www.m-culture.gov.dz/mc2/fr/gp_4.php 참조.
(2) 아메드 벤 벨라, ‘그때 체 게바라가 있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997년 10월.
(3) 윌리엄 클라인, <1969년 범아프리카 축제> (Festival panafricain d’Alger), Arte Video, 1969.
(4) 대형 회교사원은 메디나와 메카에 이어 세계 세 번째 회교사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