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단의 기적 같은 분리, 휘청이는 독재정권

[Spécial 혁명, 연쇄와 징후]

2011-02-14     제라르 프루니에

지난 1월 25일 오마르 알바시르 수단 대통령은 “우리는 남부 독립국가를 지지하며, 신생국의 안정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웃이며 앞으로도 여전히 친구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천명했다. 며칠 전 열린 국민투표에서 남수단 주민들은 분리독립에 대거 찬성표를 던졌다. 아프리카 역사상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평화적’ 분리독립의 목적은 수십 년간 지속된 분쟁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석유수입 배분, 국경선 획정 등 지역 안정을 좌우할 중대한 문제들이 미결 상태로 남아 있다.

지난 1월 9∼16일 남수단에서 실시된 주민투표는, 지난 반세기 동안 내전으로 시름해온 수단뿐 아니라 아프리카 대륙 전체에 중대한 역사적 전기를 마련한 사건이었다. 식민지 시대에 획정된 국경을 절대 수정할 수 없다는 신성불가침의 원칙이 최초로 무너진 순간이었다.

1963년 아프리카통일기구(OAU)가 출범한 이후, 아프리카 국가들은 1885∼1926년 제국주의 열강이 그어놓은 국경선(실로 터무니없이 그어진 국경선도 있지만)에 대해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기로 합의한다. 예외는 1993년 에리트레아 독립 때 단 한 번 발생했다. 그나마 진정한 예외라고 보기도 힘들었다. 에리트레아는 이탈리아의 식민지였다가, 1952년 유엔에 의해 에티오피아에 위임 통치권이 부여된 경우였기 때문이다.(1)

남수단 분리, 너무나 예외적인

1961년에는 카탕가(옛 벨기에령 콩고)가, 1967년에는 비아프라(나이지리아)가 각각 분리독립을 시도했지만, OAU와 유엔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좌절됐다. 좀더 최근의 예로는 1991년 소말릴란드가 이탈리아령 소말리아와의 합방(1996)에 반기를 들고 독립을 선언했지만, 아직까지 법적인 독립국 지위를 인정받지 못했다.(2) 그러므로 남수단의 사례는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독립을 묻는 투표가 실시된 남수단에서는 단 한 번도 식민지 시절에 획정된 국경선 문제가 제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56년 식민지 시대가 종식되자마자 남수단의 분리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1898년 영국에 의해 강제로 통합된 북수단과 남수단 사이의 반목은 남부 흑인이 북부의 아랍계 노예상인에게 쫓겨다니던 아주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부 주민 가운데 일부는 이슬람을 믿는 북부 주민과의 차별화를 위해 기독교로 개종한다. 남과 북 사이의 종교적 차이는 식민지 수단의 뿌리 깊은 분열을 조장한다. 하지만 종주국 영국은 갈등을 봉합하려는 노력 대신 오히려 남과 북을 분리 통치했고, 대부분의 사회·경제적 투자를 북부 지역에 편중했다.(3)

식민지 독립 전부터 시작된 내전은 1972년까지 지속됐다. 마침내 아디스아바바(에티오피아) 협정이 체결되면서 남부 지역이 폭넓은 자치권을 획득한다. 남부의 자치정부는 주바를 수도로 삼고, 10여 년 동안 수단의 옛 반군 지역을 다스린다. 이로써 국가 분열의 위기는 한층 가라앉는 듯 보였다(17면 마르크 라베르뉴 기사 참조).

하지만 미국 석유기업 셰브런이 남부에서 수단 전체 유전의 85%를 차지하는 막대한 양의 원유를 발견하면서 남북 갈등이 재점화된다. 당시 대통령이던 자파르 니메이리는 남수단이 힘겹게 획득한 자치권을 박탈하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주바의 자치의회를 폐쇄하고, 내각을 해산하는 한편, 군대를 무장해제하기에 이른다. 1983년 5월 마침내 반정부 저항이 발발한다. 이후 19년간 수단 내전이 지속된다.

수단군을 탈영한 남부 지역 출신 장교 존 가랑 대령은 반군조직 수단인민해방군(SLPA)을 지휘한다. 본래 반정부 운동을 표방하는 조직인 수단인민해방군은 친소련 성향의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대령이 집권한 에티오피아에 근거지를 두고, 소련의 군사적 지원을 받는다. 한편 미국은 하르툼(수단 수도) 정권을 지원한다.

1991년 소비에트연방이 붕괴되면서 수단 북부는 승리를 굳힐 절호의 기회를 얻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북부 지역은 1989년 이슬람을 국교로 채택하면서 미국의 신망을 잃는다. 3년 동안 북부와 남부는 외국의 지원 없이 내전을 치른다. 그러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아파르트헤이트가 막을 내리면서 가랑은 남아공 정부의 지원을 얻어낸다. 또 줄리어스 니에레레가 집권한 탄자니아와 로버트 무가베가 집권한 짐바브웨 등을 비롯한 여러 동맹국의 도움을 받는다.

미국의 유전 장악, 남·북 내전 유발

결국 미국은 수단 내전에 다시 개입하기로 결정한다. ‘박해받는 남수단 크리스천’을 지지하는 미 극우파 기독교도들의 거센 성화 때문이었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2002년 북수단과 남수단을 억지로 협상 테이블로 끌어낸다. 그로부터 3년 뒤 ‘포괄적 평화협정’(CPA)이라고 부르는 나이로비 협정이 체결된다. 협정의 주요 내용은 6년6개월의 과도통합정부를 거친 뒤, 남수단의 자결권을 묻는 주민투표를 실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러 해 동안의 전쟁은 또 다른 지역 갈등에 불을 지폈다.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광활한 이 나라에서는 지역 간 갈등이 단지 남과 북의 반목에만 그치지 않았다. 다르푸르, 코르도판 남부, 청나일 지역(나일은 지역에 따라 청나일과 백나일로 명칭이 달라짐), 홍해산맥 등을 필두로 남부 외 다른 지역들도 하나둘 중앙정부에 등을 돌리기 시작한다. 남부 지역만큼도 대우해주지 않고 홀대한다는 게 이유였다. 다양한 인종(하지만 모두 무슬림이다)이 모여 사는 변방 지역은 오랫동안 형식상으로만 북부 지역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 통일론자였던 가랑 대령은 앞으로 중앙정부와 북부 변방 지역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면 소수 아랍 무슬림의 헤게모니가 약화될 것이라는 사실을 간파한다. 마침 포괄적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몇 주 지나지 않아 하르툼을 방문한 가랑 장군(대령에서 진급함)은 아랍계 시민에게 열렬한 환대를 받는다. 이에 용기를 얻은 가랑 장군은 수단인민해방운동(SPLM)의 북부 분파를 창설한다. SPLM의 인기가 나날이 치솟고, 가랑은 2010년으로 예정된 대선에 최고의 다크호스로 떠오른다. 2003년 2월 발발한 다르푸르 사태도 그가 생각해낸 전략의 유효성을 입증해줬다. 하지만 가랑은 2005년 7월 30일 돌연 이마통 산맥 부근에서 일어난 헬기 추락 사고로 숨진다.

나이로비 협정은 지나치리만큼 면밀하게 자원과 정치, 군사 권력 분배에 대해 명시하고 있다. 공정한 분배를 원칙으로 삼았다. 지난 1월 주민투표가 열리기 전까지 6년이란 시간 동안 과거의 적들은 통일국가의 장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협력 기조를 유지할 것으로 보였다. 6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민주적이고 평등한 ‘새로운 수단’의 초석을 다질 수도 있고, 반대로 분리독립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랑이 사망한 뒤 분리독립의 비전에 좀더 무게가 실리게 된다. 가랑을 떠나보낸 동지들은 자유에 대한 희망이 합법적인 분리독립에서 나온다고 보았다.(4)

포괄적 평화협정은 체계적이고 뛰어난 협정이었지만, 결과는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였다. 먼저 이 협정을 통해 마련된 치안 조처는 실제로도 아주 효과적이었다. 물론 주기적으로 남-북 간 충돌이 발생했지만 종국에는 모두 수습됐다. 석유수입의 절반을 남부 자치정부의 몫으로 정한 약속도 잘 준수됐다. 하지만 반대로 정치나 행정 부문의 권력 분배는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1989년 6월 쿠데타를 통해 하르툼에 독재정권을 세운 국민회의당(NCP)의 이슬람주의자들은 포괄적 평화협정을 준수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었다. 과도통합정부(GoNu)에 참여 중이던 남부 출신의 장관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NCP의 계속되는 통제에 장관직 수행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협정이 실패로 돌아간 책임은 가랑에게도 일부 있었다. 그는 1983년 자신이 주도적으로 조직한 수단인민해방군(SLPA)을 독단적인 방식으로 지휘했고, 남부 지역의 학식이 높은 조직원들과도 담을 쌓고 지냈다. SLPA는 같은 해 수단인민해방운동(SPLM)으로 개칭됐다.

대선 다크호스, 가랑의 사고사

더욱이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두 개의 국가(남부의 자치정부와 북부의 과도통합정부)를 관리하느라 반군은 금세 인적자원 부족에 시달린다. 포괄적 평화협정으로 주어진 6년이란 시간 동안 국민회의당이 한 것은 두 가지뿐이었다. 남부 유전 개발을 통해 최대한 물적 이익을 끌어내는 것과, 주바에 근거지를 둔 남부 자치정부를 상대로 방해공작을 펴는 것이었다. 통일국가의 장점을 부각하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셈이다. 그 결과 남부 주민 가운데 통일론을 지지하는 세력이 점차 줄어들었다. 2009년부터는 예정대로 주민투표가 열리면 분리독립 쪽으로 결판 날 가능성이 높아졌다.

여러 비관적인 전망에도 주민투표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하지만 남부의 분리독립을 기정사실화한 투표 결과는 수많은 난제를 안고 있다. △먼저 북부와 남부의 국경을 아직 분명하게 설정하지 않았다는 문제가 있다. 상당량의 석유자원이 남부 지역에 편중된 상황에서 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분리된 두 국가의 시민권을 둘러싼 대책도 미비하다. 이를테면 수백만 명에 이르는 북부 지역 거주 남부 출신 주민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우기와 건기에 따라 남과 북을 유랑하는 유목민의 위상도 문제다. △국가 채무(380억 달러)를 어떻게 분담할지에 대한 논의도 없었다. △석유수입 배분 방식도 아직 정해진 바가 없다. △아비에이, 청나일 지역 등 가랑이 말한 여러 ‘소외 지역’ 주민들은 남부나 북부의 관계 설정을 위해 ‘주민투표권’을 얻었지만, 정작 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한 대책이 마련돼 있지 않다. △포괄적 평화협정이 다르푸르 사태를 다루고 있지 않은 점도 문제다.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지도, 원한을 완전히 씻어내지도 못한 수단 독재정권은 현실적인 국제협상을 통해 다르푸르 분쟁 해결에 나서기를 고집스럽게 거부하고 있다.

사면초가에 몰린 하르툼 정권

분리독립 투표가 순조로이 진행될 수 있었던 데는 수단의 복잡한 국내 사정도 한몫했다. 국민회의당 정권은 2000년대 초 내부 권력 지형에 변화를 겪는다. 다르푸르 반군 무장단체는 수단이 남과 북으로 분단되면 하르툼 정권의 방해공작에 조직이 더 취약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대응에 나서기 시작했다. 동시에 수단의 소외 지역들은 남수단의 분리독립으로 국민회의당 정권과 불편한 대면을 해야 한다면 무력을 사용해 권리 회복에 나선다는 방침을 세우고 준비해왔다. 한편 SPLM의 북부 분파는 이슬람 정권에 대항한 민주세력의 투쟁에 불을 지필 수 있는 이번 투표에 사활을 걸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문제는 북부 주민들이 내전으로 인한 20년간의 갈등과 희생이 분단이라는 치욕적인 결말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그나마 누려오던 유일한 자원인 석유에 대한 이권을 잃을 수 있다는 점을 깨닫고 있다는 것이다.

공금 유용과 전제주의로 악명 높은 하르툼 정권은 국가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 바람에 국민의 원성이 하늘을 찌른다. 심지어 아랍계 원로 정당마저 50년간의 무능한 정치에 염증을 느끼며 이제는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민주주의의 열망을 포용해야 한다고 인식할 정도다.

북부에서는 정권 전복에 대한 소문이 파다하다.(5) 국민회의당도 내홍으로 분열됐다. 너무 온건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1년 전 뒷방으로 밀려났던 알리 오스만 모하메드 타하 부통령은 다시 무대 전면으로 복귀한 반면, 하르툼 정권의 ‘강경파’들은 갑작스러운 공세에 몸살을 앓고 있다. 야당 쪽에서도 이슬람 원로 지도자 하산 알투라비가 국민투표가 한창인 가운데 튀니지식 민중봉기를 주장했다. 그 바람에 알투라비가 전격 체포됐고, 그의 추종자들에 대해 가택수사가 이어졌다.

하르툼 정권은 점차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어가고 있다. 2009년 오마르 알바시르 대통령이 국제형사재판소에 의해 기소됐을 때 일어났던 아랍계 주민들의 지지 시위는 일시적인 현상으로 끝났다.(6) 중국이 지지해주리라는 희망도 금세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수단 원유 채굴의 50%를 차지하는 동시에 하르툼 정권에 다량의 무기를 공급하고 있는 중국으로서는, 그다지 중대하지 않은 문제 때문에 굳이 ‘국제사회’와 분란에 휘말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비록 조직력은 떨어지나, 50년이란 긴 세월을 기다린 끝에 얻은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혈안이 된 남부 앞에, 국민회의당 독재정권은 오히려 저자세로 나오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투표 이후 시기는 수단 남부보다는 북부에 더 위태로워 보인다.

튀니지식 봉기 주장 등장

국민투표가 놀라울 정도로 무탈하게 진행될 수 있었던 데는 북부 내의 위기감이 고조되는 현실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권력이 약화된 알바시르 대통령은 남부의 비위를 맞추기에 여념이 없다. 투표 전날 대통령의 주바 방문은 진정한 ‘평화 선언’으로 비쳐졌다. 자신의 집 안마당에서 일어날 전쟁에 대비한 사전포석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가 남부에 요청한 것은 단 하나, 남수단에 은신한 다르푸르 게릴라들을 축출해달라는 부탁뿐이었다.

남수단의 지도자들도 즉각 알바시르의 요구에 화답했다. 고작 그 정도 대가만 치르고도 남부에는 사활이 걸린 것이나 다름없는 국민투표를 순조로이 이끌 수 있다니 반가운 노릇이었다. 존 가랑이 사망하고 자치정부 수반직을 이어받은 살바 키이르도 국민투표가 끝나는 대로 수반직을 물러나겠다고 발표했다.

남·북 모두 미래 불투명

그렇다면 이제 누가 그의 뒤를 잇게 될까? 정치적 불모지나 다름없는 남수단에서는 누구나 쉽게 정치적 야망을 불태울 수 있는 만큼, 권력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될 것이다. 대권 경쟁의 유력한 후보자는 먼저 리에크 마샤르 부통령이다. 하지만 그가 대권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파간 아문, 제임스 와니 이가, 루카 비옹 덩 등을 비롯한 다른 부족이나 지역 출신 지도자들의 지지를 얻어내야 한다. 향후 어떤 정권이 들어서든 제대로 된 정치가 이뤄지려면 여러 이질적인 인종이 모여 사는 수단에서 인종지리학적인 균형을 이끌어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안타깝게도 미래는 불투명하다. 주민투표로는 해결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이 협상 테이블에 산적해 있다. 대표적인 예가 국경 획정과 석유이권 배분에 관한 협정이다. 그 누구도 북부의 미래에 대해 예단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하르툼 정권의 혼란으로 사태가 더욱 불투명하고 위태로워졌다는 사실이다. 앞으로 협상은 열악한 상황에서 진행될 것이다. 남수단의 지루한 분리독립 행보가 끝난다 해도, 여전히 실질적이고 안정된 독립을 실현하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특히 하르툼 정권의 혼란을 극복하는 것이 관건이다. 현재 남수단은 본의 아니게 하르툼 정국 혼란의 볼모로 잡혀 있는 상태다.

글•제라르 프루니에 Gerard Prunier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CNRS) 연구원, 아디스아바바 소재 프랑스 에티오피아 연구소 소장을 겸하고 있다.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각주>
(1) 더욱이 1962년 에티오피아는 일방적으로 에리트레아를 병합함으로써 유엔이 부여한 위임 통치권을 위반했다.
(2) ‘소말릴란드, 아프리카의 예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0년 10월.
(3) 역설적이게도 수단에 기독교를 퍼뜨린 것은 영국 식민제국이 아니다. 선교사는 대부분 이탈리아인이나 미국인, 그리고 프랑스계 캐나다인이었다. 영국은 오히려 무슬림을 더 ‘진보적’이고 통치하기 쉬운 상대로 여겼다.
(4) 존 가랑은 본능적으로 분리주의 성향을 띠는 동료 전투원들을 상대로 통일론을 ‘선전’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5) 제롬 투비아나, ‘어설픈 국제 보안관, 수단을 꼬이게 하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0년 7월.
(6) 안세실 로베르, ‘국제형사재판소에 맞선 수단 대통령’, <마니에르 드부아> 108호, ‘없어서는 안 될 아프리카’, 2009년 12월~2010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