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종족 대립…수단의 길었던 여정
[Spécial 혁명, 연쇄와 징후]
남수단의 반란은 1956년 1월 수단이 독립을 선언하기 전인 1955년 시작됐다. 토리트시 수비대가 장교들에게 대항해 봉기했다. 이는 인구 대부분이 정령 숭배자와 기독교도인 남수단의 운명을, 식민 통치자 편에 서서 수단인 전체에게 아랍 회교도라는 배타적인 정체성을 강요하는 북수단의 엘리트들에게 맡기기를 거부한 행위였다.
이 전쟁은 ‘뱀의 독’이라는 뜻의 아냔나운동이란 이름으로 시작되어 1972년까지 지속되었다. 냉전과 이스라엘-아랍 간의 갈등으로 점철된 국제 상황에서 교회와 국왕이 다스리는 에티오피아, 텔아비브가 이 운동을 지지했다. 당시 수단의 독립은 아프리카 아랍권과 흑인 아프리카, 기독교와 회교 간 분열의 상징으로 받아들였다. 20세기 초부터 이 땅에 자리잡은 가톨릭과 개신교의 선교로 개종한 기독교도들이 남수단 전체 인구의 20%에 불과하고, 나머지 대다수는 전통적인 종교 신봉자들이었다. 그리고 회교도는 5% 정도의 소수에 불과했다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기독교와 회교의 대립이라는 점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독립을 지지하는 외국의 입장에서 볼 때, 남수단의 독립은 이슬람 세력이 흑인 아프리카 지역에서 더 이상 확대되는 것을 멈추게 하거나 아랍 세계, 특히 팔레스타인 저항 세력 지지자이며 비동맹의 기수인 나세르의 이집트를 배후에서 공격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또한 소비에트연맹이 이 대륙과 동부 아프리카의 영국 식민지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거리를 두게 하는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이런 이유로 1960년대 초 독립이 부여되었다.
외세 이해관계에 휩싸인 남북 관계
군데군데 나무가 서 있는 사바나 초지와 열대 숲으로 덮인 이 지역 대부분은 소규모 농민 집단이 점유하고 있지만, 예전의 자이르인 콩고민주공화국과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변경 지역에 걸쳐서 생활하는 약 200만 명의 잔데족처럼 인구가 더 많은 종족이나, 더 건조한 지역인 토포사에서 동쪽을 오가며 생활하는 유목 종족도 이 지역을 점유하며 살아가고 있다. 특히 이 지역 중부 지방은 식민 통치자들에 의해 교육 체계가 잘 갖춰져 있고, 케냐와 우간다 같은 영국 식민지와의 소통도 빈번했다. 아냔나운동의 지휘부는 이 식민지화로 육성된 엘리트 계층의 출신들이다. 영국이 1947년까지 ‘폐쇄 구역’ 정책으로 남수단과 북수단의 모든 통행을 금지한 만큼 이들은 더욱 아프리카 동부 쪽으로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으로서는 이 지역이 북부, 즉 이집트 지역에서 온 상인과 이슬람 선교사들에 의해 이슬람화·아랍화하는 것을 막는 것이 중요했다.(1)
에리트레아보다 북쪽으로는 습지에서 경작을 하며 살아가는 상나일과 바르알가잘 지역이 있지만, 두 지역의 물은 모두 백나일과 그 지류로 흘러가버렸다. 이 지역은 1824년 청나일과 백나일이 합류하는 지점에 세워진 하르툼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1840년, 떠다니는 부유 초목인 수드(바르)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온 이집트인 정복자들이 오토만과 유럽의 무역회사들을 끌어들여 이 지역을 개방시켰다. 1870년, 서쪽 사바나 지역인 바르알가잘에서는 이집트와 이스탄불 시장을 위한 노예사냥이 절정에 달했다. 막 생겨나기 시작한 다른 도심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주도인 와우 주변에는 노예와 해방된 노예, 이슬람과 아랍 혈통 군인의 혼혈 종족이 살고 있다. 이 지역은 문화와 경제적으로 점차 북수단에 통합되고 있다. 영국 식민지를 거친 후인 1960년 와우와 하르툼을 연결한 철로가 건설되어 이 탯줄 관계를 강화했다.
남수단 내부도 이질적 구성
전체적으로 볼 때, 남수단은 분명 동질적이지 않다. 지리적 이유나 문화적 유사성에서 그렇다기보다는 오히려 역사와 경제적 차원에서 더욱 그렇다. 1972년 아디스아바바에서 체결된 평화협정에서 남쪽의 자치권을 인정하고 북쪽에는 온전한 권한을 보존해준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르툼 정부는 남수단에서 자치가 실현되는 것을 막기 위해 남수단을 지역적으로 분리시키는 정책을 취했는데, 1977년부터 남쪽에 양보한 사항을 다시 문제시하기 시작했다. 남수단을 에리트레아, 바르알가잘, 상나일 셋으로 나누고, 그 지역 출신들이 아닌 딘카족(2) 공무원들의 살생부를 작성하고, 남쪽이 향후 매장 석유자원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한 것 등이다.
아냔나운동은 1983년 5월 정규군에까지 스며들었고, 이 운동의 지지자 존 가랑 대령이 새로운 반란세력의 진두에 섰다. ‘수단인민해방운동’(SPLM)을 창설해 중앙정부의 지역 분리 명령(3)을 따르지 않았다. 요구 조건은 하나의 국가라는 범주 안에서 지역과 종족의 차별 없이, 모든 수단인에게 평등한 권리를 부여해달라는 것이었다. ‘새로운 수단’ 이라는 기치 아래 수단을 재건설하려는 이 운동은 이 나라의 변두리에 있는, 비주류 전체 인구에게 자신의 주장을 호소했다. 남과 북 상관없이, 아랍화된 종족들의 지배와 정치·경제·사회·문화 권력에 의해 이슬람화된 나일 계곡 종족들의 지배에 반대하는 전 국민을 호소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남수단에서는 먼저 해방전쟁을 시작한 에카토리아 지역의 종족보다는 오히려 딘카족·누어족·실루쿠족 같은 상나일과 바르알가잘 지역의 대나일 종족들이 이 운동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더 크다.
글•마르크 라베르뉴 Marc Lavergne
카이로 국립학술연구소장. 카이로와 하르툼에 있는 국립학술연구소(CNRS)와 경제, 사법, 사회연구소(CEDEJ) 소장.
번역•이진홍 memosia@ilemonde.com
파리7대학 불문학 박사. 주요 저서로 <자살> <여행 이야기> 등이 있다.
<각주>
(1) 1821~85년 이집트 치하에서 수단은 종교지도자인 마흐디의 지휘로 해방되었다. 1898년 수단은 재병합을 노리던 이집트와 실질적인 지배를 원하던 영국의 공동통치 형태로 지배당했다.
(2) 딘카족은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바르알가잘 지역에 사는 종족 이름이다. 딘카는 원주민어로 ‘인간’을 의미한다. 딘카 지역은 실생활에서 이슬람화를 거부하며 중앙 하르툼 정부와 갈등관계에 놓여 있다. 수단 남동부 내란 당시 수천 명의 딘카족이 살해됐으며, 수많은 난민이 수단과 이웃 케냐 및 에티오피아 난민촌으로 피난했다.
(3) 알랭 그레슈, ‘수단에서의 구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984년 7월호.